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원수 세상
저자: 죠 크루스 목사 – 미국의 대표적인 자영선교기관 중의 하나인 Amazing Facts 기관의 설립자이며, 전도 목사로서 봉사함.
오늘날의 세상은 믿을 수 없으리만치 끊임없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전부터 지켜져 왔던 전통적인 견해들과 가치관이 거의 정반대의 것들로 탈바꿈해 왔다. 텔레비젼과 고도로 개발된 전자매체들의 감각을 흐리게 하는 영향력 아래서 사람들의 마음은 교묘하게 조종되어 왔으며, 생각하는 양상은 고정되었고, 결정하는 능력마저도 이미 지정된 결정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고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들은 너무나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과 도덕관을 변화시켜온 어마어마한 능력의 인공적 매체들에 관해서는 거의 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단이 우리들의 영성을 파괴하기 위해 교묘한 수법을 고안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한 수법의 최면시키는 영향력 아래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생각은 마치 대부분의 중생하지 않은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성공적으로 세뇌되어 왔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은 원수의 이러한 영리한 위장을 인식하는 데 있다.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수천 개의 위장된 덫들이 우리 주위 곳곳에 널려져 왔으며, 거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사고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아왔다. 영적인 확신들은 그 힘을 잃다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죄에 대한 예민한 분별력은 순진한 감화력으로 둘리워진 우리의 독특한 사회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악으로 인해 무디어졌다.
성경은 이러한 사단의 공격무기들을 단순히 “세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의 부도덕하게 만드는 영향력에 대처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울,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모두 세상과 연합하는 위험들에 관하여 아주 극적인 묘사를 통해 경고하고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요한일서 2:15.16).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야고보 4:4).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한복음 15:19).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리라)”(고린도후서 6:17).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디도서 2:14).
이들 성경 기자들은 신성한 것과 불경한 것이 함께 섞이는 것에 대한 치명적인 오류를 폭로하고자 하는 영감받은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그대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서부터 나와 독특하고도 따로 분리된 백성들이 되라”고.
이 성경절들은 세상에 육체적으로 속해있는 상태에서 떠나라는 지시로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그 성경절들은 그리스도인 생활방법을 치명적으로 와해시키게 되는 어떤 영향력, 습관, 그리고 사상들에서 떠나라고 하는 경고들임이 명백하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있는 것들이 사람의 눈에는 완전히 결백한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하셨다. 그분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에 대한 영원한 원칙들을 제시하셨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누가복음 16:15).
위의 말씀을 주의 깊이 연구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사회에서 가장 높임을 받고 존경을 받는 것들이 진리의 가장 큰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들이 세상에 만연한 생활양상이나 사고방식과는 아주 다른 반대편에 서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공인된 규범이 될 생활양식을 거절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자세를 취하는데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좀 알고 있는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민족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진지하면서도 분명한 인기 있는 여론들에 대항하여 맞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다가 그 여론들은 “사람 중에 높임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커다란 교회조직들로부터 완전히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생활 방법은 너무나 명백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아주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여겨질 것이다. 엘렌 지 화잇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주님께서 달하기를 원하시는 표준에 이를 때 세상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교인들을 괴상하고, 고집스러우며, 옹졸한 극단주의자들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스도인 교육의 기초, 289).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도록 한다. 이 모든 매혹적이면서도 위장된 접근이 남은 교회에 가져다 줄 영향력은 어떤 것이 될까? 우리의 큰 원수의 간교한 목적은 죄가 죄처럼 보이지 않게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며, 가능하다면 성도들의 진영 전체에 그런 식의 죄를 만연시키는 데 있다. 무법한 존재에 대항하여 방어의 마지막 성채를 구축할 힘의 한 위대한 보루는 바로 여자의 씨(남은 자손)이다. 요한계시록 12:37에 의하면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단은 하나님의 법을 미워한다. 지난 여러 세기를 통하여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항하여 사용할 특별한 무기들을 고안해 왔다. 그 무기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다양한 형태를 취하여 왔다. 종종 핍박의 날카로운 칼날이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적은 남은 무리들 위에 번쩍거렸다.
핍박과 죽음에 대한 선고는 마귀가 참 교회를 대항하여 최악의 발악을 할 때 다시 재현될 것이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영원을 가름 짓는 대쟁투가 될 죽고 사는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때에 그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이점들을 다 활용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기 위한 6천년간의 노련한 그의 경험은 그가 미워하는 백성들을 대항하여 계속 연하고 무력하게 하는 계획들을 시도해 왔다. 그 계획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교인들의 영적인 방어벽들을 세속적인 타협을 통해 점차적으로 약화시키는 계획도 포함하고 있다. 이 타협이야말로 남은 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들의 믿음을 음험한 수단으로 훼손시키는, 영리한 사단이 고안해 온 최종의 무기가 될 것이다.
그러한 사단의 작전이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둘 것인가? 세상의 것들에 굴복함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위기의 때에 흔들려 떨어져 나갈 것인가? 우리는 궁금하게 생각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예언의 신을 통하여 거듭거듭 주어지고 있다. 우리가 믿고 싶지 않을지라도 그에 대한 대답은 우리를 대단히 속상하게 하는 대답이다. 그러나 그 대답을 읽고 놀래보라.
“나는, 우리가 가장 엄숙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지난 번에 주어진 이상에서 나는 오늘날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 적은 부분에 속한 자들만이 진리로 성화되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 사업의 단순함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동화되고, 우상을 간직하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될 것이다”(교회증언 1권, 622).
얼마나 엄청난 증언인가! 지금 진리 안에서 즐거워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포기하고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세상과 일치” 되는 것 때문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사단의 음험하며, 높은 평가를 받는 천진하게 보이는 생활양식이 그들의 무장을 풀게 하고,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 것이며, 결국에는 그들을 파멸에 처하게 할 것이다. 다른 증언은 보다 직접적이다. “오늘날 진실하고 참된 것처럼 보이는 자들 중 대부분이 가짜 금속이었음이 판명될 것이다” (교회증언 5권, 136; 증언보감 2권, 29).
원수의 연하고 무력하게 하는 책략은 엘렌 지 화잇이 묘사한 다음의 말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모든 영혼에게 시험이 올 시간은 머지 아니하다. 우리들은 거짓 안식일을 준수하도록 강요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계명 사이에 투쟁이 있을 것이다. 차츰차츰 세상의 요구에 굴복하고 세상의 습관에 동화하는 사람들은 조롱과 모욕을 당하기보다 오히려 투옥과 죽음으로 위협하는 세력에 복종할 것이다. 그 때에는 금이 찌끼에서 분리될 것이다. 참 경건은 겉치레만의 경건과 분명히 구별 될 것이다. 그 광택 때문에 우리들이 감탄하던 많은 별들이 그 때에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성소의 장식으로 꾸몄으나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지 않은 사람들은 그 때에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낼 것이다” (선지자와 왕, 179).
이러한. 무더기로 넘어가는 배도에 대한 이유를 묘사한 글을 간과하지 말라. “차츰차츰 세상의 요구에 굴복하고 세상의 습관에 동화하는 사람들은 조롱과 모욕을 당하기보다 오히려 투옥과 죽음으로 위협하는 세력에 복종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갈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실제로 그들과 우정을 맺었던 형제들을 대항할 것이며, 진리를 대항하는 혹독한 원수들이 될 것이다.
“폭풍우가 임박할 때에 세째 천사의 기별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진리를 완전히 순종하여 성결함을 받지 않은 많은 사람은 그 신앙을 버리고 반대 편으로 들어 갈 것이다. 저들은 세상과 연합하여 그 정신이 깊어짐으로 모든 것을 거의 속된 사람과 한가지로 생각하게 될 것이요 시험이 이르는 때에는 곧 평안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편을 택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일찍이 진리를 순종한 자들로서 재능이 있고 말솜씨가 좋은 사람들은 그 능력을 다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할 것이다. 저들은 이전에 형제 되었던 자들에게 가장 심한 원수가 될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법정에 호출되어 그 신앙의 취조를 받을 때에 이 배교자들은 저들을 거짓 증거하고 비난하는 사단의 가장 유력한 대표자들이 될 것이요 거짓 보고와 풍자로 법관들을 선동하여 저들을 반대케 할 것이다” (대쟁투 하권, 459, 460).
우리는 다시,“저들은 세상과 연합하여. . . . . .평안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편을 택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는 표현을 보면서 놀란다. 그것이 준비하는 작업이라고 하는 표현에 유의하라.“저들은. . . .. .준비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 도덕적인 장벽들을 부수기 위한 사단의 놀랄 만큼 조직적인 프로그램이 나타나 있다. 노련하고도 총명한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라. “세상과 타협하라!” “세상과 같아져라!”
“교회는 평화와 번영의 때에 하기에 실패했던 바로 그 일을 무시무시한 위기의 때에 가장 낙망되고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해야만 할 것이다. 세상과 같아져야 한다고 하는 소리가 그쳐져야 한다는 경고들이 진리의 원수들로부터 가장 혹독한 반대를 받는 상황하에서 주어져야만 한다. 그 때에 그 영향력이 사업의 진전을 착실하게 방해해왔던 영향력을 끼치던 피상적이고도 보수적인 무리들은 믿음을 저버릴 것이며, 자신들의 동정심을 보이기를 원해왔던 진리의 원수들과 자리를 같이할 것이다. 이러한 배도자들은 그 때에 가장 혹독한 적의를 드러낼 것이며, 그들과 전에 관계를 맺었던 형제들을 대항하여 그들의 모든 힘을 다하여 억압과 중상을 일삼을 것이다.그날은 우리들 바로 앞에 있다”(영문 교회증언 1권. 278).
“세상과 같아져야 한다” 는 말이 위의 인용문에서도 또 우리 앞에 튀어나왔다. 거듭하여 우리는 사단이 세속화를 통하여 벌이는 이 어마어마한 공격에 대해서 경고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특별한 주제에 관하여 너무나 조금 듣는다. 수천 명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그 악한 사단의 이러한 조직적인 계획에 대해 눈멀어 왔다. 우리 백성 중에 어떤 이들은 표준이나 생활양식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지 율법주의적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가르침 받아 오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사단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참 안식일을 놓고 벌이는 최후의 시험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도 하고 생각도 하지만 그 시험의 결과가 바로 지금 결정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는 실패한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갈이 말한다. “세상과 연합하고 있는 자들은 세상의 본을 받고 있으며 짐승의 표률 받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자아를 신뢰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고, 진리를 순종함으로 심령을 깨끗게 하는 자들이 바로 하늘의 본을 받아들이고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자들이다” (교회증언 5권 2I6; 증언보감 2권, 69, 70).
짐승의 표는 강요 될 것이다. 모든 영혼은 참 안식일 편에 서든지 가짜 안식일인 일요일 편에 서야만 할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저들의 믿음을 인하여 사형 선고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위기의 때에 서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 표준에 대한 문제를 놓고 보였던 타협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충성되지 못했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세상의 관습과 유행에 점차적으로 굴복함으로 인해서 그들의 의지력과 결정하는 힘은 그들이 시험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아주 많이 무력해 질 것이다. 바로 그 타협은 바로 지금! 바로 지금 전개되고 있다. 바로 이 순간에 대부분의 우리 동료 교우들은 놀라울 정도로 세상과 타협함으로 인하여 짐승의 표가 강요 될 때 잃어 버려진 바 될 것이다.
여기에 나를 괴롭히는 의문이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타협하고 있는가? 교회 안에 큰 흔들림을 가지고 올 그 무서운 조류를 나는 따르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게도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국 진리 대신 세상을 선택하도록 그들의 눈을 멀게 하는 사단이 고안해 놓은 극악무도하고도 간교하게 위장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이야말로 사단이 성도들을 대항하여 사용해왔던 모든 기만적인 계획들 중에서도 아주 근사하게 광택을 낸 걸작품임이 틀림없다. 저들이 가졌던 높은 표준으로 인해 주목을 받던 우리 백성들이 그들과는 관계가 멀었던 생활양식에 굴복함으로 사단의 술책에 걸려들게 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은 자신들이 세속적이라는 평판을 들으면 분개하면서 부인할 것이다. 우리 교인들 대다수는 심지어 죽음에 직면할지라도 자신들의 믿음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깊은 확신을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믿음을 포기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지금 방금 읽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우리 교인들 중 대부분이 세속적인 것에 너무 사로잡혀 있어서 자신들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위험한 타협의 굴레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것은 아무 해가 되지 않으며 받아들여도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너무 눈이 멀어서 그들이 하고 있는 세속적인 것들을 인식할 수 없다.
왜 그들은 자신들이 세속적인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을까? 왜냐하면 표준들이 갑자기 낮춰진 것이 아니라 너무나 서서히 낮춰졌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마귀의 노련한 음모는 교회가 세상과 정욕에 대한 교회의 역사적 위치를 갑자기 버리도록 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영리해서 우리가 영화관에 가고, 화장을 하거나 장신구률 착용하거나 차나 커피를 마시는 것이 괜찮다고 공중 앞에서 광고를 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마음이 암시와 연상의 힘 아래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있다. 그는 무한한 인내력으로 그 자체로서는 정죄 받을 수 없는 그림들, 낱말들, 사상들, 행위들 따위를 도입해 들여온다. 실제로 사단의 수많은 “순진한” 고안물들은 사람들 사이에 높이 여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질과 모양에 있어서 우수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러한 고안물 중에 완전한 예는 텔레비젼이다. 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확한 뉴스, 다큐멘터리, 종교적 프로그램들에 대한 멋진 논증들을 들어왔는가. 아무도 거실에 안치되어 있는 텔레비젼, 그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텔레비전 자체는 아주 훌륭한 가구이며, 훌륭한 정보의 원천이다.
그 다음에 사단은 자신이 별로 능숙하지 않다는 데서 그 완숙한 심리적 공격을 펴나가기 시작한다. 아주 서서히, 봐도 좋고 안 봐도 좋을 듯한 코미디나 폭력극 등을 보면서 분별력은 둔해지기 시작한다. 마음은 새로운 수준의 수용력에 맞춰지고, 거의 모르는 사이에 보는 것과 듣는 것의 변해가는 질을 수용하기 시작한다.
원수가 어떻게 자신의 일을 발전시켜 가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다음의 영감 받은 두 가지 인용문을 살펴보라
“사단은 작은 쐐기들을 이용하여 자기 스스로 비집고 들어갈 것이며 쐐기들이 박힐 때에 틈이 넓어진다. 사단의 그럴 듯한 계책들이 이 때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업에 침투할 것이다. (가려뽑은 기별 2권, 20).
“원수는 일을 돌발적으로 하지 아니한다. 원수의 일은. .. . .. 비밀리에 원칙이란 요새를 침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기에는 매우 작은 일처럼 보이는 것.. . . 에서 시작한다” (부조와 선지자 하권, 444).
우리가 어떤 특별한 영향력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을 때, 그 방향을 인식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참새를 잡을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과 사단의 전략과는 비슷한 점이 많다. 덫이 놓여진 곳에서 몇 자 떨어진 곳에 빵 덩어리를 놓았을 때 참새는 약간 겁먹은 듯이 그 빵 덩어리 있는 곳으로 접근해 온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두려워할 만한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는 그 맛있는 빵 덩어리를 먹는다. 다음 날 빵 덩어리는 어제보다 덫에 더 가까이 놓여 있다. 참새들은 주위에 흩어져 있는 빵 조각들을 주워 먹는다. 하루하루 빵 덩어리는 덫에 아주 조금씩만 더 가까이 놓여진다. 참새는 빵 덩어리를 먹는데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그 때 빵 덩어리는 덫 안에 놓여지며, 그 참새는 그래도 그 덫 안으로 날아들어 온다. 순진하게도 그 새는 건강을 보존하고 안전하게 잔치를 즐기게 해주는 그 훌륭한 빵 덩어리를 신뢰한다. 그 때 그 덫은 그 참새를 채버리고 만다.
나는 참새들이 빵 덩어리 먹는 일을 중지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훌륭한 활동을 멈추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요점은 우리가 이끌려 가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 고려해 볼 만큼 충분히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며, 만일 그 “좋은” 것들이 우리를 영적인 위험 가운데로 몰고 간다면 “좋은” 것일지라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것들이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완전히 죄 없어 보이는 과정이나 학위에 의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높은 표준을 포기하도록 이끌려 가고 있다.
이런 식으로 타협이 교회 안으로까지 항상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단지 조금의 저항감만 느낄 정도의 어떤 활동을 교회 안으로 들여온다…… 사실, 그것은 왜 그러한 활동이 좋은 것이 아닌지를 정확하게 구분 짓기가 매우 어려운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너무나 조금 밖에 탈선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지고 문제 삼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몇몇 충실한 교인들이 그 문제에 관해 약간 편치 않은 감정을 가지지만 극단주의자라 불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것에 대해 어떤 말하기를 꺼린다. 그들은 그들이 그 문제에 대해 강력한 입장을 취하기 전에 그 문제가 좀 더 커지기까지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는다.
불행하게도 더 큰 문제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사단은 타협으로 이르는 모든 계단들을 아주 작은 것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그 정도의 조그만 변질에 대해서 반대할 용기를 갖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때 마귀가 사용하는 훌륭한 논증은 “다른 사람도 다 하고 있는 걸”이었다. 지금도 그 말은 젊은이들 가운데서 종종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세속화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새로운 용어가 탄생되었는데, 그것은 “아주 조금은 괜찮아”이다. 치마는 조금 밖에 안 짧으며, 음료수는 카페인이 아주 조금 밖에 안 들었으며, 텔레비젼 프로그램은 단지 몇 개의 폭력 사건만을 보여줄 뿐이며, 결혼반지는 아주 조그만 것이며, 화장품은 조금만 발라도 아주 생기 있게 보이도록 하며 따위이다. 우리는 계속 그런 식으로 말을 이어갈 수 있다.
우리는 롯이 소돔을 떠날 때에 가졌던 경험을 보면서도 그 가운데서 아무런 교훈도 배우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가족들 대부분은 그 운명 지어진 도시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악한 환경 가운데 살기로 선택함으로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의 집, 부,그리고 사랑스러운 딸들을, 그러나 천사들이 그에게 산으로 도망가라고 재촉했을 때 그는 다른 성에 가서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창 19:20)며 그럴 듯이 변명하였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롯은 도시생활이 그를 거의 파멸에 처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배웠다. 그가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창 13:12)렀던 날 이래로 그의 가족들은 그 부패한 도성의 부패한 행습 속으로 거의 알지 못하는 사이에 1센티씩 빠져 들어갔다. 아슬아슬한 경계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대담한 타락의 지경까지 빠져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이 또 다른 도시에 살게 해 달라고 간청한 것은 점진적인 타협이 얼마나 감각을 마비시키며 판단력을 비틀어 놓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 교회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래전에 소돔을 향하여 자신들의 장막을 쳤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타협을 향하여 그 첫번째 하기 쉬운 변명을 늘어놓으며 발을 들이 밀었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에 대해 불안하게 느끼고 경고의 소리를 발할 용기를 가졌는가?
그리고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감각이 점차 마비된 그들 그리스도인들은 똑 같은 말로 낮아진 표준의 점진적인 타락을 방어하지 않는가? “이까짓 것을 가지고 뭘 그럽니까?” 라고. 이것이 세상의 것들이 남은 교회 안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온 것을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어떻게 가증한 미니스커트가 안식일 아침,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들에서 그리도 눈에 잘 띄게 되었는가? 화잇 여사는 지난 세대에 유행했던 버팀대(후프: 옛날 여자의 스커트 폭을 벌어지게 하는 데 씀)을 받친 치마에 대해 말하면서 그 과정을 설명한다. 그대들은 사단이 미니스커트를 도입해 들여오는 똑같은 미묘한 수법의 사용에 대해서 보게 된다:
“모본의 힘은 크다. A 자매는 작은 후프를 사용하고자 한다. B 자매는 내가 후프를 사용하는 것이 A 자매만큼은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좀 더 큰 것을 사용한다. 또한, C 자매는 A 자매와 B 자매를 본 받아서 그들의 것보다 좀 더 큰 후프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들의 후프가 작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회증언 1권,302).
많이 들어 본 소리가 아닌가? 남은 교회에 있는 소녀들과 부인들은 다 같이 그들의 치마 길이를 줄이기 시작했다. 만일 무릎까지 내려오는 것이 옳다면 무릎 위로 반 인치쯤 올라가는 것이 잘못될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만일 반 인치 올라간 것이 정숙하게 보인다면 반 인치 더 올라간다고 해서 정숙하지 못하다는 말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라고 그들은 말한다.
왜 그에 대한 반대의 말이 그리도 적게 들리는가? 왜냐하면 발효시키는 과정의 매 단계는 너무나 작아서 어떤 경종을 울릴 수 없는 까닭이다. 심지어는 목사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을 꺼내지만 악한 사람들의 핀잔에 금방 말문을 닫아버리게 된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정숙의 표준이 무너지고 있다고 경고의 나팔을 불기를 계속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그럴 듯하게 침입해 들어오는 세속화에 대해서 잠잠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명백한 증언들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 증언들은 그들의 본성적인 감정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부드러운 말들이 전해지고. 그들의 귀에 평화가 외쳐지는 것을 선택한다. 나는 교회가 그들이 처했던 어떠한 상태보다 더 위험한 상태에 처하게 된 것을 본다. 경험적인 신앙은 아주 소수의 사람에게 밖에 알려진 바 되지 않았다. 교회를 정화시키기 위하여 흔들림이 곧 일어나야만 한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그대로의 진리를 전하는데 아무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진리가 밖에 드러나도록 하라. 목사들이 더욱 성공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내게 보여진바 되었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기를 두려워하고 있고, 예의 바르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며, 진리의 표준을 낮추고, 만일 가능하다면 우리 믿음의 독특함을 감추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목사들을 성공하도록 하실 수 없음을 보았다. 진리는 단도직입적으로 제시되어야만 하며 결정할 필요성은 촉구되어야 한다. 거짓 목자들이 평화를 외치고 있으며, 듣기 좋은 것들을 설교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아끼지 말고 크게 외치며,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만 한다” (영적선물 2권, 284, 285)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살아있는 증언은 멈춰지고 있다. 진리의 자르는 힘은 멈춰져서는 안된다. 지금 사람의 마음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론 이외의 어떤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뒤흔들어 깨우고, 원수의 책략을 마구 흔들어버려 정직한 영혼들이 진리를 위하여 결정하도록 하는 뒤흔드는 증언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너무나 부드럽게 모든 것이 움직여져 왔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인 곧은 증언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가 교회 안에 있으나 그들은 사람들과 원수가 될까 두려워 그 죄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는다. 명백한 증언에 대한 반대가 교회 안에 있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증언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부드러운 말들을 듣기 좋아한다. 만일 사람들의 잘못한 것을 누가 이야기하면 그들은 그 사람을 너무 혹독하다고 불평하며 잘못한 사람을 동정한다. .. ..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갈 때 그들은 명백한 증언을 멸시하며, 혹독하고 엄한 것에 대해 불평한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의 미지근한 상태에 대한 슬픈 증거이다” (상동, 283, 284).
교회 안에서 크게 필요 되는 것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담대하게 말할 용기 있는 목사들이다. 진실로 자기의 양떼들과 자기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목사는 매 설교에서 죄를 죄라고 부르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잘못하는 일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단도직입적인 설교는 진실한 사랑을 보여주는 가장 진정한 모본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양떼들을 위하여 슬퍼할 것이며, 그들의 양떼들과 함께 울 것이나,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기별을 뒤로 제쳐두지 않을 것이다.
디트리히 본훼펴(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책, Life Together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을 하였다. “다른 사람의 죄지은 것에 대하여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보다 더 잔인한 것은 없다. 어떤 형제를 죄의 길로부터 돌이키도록 하는 혹독한 견책보다 더 동정적인 일은 없다.” 성경 이외의 다른 책에서 읽은 것 중에 내 사역에 가장 큰 감화를 준 것은 부조와 선지자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 구절이 주는 엄숙한 기별은 내가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처음 읽었던 순간부터 내 영혼 안에서 불 타오르고 있다. 그 기별은 목사들에게뿐만 아니라 부모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별이다. 그래서 그 기별은 내게 있어서 이중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잘못을 책망할 용기가 조금도 없는 자들이나 게으름과 관심의 부족으로 인하여 가정이나 하나님의 교회를 순결하게 하는데 노력하지 않는 자들은 저희가 의무를 태만히 함으로 초래한 악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그 악한 행위가 우리 자신의 것인 양 부모로서의 혹은 목사로서의 권위를 행사하여 저지할 수 있었던 악에 대하여 똑 같이 책임이 있다” (부조와 선지자 하권, 252).
위의 인용문이 주는 심각한 기별을 부디 그냥 넘어가지 말기를. 만일 내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영적인 위험을 나팔을 불어 경고하기를 두려워하여 그 결과 죄를 이끌어 들인다면 그들이 범한 죄들이 마치 나의 죄인 것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범한 죄에 대하여 대답하기를 원치 않는다.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그 때문이다. 너무나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오늘날 이 교회의 힘을 부셔버리기 위해 암암리에 벌이는 우리의 큰 원수의 전략들에 대해 듣고 있다.
이러한 세속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딘가에 줄을 긋고 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의 표준을 조금씩 갉아먹는 일은 우리가 그 첫번째 타협에 대해 용기를 모아 저항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화잇 여사는 말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사이의 거리는 넓어지고 있으며, 그분의 백성들과 세상과의 사이는 좁아지고 있다”(영적선물 4권. 68).
다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은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으로서 서 있는 데 있다. 우리는 이 세대의 타락시키는 관습과 유행에 한치도 양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독립을 유지하며 이 세대의 부패와 우상숭배적인 행위들에 대해 아무런 타협도 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증언 5권, 78, 영문).
그리스도인 생애의 표준에 대하여 사단이 살금살금 침략해서 타협작전을 펼쳐오고 있는 몇몇 주요 부분들을 이제 계속되는 장들에서 공부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