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ect Page

귀를 막고 도망간 사람들

저는 오늘 영적 분별력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설명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적 분별력을 테스트 해보시기 바랍니다.

 “매우 더운 날씨였습니다. 어떤 마을 공터 앞, 흙먼지가 날리는 길에서, 한 청년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청년의 옷에는 흙먼지가 이곳 저곳에 묻어 있었으며, 땀에 절은 흔적이 옷소매에 베어 있었습니다. 또한 신발도 많이 헤어져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지위가 높은 가문에서 출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청년은 일정하게 사는 장소가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청년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좋아했는데, 그는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 제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는데,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자신만이 옳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틀렸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과 학교 선생님들은 그 청년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그 청년이 주문을 외우면 죽을 병도 치료되고, 앉은뱅이도 걷게 되며, 소경이 앞을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굉장한 구두쇠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서 자선사업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청년의 말을 귀담아 잘 들었던 사람들은 참으로 만족하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은 그 청년은 귀신들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청년은 많은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서, 교회 목사님들과 믿음 좋으신 장로님들에게 저주를 퍼부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을의 어떤 사람들은 청년을 좋아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 청년이 병을 고치고 자선 사업을 했을 때는 좋아했지만, 자신이 동네 어른들을 가르치려고 하며, 자신만이 옳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들고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동정적이었습니다. 그 청년을 개인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한 그의 깊은 지혜가 담겨 있는 듯한 눈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좋아해서 따라다니지만, 그들은 대개 무식하고 괴팍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청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굉장히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것처럼 보였지만, 어떤 때는 너무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특별히 어른들과 유지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무튼 그 청년은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 청년이 누구인지 아시겠죠? 그렇습니다. 그 청년은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쉽게 그리스도를 머리 속에 떠올릴 수 있었지만, 그러나 2000년 전에 유대 땅에서 그 청년의 모습을 실제로 보면서,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조건으로 교회를 나오지만, 그들은 식사할 때도 우리처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한 청년을 보면서, 메시야를 머리 속에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가 메시야에 대한 많은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과 산헤드린 사람들은 도무지 메시야를 거절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4000년 동안이나 기다려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메시야를 거절하게 되었을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영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영적인 통찰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흙먼지 속에 앉아있던 나사렛 청년, 예수를 메시야로 알아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구세주를 십자가에 매달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어떻게 그들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지만, 유대인들이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분별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영성을 잃어버림으로써,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구세주를 맞이하는데 있어서, 영성과 분별력은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이제 구세주께서 두 번째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을 기대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구세주를 거절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천군천사와 함께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실 텐데요?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해해야 될 사실은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기 훨씬 전에, 우리 모두에 대한 심판이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악인과 의인이 모두 그분을 알아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심판은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영적인 분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의 기별이 교회 안에서 외쳐질 때,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편견과 세속에 사로잡힘으로써,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진리를 대항하여 일어서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기별을 전하는 사람과 싸우려고 일어서지만, 자신들이 진리 그 자체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리가 울려 퍼질 때, 귀를 막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진리가 요구하는 희생과 극기가 싫어서 머리를 흔들면서 거절하고 있습니다. 죄를 버리고 유혹에 승리할 수 있다는 유일한 구원의 기별을 대항하여 일어서서,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믿는 자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완전한 승리를 약속하는 기별을 향하여 나타나고 있는 그들의 증오심은 참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완전한 승리가 외쳐지는 장소마다, 교회마다 귀를 막고 도망가는 사람들로 인해서 좌석이 텅 비게 됩니다.

지금, 재림 교회는 “우리는 완전한 승리를 믿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지만, 어떤 개신교인들은 재림교회를 “완전”을 믿는 이단으로 낙인 찍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개신교회 목사가 쓴 다음에 나오는 글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안식교를 율법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객관적으로 소개하고 하나씩 비판해 보겠다. 첫째, 안식교는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2권, 21). 둘째, 안식교는 완전 성과, 즉 완벽한 품성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성서 기초교리, 한국연합회, 101). 셋째, 안식교는 현세에서 완전 성화(품성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실물교훈, 61). 넷째, 안식교는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가려 뽑은 기별1권, 272).” 목회와 신학 1월호에 기재된 기사, 192.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은 완전한 순종과 승리에 대한 설교를 듣거나 글을 읽으면, 귀를 막고 도망가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개신교회는 재림교회를 “완전”을 믿는 이단으로 보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재림교회가 가지고 있는 책(예언의 신)에는 “완전”에 대한 가르침이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림교인들은 그 가르침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재림교회를 조사하는 사람들이, 재림교회가 가지고 있는 책인 예언의 신을 가져다가 읽어보면, 그곳에 “완전”에 대한 가르침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들은 재림교인들을 “이단”으로 낙인 찍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을 믿지 않지만. “완전주의자”로 몰리고 있는 재림교회의 모습을 정확히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재림교회는 세상 역사를 끝마치기 위해서 세워졌는데, 우리는 세상 역사를 끝마칠 수 있는 진리를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림교회는 스스로를 마지막 남은 교회라고 광고하면서 새로운 신자들을 교회 안으로 인도하고 있지만, 재림교회가 마지막 남은 교회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별을 거절하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문제를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진리를 거절하였던 유대인들, 마지막 기별을 거절하는 재림교인들. 마지막 기별이 외쳐지는 곳마다 귀를 막고 도망가는 모습을 재림교회의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을 교회의 조직과 교단을 보호하기 위해서, 진리를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유대의 지도자들을 만일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인정하게 되면, 그들이 백성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영향력과 권위를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교회의 조직이 하루 아침에 와해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교인들이 하루 아침에 재산을 정리하고 시골로 들어갈 것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소원하시는 것이 혹시나 이루어질까봐 염려하는 현대 유대지도자들의 모습을 상상하실 수 있겠습니까?

 진리와 기별은 사람을 올바로 세우기도 하며, 결정적으로 쓰러뜨리기도 합니다. 진리가 어떤 사람이나 교회에 전하여 질 때, 진리는 반드시 거절 당하거나 받아들여짐 받게 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진리를 알지만, 영성으로부터 나오는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를 거절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자기 기만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거절하는 자신의 입장을 거의 완전하게 미화하고 합리화하게 됩니다. 일단 자기 기만에 빠져든 사람들은, 시골에 갈 수 없는 이유를, 자녀 교육을 원칙대로 할 수 없는 이유들, 자신의 더러운 감정과 세속을 버릴 수 없는 이유를, 그리고 진리를 거절하며 반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방법은 매우 단순합니다. 첫째로, 기도를 많이 하면서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즉시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무엇을 깨달았지만, 중간에서 어물어물거리는 사람을 사단이 묘한 방법으로 끌고 가는 모습을 우리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세상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사단이 들어올 수 있는 디딤돌을 가지고 있는 한, 사단은 시시때때로 드나들 것입니다. 우리가 자아를 방어하기로 결정할 때, 우리는 자기 기만의 과정을 거쳐서 진리를 거절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가 교단과 조직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진리를 향한 사랑과 충성보다 강조할 때, 우리는 자기 기만의 과장을 거쳐서 진리를 거절했던 유대교회의 전철을 뒤밟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보호하고, 무엇을 방어하기에 앞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깊이 연구하고 명상해야 할 것입니다.

 분별력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이름으로 진리를 거절하게 됩니다. 마지막 기별이 전해지는 곳마다 좌석들이 텅 비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 그들로 하여금 귀를 막고 도망가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는데, 사람들은 교회의 이름으로 기별을 거절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음 속에 죄와 세속을 품고 있는 자마다 자기 기만의 혼돈 속에서 진리를 거절하게 될 것입니다.

 종종 진리는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앉아 있습니다. 종종 진리는 오해와 편견과 비판의 정죄를 뒤집어 쓰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리가 왜 이토록 흉한 모습으로 백성들 앞에 나타날까요? 어쩌면 주님께서 진리와 기별 위에 역한 냄새를 피우는 보자기를 뒤집어 씌우도록 허용하신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진리와 기별이 취급 당하는 모습에 의해서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기별 그 자체에 대하여 사랑을 느끼는 자들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매우 더운 날씨였습니다. 어떤 마을 공터 앞, 흙먼지가 날리는 길에서, 한 청년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이 청년을 메시야 그리스도로 알아볼 수 있습니까? 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판단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명상하고, 그리고 결정하여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혹시 유대인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속과 세상을 결정적으로 포기해야만, 잃어버렸던 영성과 분별력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듣는 것과 만지는 것과 보는 것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만이 유일한 안전 책이 될 것입니다. 죄와 쾌락을 은근하게 마음 속으로 오랜 기간 동안 품고 있으면,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미화시키고 합리화 하여서 악을 의로, 의를 악으로 믿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게 서서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러한 상태가 되면, 그 사람은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이 믿는 바를 아무런 가책 없이 밀고 나가게 될 것입니다.

 종교적인 양심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곧 바른 진리와 개혁에 대한 기별, 그리고 세속을 버리고 하늘만을 바라보면서 살라는 가르침을 들을 때, 마음 속에서 격렬한 투쟁을 느끼게 됩니다. 육체와 양심의 호소 사이에서 말할 수 없이 피곤한 투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단 어느 것을 선택하고 나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선택한 것을 합리화하고 미화시키는 작업이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가 두려워해야 할 자기 기만입니다. 일단 이러한 기만 가운데 빠지고 나면, 더 이상 양심 속에서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천사가 나타나서 말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서 서슴없이 밀고 나갑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야바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절박한 투쟁 속에서, 우리는 유다가 내렸던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금신상 앞에 서있던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위기의 상황에서, 오직 다니엘의 세 친구 외에는 누구도 올바른 선택을 하지 않았었던 사실을…. 우리 모두는 깊은 영성과 분별력이 절실히 필요 되는 시간에 살고 있습니다. 진리와 기별을 느낌과 감정에 의해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결국에는 아무런 가책 없이 예수를 거절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편견과 견해에 사로잡혀서, 그것에 의해서 진리를 판단하고 저울질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서슴없는 확신을 가지고 진리를 거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 들고 교회에 나갈 것이며, 기도를 할 것이고, 전도를 할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에 다음과 같은 선언을 듣고서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참 모습과 참 믿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날에 울며 이를 갈 자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디 주의하십시오! 성경은, 그날에 울며 이를 갈 자들이 많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