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질, 흔들림, 그리고 곧바른 증언
저자: 훠난도 차이 (Fenando Chaij)
하루는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위에 배를 젓고 있을 때에 광풍이 일어나 파도가 배를 덮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잠들어 계셨습니다.그들은 경험 많은 어부들이었고 갑작스런 위험들에 익숙한 자들이었으므로 모든 전문 지식과 힘을 다하여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광풍을 이길 희망이 깨어 졌을때 갑자기 예수께서 배에 타고 계신것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깨우고, “주여 구원 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부르짖자 주께서는 평온하게 대답하시기를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시고 일어 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마 8:24-26) 그 특별한 경험은 과거에 있었던 어떠한 일보다도 더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해 주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개인적으로 또는 교회 전체적으로, 가끔씩 모든 것들이 안정성 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특별한 믿음의 시련을 통과하게 되며,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지 아니면 거친 바다의 흉흉한 파도들 가운데 떠내려 가도록 우리를 버려 두셨는지 의아해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 즉 우리 개인의 생애나 교회에 생기는 특별한 사정들 곧 그 궁극적인 목적이나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경험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신뢰를 굳게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교단이 흔히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마지막 시대에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성경과 영감의 글에서 빌려온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흔들림”, 혹은 “체질”이라는 낱말이고, 또 다른 말은 “곧바른 증언”이라는 낱말입니다. 이 말들은 화잇 부인께서 당신의 글들 가운데서 사용 하셨고 그것들 중 하나인 “바른 증언”이란 말은 이 글을 쓰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먼저 흔들림에 대하여 살펴 보십시다. “흔들림”이란 동명사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것을 이리저리 움직임, 흔들리게 만듬, 신체적 혹은 정서적 동요의 결과로 떨림”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의 종은 그것을 교회 안에서 시작될 배도의 과정 또 믿음을 굳게 할 충격적인 독특한 경험에 적용 하였습니다.
화잇 부인은 우리가 성경 가운데서 역시 발견할 수 있는 비슷한 낱말을 같은 경험에 적용하였는데 그것이 곧 “체질”이란 표현입니다. 화잇 부인은 그 낱말을 타작하는 일을 설명 할때 상징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곡식이 흔들리고 체질 당하여 깨어진 낱알이나 겨나 이물질들이 떨어져 나가게 되고 불려나가는 ‘체질당함’을 상징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맹렬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완전한 알갱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아모스9:9).
또한 당신의 제자의 위기의 시간에 주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사단이 너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 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녹22:31,32). 라고 하셨습니다.
전에 언급했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특별한 믿음의 시련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흔들림과 체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일은 과거에 여러 번 일어 났었으나 역사의 마지막 무대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로서 다시 반복 될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교인들을 떨어져 나가게 하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1. 종교적 부주의와 무관심 2. 일요일 휴업령 강제법에 따른 핍박 3. 거룩한 진리의 지식에 대한 불확실한 이해-그러나 그 근본 이유는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기별을 무시하거나 그 기별을 받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네가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하고 뜨뜻 미지근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계3:16).
“나는 내가 본 흔들림의 의미를 물었는데 그것은 라오디게아 교회 에 보내는 참된 증인의 권면으로 인한 결과임을 알았다. 이 바른 증언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마음속에 작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준을 높이고 진리에 매달리도록 이끌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바른 증거를 저버렸다. 그들은 그것을 대항하여 일어섰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을 흔들림의 이유이다.” 선지자는 슬프게도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입니다. “나는 참된 증인의 증거가 절반도 주의를 끌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교회의 운명이 달려있는 이 엄숙한 증거가 완전히 등한시 되거나 경솔하게 평가되고 있다. 이 증거는 깊은 회개를 불러 일으킬 것인 바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드린 모든 자들은 그것에 순종하여 순결하게 될 것이다” (초기 문집 277).
이 영감의 글을 좀 분석하여 봅시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기별인, 곧바른 증언의 계시들을 교회에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 도구들을 사용하셔서 예리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화잇 부인은 말하기를 참된 증인의 기별인 ‘곧바른 증언’이 교회에서 반도 주의를 끌고 있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기별이 무엇 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생애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들, 즉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진정한 경험을 하는 것에 그리고 복음을 나누기 위해 전도하는 활동에 있어서 뜨듯 미지근하며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기별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우리 자신의 영적 형편에 대하여 크게 기만 당하고 있으며, 하늘을 위해 준비하는 우리의 현 상태에 대하여 만족하고 있으나, 실제상으로는 가련하고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 멀었으며 벌거벗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처참한 상태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히 회복 할 수 있는 세가지 특효약을 제공해 주고 계십니다. 믿음과 사랑의 금 – 즉 성령의 열매, 또한 그리스도의 의의 흰옷 –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 의 성품을 나누어 주심, 그리고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보고 식별해 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안약 말입니다. 이 세가지 치료약은 우리를 가난과 벌거벗음과 눈먼 것으로부터 치료하여 하늘을 위해 적합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을 확신 합니다.
이제야말로 참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면으로 불리어진 ‘곧바른 증언’, 즉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이 우리들에 의하여 새롭게 강조되고 그 의미가 해석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바른 증언을 전할 수가 있습니까? 단순하게 말과 행동으로, 한편으로는 변화된 생애로 (회개와 개혁),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남들을 깨우치고 그 기별을 받게 하기 위하여 호소하는 말들이나 곧바른 글로써 할 수 있습니다.
곧바른 증언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주어질 것입니다. 화잇 부인께서 보시기를 “이 권면은 그것을 받아 들이는 자들 마음 속에 작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준을 높이고 진리에 매어 달리도록 이끌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영감의 말씀이 여기에서 그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만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그 권면을 받아 드리지만 어떤 이들은 그 바른 증언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항하여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일어나는 흔들림의 이유라고 그녀는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기별을 극단주의요, 광신주의요, 율법주의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들은 값 싼 은혜에 매달려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아닌, 생애를 변화시키지 않는 다른 믿음을 가질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는 정신아래 “회개와 개혁”이란 말을 좋지 않은 개념으로 생 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굴복하기 위한 어떤 노력이나 세속을 극복하고 자아를 버리기 위해 애쓰는 노력, 또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그들의 뜨뜻 미지근함과 우상들을 버리려는 노력들을 십자가의 공로률 믿는 믿음의 결핍 때문에 생기는 ‘행위’들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이 바른 증언의 말씀들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기별에 대항하여 일어날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흔들림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의 최대의 원수로 돌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 바로 이러한 일들이 눈 앞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형제들 가운데 신신학을(New Theology) 받아 들이는 자들이 점점 증가하며 “그러므로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계 3:39) 는 예수님의 진정한 초청과 책망을 거절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실망의 이유가 되지 않게 하십시다. 이것은 수십 년 전에 영감의 펜에 의하여 예언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참 백성과 참 백성이 아닌 자들 사이에 분리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러한 성취가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로 하여금 주를 위하여 더욱 담대해지도록 하십시다. 이러한 분리 하는 일이 오히려 우리를 도와서 우리의 영원한 의가 되시며, 영적인 힘과 능력의 유일한 원천이신 그리스도와 더 가까운 관계를 갖도록 노력하십시다.
우리는 우리들의 영혼들을 주 앞에 겸비하게 낮추고, 회개와 개혁을 갈구하며, 또한 예수님만 전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무능력함을 인식하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 짐이라”(고후12:9)고 말씀하시는 주님, 곧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의 무한한 능력의 손에 우리의 무능함을 내어 던지도록 합시다. 이 마지막 때의 위험들을 통과해 갈 때에 충성심을 가지고 확신 있게, 영원한 승리를 향하여 전진해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