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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과 경험

저자: 생애의 빛 (1989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재림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리와 기별을 교회 안과 세상에 전파하기 위하여 출판 사업과 테입과 텔레비젼 방송을 해오고 있는 자영 선교 기관)

지난해 연말에 로스앤젤레스를 다녀왔다. 그곳에서 연말 집회를 하면서 들었던 말씀이 아직도 내 마음의 한쪽 구석에서 맴돌고 있다.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눅 3:3), 어떤 회개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일까? 침례 요한이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하라고 외친 이유는 그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죄사함을 얻지 못하는 회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누가복음 3장에서 침례 요한은 어떠한 회개를 하라고 촉구하고 있는것인가? 침례 요한은 “죄 사함을 얻데 하는 회개”에 대해서 말하면서 회개의 “열매”를 맺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이 침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눅 3:7,8.

바로 열매가 없는 회개를 가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 회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 회개”, 회개를 위하여 진지한 기도를 드리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죄의 회개를 위한 우리의 회개의 기도가 진지한 만큼 우리의 생활도 진지하고 정직하며 순결한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회개가 죄를 고백한 후, 그 죄를 버리고 돌아서는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한 채, 죄에 대한 고백을 되풀이하는 형식적이고, 단지 죄의 결과에 대한 징계를 두려워하는 후회의 수준에서 머물러 버린다면, 우리의 회개는 열매를 맺지 못한 회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손은 하늘을 향하여 뻗으면서, 구원과 용서를 간구하지만, 다른 한 손에 쥐어진 죄는 결코 버리지 않는 회개의 모습이야 말로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 회개”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러한 회개를 하면서 스스로를 깊은 기만 가운데로 몰아가고 있는가! 죄는 하늘에서 사함을 받지 못했는데, 우리의 마음 속에는 용서에 대한 확신과 평안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만적인 회개가 되풀이 될 때마다 죄에 대한 양심의 예민한 가책은 사라지게 되며,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가련한 라오디게아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토록 둔감한 종교적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겠다고 달려드는 것이 율법주의자들의 일반적인 모습들이다. 율법주의들의 진정한 문제는 자신들이 율법을 순종할 수 없는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양심과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겠다고 끈질기게 도전하는 것이다.

재림 교회의 역사를 뒤돌아 볼 때, 재림 교회는 세상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십계명은 이미 십자가에서 폐했다는 가르침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탄생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교계의 분위기 아래서 재림교회의 지도자들과 설교자들은 율법의 중요성과 불변성을 강조하는 설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율법을 높이고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 즉, “어떻게”(How)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설교가 병행되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 그 결과, 재림교회는 세상과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에게 율법주의자들의 메마르고 지친 모습만을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재림 교인들이 율법주의의 탈을 벗지 못한 채 실망과 좌절과 번민 속에서 그들의 생을 마치었다. 그들은 율법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했지만 자신들의 생활과 영혼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진정한 “순종의 삶”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고뇌가 섞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는다. “주여, 정말 당신의 율법은 지킬 수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진리를 이해하고 믿었지만 그 진리가 자신의 생애 속에서 적용되지 않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리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키워가게 되었다. 오직 위로부터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진리가 빠져 있는 가르침은 점점 더 많은 재림교인들을 율법주의자들로 만들어 갔다.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이 재림교회 안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될 때, 신신학의 가르침이 재림교회의 교육 기관으로 도입되게 된 것이다.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잃어버린 채 율법의 종이 되어 있던 수많은 재림교인들이, 그리고 “죄 사함을 얻지 못하는 회개”를 습관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던 수많은 재림교인들이 신신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합리화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바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바를 더욱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재림교인은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지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자신의 경험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신신학의 가르침이 나오자, 그들은 그것을 새로운 복음으로 받아들였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지만, 신신학의 신봉자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인간은 결코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선언하는 신신학으로 위로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합리화 시켰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나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않으면서 즐겁고 편리한 그리스도인 생활을 영위하게 됨으로써 율법주의자들보다 더욱 깊은 기만 가운데로 빠지게 된다.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통하여 확증하는 진리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의 수준에 맞추어서 자신이 믿는 바를 재조정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가 두려워해야 할 타협인 것이다. 진리의 표준을 자신의 경험에 맞추어서 끌어내리는 일이 거의 완전한 자기 기만 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율법은 폐해지지 않았고, 태초부터 지금가지 불변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을 비추는 거울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높고 고결한 율법을 우리처럼 타락한 죄인들이 “어떻게 지킬수 있을까?”라는 가르침을 성경적으로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바로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있다. 6000년간 타락해 온 인간의 육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과 타락한 인간의 순종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은자, 즉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을 하지 못한 어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없다. 비록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고 할지라도 거듭남의 경험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은 육체의 종이 되어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재림 교인들이 거듭남의 경험 없이 교회를 계속 다니게 될 경우, 다음과 같은 4가지의 입장 중의 어느 하나에 처하
게 된다.

1. 율법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순종해야 되고, 또한 할 수 있다는 진리를 인정하지만, 그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위로부터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세속에 대한 애착심과 이기심과 탐욕을 포기하지 못한 상태에서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애스지만 죄책감과 자신의 무능력 함에 압도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즐거움과 보람과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채 생기를 잃고 메마른 생애를 보내게 된다. 자신의 불편한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서 교회와 이웃에게 봉사를 하고, 헌금을 드리지만, 그러한 그들의 희생은 흔히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것들이어서 일시적으로 끝나고 만다. 자신들이 희생과 헌신으로 인해서 이들은 오히려 영적으로 더욱 깊은 기만 가운데로 빠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헌신을 하는 동기와 목적이 불투명하고, 이기적이며 자신의 종교성에 대한 평판을 매우 염려하는 사람들이 된다. 이들은 죄에 대한 승리의 길을 발견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사람들이다.

2. 신신학의 추종자가 되는 길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신신학을 추종하기 전에 대개 율법주의자로서의 신앙생활을 해보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공언했지만 순종하지 못했던 자신의 위선적인 신앙에 지쳐있던 사람들로서, 복음과 진리를 자신의 거듭나지 못한 경험에 맞추어 끌어내림으로서 마음과 영혼의 평안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율법은 순종할 수 없는 것이며, 자신이 받은 빛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없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던져주는 신신학을 받아드리기로 선택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구원의 조건과 절제와 심판에 대한 문제 보다는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 관대한 것만큼 교회의 죄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죄와 배도를 지적하는 날카로운 설교는 결단코 용납하지 못한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관대하고 포용력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평판을 받게 되며, 율법과 순종을 존중하며 원칙과 의무를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수적이고 편협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온건하고 폭넓은 중도적인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를 중요시 여기기 보다는 인간적인 타당성과 보편성을 중요시 여긴다. 성경적인 진리에 대한 애착심이 결여되어 있고, 원칙과 희생과 극기에 대한 결정적인 믿음이 없기 때문에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봉사에 참여하게 된다. 또한 전 생애를 바치는 희생과 헌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이들 중의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자신의 신앙과 판단을 기준점으로 해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와 중도주의로 나눈 다음, 어떠한 가르침과 기별을 접하게 될 때마다, 무엇이 진리인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무엇이 중도적이고 중간적인 입장인가를 생각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잣대를 가지고 절제와 개혁의 가르침들을 측정하기 대문에 건강 개혁, 시골 생활과 같은 진리들은 극단적인 것으로 평가하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부류이다.

3. 세번째 부류는 교회를 등지고 떠나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생애에 있어야 할 활력과 감사와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고, 교회 안에 들어온 세속과 원칙이 결여된 사랑과 분별없는 관대함을 보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원칙과 희생과 극기를 가볍게 여기는 교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면서 떠나가게 된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 속에서도 참된 신앙의 경험을 체험하지 못하면서 진리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하여 깊은 불신과 회의를 가지고 교회를 떠나가게 된다. 이들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위선과 세속과 이기심에 실망하여 교회를 등지게 된다. 이들은 세상 끝까지 교회 안에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남아 있을 것이라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과 교회 안에서 활개치는 가라지들에 대한 깊은 실망으로 인해서 교회를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4. 무관심 속에서 교회의 좌석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리에 대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무관심하며, 습관적으로 교회를 출석함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위로하고자 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진리와 종교적 의무와 관계 있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 할 뿐이다.

그러나 재림교회 안에 다섯번째의 부류가 있는데 이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율법주의자와 신신학의 추종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좁은 길을 걷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지식적으로, 경험적으로 아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깨달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며,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길이 유일한 피난처가 된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다. 이들은 유혹과 시험에 부딪힐 때마다 그것들을 붙잡고 싸우기 보다는 그리스도께 달려 매달리는 자들이다. 바로 이들에게 마지막 남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걸려 있는 것이다.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경험의 부재가 오늘날의 재림교회 안에 구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설을 가지고 들어오고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4종류의 참담한 현실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재림 교회 안에서 남은 무리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참된 거듭남에 대한 지식과 경험에 대한 가르침이야말로 첫째 천사의 기별 중에 나오는 “영원한 복음”이며, 온 세상을 복음으로 불사를 능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이들은 재림 교회 안에서 장노교회나 감리교회 식의 거듭남을 주장하며, 경험하고 있다. 마지막 남은 교회로서, 재림교회는 세상 역사를 끝마칠 수 있는 복음을 부여 받았지만 신신학과 같은 각종 교리들의 침입으로 인해서 재림교회 안에서 순수한 거듭남의 경험은 매우 희박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마지막 남은 교회는 세상 역사를 끝마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지금까지 이 땅에서 방황하게 된 것이다.

“교회의 녹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생애에 참된 변화와 개심의 경험이 없다. 진리가 그들의 마음 밖에 있다. 참된 개심이 없으며 마음에 확실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그들의 욕망은 그들 자신의 의향에 기초한 것이요, 성령의 깊은 자각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받아들인다고 공언하지만 주께서 그들의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계신 구세주와 개인적인 접촉이 없다.” 리뷰 앤 헤랄드, 1904년 7월 7일.

그렇다면 “거듭남”이란 어떤 것인가? 화잇 부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옛 성질 즉, 혈과 육의 뜻으로 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옛 생애들, 유전적으로 받은 경향들과 이전 습관들은 포기되어야 한다. 새로 태어남은 새로운 동기, 새로운 입맛, 새로운 경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새 생명으로 태어난 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며, 그들의 습관들과 행실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를 증거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들의 천성적인 성품과 성격의 결함들을 그냥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형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진리를 거룩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는 것으로서 감사히 여기지 않는 자들이다. 참된 개심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리고 후천적으로 배양된 잘못된 경향들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마라나타, 237.

그렇다면 어떻게 거듭남의 경험을 소유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거듭나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거듭나기를 소원할 수는 있지만, 우리 스스로 거듭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거듭남이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선한 것을 계발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능력이 우리 마음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교육, 훌륭한 예절, 의지력은 모두 옳은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제각기 적당한 구실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는 없으며 우리의 생애를 순결하게 해줄 수도 없다. 오직 위에서부터 온 능력이 우리 속에 역사함으로써 우리를 죄 많은 상태에서 거룩한 상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은 그들 속에 이미 존재해 있는 선을 계발 하기만 하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으로 끌고 가는 거짓말이다.” 생애의 빛, 37.

거듭남에 대해서 우리가 한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거듭남의 시작점에 대해서이다. 우리의 거듭남은 진정한 회개에서 시작된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기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정한 마음으로 참된 회개의 경험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이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은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상동,67.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를 기억해 보자. 하나님께 얼굴을 들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18:13. 그는 자신의 악함을 생각했으며, 구세주의 필요성을 깨달았으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음 속에 들어 오셔서 죄의 세력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주시도록 마음의 문을 열었다.” 상동 69.그렇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원한다면, 정직한 겸손함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우리가 저절로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죄에서 돌아서는 일을 지연시킬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순결한 마음을 구하여야 한다. 수천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실수를 범해 왔다. 그리하여 그것 때문에 그들은 영생을 희생시켰다. 지상에서의 생명은 확실성이 없다. 그것은 짧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음성에 복종하기를 지체하고 죄악 속에 살기를 선택하는 일에는 무서운 위험이 따른다.” 상동 73.

우리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생애를 바라봄으로써 죄가 얼마나 무섭고 혐오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말을 한다. “나는 무엇을 회개해야 될지를 모르겠어. 나에게 죄가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될지 모르겠어.” 나는 이런 형제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는 시대의 소망을 읽으면서 형제의 삶과 비교해 보세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분의 순결하고 희생적인 생애를 명상할 때마다 내 자신의 부족과 허물이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내게 보여졌어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분의 전 생애를 읽고 생각할 때마다, 나는 더 이상 뻔뻔스러울 수 없었어요” 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과 고난과 죽음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그밖에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유일희 희망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데 있다.” 상동 71.

우리가 죄를 용서함 받았을 지라도 죄의 결과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 속에 두렵고 큰 상처로서 남게 된다. 다음과 같은 영감의 말씀을 주의 깊게 일거보자. “죄를 범하는 행동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멸시하고 저버리는 것마다, 그 영향은 그대들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또 그것이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의지를 약하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켜 그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신의 간절한 탄원에 응할 생각을 적어지게 할 뿐 아니라 능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저희는 아무 때나 원하는 때에 저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설 수 있다는 생각으로 또는 저희가 지금 하나님의 자비의 초청을 경솔히 여길지라도 일후에 감화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저희의 불안한 양심을 진정시키고 있다. 저들은 생각하기를 은혜의 성신을 거스린 이후에라도 또는 저희의 감화를 사단의 편으로 끼친 이후에라도 어떤 최후적 순간에 저희가 걸어오던 방향을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일생 동안의 경험과 교육이 이미 그 품성을 완전히 형성하였은즉 그 때에 가서 예수의 형상을 받고자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상동 75.

죄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 두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 의사를 강제하시지는 않으시나니 만일 우리의 의사가 죄를 범하기를 고집함으로써 온전히 악에 쏠리게 되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아니하거나 혹은 우리가 그의 은혜를 받을 의사가 없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더할 수 있으랴?” 상동 77.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고 스스로 기만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그분의 은혜의 음성을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인도하실 것이다. 구원에 대한 소망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참된 회개만이 참된 거듭남을 가져올 수 있는데,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참된 회개의 경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다음의 글은 우리 모두에게 회개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큰 죄인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심으로써 용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무한히 고귀한 그분의 희생은 우리의 죄를 가리워 주기에 충분하다. 가장 많이 용서 받은 자들이 그분을 가장 많이 사랑할 것이다. 그들은 하늘에서 그분 곁에 가장 가까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깨달을 때,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가장 잘 알게 된다. 그분께서 우리를 붙들기 위하여 얼마나 멀리까지 손을 뻗쳤는가를 깨달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그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죄를 슬퍼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된다.” 생애의 빛 83.

이 땅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고, 하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자. 가장 고귀하고, 가장 가치 있는 삶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삶을 하나씩 들추어 보자. 우리가 그분의 생애를 조용히 명상하기만 한다면, 참된 거듭남에 대한 모든 지식과 실체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기억하자. 참된 개심의 경험이야말로 알곡과 가라지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경계선이 된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