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물 위를 걸을 수 없는가? 제1부~제3부
저자: 토마스 데이비스 목사 : 리뷰지의 편집인으로 봉사한 재림 교회의 은퇴 목사.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의 저자인 마가렛 데이비스의 남편.
그대는 물위를 걸을 수 없는가? 물론 그대는 걸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 스스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가 물위를 걸을 수 없다고 믿는 그 믿음이 그대로 하여금 물위를 걸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대는 예수께서 그대에게 물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새벽 미명의 갈릴리 바다를 살펴보자. 희뿌연 회색 빛을 뚫고 다가오는 희미한 존재가 있다. 배 위에는 무서워 떨고 있는 열두 명의 남자들이 있다. 그 때, 파도를 가르며 상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니 두려워 말라.”
갑자기 생기를 얻은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만일 당신이시거든 나로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라.”
베드로는 차갑고 시퍼런 파도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과의 거리를 측정해 보았다. 그는 생각하기를,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물위를 걸어.”
그는 망설였다. 순간적으로 의심이 그를 삼키어 버렸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물위를 걸었던 적이 없었어.”
이러한 장면이 베드로에게 일어날 뻔했다. 그는 검푸른 바다 속을 바라보면서 움츠러들 수 있었다. 그의 믿음은 처음 시작부터 힘을 잃고 시들을 수 있었다. 만일 베드로가 파도 위로 그의 발걸음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가 물위를 걷는 장면을 통해서 믿음에 관한 놀라운 교훈을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물위를 걷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퀴글리 (W.B. Quigley) 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사실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가 동물원을 방문했을 때, 60센티의 높이 밖에 안되는 울타리 안에 서있는 거대한 코끼리를 보았는데, 그 코끼리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서성거리고 있었지만 한쪽 다리에 얇은 쇠사슬이 묶여져 있었고, 쇠사슬은 작은 말뚝에 매여져 있었다. 퀴글리에게 있어서 코끼리를 지키는 사람이 그토록 약한 구속력을 가지고 코끼리를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실로 묶고, 실을 성냥개비에 매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가 매여져 있는 코끼리를 계속해서 보고 있는 동안, 코끼리에 대한 구속력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코끼리를 지키는 사람이 나타나자, 퀴글리는 그에게 이처럼 작은 쇠사슬과 말뚝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그 코끼리는 힘없는 애기처럼 울타리 안에서 잘 구속 당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코끼리는 모든 구속력, 즉 울타리와 쇠사슬을 극복하고 도망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런 일을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길들여져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쇠사슬과 말뚝을 힘없이 뽑아버리고 달려나갈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기엔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힘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에 있어서 코끼리는 쇠사슬과 말뚝에 의해서 구속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의해서 구속 당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적고 연약한 쇠사슬과 말뚝이 코끼리의 자유를 빼앗은 것처럼, 그들의 삶에 있어서 반신 반의 하는 믿음으로 인해서 죄에 대한 승리를 빼앗기고 있다.
다음에 서술하는 한 사람의 경험은 자유를 빼앗긴 코끼리의 모습을 우리에게 연상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는 20살이 채 되기 전인 소년기에 침례를 받았는데, 그 당시 나는 매우 신실하여서 100%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했었다. 나는 다니엘서로 시작되는 일련의 침례 공부를 했으며, 그 공부는 예수님에 관한 믿음과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은 교회의 녹명책에 기록되었으며, 자아와 죄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사단의 강력한 동맹자인 자아와 죄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결심을 쉽게 허물어뜨렸다.
환멸과 실망이 그 뒤를 이어서 찾아왔다. 나의 젊은 시절 동안, 나는 계속 교회 안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동안 나의 실망과 좌절의 곡선은 위 아래로 오르내렸다. 어떤 때는 심하였고, 어떤 때는 약하게….
그러나 여전히 나는 신실하였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신학교의 학생이 되었고, 후에 목회자가 되었다. 내가 성경을 연구할 때에 때때로 나는 모든 죄를 정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지만, 유혹에 대한 만성적인 패배감으로 인한 고통과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의 신앙 상담은 죄, 즉 이기심, 질투, 불인내, 등등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것들을 휩쓸어 버릴 때까지 나의 생애에서 활동적인 존재로 자리를 잡고 있게 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은 나로 하여금 스스로 내 자신을 합리화하도록 확신시켰다. 마음 속으로 내가 결정하였던 나의 결심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투쟁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나의 실제적인 생애에 있어서 죄에 대한 충실한 승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쇠사슬은 만들어졌으며, 말뚝은 땅에 꽂혀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죄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는 성경절과 예언의 신의 인용구절을 읽었지만, 그 약속의 글은 오히려 나를 혼동케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그 글이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닌 다른 의미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화잇부인의 책의 테두리 여백의 곳곳에는 당시에 내가 가졌던 의문과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고 애썼던 나의 노력이 여러 가지 표현으로서 남아 있는데, 그것은 그 페이지에 있는 죄에 대한 승리의 약속과 전혀 상반되는 것이었다. 나는 승리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글들은 자유를 약속하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는 믿음일지라도 순간적으로 정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신조에 의해서 나는 묶여지고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다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물 위로는 걸을 수 없다고 단정지었기 때문이다. 성경과 예언의 신을 통하여, 나도 걸을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보았을지라도, 나는 그것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약속과 증거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과거의 나의 육적인 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나는 성경의 약속과 증거보다는 내 자신의 경험과 신조를 더욱 신뢰하였다.
물위를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실험실에서 간단한 실험을 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구태여 실험을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가 스스로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쉽게 증명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자신이 직접 물위를 걸었을 때까지는…. 그대들은 베드로를 데리고 실험실에 가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베드로는 차이점을 발견했다.
우리는 믿음이 지식을 앞서간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활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물위를 걸을 수 있다는 지식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이와는 다른 길을 요구한다. 인간은 항상 “먼저 나에게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증거를 주겠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성경을 통해서 되풀이 되고 있는 장면이다.
두 명의 눈먼 자들이 예수님을 소리질러 부르며 따라왔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태복음 9:27). 예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치유를 베풀기 전에 그분께서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이끌어 내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상동 28절).
한번은 귀신들린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께 나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마가복음 9:22) 라고 말하는 가운데 자신의 가진 의심을 드러내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이 부족함을 보여주시면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상동 23절) 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의심이 자기 아들을 치유 받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깨달은 소년의 아버지는 열정적인 갈망으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상동 24절) 라고 예수께 외쳤다. 그 장면에서 믿음이 포기되거나 취소되었다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실 수 없으셨다.
제임스 레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재림교회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완전주의자였다. 그래서 그의 책임 하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자주 충돌하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모든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항상 죗되었고, 그들이 해야 할 일보다는 축구 경기와 월급봉투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좌절감과 불만은 해가 지남에 따라 증가하여서, 그의 부하 직원들에게 화가 나서 소리를 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자신은 그러한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 상태까지 이르자 폭발하고 말았다. 그 결과로 그는 다른 기관으로 옮겨졌고, 후에 또 다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근무처의 이동으로 인해서 그는 상관들과 여러 가지 문제에 접하게 되었고, 감정의 쓴 뿌리가 마음 속 깊이 내리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마음 속으로 여러 가지 감정을 쌓아갔으며, 그것은 육체적으로 갖가지 고통과 아픔을 수반하게 하였다. 그의 인생은 비참하게 변했으며, 결국에는 신경쇠약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죄에 대한 승리를 발견하고 “물위를 걷는” 비밀을 터득한 참 그리스도인을 만나게 되었다. 제임스가 그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는 참담한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고 조각난 인생을 회복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믿음으로 예수를 바라보았고, “물위를 걷기” 시작했다.
그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산 관계를 유지했을 때, 그에게 있었던 좌절과 낙망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변화된 유쾌한 정신과 마음은 그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가 결코 제거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마음 속의 은밀한 죄들이 뿌리째 제거되었다. 과거에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감정의 쓴 뿌리가 사라져 갔으며, 그와 함께 육체의 병과 고통도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가 믿음으로 순간순간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자, 그는 자신의 인생에 일어난 놀라운 사건들로 인해서 전율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제임스는 물위를 뜰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자신의 인생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상대편은 그의 말을 의심스럽게 듣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물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두렵고 비정상적인 것으로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제임스에게 환상과 광신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며 경고했다. 그는 “우리의 죗된 본성 때문에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영적 경험과 신조를 성경을 통하여 재조명 해 보아야 했지만, 너무도 분명하고 현실적인 자신의 신앙 경험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학을 되풀이 말하면서 제임스의 이야기를 매우 위험스러운 것으로 결정하였다.
한동안, 이 지식이 많고 영향력 있는 사람과 즐겁고 재미있는 교제를 나누면서, 제임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에 대한 확신을 잃어갔으며, 어느 정도 혼동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와 “이제 능히 너희를 실족하지 않게 지키시고 자기 영광의 임재 앞에 흠 없이 큰 기쁨으로 서게 하실 수 있는 그 분” (유다서 24절)의 말씀을 기억했다.
또한 그는 예언의 신에 있는 다음의 말씀을 생각했다. “인성은 이 세상에서 신성과의 협력을 통하여 성품의 완전을 얻을 수 있다.” 리뷰앤 헤럴드, 1906년 6월 14일.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구주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는 영적 생활의 과학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를 영예롭게 할 수 있다.” 상동, 1904년 11월 24일.
제임스의 흔들리는 믿음은 다시 굳건해졌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시고 계신 일이 실제적인 사실인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위기는 지나갔고 승리가 주장되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얼마든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만일 제임스가 설득 당하였다면, 그는 미혹 당했을 것이다. 만일 제임스가 그 중요한 사람의 말을 따라서 자신의 경험과 믿음을 부인하기로 결심했다면, 그는 그 중요한 사람의 경험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따라갔을 것이다. 그 사람은 중요하고 높은 위치에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리에 대해서 알았어야 했고, 물위를 걷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야만 했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사람은 ….
제임스를 위한 또 한번의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 경우에 제임스는 물속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베드로가 물에 빠졌던 것처럼…. 그가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면 그의 생애에는 다시 좌절과 쓰디 쓴 감정과 고통과 아픔이 되살아 나올 것이었다. 그리고 신경쇠약증으로 인하여 비참한 인생을 살아갔을 것이었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제임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끔찍한 문제들로 자리잡고 있던 것들에 대한 유일하고 참된 해결책, 즉 믿음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해결책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르는 평화와 확신 그리고 실제적인 신앙 생활에 있어서 물위를 걷는 경험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때까지 그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와서 제임스가 소유하고 있던 승리와 평화는 전혀 거짓된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 사실을 모릅니까?”
그대는 물위를 걸을 수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는가? 아니면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외치는 거듭나지 못한 그대 자신의 경험을 믿는가?
오라! – 제2부
갈릴리 호수, 배, 베드로, 그리고 그리스도. 물위를 걸은 2번째 사람이 된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물위를 걷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번에 연재되는 토마스 데이비스 목사님의 글, “물론 당신도 물위를 걸을 수 있다!” 를 읽어가면서 자신의 믿음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물위를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 글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면서 동의할 것이고, 물위를 걷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위험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나도 물위를 걷고 싶다!”는 깊은 소원의 기도를 하늘 아버지께 드리게 될 것이다.
오라!
“만일 주님이시거든 내게 물위를 걸어 오라고 말씀하소서.”
베드로의 호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허락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오라!”
예수께서는 그 이상의 어떤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물위를 걸을 수 있을 만한 확신을 주시지 않으셨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존하여서 확신을 이끌어내야만 하였다. 거룩한 확신이 가득 찬 주님의 명령은 베드로에게 영감적인 확신을 불러일으켜 주었으며, 그리하여 베드로는 신속하게 순종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그것은 자주 구체적이 아닌 부르심으로 우리에게 들려온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비구체적이고 짧은 부르심을 살펴보자.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이제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산중에서 내가 네게 알려 줄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창 22:2). 이 성경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을만한 내용이 담겨져 있을 뿐이다.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다.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 4:18,19). 이것이 그 사람을 부르신 말씀의 전부이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 9:9). 여기서는 오직 두 단어만을 말씀하셨다.
38년 동안, 한 앉은뱅이가 베데스다 연못으로 매일 들려져 왔는데, 그는 연못이 요동칠 때에 치유를 얻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6-9).
잠시 후에 그가 자신을 고쳐준 사람을 찾아보니, 예수께서는 이미 자리를 피하신 후 였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여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 9:3-6). 이것 역시 극적이고 놀라운 경험치고는 그다지 많은 설명이 없는 장면이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경우들에서, 예수께서는 그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해서 그분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각 사람들을 남겨둔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예화를 생각해 볼 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직접 행하셨던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경험한 적이 없는 불가능한 행동을 당신의 제자인 베드로에게 요구하셨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길을 쉽고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물위를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어떠한 확신을 주는 언급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시겠다고 미리 보장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마태에게 먹고 살만한 적당한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겠다는 보증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의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믿음을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요구하셨는데,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을 충족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전적인 헌신과 굴복을 해야만 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주님께서 부르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분을 떠나가게 되는 이유이다.
그분의 명령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길고 구체적인 설명을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직접 귀로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영혼을 울리는데, 그 소리는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매우 조용하고 은은하게 우리의 귀를 울린다.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아브라함, 베드로, 안드레, 마태, 중풍병자, 그리고 바울처럼 주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여, 배에서 내린 다음 물 위를 걸어야 한다.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는가?
“데이비스, 네가 사랑하는 그 직장, 그 취미, 그 어떤 것을 내가 지금 너에게 알려주는 산 위에서 번제로 드리겠니?”
주님께서 길을 걷고 있을 때, 그분께서 레리와 그의 처인 메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들은 매우 훌륭한 집을 찾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부부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놔두고 나를 따르라!”
주님께서 조용히 나를, 또는 그대를 찾아와서 “나를 따르라!”고 지금 말씀하신다면, 그대와 나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굴복하여, 순종하겠는가? 바로 이러한 것들이 주님께서 그대와 나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다.
믿음과 헌신, 또는 굴복은 결과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믿음은 그대가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그분께 대한 전적인 신뢰인데, 그것은 굴복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대가 믿음이 있다면, 그대는 굴복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가 굴복한다면, 그대는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계속적인 굴복없이 계속적인 순종을 주장할 수 없다. 굴복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의 믿음은 그의 순종에 의해서 시험 받았다. 믿음은 언제나 순종을 통해서 시험 받는다. 사실, 참된 순종만이 참된 믿음을 시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올바른 지침을 말할 수 있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뇨?” (야고보 2:14). 야고보의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못한다” 이다. 야고보는 또 다시 다음과 같은 도전을 던지고 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상동, 8절).
야고보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믿음과 굴복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행함과 순종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의혹이나 타협하는 일 없이 당신께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확신을 소유하기를 요구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증거들을 보여주시고, 들려 주신다. 당신을 찾고자 하는 자들이 그분께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증거들을 주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위를 걸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눈 앞, 또는 우리의 손 안, 또는 우리의 발 아래와 같이 가까운 곳에서 항상 확실한 증거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우리가 순종할 때만 그러한 증거들을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베드로가 실제로 물위를 걸었을 때까지 그가 물위를 걸을 수 있다는 보증을 받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뢰할만한 명령인 “오라!”라는 말씀의 증거 외에 어떤 다른 증거도 없었다. 가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물위를 걸을 것을 요구하시는 데에는 오직 한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물위를 걷지 않는다면, 우리의 발 밑에서 느껴지는 물을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순종을 통한 경험에서 우리로 하여금 귀중한 체험을 소유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순종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경험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더욱 더 깊고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간다.
4세기 경, 교회의 지도자였던 엠브로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이성적인 논리 없이 그분께 대하여 우리의 믿음을 굴종시키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인간의 유한한 이성과 논리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더욱 더 필요로 하게 만든다.”
앞에서 고찰해 본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마음의 동의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동인 순종을 요구하신다. 또한 그러한 행동을 하는 데에는 믿음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가 또는 하지 않는가에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한 개인의 믿음의 상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위를 걸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말해왔다. 젊은 부자 법관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께 대한 강한 믿음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한 슬픈 예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생을 위한 길을 묻기 위해서 찾아왔던 부자 청년에게 물위를 걸을 것을 요구하셨지만, 그는 그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계명을 지켜라”고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마19:17).
“내가 모두 지켜왔습니다.” 라고 청년이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명을 지키지 않았었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생애 했으며, 하나님이 법의 요구에 대해서 바리새인적인 이해를 가지고 계명을 지켜왔었다. 그는 법에 대한 인간적인 사고 방식에 의존해서 법을 준수했으며, 죄와 인간의 본성의 조수를 역으로 거슬려서 올라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는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는 계명을 지키지 못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는 지킬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물위를 걸음으로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것보다 불가능한 것은 없다.
한번은 한 친구가 나에게 멕시코 인디언의 언어에서는 “믿음” 과 “순종” 이라는 단어 사이에 아무런 의미의 차이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 적이 있다. 그래서 멕시코 인디언들은 믿음과 순종의 의미를 구별해서 다르게 사용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 적지 않은 당혹감을 갖게 된다고 한다. “당신이 그것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순종하지 않을 거죠?” 라는 질문에 대해서 멕시코 인디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한다.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당황하는가? 아니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가? 혹시 우리는 그 멕시코 인디언들을 천진난만한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대다수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놀랍고 우스꽝스러운 것이지만, 그 인디언들에게는 당연하게 생각되는 그 개념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 대한 정의이다. 이러한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성경절을 찾아보자.
사도행전 5:37 에서, 우리는 반역한 지도자인 갈릴리 사람 유다를 찾게 된다. 그가 일으켰던 운동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죽임을 당하였고, “그를 좇던(순종하던, obeyed)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재미있는 사실은, 킹제임스 성경에는 순종(obey)이라는 말에 대해서 믿음(believe)이라는 다른 표현이 관주에 나와 있는데, 그 이유는 원어인 그리스 말에는 두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현대어 성경에서는 두가지 의미를 복합시켜서 “따르는(follow)”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믿기 때문에 순종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실로 그분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죄에 대해서 승리하기를 소원하며, 믿음과 평화와 사랑 같은 거룩하고 영적인 요소들을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게 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주여, 나로 하여금 물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라고 입으로 외치고 있지만, 주님께서 “오라!”고 명령하시는 호소에는 결코 응답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만, 배위를 서성거리면서 불분명하고, 두려워하면서, 의심을 품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안에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을 찾으려고 하지만, 자신 안에 그러한 원천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은 우리 자신의 능력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결코 물위를 걸을 수 없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원천을 제공해 주시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분의 모든 명령은 행할 수 있는 것들이다.” 실물교훈, 영문 333.
우리의 믿음은 순종에 의해서 시험 받게 된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무슨 말로 변명할지라도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디트리취라는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할 수 있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음이 있는 것이다.” 제자되는 대가, 69.
하나님께서는 순종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오직 믿음이 있는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애굽을 탈출해서 나왔을 때, 모세와 제사장들의 믿음으로 행한 순종이 홍해를 갈라지게 만들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없었다면, 홍해의 물결은 그들을 삼켜버렸을 것이고, 백성들은 애굽으로 되돌아 가야만 했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행한 순종만이 엘리야로 하여금 아합 왕에게 담대히 나아가 삼년 반 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기별을 전할 수 있게 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행한 순종만이 온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 산으로 모아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옹호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실패하지 않는 믿음을 백성들 앞에 전시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없이는, 그는 파도 위에 서있는 그분을 신뢰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너무도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때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었을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로마서 8:2-4 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더 높은 법에 의거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물위를 걸을 수 없도록 하였던 물의 수압에 대한 물리적인 법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 세상에서 인정 받고 있는 보편적인 수압의 법칙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물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이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어 물위를 걷게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도 그분처럼 물리적인 수압의 법칙이 아닌 하늘의 믿음의 법칙에 의거하여 물위를 걸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너무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제한하며, 해석한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하셨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서, 가능한 한 적게 죄를 범하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태도로 인해서,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약해지고 병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배에서 내려 물위를 걷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물위를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확신을 잃어버리고 아예 배를 포기하고 떠나려고까지 한다. 그러나 그 즉시로 우리는 죄의 물결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그러한 죄의 물결을 감당할만한 믿음이 없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과 상태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죄를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야. 물위를 어떻게 걸을 수 있겠어?” 그리하여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고자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다. “너희의 믿음대로 될지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것 중에는 두가지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데, 그것은 “순종에 관한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만, 순종을 위한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해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이라도 그를 대신해서 해주시지 않았다. 베드로는 스스로 배에서 뛰어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고, 계속해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물의 부력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믿음을 근거로 해서 베드로를 위해서 일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너의 길을 여호와게 맡겨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실 것이고” 시편 37장 5절.
믿음은 오직 물 위를 걷는 것 – 제3부
사두라는 사람이 있었다. 인도의 봄베이 신문은 그가 물위를 걸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나는 그 발표와 그에 대한 상당한 관심을 표명한 일련의 논평들을 읽었다. 사두라는 사람은 힌두교의 성인으로 알려졌는데, 그가 저수지의 물위를 걷게 될 날짜를 발표했던 것이다.
기적이 일어날 그 날이 다가오자 수많은 군중들이 그곳에 몰려들었다. 그 성인은 자신을 추종하는 제자들과 함께 나타나서 저수지 옆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단으로 올라갔다. 잠시 동안의 준비 작업 후에 그는 당당하게 물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두는 물위를 걷는 대신에 물속을 걸을 수 밖에 없었으며, 나와 나의 처 마가렛은 그가 물위를 걸어가는 두번째 사람이 되지 못했음을 확인하였다. 사두는 몹시 당황하였지만 우리는 친절하게 그의 실패를 덮어주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사람도 물위를 걷는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물위로 걸어야 함을 절대적으로 강조하고 싶다. 물위를 걷는 일에 있어서,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믿음은 물위를 걷는 것.
믿음은 언제나 물위를 걷는 것.
이것은 믿음에 대한 이상한 정의인가? 믿음에 대한 이런 식의 정의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태복음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날,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 북동쪽 해변가에 있었는데, 그곳은 주님께서 5000명을 먹이셨던 곳이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을 향해 떠났다.
어두움이 밀려오고 사나운 폭풍이 몰아쳤다. 밤이 새도록 제자들을 배 안에서 폭풍우와 씨름하였다. 새벽녘의 검푸른 빛 속에서 그들은 바람으로 인해서 꿈틀거리는 파도 위로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물체를 보았다. 수면 부족과 함께 온 몸이 후들거리는 그들의 상태는 더욱 격렬해졌다. 무서움이 그들을 엄습하였고, 두려움으로 인해서 떨었다. 그때, 고요하고 확신케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전율처럼 감동이 된 베드로는 외치기를, “주여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하였다. 이에 주께서 “오라!” 하시니, 베드로는 배에서 나와 물위에 서서 주님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현실화 하였다. 그는 그 이전이나 후에 어떤 사람도 하지 못했던 것을 성취했다. 그는 세상에서 인정하는 과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절대 불변의 물리적 법칙에 대항하여 걸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도 물위를 걸을 수는 없다. 수력학 법칙은 인간이 물위를 걷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하고 있다. 그래서 “불가능”이라는 단어의 상형문자를 나타낼 때, 고대 이집트인들을 물위를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이용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물위를 걸었던 것이다.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을까? 조그만 개구리의 무게조차도 가라앉아 버리는 물의 표면 위에서, 성장한 인간의 무게를 버티게 하였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믿음이다. 믿음이란 자신의 확신이 이루어내는 자기달성이 아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소유하는 완전한 확신인데 이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적을 창조해 내시는 것이다.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고 원대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에게 불가능한 것을 행하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물위로 걸어서 당신에게 가도록 명하여 주십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애를 올바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의 경험 속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아직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인 생활이 단순히 종교적인 생활 형식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종의 자아훈련을 통해서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은 전혀 실질적인 그리스도인 생애가 아니다. 그것은 20불 짜리의 싸구려 구슬을 만지면서 2만불의 가치가 있는 다이아몬드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에 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것은 진짜가 아닌 싸구려 가짜 대용품이었던 것이다. 아, 내가 가지고 있던 가짜 대용품을 어루만지면서 얼마나 자신을 위로하면서 확신을 가지려고 애썼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가 아닌, 그저 가끔 그분께 작은 입술로만 드리는 종교를 이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할 수 없는 것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지적으로,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는 계속적으로 물위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 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십계명에 예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입증하는 것이며, 둘째는 인간을 에덴의 상태로 회복시킴으로써 당신의 성품을 반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던 이유이다. 신약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한 첫 말씀이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인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소유하고 있는가? 죄란 인간의 영혼을 모든 면에서 침투하는 질병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러가지 시선으로 죄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죄의 문제를 다루는 한 방법은 죄를 표면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문제를 소홀히 하는 반면에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만을 논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죗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죄의 증상만을 다루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맺히는 쓴 열매를 따내어 버리거나, 또는 완강하고 굵은 뿌리를 무기력한 주머니 칼로 가끔씩 찌르거나 흠을 내어본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어떤 면에서는 약간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쓴 열매의 원천은 여전히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침례 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으니” 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할 때마다 나무로부터 잎을 떼어낼지 모르나, 이것이 나무를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 계절이 오면 그 잎은 그 이전만큼 두껍게 다시 나올 것이다. 그러나 도끼로 그 나무의 뿌리를 치면 잎사귀도 떨어질 뿐 아니라 그 나무는 죽을 것이다.” 나의 오늘 양식, 26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그 근원을 찾으셨다. 그분께서는 뿌리는 죽임을 당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에 대한 당신의 사상을 불어넣기 위해서 애쓰셨다.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 중,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사람으로서의 모델이었다. 그들은 기도, 구약의 낭독, 안식일 준수 등에 대해서 극단적인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안식일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39개의 금지된 활동 목록을 작성하였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바리새인은 천국의 자리가 확보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축복의 산에 모였던 군중들은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 충격을 받았었음에 틀림없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2
“화를 내는 것은 … 죄이다 … 비통함과 증오감으로부터 나오는 이기적인 복수심을 품은 화 … 죄이다.” 새자녀교육, 95.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3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자신의 원수조차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나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이러한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의 특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고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장
“하나님의 율법은 마음 속에 들끓는 질투, 시기심, 증오심, 악한 원한, 정욕 및 야심 등을 주시하여 본다. 이러한 악의 씨들은 뜻은 있으나 기회가 없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행동으로 옮겨질 것이다. 이러한 모든 죄악적인 감정은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은 심판하'(전 12:12) 실 그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가려뽑은 기별, 1권, 217.
사랑에 대해서 이러한 정의가 설교되고 가르쳐질 때마다, 다음과 같은 외침이 들린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마 19:26
얼마 전에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친구와 함께 고린도전서 13장의 사상을 토론하였다. 사랑은 내면적인 것이다. 사랑은 질투하지 않는 것, 사랑은 성급하지 않는 것, 사랑은 마음의 안정을 잃지 않는 것 등 ….
나의 친구는 그러한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너의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어. 바로 그 감정 자체가 너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것은 너의 눈의 색깔처럼 너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단다.” 나는 그의 주장을 인간적인 견지에서 조차도 동의할 수 없었다. 스토어 학파의 철학적 목표는 자신들의 모든 감정을 제거하는 것이다. 힌두교가 지향하는 열반의 세계는 모든 개성과 희망을 없애는 것이다.
헌신적인 불교인과 진실한 힌두교인은, 비록 그것이 이교적인 오류이긴 하지만, 모든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신이 믿는 종교를 통해서 확신한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잘못된 감정과 태도를 온전히 승리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데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께 다음과 같이 호소하는 것이다. “주님, 나를 명하사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주님, 저는 저의 생애에서 죄를 극복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질투심, 원망, 분노, 조절되지 않는 식욕, 그리고 원한을 버리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 지긋지긋한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는 제 자신의 힘으로 물위를 걷기를 원하지만, 제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를 주님께 가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라!”
이런 소원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항상 “오라!” 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이러한 호소를 주님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 없이 물위를 걸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그대는 그리스도 없이 물위를 걸을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