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강병국
우리는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기대 하지 않았을 때에 갑자기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닥쳐오고야 말 위기를 눈앞에 두고서 살고 있는 백성들이다. 이때에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신 목적은 먼저 우리 자신들의 품성 준비인 사실을 다음의 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슬픔과 걱정과 혼란의 세상에 처해 왔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처럼 시험을 받아 자신이 올바른 품성을 계발하고 불화와 혼란 가운데서 조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입증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있다.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다.” (교회 증언 5권, 310)
아울러 그 보다 못지않게 중요한 우리의 존재 이유는 교회와 세상에 경고의 기별을 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의 손과 발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재물들과 시간들도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왜 하필이면 지금 이때에 바로 이러한 형편 가운데 있는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주의 깊게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우리 중 어떤 목사들이 생명과 사망의 기별을 가지고 맥 빠지게 전하는 것을 생각할 때면 내 심령은 근심으로 가득 찬다. 목사들은 졸고 있고 신자들도 졸고 있으며 세상은 죄악 가운데 멸망하여 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깨우셔서 그들이 마치 영원한 세계의 경계선에 서 있는 남녀들과 같이 행하고 일하기를 바라신다. 조만간 무섭고 깜짝 놀랄 사건이 세상에 거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다. 갑자기 그리스도께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때에는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때에는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경고의 기별을 전할 때이다.” (교회증언 8권, 37; 증언보감 3권, 204, 205)
우리는 이사야 21장 11절, 12절에서 파수꾼과 백성들 사이의 흥미 있는 대화의 구절을 보게 된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라고 묻는 말에 파수꾼은 모호한 대답을 하고 있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다시 말해서, 아침 미명이 곧 이르러 오기는 하나 또다시 밤이 와서 자야 할 터이니 너무 성급히 조바심을 갖지 말라, 그저 평안하고 안전하니 너무 그렇게 염려 하지 말라는 대답이다.
거기다가 덧붙여서 묻고 싶으면 다시 와서 또 물으라고 친절까지 베푸는 듯한 대답을 주고 있으나 이 파구꾼이야말로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말세가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하며 또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진지하게 믿고 살며 경고의 기별을 말하는 파수꾼들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진리를 이야기 할 때 이런 것도 같고 저런 것도 같게 애매모호하게 말하는 자들은 백성들을 잠재우다 멸망에 빠뜨리는 파수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교하는 일이 진전되기 전에 믿음의 혼란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오묘에 관한 뚜렷한 견해가 없어질 것이다. 진리는 차례차례 타락할 것이다.”(ST 1894, 5-28)
“우리가 말세에 가까이 이를수록 거짓이 진리에 너무나 잘 섞여 있으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만이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길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람을 신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떠나서는 안 된다.” (7 SDABC, 907)
우리가 완전해 져야 하며 완전해 질 수 있다는 성경과 예언의 신의 가르침이 애매모호하게 설명되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마지막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는 결정적인 파수꾼의 나팔 소리들을 광신적인 것으로 밀어 붙여 버리게 만드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화잇 부인께서는 칭의의 경험이 있어서 완전이란 단어를 사용하시고 성화의 매 단계에 있어서도 완전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으며, 마지막 성도들의 완전한 열매의 경험을 묘사 하실 때에도 완전이란 단어를 사용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칭의의 경험에 있어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고 완전함을 받는다는 표현들을, 마지막 세대들의 경험인 최종적인 열매 즉 그리스도의 재창조의 능력을 입증하는 완전케 된 성도들의 경험에 대하여 설명하는 과정에서 인용하여 버릴 때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 할 뿐더러 결국에 가서는 완전을 말하는 것은 율법주의요, 위험한 사상이라는 부정적인 관념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탄식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주님께서 오시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파수꾼들의 엉뚱한 잠재우는 이야기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의 성품을 합당하게 준비시키지 못하고 늦은 비 군대를 불러 모으지 못하게 만드는 심각한 요인이, 바로 우리의 교육 이념에 있어서 하나님의 청사진을 멀리 떠나버린 데 그 이유가 있다. 우리는 부흥과 개혁이 필요하다. 그 일은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의 권위가 올바른 위치로 우리 가정과 교회들에서 다시 회복 되어야 한다. “증언들을 공공연하게 거절하는 자들이나 그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는 자들만이 위험한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을 등한히 하는 것은 빛을 거절하는 것이다.” (교회증언 5권, 680)
“목사들과 일반 교인들은 복음의 진리가 구원하지 않을 때는 굳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빛을 거절하면 사람들이 포로가 되고 암흑과 불신의 사슬에 묶여 진다. 날마다 자비의 초청 듣기를 거절하는 영혼은 자신의 심령을 일깨우는 감동을 잃어버린 채 가장 긴급한 호소를 미구에 듣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더욱 열렬한 경건과, 자아를 적게 높이는 일이 필요하다.” (증언 보감 3권, 305, 306)
지금 우리는 지구 역사상 가장 놀랄만한 죄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다. TV와 신문들은 우리의 생각들을 더러운 것들로 가득 채우려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1분에 한명씩 그리고 세계적으로는 1초에 한명씩 환자가 발생하고 있는 AIDS병의 참상은 우리에게 때의 급박함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고 있다. 파수꾼들이여! 지금이 어느 때인가?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은 분명한 소리를 내는 파수꾼으로 살며 말하고 있는가? “대쟁투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 바다나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참화의 소식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된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세상 끝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 앞에 펼쳐진 큰 사건들을 기다릴 때 맥박이 급히 뛰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오고 계시다. 우리는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H C, 346)
주님 속히 오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