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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의미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4:7)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8~11)

육의 양식과 더불어 영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도 같이 먹어야 합니다. 건강식을 꼭꼭 잘 씹어서 먹어서 우리 몸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세포가 재생하듯이, 마음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도 잘 받아 먹어야 합니다. 잘 받아 먹으면 순종을 또 잘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9절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이 날은 안식일이니” 그러시면서 “나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이 지구를 창조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맞습니까?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 그랬습니다. 이 지구인 자기 땅에 창조주가 오셨습니다. 만든 분이 주인입니다. 그럼 안식일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안식일도 예수님이 만드셨어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천지만물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되는 날은 안식일을 세우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창조과정과 함께 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주님이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만물도 주님이 만드시고 안식일도 주님이 만드시고. 전부 다 주님이 관리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런 말씀을 하시고 안식일에 환자도 고쳐주시고 이 날을 안식일이라고 성경에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누가 만들었어요? 당연히 예수님이 만드셨죠. 그럼 내 주인도 누가 돼야 합니까? 예수님이 내 주인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교제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우리의 사사로운 말을 금하고 모든 사사로운 일들을 다 접어두고 금요일인 예비일이 되면 철저하게 다 준비를 해서 금요일 해지는 시간부터 안식일이 돌아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거룩한 시간이라고 그랬죠? 주님이 임하시는 시간이 거룩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 안식일은 거룩한 날입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피조물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맺은 언약이 있는데, 너희의 모든 필요는 내가 다 줄 것이다. 내게 와서 받아라.” 이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쉼을 주고 그 분이 일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 안식일 복음 속에는 완전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담겨져 있습니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복음으로 왔습니다. “내가 너를 창조했으니 내가 너를 고쳐줄 것이다. 너희의 필요를 내가 다 줄 것이다.” 그래서 이 안식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피조물이 예수님을 만나는 거룩한 관계가 이루어질 때에 우리에게 재창조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어떤 세상의 학문을 접하는 날이 아니고 그 날은 창조주를 만나기 위하여 구별해 주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 천지 만물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안식일도 그대로 있어야 될까요? 그대로 있어야 됩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지만물이 설 때에 안식일도 같이 섰거든요. 천지만물이 살아있고 내가 숨 쉬고 있는 동안에는 안식일은 없어지지 않는 거예요. 자, 그럼 우리가 매번 안식일을 통하여 누구를 기억하게 되냐하면 창조주를 기억하게 되며 그 창조주를 기억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어떻게 만드셨나 보니까 “말씀으로” “가라사대”로 있어라 하니까 있었다 이 말이에요. 천지만물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 말씀을 발하시므로 만물이 이루어 나왔으니까 그 창조주를 믿는 신앙은 그분의 말씀을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그 말씀으로 모든 일이 그대로 되더라 이 말입니다. 없는 것도 부르면 나오게 하시고, 명하시매 견고히 서게 되는 창조가 말씀을 통해서 되었습니다. 자, 그 말씀이 만물을 창조한 말씀이요, 만세 전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과 함께 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시고 성령님과 함께 역사하셔서 삼위 하나님이 창조와 구속을 이루시는 그 말씀이다 이 말입니다.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회복시키고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사람을 통하여 전달되고 성경으로 기록되어서 우리가 받는 이 모든 메세지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1~2)” 라는 그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요1:3)”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이제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 죄인인 인간을 찾아오시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5장 이야기입니다. 스스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고, 나뭇가지가 나무에서부터 잘라지니까 그 나뭇가지가 아무 생명도 없이 죽어가게 되는 것처럼 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누워있는 중풍병자는 그런 죄인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스스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인성을 입고 이 땅에 오셨어도 “내가 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 내 안의 아버지가 하시노라” 그러면서 이적을 행하시고 살아가셨잖아요. 예수님이 인간 앞에 걸어가시고 나를 본받으라고 하시면서,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해야 살수있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산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늘로부터 나서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너는 나로 인하여 거듭나고 나로 인하여 살아라”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핵심 진리 아니겠습니까? 믿음과 받음, 믿음으로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입니다. 이 안식일이라고 하는 진리 속에는 바로 그런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 쪽에서 할 일이 없다. 스스로 수고하려고 하지 말고 그동안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와서 내려놓고 내가 주는 멍에를 받아라” 멍에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율법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가 오늘날의 나 자신이라고 적용을 하셔야 합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 만났던 중풍병자네’하고 끝나버리면 성경말씀이 왜 오늘날 우리에게 생명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상관이 없지요. 이 성경의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다 적용되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그분이 역사하시는 가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읽으십시오.

창조주를 믿는 신앙은 말씀을 믿는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 안에 그분의 일이 다 들어있고 창조의 능력이 들어있으며 그분의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신앙입니다. 안식일 신앙은 자기 일을 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며 말씀에 순종할 때에 자기 일을 쉬기 때문에 자기 걱정과 불안과 초조가 없다 이 말이에요. 말씀 하신 분의 일을 할 때에 말씀 하신 분이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쉼이 있다 이 말이에요. 그 안에 재창조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엄청난 복음을 여러분이 이해하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1)” 그리고 히브리서 3장부터 4장까지 보면 “안식일은 자기 일을 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거든요. 참된 쉼은 자기 일을 놓아버릴 때 옵니다. 자기 일을 하는 동안에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다 힘이 듭니다. 이 안식일 신앙은 “내가 너를 창조했으니 내가 네 주인이지 않느냐. 네게 필요한 것은 내게 다 있다. 그러니 내게 와서 받아라.” 전부 은혜고 선물입니다. 내가 주는 것을 네가 받으면 “보아라. 내가 말로써 만물을 다 창조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네가 말을 하겠는데 내가 네게 명하는 말을 청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고 내 규례와 법도를 잘 행하면 내가 너를 위해 치료도 해 주고 다 해주겠다. 누가? 내가 하겠다. 너희들이 범죄하고 죽게 되었을 때도 내가 너를 재창조 해주겠다.” 창조보다 재창조가 어렵긴 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명하시면 되지만 재창조는 내가 받아들여줘야 그분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만 받아만 들이면 그분이 이뤄 주실 건데 그게 안식일 제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과 우리와 맺은 언약입니다. “내가 너를 지었으니 내가 너를 구속하겠다.” 그래서 예수님 보내주셨잖아요. 죄가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있더라 이 말이에요. 이것은 만세 전부터 계획하신 구속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죄를 짓고 넘어지면 그 자리에 바로 예수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몸에 사고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몸 안에 복구할 수 있는 대책이 서 있듯이 말입니다. 병균이 들어오기 이 전에 면역성이 지키고 있다가 병균이 들어오면 활동하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분이 지키고 계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그분의 말씀과 함께 그분을 내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유의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활용하세요.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의 분신으로 가장 신묘막측하게 창조한 하나님의 자식이에요. 우리와의 영원한 사랑관계를 맺기 위해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스스로 원해서 선택해서 누리는 것, 그 상관계.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랑의 극치의 표현이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너희들이 스스로 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주는 것을 받아라. 내 말에는 창조의 역사가 다 일어나지 않느냐. 그러니 내 말을 믿어라. 그러면 내가 말한 대로 내가 이룰 것이다.”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쉬운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 신앙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똑바로 세워주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하실 일을 인간이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이루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안식일이고 그 안식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맺은 언약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를 창조했으니 네가 필요한 것은 내가 다 줄거다. 내게 와서 받아라.” 그게 완전한 쉼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안에서 재창조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일이 말씀으로 주어진다 이 말이에요. 말씀으로…….말씀으로 창조된 것처럼 재창조도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천사가 물을 움직일 때 먼저 뛰어 들어간 자가 낫는다는 것은 하나의 전설, 유전이자 미신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6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병이 오래된 줄 아셨어요. 그러시면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셨는데 그 물음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내가 너를 고쳐주랴?” 그런 얘깁니다. 이 중풍병자는 38년 동안 연못가에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지만 걷지도 못하는 처지라 들어가기를 매번 실패하니 얼마나 소외감을 느꼈겠습니까? 그래서 하는 대답이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인데  그 말은 “나를 빨리 저 연못에 넣어달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꼭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움도 그런 식으로 구합니다. 내가 원하는 쪽으로 해 주십시오 하면서 소원하는 일이 있을 때 뭐가 조금 보이면 기도하고 무슨 기미가 보이면 “아, 이렇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구나” 이런 식으로 자기 생각, 자기 기대, 자기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만약에 찾아오셔서 “뭘 도와주기를 원하느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도와달라고 그럴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하는 자가 원하는 쪽으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쪽에서 이 중풍병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다 이 말이에요. 예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으니까 우리의 필요를 아실 것 아니겠어요? 이 중풍병자는 “옳거니, 나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생겼구나. 나를 넣어주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 환자가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이렇게 간절할 때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붙잡으면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주시는데  이때의 우리의 반응이 참 중요하고 우리가 알아야 할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38년이 된 못 걷는 환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그러면 우리 같으면 뭐라고 그러겠어요? 내 계획과 내 소원과 내가 기다리는 것이 있는데 다른 쪽으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의 말씀일 뿐이고 하나님의 방법이지 나한테는 안 맞고요. 나는 이런 방법으로 하고 싶어요.” 이런 식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더라 이 말입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면 “예수님, 나 원수를 사랑 못하겠어요.”하고 운단 말이에요. “미워 죽겠는데 어쩝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환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면 “나 못해요. 38년이나 오랫동안 누워서 못 일어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일어납니까? 당신이 내 손 붙잡고 나를 좀 일으켜서 걸어가라고 하든지,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고친 다음에 걸어가라고 하든지 하세요”하고 기다리고 있을거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 환자가 다른 말 한마디도 안하고 일어나서 걸어갔다고 하는 것은 “아멘,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을 했다 이 말이에요. “걸어가라구요? 예, 가겠습니다.” 자신이 완전히 포기될 때 그분이 말씀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대로 가지 않을 때에 그것은 산이고 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막고 있습니다. 그때에 아니라는 것을 절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이게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깨닫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이 회개가 일어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명을 받고 일어날 수 있는 다음 기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가 계획하고 구상한 대로 그것을 추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얼마나 매달리고 기도를 하고 있는지 몰라요. 하나님이 여러분 수명 다 되었다고 무덤에 묻히라 하면 감사히 가야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임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주 안에서는 잠자는 자가 더 편합니다. 푹 자고 깨면 예수님 재림이고 하늘로 직행하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살려고 스트레스 받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이게 좋은가 저게 좋은가 찾아다니지 말고 그냥 예수님께 굴복하고 그분의 말씀 받고 일어나면 그 말씀이 우리를 일으켜 줄 텐데. 그것을 우리가 못 믿고 자꾸 자기 식대로 행하면서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비니까 그게 행해져요? 중풍병자처럼 못 일어나죠.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 말씀 듣고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 말씀을 받아들인 증거입니다. 그것은 확실한 믿음의 증거에요. 믿음에는 행함이 함께 임한다고 했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그랬거든요. 이 환자의 믿음은 그 말씀을 믿는 것 아닙니까! 일단은 그 말씀을 믿었다 이 말이에요. 그 말씀을! 그 말씀을 믿었고 증거는 일어났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걸어간 것은 창조의 생명이 이 사람에게 들어와서 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났는데 반드시 이 사람이 해야 될 몫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말씀을 받고 그대로 행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활용해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을 수 있고 내 안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능력, 죽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서 걷게 하시는 그 믿음, 베드로를 물위로 걷게 하는 그 능력은 전부 하나님께 있는 능력입니다. 이 의미는, 그 초능력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하고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피조물인 인간하고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 협력하라는 뜻입니다. “서로 의논하고 서로 변론하자. 우리가 서로 만나서 교제하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하고 인간이 관계를 회복하면 우리에게 초능력이 오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관계회복은 떨어진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거절하고 생명적인 관계가 끊어진 우리 인간이 그분의 말씀을 받고 또 다시 생명적인 관계를 회복하도록 예수님이 이 땅에 중보자 역할을 하고 계신다 이 말입니다.

죄인 스스로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관계를 맺어주시려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로서 우리를 재창조 해주겠다고 하는 구속의 언약이 들어있습니다. 그분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창조주이므로 그분에게만 경배하라 그게 안식일 예배 아닙니까! 심지어는 하늘님 우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 우상. 그래서 날마다 교회 가서 하늘님께 빌고 아무 생명도 한방울도 못 얻고 그냥 또 돌아오고….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을 그 어떤 단어 속에서 받는 게 아닙니다. 하늘님 우상을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지 몰라요. 창조주를 믿어야 합니다. 창조주를 믿는 신앙은 동시에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그분이 말씀으로 계시지 않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되고 그 말씀으로 모든 것을 관리하시고 우리 인간도 말씀으로 걷게도 하시고 말씀으로 앉게도 하시고 쉬게도 하시고 말씀으로 이 지구 역사를 이루어 오신 하나님.

다니엘 예언서를 보면 이 지구 역사를 이루신 분도 하나님이세요. 무엇으로? 말씀으로. 미리 예언하셨잖아요. 그 말씀하신 때가 되니까 그 말씀으로 이루어져 나온 게 역사입니다. 그 말씀으로 또한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말씀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떨어졌는가를 짚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신으로서 영원히 함께 살텐데 어디서부터 떨어졌는가! 그게 죄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생명적인 관계인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다 이 말입니다. 거기서부터 우리가 끊어져서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그 “말씀이 육신(요1:14)”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과 접촉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님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면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 이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히4:12)”하면서 나를 움직이게도 하고 웃게도 하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우리의 모든 동기까지도 그 말씀이 역사해 주겠다 이 말입니다. 그 말씀 안에 창조의 생명이 있다는 말이에요. 38년 된 환자에게 창조주이시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걷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는 있으라 하면 있어지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걸어가라 했고 그 말씀을 받고 걸어가면 그 생명이 역동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살지만 또 하나님의 말씀을 놓으면 다시 죽어간단 말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이해하시면 너무 쉽습니다. 이 은혜의 때고 구원의 때에 우리가 말씀을 받고 살수도 있고 우리 스스로 말씀을 버리고 죽을 수도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선택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계속 보고 일하고 내일 또 예수님 말씀 받고 순종하면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내 안의 주인이 예수님이 돼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이에요. 예수님을 구주로만 인정하지 말고 동시에 개인적인 주인으로 영접해야 나를 지속시켜줍니다. 구주로만 영접하면 잠시 그냥 죄 용서 받은 칭의 경험이 일어나지만 그분을 내 주인으로 모시고 계속 그분에 의하여 살 때에 지속되면서 점점 성화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를 통하여 영광에 들어가는 것 아니겠어요?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롬8:30)”신다고 했으니까 그대로 하실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만나는, 곧 말씀을 받아먹어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 다음 그 말씀의 사역에 따라서 살아가는 경험까지 하려면 여러분의 의지가 거기에 동의를 해 주어야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선택으로, 선택으로 우리 인생이 꼴 지워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직 “기록되었으되”로 살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이 이렇습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 안에서 살면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를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재창조가 일어납니다. 이게 하나님이 세우신 법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