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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자행의 죗됨(Sinful Independence)
마샬 그로스볼

 하늘의 대가족 제도에 있어서 각자는 자신의 개성을 소유하고 있으나 아무도 독립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이는 모두가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서로에게는 사랑으로 대하는 사랑의 줄로 함께 뭉쳐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않으신다. 사실 하나님은 특별히 더 그러하시다고 우린 말해야 한다. 이는 그분의 모든 행위가 당신의 피조물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하시는 모든 것에 있어서 그분은 그분이 창조하신 자들의 사랑과 협력을 끌어내신다. 아담을 창조하신 것을 생각해 보라. 아담이 창조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당신을 돕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라고 초청하셨다. 하나님 당신 자신이 그저 쉽게 그 이름들을 지어서 그 이름들을 아담의 두뇌 속에 기억되도록 하셔서 아담이 지어내는 다른 어휘들과 함께 사용하도록 하실 수도 있으셨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사는 한 세계를 창조하실 수 있으셨으나 가족을 형성할 수 있을 가장 소수의 사람들을 만드셔서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인류의 가족을 이루도록 하셨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종족을 번성시키도록 결정하신 그분의 결정에는 얼마나 큰 위험이 뒤따랐겠는가! 또한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제일 첫 아기에게서 성공을 거두는 데 있어서 얼마나 저조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책임감과 특권을 빼앗아가지 않으셨다. 그래서 시작부터 남녀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고전 3:9)로서 하나님과 함께 왕들과 제사장들이 될 것이었다.

 땅에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늘에서는 천사들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중앙집권제나 독제정치제를 만들지 않으시고 가족을 만드셨다. 바로 그것이 하늘에 전쟁을 가져오게 한 이유이다. 사단이 반역하기로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저 한마디 말을 함으로 사단을 하늘 사회에서 쫓아내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천사들이 그분의 동역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도 그분은 당신 자신의 손에 고삐를 쥐지 않으시고 대신에 천사들과 함께 그 문제를 결정하셨다. 계시록 12:7을 보라. 전쟁 후일지라도 사단은 하늘회의에 지구의 대표로 오도록 허용된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 욥의 충실함을 보이시며 지구의 대표자라고 주장하는 사단의 주장에 도전하셨으며, 천사들을 위하여 그분은 사단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사단은 “하늘의 존재자들의 동정에서 자기 자신을 근절시켰다. 그때부터 그의 사업은 제한을 받았다”(시대의 소망 3권, 300. 욥 1:6-8; 2:1-3; 시대의 소망 3권, 403, 404를 보라). 마침내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하셨던 것을 이해했다. 그들은 결코 다시는 사단이 지구를 대표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1844년 이래로 계속되어 오고 있는 다니엘 8:14의 조사심판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심판을 필요로 하실까? 물론 그렇지 않다. 심판하시는 것은 단지 한가지 이유 때문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중앙집권적인 독재를 하지 않으시는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의 동역자들로서 하늘의 존재들을 만드셨고, 그들로 실제적인 부분을 맡도록 하셨다. 그들은 심판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것처럼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기록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하늘은 상호협력과 연합의 원칙 위에 건설되었다. 그래서 어떤 존재가 일어나서 여러 시대를 통하여 계속되어 오던 하늘의 정규적인 미니스트리를 반대하거나 그것과 경쟁하여 자신의 독립 미니스트리를 시작할 때까지는 늘 그래 왔다. 그런식으로 독립자주 정신은 시작이 되었다.
 하와가 타락하도록 한 것도 그와 동일한 독립자주 정신에 대한 시험이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 5). 그런 식으로 뱀은 하와가 자신이 선과 악을 알아서 혼자 독립적으로 행동해도 충분할 만큼 지혜롭게 생각하도록 그녀를 유혹했다. 인류가 이 기만에 속았을 때 지구는 무언가 더 혼돈된 사단의 독립 미니스트리의 일부가 되었다. 온 세계가 사단의 독립 미니스트리에 연합하게 되었기 때문에 겸손하게 하나님과 협력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독립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사단의 인기 있는 독립 미니스트리에서 분리된 소수였다.

독립자행의 외관
 
 하나님께서 다가오는 홍수에 대해 경고를 주셨던 노아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온 세계는 하나님과 그분의 권면들에 개의치 않았다. 모든 조직된 교회들은 하나님의 권면들로부터 독립된 채로 남아 있었다. 오직 노아만이 하늘의 계획들에 협력하여 겸손히 일했다. 그가 얼마나 고독하고 고립된 듯이 보였는가! 그는 얼마나 독립자행하는 듯이 보였는가! 그러나 외관은 기만적인 것이었다. 독립자행하는 듯이 보였던 그 한사람만이 독립자행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단은 노아의 때에 온 세상 사람들을 자신의 독립자행하는 편으로 끌어 들였던 때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가 온 교회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을 때 그는 더 큰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

독립자행하는 교회?

 모세가 가나안 땅에 열 두 명의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10명의 정탐꾼이 낙담시키는 보고를 가지고 돌아왔다. 백성들은 아우성쳤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민 14:3, 4).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도하심에서 독립하여 자신들의 지도자를 택하고 자신들의 결정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때 갈렙이 그들에게 종용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하나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였다”(민 14:9, 10).

 구약에서 “회중”이란 말은 신약에서 “교회”와 같은 말이다. 스데반은 사도행전 7:38에서 “광야교회”라고 묘사했다. 그리하여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 전체가 갈렙과 여호수아가 곧바른 증언을 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제적시키고 돌로 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결정을 한 것이 다른 이방인의 교회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하나님 자신의 참된 백성들의 결정이라는 것을 유의해 두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면 누가 옳았는가? 교회 지도자들로 대표된 열 명의 불충실한 정탐군들과 대다수의 청중들이 옳았는가? 아니면 곧바른 증언을 한 것 때문에 제적당한 외로운 두 명이 옳았는가? 거룩한 역사에 기록된 것을 볼 때 그 답은 매우 명백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실제적인 상황을 당할 때엔 늘 그런 것은 아니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종종 즉시로 그분의 쾌, 불쾌를 드러내신 것은 마지막 심판 때에 성취될 새 언약의 미래의 보상과 형벌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록 22:12을 보라. 이 경우에 불충실한 지도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에 독립자행과 불복의 정신이 너무도 깊게 잠식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처벌도 그들 가운데서 그 정신을 뿌리 뽑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민 16:2).

 오늘날의 우리 교회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정부를 대표하는 기구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교회의 대표자들이 함께 모일 때 우리는 그것을 대총회라고 부른다.

 이들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들은 “유명한” 자들이었으며, 고라가 그를 돕는 다단과 아비람과 함께 택함을 입은 지도였다. 이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주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민 16:3)라고 항의하였다.

모세와 아론은 독립자행하지 않았다. 노아의 상황처럼 그들이야말로 교회 안에서 참으로 독립자행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교회에서 독립하여 교회의 인정을 받음 없이 자신들을 스스로 너무 높인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고라와 그의 동역자들이 대표자이며,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한 그 교회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였다. 진정, 전 교회가 그들이 임명한 대표자들을 통하여 무엇을 결정할 때 그것이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어떻게 모세와 아론이 교회가 선택한 교회와 지도자들의 권위 밑에 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들이, 그들이 취하는 “독립자행한”길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독립자행하지 않았다. 노아의 상황처럼 그들이야말로 교회 안에서 참으로 독립자행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이번에도 외관은 참으로 기만적인 것이었다. 교회 조직은 독립자행한 반면에 독립자행한다는 비난을 받은 자들은 하늘 정부에 충성되고 진실되게 남은 자들이었다.

 황급하게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 나는 목사님들과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미니스트리가 모세의 미니스트리와 같아서 누구든지 자신들의 계획이나 대회의 계획과 조화되지 않을 때에는 이유나 확신을 무론하고 그 사람들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같다고 하는 얘기를 들어왔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엘렌 화잇의 편지는 그 같은 생각에 대해 경고 한다:
 “종교자유에 관한 문제는 우리 백성들에 의해 한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명백하게 이해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팔을 펴서 법궤를 고정시키려 애씀으로 주님의 노가 그들에게 발해진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지위가 주님의 종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와 무엇을 안해야 할지를 말해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무엇을 제시해야 하며 무엇을 금하여야 할런지를 결정하는데 능하다고 생각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물으신다 ‘누가 그대들에게 그것을 요구했느냐? 누가 그대들로 하여금 내 백성들의 양심이 되는 부담을 주었느냐? 그대들이 내 백성들의 자유를 제한하려 할 때 무슨 정신에 의해 인도와 조정을 받느냐? 나는 내가 내 백성들에게 하늘의 교훈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모세를 선택한 것처럼 그대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들의 손에 지배권을 맡기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모세에게 놓여진 책임이 그대들에게는 결코 맡겨진 적이 없다’”(Manuscript Release 1335, 1895년 8월 1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선택된 지도자가 아니었다는 것은 잘 유의해야 한다. 그는 백성들에 의해 선택된 적이 전혀 없다. 오히려 모세는 백성들에 의해 거절당한 지도자였다. 사도행전 7:35을 보라. 모세는 교회 지도자들이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그리스도(신 18:15 참조)의 표상이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선지자였다. 백성들이 선택한 지도자는 고라였다. “고라가 온 회중〔혹은 교회〕을 회막문에 모아놓고 그 두사람〔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려 하매”(민 16:19).

 하나님께서 단순히 온 교회가 고라를 선택한 것 때문에 고라의 지위를 인정하셨는가? 오늘날 우리가 고라에게서 배우는 교훈들을 기억하고 지위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방향을 더욱 구하면 투표나 여론조사에서 하나님께 승리가 돌아가는 것이 되지 않을까? 우리가 짐승의 세력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이 땅에 있는 어떠한 위원회나 대총회나 세력이 진리의 한 원칙이라도 변경할 권리가 없다는 공과를 배울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 땅위의 당신의 동료 일꾼들의 협력을 구하시지만 그분이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지위를 버리시거나 사람으로 하여금 그분의 값을 주고 산 소유물인 그분의 기업들 위에 왕처럼 조종하는 세력을 가지고 군림하도록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날 요구되는 독립자행

 지금은 다시 한 교회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준비되기 위해 하나님의 기업(소유물들)에게 침례 요한의 기별과 미니스트리를 가지고 와야 할 때가 아닌가? 요한이 자신의 생애를 준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사명을 받은 후에 어떻게 자신의 미니스트리를 시작했는가? 요한은 자신의 사업을 위해 산헤드린의 인가를 구하지 않음으로 산헤드린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지도자들과 백성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똑같이 견책했다. 시대의 소망 1권, 163-165 참조. 오늘날 우리는 침례 요한과 유사한 종류의 사업을 하며, 사라의 정신으로 그보다 더 예리한 태도로 동일한 기별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이 두려운 시대, 곧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오시기 직전에, 하나님의 성실한 전도자들은 침례 요한이 증거한 것보다 더 분명한 증거를 해야 할 것이다. 책임 있고 중요한 사업이 그들 앞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것을 말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자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무서운 화가 그들에게 이르러 오고 있다”(교회증언 1권, 343).

오늘날 우리는 침례요한과 유사한 종류의 사업을 하며, 사랑의 정신으로 그보다 더 예리한 태도로 동일한 기별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침례 요한을 부르신 것과 그의 권위는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는 하늘의 권위를 존경했다. 산헤드린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특권과 권위가 자신들의 것인 양 주장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독립자행했으나 침례요한은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독립자행에 참여하지 않았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7-10).

 요한은 백성들에게 어떤 조직이나 개인적 경건의 공언이나, 혹은 기관에 온통 믿음을 두지 말라. 이는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어 던지”울 것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아무리 크든 적든 간에 모든 독립된 개인, 회중, 대회, 혹은 기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독립자행하게 될 때 찍히는바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교회를 가지고 계시다…그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들이다”(The Upward Look, 315). 하나님의 교회, 즉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계 14:4) 그분의 백성들은 끝까지 통과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연합하여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운동이 조직이나 건물이나 법적인 문서 이상의 것이라는 것은 이해해야만 한다. 베틀크릭이 독립자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불을 보내셨다. 그러나 교회 자체는 생존했으며,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와 함께 승리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새로운 교회나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 운동은 그분을 떠나 독립자행하려는 모든 요소로부터 정결케 되어야만 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그 계통이 아브라함에 속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께서 한 백성을 소유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이방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취하셔서 원가지에 접목하실 수 있다고 말하였다. 요한의 기별을 설명하면서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 한다: “나무의 가치는 그 나무의 이름보다도 그 나무의 열매로 결정된다. 만일 열매가 무가치한 것이라면 그 이름이 그 나무를 멸망에서 면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저희의 품성과 생애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라고 하였다. 믿노라고 자칭하는 것만으로는 무가치하였다. 만일 저희의 생애와 품성이 하나님의 율법과 부합되지 아니한다면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이다”(시대의 소망 1권, 125).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름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하면서 그 이름을 보존하기 위해 그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못박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들이 그 이름의 진정한 중요성을 상실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일차적인 목적은 그 이름 안에 품직된 성품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유대인이라 부르지 않으셨다면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립자행에 대한 예수님의 모본

 예수님께서는 교회만이 성립될 수 있는 진정한 원칙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하노라)”(요 5:3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산 사람 중 가장 의존적인 성격의 사람이셨다. 그분은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조화 있게 일하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그는 유년 시대부터 랍비의 규칙에 구애됨이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셨다……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온순하고 유순한 태도로 그가 접촉하시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시려고 힘쓰셨다. 그가 너무 온순하고 겸손하신 까닭에 서기관과 장로들은 그가 저희의 교훈의 감화를 쉽사리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저들은 고대의 랍비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주의와 유전을 받아들이도록 권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이것들의 성경상 근거를 요구하셨다”(시대의 소망 1권, 96, 9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한 순종과 성화로 돌아오도록 초청하고 계셨다. 바로 이것, 이것만이 교회를 단합하고 순결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행해지던 정책을 창안했거나 그 정책들을 고대로부터 전수받아 온 것이 하나님의 참된 교회였다는 사실은 그분께 문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이외에는 다른 영감 받은 지침이 없으셨다. 그러나 교회가 너무 중앙집권적이 되자 그들은 교회가 사람이 만든 규칙과 권위와 예루살렘 중심의 강력한 구조에 의해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알 수도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업과 상치되는 사람이 만든 규칙과 제지들에 굴복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의 제사제도의 기초가 되신 그가 그 제도의 원수와 파괴자로 인정을 받게 될 것이었다”(상동, 131). 만일 모든 사람이 산헤드린에 의해 지도받는 대신 “자기 자신의 일”을 도모할 것 같으면 교회는 그 기능을 멈출 것이라고 지도자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라고 그럴듯한 변명을 갖다 붙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의 일”을 하고 계시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데 실패하였다. 그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한 순종과 성화로 돌아오도록 초청하고 계셨다. 바로 이것, 이것만이 교회를 단합하고 순결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교회를 구하려는 산헤드린의 바로 그 시도가 결국 교회를 파괴시키는 것이 되었다.

 산헤드린은 모든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하여 예수님의 소위 독립자행-바로 그들의 권위로부터의 독립자행-을 제한시키려 애썼다. 만일 그분이 로마인이거나 이방인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분이 그분 자신을 교인이라고 부른 데서 온 것이다. 산헤드린은 충실히 그분에게 경고하였다. 그분은 산헤드린 회의 앞에 불리어졌고, 그들은 그분을 설득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성경의 명백한 증언이 없이는 그분을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분의 영향력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백성들을 경고하려 애썼다. 마침내 교회를 구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시도로 그들은 그분을 제적시키고 결국은 나무에 못박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이런 것은 저들이 스스로 기뻐한 저희의 기만이었다. 저들은 자신들을 민족의 구원을 도모한 애국자처럼 생각하였다.”(상동 2권, 360).

 그러나 비록 그들이 애썼고, 자신들이 성공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들은 예수님을 교회로부터 제적시킬 수 없었다. 예수님이 바로 교회이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을 참 교회로부터 제적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 23)고 하신 때문이다.

 교회는 아직 “그 기초인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는바 교회는 그 머리로 그리스도를 순종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에 의존하거나 사람에 의하여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교회의 책임 있는 지위는 다른 사람들이 믿거나 행하는 바를 명령할 권위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주장을 시인하지 않으신다. 구주께서는 ‘너희가 다 형제니라’고 언명하신다. 사람은 다 시험을 당하고 자칫하면 실수하기 쉽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에게 지도를 위촉할 수는 없다. 믿음의 반석은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것이다. 가장 연약한 자일지라도 이를 의뢰할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을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라도 그리스도를 저희의 능력으로 삼지 않는 한 가장 약한 자임이 드러날 것이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는)……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상동, 182).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능가하는 중앙지배적이며 중앙지배적인 세력이 없어야 한다. 주님의 사자는 “베틀크릭은 하나님의 사업의 센터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장소를 채울 수 있으시다”(TM, 375)고 말한다. 질서를 위한 장소는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단순하고 겸손한 질서여야 하며, 늘 그리스도를 최우선으로 높여야 한다. 이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라고 한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몸의 머리인 때문에 그분이 항상 “으뜸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나 그분의 말씀위에 군림할 때마다 그 교회는 백성들의 우상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조직을 만드셨고 그것은 거룩하다. 그러나 그 조직은 늘 그 머리로서 그리스도와 말씀을 보조하는 것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능가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거짓 신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전을 신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지리나,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성전에 대항하여 비난의 말을 하는 것은 그 성전 경내에서 가르쳐지는 거짓 가르침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뒤집어 쓴 마지막 죄명은 그분이 성전을 대항하여 말하셨다는 것이었다.

 조직과 지도자들을 거짓 하나님으로 삼는 위험에 관하여 엘렌 화잇은 목사들에게 보내는 증언의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장에서 베틀크릭(당시 대총회 본부가 있던 곳)과 그 조직과 지도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체험하게 될 그 입장을 설명해 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련과 그리스도의 초림 직전에 저들이 보인 태도에 대한 광경을 여러 번 반복해서 나에게 보여 주셨다. -원수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모든 기회를 포착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역시 사단은 하나님의 종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저들이 고귀한 진리를 분별할 수 없게 하려고 힘쓰고 있다”(가려 1권 513)고 경고한다.
 
1888년의 문제

 조직이 종이기 보다는 주인이 되는 조직에 대한 예배의 이런 거짓 복음이 엘렌 화잇이 1888년에 주요 문제점으로 알던 것이었다. 그녀는 다음의 편지에서 이 문제의 원인을 얘기한다. “이것은(문제는) 주로 지위가 무제한의 권위를 주는 것이라는 버틀러 목사의 감정 때문이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과 양심을 자신들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고안하신다. 그분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되며, 오직 다른 사람의 정서를 말하도록 계획하신 적이 전혀 없으시다. 그러나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모든 일꾼들을 위한 마음과 양심과 판단이 되어야 한다는 오류가 우리 가운데 들어오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기초는 ‘그리스도 우리의 의’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개별적으로 책임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행동하시는 것처럼 행동해야지 다른 사람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도록 행동해서는 안된다. 이는 이러한 간접적인 영향력이 계속될 때 영혼들은 스스로 있는 위대하신 분에 의해 인상과 지도를 받을 수 없게 되는 때문이다. 반면에 그들은 다른 사람의 경험과 섞인 경험을 갖게 될 것이며, 아무런 행동이나 선택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도덕적인 억제 하에 있게 될 것이다…만일 우리가 빛과 축복들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오는 수단들을 열심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감사하게 사용한다면 이 세상의 어떤 음성이나 권력도 우리 위에 권세를 부리며 ‘그렇게 해서는 안되느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1888년 자료, 110-113).

 버틀러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엘렌 화잇은 계시에서 보여진 바를 언급했다: “나의 안내자가……그의 팔을 와그너 의사와 버틀러 목사 당신에게 펼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도 율법에 관한 모든 빛을 가진 자가 없으며; 어떠한 지위도 완전한 것은 없다’”(상동, 93). 문제는 단순히 신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와그너와 죤스의 입장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주시기 위한 한 기별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그들을 통해서 나가는 모든 기별들은 자신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도자들에 의해 주어져야 할 거짓 가르침들을 반대하는 권면과 심지어는 경고들을 위한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모든 권면과 경고들은 건전한 성서적 원칙에 기초되어야지 중앙집권적인 권위에 기초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백성들은 사람의 권면과 경고보다 오히려 말씀의 권고와 경고들에 의존하도록 가르침 받아야 한다. 우리는 백성들로 존경하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인간의 지혜와 지도를 의존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우리 백성들이 특별한 성회를 가질 때 그리스도와 그들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육체를 의지하지 않도록 그들을 가르치라…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사람들을 놓는 것은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거나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대총회장이 백성들의 신이 되어야 하는가? 베틀크릭에 있는 사람들이 무궁한 지혜를 자긴 자들로 인정되어야 할 것인가? 주님께서 인간의 마음과 지성에 역사하실 때 그와는 다른 원칙과 행습들이 백성들 앞에 제시될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사 2:22)”(TM, 375, 376).

 어떤 사람이 1800페이지에 달하는 엘렌 화잇의 1888년 자료(The Ellen G. White 1888 Materials)와 목사들에게 보내는 증언들(Testimonies to Ministers)을 다 읽어볼 때 그는 집단적인 독립자행의 심각함과 현재의 널리 퍼진 상황에 의해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1888년에 있었던 주요한 문제거리였으며, 결코 시정되지 않은 듯이 보인다. 1901년에 시정하려 했으나 2년후에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대총회(1901)의 결과는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크고도 어마어마한 슬픔이 되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 회의의 결과로서 전 사업에 도입되어야 할 정신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의 증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도입되지 않았다”(Manuscript Release 1016, 3-4,〔1903년 1월 14일〕. 그녀가 다음의 말을 한 것은 1901년이었다: “복종하지 않으므로 여러 해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으면 안될지 모른다”(복음전도, 678).

 주님께서 침례요한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러들이려 했던 진정한 부흥과 개혁을 보내 주시어 자아에 대한 겸손과 서로에 대한 사랑을 통해 연합을 이루는 곳, 온전한 복음이 그 순결함 그대로 전파되는 곳, 하늘 정부의 원칙들이 실행되는 곳,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모시고 교인들은 모두 동료 종들이 되는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기를 기도드린다. 종교 지도자들의 손 안에 있는 왕 같은 권력은 절대 교회를 구하거나 높일 수 없을 것이다. 중앙집권제를 통한 연합은 결코 그리스도를 높일 수 없을 것이다. 종교적 교사들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단 한 사람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인이 그리스도와 동역자(고전 3:9)가 되어 겸손하게 협력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함께 조직하며,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뜻을 최상 최선으로 의존할 때 오랫동안 기다리던 늦은 비의 축복을 받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곧 오시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세상에 내리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 중에는 사도 시대 이래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근본적인 경건을 위한 부흥이 될 것이다. 대쟁투, 513을 보라.

* 목사요 전도자인 필자는 캔사스 주, 위치타에 있는 Steps to Life Ministry의 책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