자유와 권위의 대쟁투
왈덴스인과 로마 천주교회, 그리고 우리의 재림 교회
저자: 짐 혼버거 장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디모데 전서 2장 5절. 이것은 이태리의 알프스 산속에 있는 16세기 왈덴스인들의 교회 문 위에 새겨져 있는 성경절이다. 각 시대마다 단순한 성경적 믿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극도의 고난과 고초를 감수했던 남녀들이 있었다. 왈덴스인들에 대한 핍박의 총체적 이유는 그들이 로마 교회의 지시대로 하나님을 경배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교회가 이렇게 말했다” 보다는 “주께서 가라사대” 를 더 높이 존중했다. 교회에 대한 이와 같은 저항으로 인해서, 그들에게는 이단자라는 낙인이 찍혔으며, 그들의 동기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들의 성품은 중상으로 인해서 비방되었고, 그들이 쓴 글과 책은 압제되고 잘못 평가되었으며 삭제되었다. 수백 년 동안의 반대와 박해를 받는 가운데 그들은 이태리 북부에 있는 산맥으로 된 천연의 방벽을 피난처로 삼았다. 이곳에서 그들은 위험과 고통 중에 일지라도 사도들이 가르쳤던 옛 신앙을 고수했다. 그들은 로마 교회의 권세로부터 피신하여, 그들 각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있어서의 자유를 보존했다.
로마 교회는 하나님과 왈덴스인들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로마 교회는 왈덴스인들이 하나님 대신에 교회를 바라보기를 원했으며, 교회가 만든 지침과 규칙 그리고 지시를 따르기를 원했다. “교회가 그들을 대신하여 양심의 역할을 하려고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보다 더 높은 곳에 교회의 권위를 세워놓았다. 순결하고 단순한 신앙을 추구하던 왈덴스인들은 로마교회의 최상권을 거부했으며, 생애와 믿음에 대한 유일한 최고의 권위와 척도로서 성경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지키고 각 개인의 양심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보존하기로 결심했을 때, 불가피하게도 분리 현상이 일어났다. 그 당시 누가 분리주의자였는가? 신령과 진리로써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선택했던 왈덴스인들이 분리주의자이었는가? 아니면 인간이 만든 규칙과 규범을 고수하였던 교회가 분리주의자이었는가? 또한 누가 하나님과 연합하였고,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였는가? 자랑스런 조직을 가졌었던 로마교회가 분리주의자이었지 광야에 있었던 초라한 왈덴스인들이 아니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 떠나갔던 로마교회가 그 분으로부터 독립적이었다.
나는 바로 이러한 로마 천주 교회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성경보다는 교리 문답에 의해서 가르침 받았으며, 죄를 하나님께가 아닌 신부에게 고백하였고, 그리스도께가 아닌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렸고,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에 교회에 갔다. 또한 금요일에는 육식을 삼갔으며, 내 자신을 성결하게 하는 수단으로 성수 (Holy Water) 를 사용했고, 연옥으로부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돈을 사용했고, 하나님의 법을 범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신부로부터 죄에 대한 면죄를 얻었으며,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아베 마리아에게 기도드렸으며, 나의 견진성사 날에는 주교의 반지에 입맞춤을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마치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를 지배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믿고 행동하면서 성장하였다. 그래서 나의 종교는 외식적이 되었으며, 진정한 개심의 경험이 없었고, 매일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와 인생 여정을 안내하는 인도자로서의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신뢰가 없었다.
나의 젊은 시절을 보낸 그 교회는 나의 인생에서 그리스도께서 점유했어야 할 자리를 빼앗았다. 교회가 나의 중보자였으며, 교회가 만든 규칙과 수칙이 나의 신앙 생활의 근본 바탕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내가 3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와 나의 처, 샐리에게 폴과 에텔을 보내주셨다. 그들은 우리에게 변경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해 주었으며, 18개월 동안의 철저한 성경연구 끝에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의 남은 교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다. 더 이상 인간이 주는 교훈과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를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나의 진정한 중보자의 자리를 교회에게 빼앗길 필요도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게 되었으며, “오직 성경” 만이 믿음의 척도가 되었다. 우리가 남은 교회에 입교하는 선서를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이며, 그것만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습의 유일한 기준임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으며, 그분을 우리의 중보자로 인정한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왜 우리는 천년 동안이나 사도시대의 믿음을 고수해 온 왈덴스인 교회와 연합하지 않는가? 그 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오랫동안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하고 순결한 믿음을 유지해왔으며, 성경을 그들의 생애와 믿음에 대한 오직 유일한 최고의 변치 않는 권위로서 주장해 오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나는 다음과 같은 슬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광야 교회”는 소위 말하는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로마 교회로부터 인간이 만든 교리를 받아들임으로 결국 그들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이같은 양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입증되고 뒷받침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왈덴스인들은 로마 교회를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서 허용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타협으로 인해서 그토록 순수하고 순결했던 교회는 쓰러지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들이 왈덴스인의 교회를 방문한다면, 그곳에서 우리는 평범한 신앙고백과 무미건조한 형식주의 만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한 순간의 망설임과 한번의 타협적인 결정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는가! 오늘날 왈덴스인들의 교회는 그들이 천년 동안 온갖 이상한 가르침과 인간의 전통을 대항하면서 지켜왔던 순결함과 단순함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들이 그들의 중보자로서의 로마교회를 인정하던 날, 그리고 자신들의 평안을 위해서 인간이 만든 가르침과 전통을 그들이 간직해오던 순결함과 교환하던 날, 바로 그 날에 그들의 교회는 쓰러졌던 것이다. 천년 동안을 한결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인간의 요구사항을 혼합할 것을 시인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재산과 생명, 심지어는 그들 자녀들의 목숨마저도 희생시킬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그 오랜 전쟁으로 인해서 지치고 피곤하게 되었을 때, 로마 교회는 그들에게 호의적인 타협안을 제의했다.
그들에게 주어졌던 그 호의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들의 개신교적인 예배의 자유를 그들의 거주 지역 안에서는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호의의 대가로서 그들이 지불해야 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왈덴스인들은 그들의 신실한 지도자, 헨리 알너드와 수 명의 목자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힘과 덕을 갖춘 사람들을 영구히 추방해야 되었다. 그들에게는 전도하거나 개종시키는 행위 그리고 출판사업이 금지되었다. 또한 그들의 책들을 로마 천주교도들에게 팔거나 빌려주는 것도 금지 당했다.(참고: 왈덴스인들의 역사/J.A.Wylie 지음)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 권리 그리고 특권이 거절 당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왈덴스인들의 영성은 날로 쇠약해졌으며, 비록 피에 젖은 박해의 손길은 더 이상 그들 위에 머물러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짐승처럼 쫓기는 취급을 받을 때보다도 훨씬 더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제한되고 속박 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든 자유의 근원인 양심의 자유를 그들의 육신적 평안 (peace) 과 거래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거나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포기했던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 또는 한 교회로서 이와 같은 과정과 상황을 허용하게 될 때, 우리 역시 왈덴스인들의 전철을 뒤밟을 수 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던지 그리고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가를 불문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구별되고 독특한 백성들이 될 것을 선택해야 한다.
로마 천주 교회를 떠난 이후,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입증되지 못하는 인간의 가르침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의 요구에 대해서 저항하는 법을 배웠다. 왜냐하면 맹목적인 복종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인간에 대한 속박과 지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유년시대부터 랍비의 규칙에 구애됨이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셨다. . . 사람들은 고대의 랍비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주의와 유전을 받아들이도록 권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이것들의 성경상 근거를 요구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듣고자 하였으나 사람이 만든 것을 순종하실 수는 없으셨다. 시대의 소망, 97
유대교회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설교하지 말 것을 명령했을 때 제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또한 대쟁투 335 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주의는 정치적 권력 위에 양심의 힘을 놓으며, 눈에 보이는 교회보다 높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세워 놓는다.”
각 시대마다 가장 중요한 이슈(Issue)는 권위와 자유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올바로 회복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성경에 대한 권위와 그 성경이 지시하고 안내하는 대로 각 개인이 선택하여 따라갈 수 있는 자유, 이 두가지는 항상 함께 존재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둘 중에 하나가 부족하거나 없다면 나머지 다른 하나의 존재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권위가 무시된 자유는 한낱 무정부주의에 불과하며, 자유가 무시된 권위의 주장은 인간에 대한 속박과 압박일 뿐이다. 그러므로 권위와 자유는 필연적으로 함께 존재해야 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둘 다 함께 소멸될 것이다.
우리는 왈덴스인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그들이 심어놓은 개혁의 씨앗은 위클립의 시대에 싹트기 시작하였고, 루터의 시대에는 더 깊고 넓게 자라나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는 우리들 중의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성장, 발전해가고 있다. 144,000인은 20세기의 왈덴스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끝까지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붙잡을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생애와 믿음에 있어서 유일한 안내자로 삼을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과거 중세 시대의 수 많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처럼 창조주를 외면한 채 인간에게 그대들의 존경과 경의를 표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방심치 않는 경계만이 안전함의 보증인 것으로 경고 받고 있다. 오직 진리와 의의 바른 길을 통하여서만이 우리는 유혹자의 권세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다. 지금 온 세상은 올무에 걸려있다. 사단은 그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수없이 많은 계획과 기교와 방법을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위장술은 그에게 있어서 세련된 술책이 되었으며 그는 빛의 천사의 모양을 하고 일한다. 오직 하나님의 눈만이 그들의 얼굴의 선한 모습 속에 담겨져 있는, 거짓되고 멸망시키는 원칙들로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는 사단의 술책을 분별하실 수 있다. 사단은 종교 자유를 구속하고자 일하며 종교계 속으로 일종의 노예제도를 유입시키고자 한다. 조직과 기관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켜지지 않는 한, 조직과 기관은 사단의 지도하에서 사람들을 사람의 지배 아래로 넣기 위하여 일할 것이며, 기만과 거짓은 진리와 하나님의 왕국의 진척을 위한 가장된 열심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우리의 행습 가운데서 낮과 같이 밝지 않는 것은 악의 왕자에게서 온 것이다. 진보된 진리를 가졌노라고 주장하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 사이에서 조차도 사단의 방법들이 행하여지고 있다.” TM 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