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과 개혁 (Revival and Reformation]
John Grosboll (좐 그로스볼)
만일 마귀가 자기의 방법대로만 한다면 부흥과 개혁이 없었을 것이다. 사단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닥쳐오는 전체적인 파멸에 포함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그는 교회 안에서의 부흥과 개혁을 방해하려고 꾀하는 것이다. 참고로, 각 시대의 대쟁투 하권 145-148, 251, 447-448을 읽으십시오. 우리가 마귀의 작전을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부흥과 개혁을 가져 오셨는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고 먼저 우리는 기드온의 시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큰 배도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 배도를 다루시기 위하여 요시야의 아들 기드온을 불러내셨다. 이러한 부르심에 대한 그의 응답은 다음과 같았다:
1) 그는 그의 시대에 현존하는 죄악에 대하야 공격하였다. – 단순히 세상에 있는 들 보다는 특별히 교회 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이 공격은 강하고 힘이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들과 교회 안에 있는 죄악들 간의 커다란 대조를 보였다. “기드온은 그의 백성의 원수로 더더불어 싸우려고 나아가기 전에 우상숭배에 대하여 전쟁을 선언해야 하였다.” (부조와 선지자 하권, 207)
2) 개혁자들은 변화를 호소하였다.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 (사 6:31)
3) 성령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생각의 변화와 품성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시기 위하여 이러한 호소를 사용하셨다. 그 결과로 기드온의 300명의 미디안 군대를 쳐서 승리한 익숙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주 잘 시작한 부흥과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드온은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대제사장이 입었던 의복을 모방하여 에봇과 흉배를 만들었으며, 끝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버리도록 인도한 허락되지 않은 예배 제도를 세우게 되었다. “한 때 저희 우상숭배를 전복시킨 바로 그 사람에 의하여 백성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되었다.” (부조와 선지자 하, 217)
엘리야의 시대의 개혁에 있어서, 엘리는 기드온이 행한 같은 성공적인 방법의 순서를 따랐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의 계속적인 신실함 때문에, 이 부흥은 기드온이 한 것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었으며 개혁 사업의 진전에 있어서 부가적인 단계들을 보여주게 되었다. 자 이제 다시 그 단계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악을 공격함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열심 있는 엘리야는 분개하여 이스라엘에게 이 무서운 재난을 가져온 것은 그의 죄와 그의 조상의 조라고 두려움 없이 선언하였다. 엘리야는 담대히 주장하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을 쫓았음이라”고 하였다. “오늘날도 단호한 책의 음성이 필요하니 이는 한탄할만한 죄악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까닭이다. 불신은 신속히 유행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라고 무수한 사람들이 말한다. 너무도 흔히 행하여지고 있는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설교들은 오래 지속하는 감화를 끼치지 않는다. 나팔은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하고 똑똑한 지리에도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진정한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에, 그처럼 분명히 말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라고 말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또한 왜 침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로를 피하라 하더냐”고 말할 필요가 있었는가? 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왜 그는 동생의 아내와 사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헤롯에게 고하여 헤로디아의 분노를 일으킬 필요가 있었는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한 자는 분명히 말함으로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왜 그는 죄 중에 사는 자들의 불쾌를 사지 않고 행동할 수 없었을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실한 수호자로서 서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였고 드디어 정책이 충실을 대신 하였으며 죄는 책망을 받지 않고 지나게 된다. 언제 충실한 견책의 음성이 다시 한 번 교회 중에서 들리게 될 것인가?
“당신이 그 사람이라.” (삼하 12:7) 나단이 다윗에게 말한 이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말은 오늘날 설교단에서 거의 들을 수 없고 공공의 정기 간행물에서 볼 수 없다. 이런 말이 그처럼 드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더욱 많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주의 사자들은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과 인간을 즐겁게 하려는 야망을 가짐으로써 스스로 진리를 감추고 있음을 회개하기 전에는 그들의 노력의 결과가 없다고 불평하지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말씀하시지 않으신 때에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부르짖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이런 목사들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저희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그들의 불성실과 도덕적 용기의 부족에 대하여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저희에게 맡겨진 기별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함이 아니요 저희가 방종과 안일을 사랑하는 까닭이다. 참 사랑은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추구한다. 이 사랑을 가진 자들은 명백하게 말함으로 초래되는 불유쾌한 결과를 피하려고 진리를 회피하지 아니할 것이다. 영혼들이 위험에 빠져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은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그들에게 말하도록 주신 말씀을 말하고 악을 변명하거나 핑계하지 말 것이다.” (선지자와 왕, 131-133)
2) 변화를 촉구함 엘리야는 변화를 촉구했다. 하나님의 기별자는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집행해야 할 그의 사명을 충분히 인식하고 군중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의 얼굴은 무서울 만큼 엄숙하게 빛나고 있었다. 백성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먼저 허물어진 여호와의 제단을 바라보고 그 다음에 군중을 향하여 엘리야는 분명한 나팔 소리 같은 목소리로 “너희가 어느 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찌니라”고 외쳤다.
“주께서는 당신의 사업의 위기의 때에 무관심과 불충실을 미워하신다. 온 우주는 말할 수 없이 큰 관심을 가지고 선악간의 대쟁투의 마지막 장면을 주목하고 있다.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엘리야와 다니엘과 같이 저희가 당신의 특별한 백성임을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도덕적 영웅들을 가지고 계셨으며 지금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은 활동가들의 노력이 따르게 하는데 그들은 의무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고 거룩한 힘을 가지고 누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 냐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이며, 다만 묻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전진하여 만 왕의 왕과 만주의 주에게 저희의 충성을 분명히 나타내도록 요구할 사람들이다.” (선지자와 왕, 137~138)
3) 성령의 역사하심 성령께서 엘리야의 호소를 사용하시어 그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마음과 성품의 변화와 개혁을 일으키시기 위하여 역사하셨다.
“ 모두 이구동성으로 “여호와 그는 하나님 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 이시로다”라고 부르짖었다. 그 부르짖음은 아주 분명하게 온 산에 울려 퍼져서 산 밑의 평지에까지 메아리쳤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어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였다. 마침내 백성들은 저희가 얼마나 크게 하나님께 욕을 돌렸는지를 알았다. 바알 예배를 참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합리적인 예배와 비교해 봄으로 그 예배의 성격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백성들은 저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기까지 우로를 거두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깨달았다. 그들은 지금 엘리야의 하나님이 모든 우상들보다 뛰어나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였다.” (선지자와 왕, 153)
마귀가 마치 기드온의 때에 부흥을 뒤엎기 위하여 그를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하려 유혹했던 것처럼 엘리야 시대의 개혁사업도 패배케 하려고 엘리야를 낙심시키려 하였다. 이 경험에 관하여 화잇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실하고 충성된 자들의 끊임없는 활동에 많은 것이 좌우됨으로 사단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을 통하여 성취될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인다.” (선지자아 왕, 171)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마귀의 계획은 좌절되었고 개혁사업은 계속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성공을 향한 부가적인 단계들을 발견하게 된다.
4)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재헌신과 굴복하는 일이 있는 후에 개혁자로부터 배운 교사들을 파견하는 일이 뒤따랐다. “엘리사가 부르심을 받은 후에 여러 해 동안 엘리야와 함께 일했고 연소한 엘리사는 날마다 자기의 사업을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엘리야는 거대한 죄악의 조류가 흘러넘치는 동안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의 역할을 하였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교도인 이세벨의 지지를 받아 온 민족을 유혹하였던 우상숭배를 단호히 제지하였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였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는 주의 깊고 끈기 있는 교훈으로 이스라엘을 안전한 길로 인도하도록 노력하여야 했다. 엘리사는 모세 시대 이후 가장 큰 선지자인 엘리야와 교제함으로 얼마 후에 홀로 종사해야 할 사업을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선지자와 왕, 224)
5) 개혁의 길은 교육적인 제도의 한 부분이 되었다. “사무엘이 설립한 선지자 학교들은 이스라엘의 배도의 기간에 낡고 허물어져 있었다. 엘리야는 청년들로 하여금 율법을 중요시하며 존중하는 교육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이 학교들을 다시 설립하였다. 이들 중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에 있던 세 학교가 기록에 남아 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기 바로 전에 그와 엘리사는 이 훈련소들을 방문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지난번 방문 때에 그들에게 주었던 교훈을 다시 반복하여 말했다. 특별히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충실히 유지할 고귀한 특권에 관하여 그들을 교훈하였다. 그는 또한 그들이 받은 교육의 모든 부분에서 단순함의 중요성을 마음 가운데 명심하도록 하였다. 오직 이 방법으로써만 그들은 하늘의 품성을 받고 나아가 주님의 방법으로 일할 수 있었다.” (선지자와 왕, 224)
6) 갈멜산의 결전의 시간으로부터 선지자 학교들의 특별한 사업이 계속되는 동안 엘리야는 집회와 설교와 가르침을 통하여 공중 앞에서 직접적으로 말할 기회들을 잘 선용하였다. 다시 수 세기 이후에 이러한 동일한 원칙들이 말틴 루터의 생애와 역사 가운데서 개발되어졌다.
1) 악을 공격함 – 말틴 루터는 말과 글로 그 당시 세상에 있는 죄악들 특히 교회 안에 있는 악들을 공격하였다. “루터는 단연히 그리스도인이 성경의 권위에 기초하지 아니한 어떤 교리든지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확고하게 언명하였다. 그것은 법왕의 최상권의 기초를 바로 공격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종교개혁의 근본 원칙이 포함되어 있었다.” “루터는 사람의 이론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욱 존중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두려움 없이 학자들의 사변적 무신론(思辨的 無神論)을 공격하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지배해 온 철학과 신학에 반대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해가 되는 일이라고 말하고, 청중들의 마음을 철학자나 신학자의 궤변에서 돌이켜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말한 영원한 진리로 돌아오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각시대의 대쟁투, 126)
루터는 그의 사업이 미약하다고 조소하는 원수들의 비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누가 알며, 그들이 나를 멸시하므로 하나님 자신을 멸시하는 일이 될까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모세는 애굽을 떠날 때에 홀로 있었다. 엘리야도 아합의 통치 때에 홀로 있었다. 이사야도 예루살렘에 홀로 있었고, 에스겔도 바벨론에 홀로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이나 어떤 위대한 사람을 선지자로 택하지 않으시고, 일반적으로 지위가 낮고 멸시받는 사람들 중에서 택하셨다. 그분께서는 목자 아모스를 선지자로 택하신 적도 있었다. 각 시대를 통하여 성도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위대한 사람들과 왕들과 제후들과 제사장들과 지혜로운 사람들을 책망하였다. …나는 내 자신을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홀로 있고 그들은 다수이기 때문에 그들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고 나는 말하는 바이다. 나는 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D’Aubigne, b.6, ch.10). (각시대의 대쟁투, 142)
2) 변화에 대한 촉구 – 제일 먼저 루터는 그의 95개 조항을 위텐벅 교회당 문에 붙이고 그 후 옥스벅의 의회 앞에서와, 또한 후에 보름스 의회( The Diet of Worms) 앞에서의 그의 변증에서도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위에만 기초된 교리들을 호소하였고 인간의 의회나 단체들의 권위에 기초하지 아니하기를 촉구하였다. 변화에 대한 그의 촉구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에 기초한 것이었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루터로 하여금 로마와 타협하는 일에 동의하게 하려는 매우 열렬한 운동이 일어났다. 귀족들과 선후들은 그가 이 이상 더 자기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고 교리와 의회를 대항한다면 결국은 이 나라에서 추방될 것이며,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호소에 대하여 루터는 대답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공격을 받지 않고 전파될 수 없다. …그럴진대 어떻게 그와 같은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 때문에 내가 어찌 주님께로부터, 또한 유일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나는 차라리 내 육체, 내 피, 내 생명을 버릴 것이다”(D’Aubigne, b.7, ch.10). 그는 다시 황제의 의견에 복종하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그렇게 하면 그는 염려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대답하였다. “황제와 제후들과, 아니 가장 연약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그들이 나의 저서들을 시험하고 검토해 보는 데 대하여 나는 충심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순종하는 일이다. 성경 말씀으로 매여지고 얽혀져 있는 나의 양심을 깨뜨리고자 하지 말라”(D’Aubigne, b.7, ch.10). 또 다른 권고를 받고 그는 말하였다. “나는 나의 통행권을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 나는 나의 몸과 나의 생명을 황제의 손에 맡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맡길 수 없다. 결단코 맡길 수 없다”(D’Aubigne, b.7, ch.10). 그는 의회의 결정에 쾌히 순종하기로 뜻을 나타냈으나 의회가 성경에 의거하여 결정한다는 조건 하에서였다. 그는 계속하여 “비록 법왕이 백만의 의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에 관해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법왕이 가진 것과 동일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Martyn, vol.1, p.410)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친구와 원수들은 이 이상 화해를 위하여 노력할지라도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 (각시대의 대쟁투, 165)
3) 성령의 역사 – 진리가 전해짐으로 자유를 경험하게 될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오류와 미신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기 위하여 사용하신 그 인물들을 찬탄하는 경향을 가지기 쉽다. 사단은 사람들의 사상과 애정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켜, 사람을 바라보게 함으로 도구에 불과한 사람들을 높이 우러러보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온갖 사건의 배후에서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무시해 버리도록 한다. 이런 경우에 흔히 칭찬과 존경을 받는 그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의지하게 된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지도를 받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탐구하지 않고, 지도자들을 바라보게 되며,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생각과 양심을 지배하고자 애쓰게 된다. 개혁 사업의 지지자들이 이와 같은 정신에 사로잡히게 되면, 개혁 사업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위험에서 개혁 사업을 보호하고자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라신 것은 그 사업이 사람의 사업이 아니고 당신의 사업임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 하신 것이었다. 사람들의 눈이 루터를 진리의 해석자로 주목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의 눈을 진리의 영원한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리기 위하여 그를 사람들에게서 떠나 있도록 옮기셨다. (각시대의 대쟁투, 169)
4) 교사들 – 개혁시대 동안 장사꾼으로 가장한 교사들이 말틴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의 저서들을 온 유럽에 퍼뜨렸다. 이리하여 그들은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확신을 가지게 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게 되었다.
5) 교육 – 세계 각지로부터 학생들이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위텐버그로 몰려왔다.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은 출판사업의 힘을 이용하여 교회 안에서의 개혁사업을 촉진하고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악습들을 널리 알게 하였다. 이러한 공격들은 성경의 영감된 기록들과 인간의 가르침과의 대조를 강력하게 보여주었으며, 그에 관여된 사람들을 일일이 지목하는 것이었다.
6) 공중집회들 – 또한 개혁의 시대 동안에 각 시대의 대쟁투의 첫 부분의 기록들에 의하면 개혁자들은 가능하면 할 수 있는 곳에서마다 공중집회들을 개최하였다. 엘리야의 시대와 말틴 루터의 시대에 모두 개혁자들의 사업을 대항하는 기성교회의 반대운동이 있었다. 개혁자는 기존 세력을 비판하는 자로 지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저의는 만일 어떤 사람이 그 기존 세력에게 고분고분 순종하고, 그 기존 세력에 대항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개혁을 일으키기에 불가능할 것을 아는 때문이었다. 이러한 비난에 관하여 주의 종은 대쟁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나간 시대에서처럼 오늘날도 이 시대의 죄와 오류를 책망하는 진리를 증거하면 반대를 당할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 사람들이 성경으로 그들의 입장을 지탱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지탱하기로 결심하고 인기가 없는 진리를 옹호하는 자들에 대하여 악의로써 그 인격과 동기를 공격한다. 이러한 일은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있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말을 들었고 예레미야는 배반자라는 욕을 들었고 바울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는 무고를 당하였다. 그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진리에 충성하는 자들은 치안을 문란케 하는 자, 이단자, 분열을 좋아하는 자라는 등의 비난을 받아왔다. 예언의 확실한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유행을 따르는 죄를 담대하게 책망하는 자들에게 대한 비난과 공격을 의심 없이 믿어 버린다. 이런 정신은 더욱더 증가될 것이다. 성경은 장차 국가의 법령과 하나님의 율법이 서로 상치되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순종하는 자는 누구든지 악을 행하는 자처럼 비난 받고 벌을 받을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밝히 알려 주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진리를 전하는 자의 의무가 무엇인가? 진리를 전하는 결과로 사람들이 그 진리의 명령을 거절하거나 회피하게 할 뿐이므로 차라리 전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인가? 아니다. 우리가 초기의 개혁자들이 당한 것과 같은 반대나 그 이상의 반대를 당한다 할지라도 거룩한 말씀을 증거하는 일을 중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성도와 순교자들이 한 신앙 고백은 후세를 위하여 기록되었다. 성결과 확고한 충성의 산 모본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증인으로 서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용기를 고취시키기 위하여 전해 내려왔다. 그들은 저희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온 세상에 밝혀 주기 위하여 은혜와 진리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이 시대의 종들에게도 빛을 주셨는가? 그렇다면 빛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그 빛을 이 세상에 비추어야 할 것이다. …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전파하는 데 다 같이 큰 장애가 있는 까닭은 진리는 불리한 것과 조롱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의 옹호자들이 결코 논박할 수 없었던 진리에 대한 유일한 반대 논증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도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을 결코 방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가 인기를 얻기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의 의무를 깨닫게 되면 그들은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고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고후 4:17) 하는 줄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성도와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히 11:26) 여기게 된다. 신앙적 문제에 있어서 원칙보다 지략(智略)으로 일을 하는 자들은 그들이 무엇이라고 공언할지라도 이 세상을 섬기는 자들에 불과하다. 우리는 옳은 일이기 때문에 바른 길을 택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세상의 위대한 개혁들은 원칙적이고, 믿음 있고 용기 있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오늘날 개혁 사업도 그와 같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진척되어야 한다. (각시대의 대쟁투, 458~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