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의 중요한 걸음
저자: 짐 혼버거 장로
모세가 마지막의 중요한 걸음을 옮기었고, 침례 요한 역시 그 걸음을 내디디었다. 베드로, 야곱, 요한 그리고 사도 바울도 그리하였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바치었으며,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온전히 의지했다.
나는 그들이 옮기었던 그것을 “마지막의 중요한 걸음”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에 있어서 그 마지막 발걸음을 내디디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의 과거, 능력, 지식, 종교, 그리고 국적에 관계없이 그 마지막 발걸음은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끝까지 동행하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15:28에 있는 말씀이 우리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실행되고 있지 못하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분이 되고 있지만, 그들에게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가복음 14:33에서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러나 나의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나,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 이었으며, 얼마 후 조금 더 발전해서 “나와 그리스 도” 가 되었고, 지금은 “그리스도, 그 다음에 나”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태는 “온전히 그리스도”이며, “나는” 전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마음과 손이 나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나의 마음과 나의 손이 그분께 봉사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즉, 몸, 정신, 마음, 영혼, 시간, 재능, 목소리, 재물 등, 문자 그대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 우리의 모든 생애를 펼쳐놓기를 소원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하여야 그분께서 우리의 생애를 당신께서 원하시는 상태대로 안내하고 지도하며,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떠나서는 전혀 가망이 없으며, 온갖 형태의 이기심으로 빠져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분 안에서 만족함을 찾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들이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의 능력 안에서, 우리의 돈에서, 우리의 지식에서, 우리의 재산에서, 우리의 직업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에서, 우리가 행하고 있는 개혁에서, 그리고 우리가 다니는 교회 안에서 만족함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린도후서 3:5
하나님께 대한 어느 정도의 헌신, 우리 모두는 이러한 어느 정도의 헌신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완전한 굴복, 아무 것도 남겨두는 것 없이 모두 바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도 심한 요구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 한다. 그러한 헌신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러한 헌신은 너무나 큰 위험을 수반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우리가 측정할 수 있을 정도의 순종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완전한 순종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이 미치게 되면, 우리는 그만 질겁하게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주며, 그 대가로 모든 것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중의 거의 모두가 이 “마지막 중요한 걸음”을 걷기를 주저한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는 완전한 생애를 시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도 적다 (골로새서 3:3).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함을 받는 사람마다 반드시 그것을 시도하게 된다.
수년 전에, 잘아는 친구가 소유하고 있는 휴양지인 섬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카누를 타고 섬에 도착하여 짐을 정리한 후, 아내 샐리와 일광욕을 하기 위해서 부둣가로 내려갔다. 우리의 아이들은 섬을 탐험하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후, 우리에게 돌아와서 자신들의 탐험 결과를 보고 하였다.
“아빠, 엄마는 우리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할 겁니다.”
“제발, 우리에게 이야기 해줄래?”
“섬의 서쪽에 가면 높은 절벽이 있는데, 그 위에 다이빙 대가 만들어져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는 아주 놓은 다이빙 대가 하나 있고, 또 하나의 다이빙 대가 2층보다 조금 낮은 높이에 있어요.”
이어서 아이들이 나에게 어려운 질문을 했다. “아빠, 그 다이빙 대에서 뛰어 내릴 수 있어요?”
“물론, 할 수 있고 말고.” 그러자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언제요?” 아이들의 이 질문에 나는 주저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을 알았고, 또한 언젠가는 그것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아이들은 지금 당장 뛰어 내리기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글쎄, 점심 식사 후에 해볼까?” 라고 대답하였다. 기분이 들뜬 아이들은 식사 후, 설거지를 하자마자 나에게 왔다.
“아빠, 그 높은 다이빙 대에서 뛰어내릴 준비가 되었어요?”
“얘들아, 식사 후에 금방 수영하는 것은 좋지 않단다. 음식이 다 소화된 후에 할께.” 나는 또 다시 주저하는 마음으로 대답하였다.
결국, 오후 늦게가 돼서야 아이들이 나를 그 높은 다이빙 대로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나는 그 다이빙 대의 끝으로 걸어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아빠, 뛰어내리세요” 하고 아이들이 소리쳤다. “뛰어내리세요!”
“조금 기다려봐” 라고 대답하였다.
“아빠, 무엇을 기다려요?” 라고 물었다.
“내가 열까지 세고, 그 다음에 뛰어내릴께.”
“아빠, 우리가 세어드릴께요. 하나, 둘, 셋, 넷,… 열!” 숫자 열을 순식간에 세어버렸다.
“아냐, 아빠가 다시 셀께.”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다. 우리는 그 마지막 단계를 취하기를 주저한다.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들은 이미 그 마지막 걸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실제에 있어서는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주저하고 또 연기 한다.
친구들이시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 “마지막 중요한 걸음”을 걷게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성경에 소개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이미 다른 사람들이 그 마지막 걸음을 내디디었다. 우리는 그것이 최고의 생애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어주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인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활에 있어서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서 사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가장 행복한 것인지 알면서도 …. 결국, 그날, 나는 다이빙 대에서 뛰어 내렸다. 한번이나 두 번이 아닌 여러 번을 신나게 뛰어내렸다. 나의 아이들도 뛰어내렸고, 심지어는 아내 샐리까지도 점프하였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고자 한다. 아빠인 내가 그 점프를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면, 나의 두 아들이 그것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요즘 청년들이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하며 걱정한다. 나는, 청소년들이 가정과 교회에서 겉도는 이유는 신앙에 대해서 말하기만 하고, 매일의 실제적인 삶에서 살아있고 약동하는 경험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만일 그들이 어른들이 말하고 공언하는 바 대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들은 우리가 말로 강요하는 바에 의해서 끌려 다니지 않고, 우리가 걷는 걸음을 보면서 따라 걷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세상 끝까지 동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그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날, 나는 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을 할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살아야 했는데, 그것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부터 저녁에 자리에 누워 잠을 자는 시간까지였다. 그분께서는 나의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의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그분을 중심으로 하고, 나의 모든 사상과 언행이 표현되고 정립되기 전에 먼저 그분을 통과함으로써 정결하게 여과되기를 바라신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끝까지 동행하기를 동의 하는가? 나는 내 안에서 그분의 생애를 이루시기를 전적으로 원하는가? 그분께서 나를 완전히, 100% 소유하시도록 허용하는가?
처음에,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대해서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나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분의 뜻을 내 생애 가운데에 이루는 것이야말로 가장 보람되고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의 동조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과 협력함으로써, 나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다음날, 하나님께서는 새벽 4시에 나를 깨워 주셨다. 대단한 열심과 활기를 가지고 침대에 앉아서, “주여, 아침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손을 지금 꼭 붙잡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저는 당신의 손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모든 생각을 당신과 함께 의논할 것이며, 당신의 보혈로써 저의 모든 말을 여과할 것이고, 저의 모든 행동을 체질하여 가려내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내 자신의 의지와 욕심과 정욕의 노예가 되지 않으렵니다. 제게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저는 육신과 세상과 이기적인 세력을 초월하여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유인 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의 이러한 간절한 소원을 실현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바로 그때 아내 샐리가 잠에서 깨어, 나를 쳐다 보면서 “당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싱글벙글 해요?”라고 물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오늘, 나는 온 종일 하나님과 함께 걸을 거야. 하루 종일 말이야.” 아내는 말하기를 “정말,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라고 했다. 나의 아내는 고집 불통의 독일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나와 결혼해서 함께 산지 벌써 20년이 되었으니, 나의 말을 의심할 만도 했다.
아내의 그러한 부정적인 대답이 내게 첫 번째 시험이 되었다. 나는 쉽게 아내의 말에 짜증을 낼 수도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짜증을 당신께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나는 즉시로 그분께 동의하였고, 아내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샐리, 나는 부분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에 진절머리가 났소. 나는 그분에게 협력하지 않았으며, 굴복하지 않았고, 신뢰하지 않았지.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특권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요. 그러나 이제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로 했소. 오늘부터 나의 모든 것은 그분의 것이요.”
“내 자신의 의지나 방법을 십자가에 못박는 한이 있을지라도, 오늘은 하루 종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이며, 동기이다” 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날도 하루 종일 나는 시험을 받았고, 시련을 당해야 했다. 시험과 시련의 매 순간마다 나의 양심 속에서, “의지를 바쳐라.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믿으라” 고 호소하시는 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이사야 30:21, 마태복음 28:20, 요한복음 10:27, 시편 32:8 을 참조 할 것). 나는 내게 호소하시는 그 음성에 즉시로 동의하였고, 협력하는 태도를 나타내었다. 나는 그분의 음성이 하루 종일 나를 나의 자아로부터 보호하실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유다서 24절 참조).
나는, 그날 내가 경험하였던 하루의 전체를 소개하고 싶다. 그날에 있었던 모든 즐거움과 시험과 도전과 저항과 구원하여 주심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책을 한권 써도 부족할 것이다. 그대신 그날에 내게 있었던 모든 사건들의 특성을 잘 나타내어 주는 한가지 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날 오후 3시쯤, 샐리가 준비한 맛있는 식사를 끝마친 직후였다. 두 아들에게 설거지를 하고 상을 치우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한 세미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조금 놀게 하고, 네가 설거지를 해라.” 나는 그 소리를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사고 안에서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고린도후서 10:5 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니.”
그런데 나의 이러한 생각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왔는가? 아니면 나의 육신으로부터 왔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또는 육신으로부터 왔는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질문한다. 나는 그러한 것들이 온유함과 겸손함과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필경 사단이나 육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한다는 의미는, 나의 의지를 굴복하여 주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뜻이다. “네, 주님, 설거지를 기꺼이 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라고 명하신 설거지를 즐겁게 수행할 수 있었다. 내가 일을 시작하니까 아이들도 테이블을 치우며 즐거운 마음으로 나를 도왔다.
그날, 나의 아내는 나를 온 종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남편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조그마한 유리병을 닦고 있었는데, 유리병 밖에 사과즙이 말라 붙어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유리병을 닦으면서, 나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사과즙이 유리병 밖에 붙어 있는데, 이 조그만 것 때문에 그렇게 애쓸 필요가 있을까?” 한가지 말해 둘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설거지와 아내의 설거지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설거지를 해버리면 되지만, 아내는 완벽하게 잘 하기를 원한다. 아무튼 유리병을 잘 닦아서, 깨끗한 물에 씻은 다음, 병을 말리는 곳에 두었다. 바로 그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걸어와서, 그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나는 즉시로 비위가 거슬리는 것을 느꼈다. 거슬리는 감정이 나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결정은 언제나 내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때 육신에 굴복할 것인지 또는 그리스도의 영에 굴복할 것인지를 선택하여야 했다. 화를 내기로 선택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도 있고, 나의 감정적인 생각을 굴복하고 조용히 있을 수도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그분께 드리기로 작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샐리는 유리병을 들어서 불빛에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이 아닌가! 정말 해도 너무 하지 않는가! 여느 때처럼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여보, 내가 설거지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어.” 그녀의 그러한 행동을 육신이 인내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한바탕 해보라는 욕구가 솟구쳐 올라왔다. 한쪽 귀에서는, “네가 생각하는 대로 다 이야기 해봐!”라는 악마의 음성이 들렸고, 다른 쪽 귀에서는 “내게 모든 것을 맡겨라. 이것은 사소하고 조그만 일이란다” 라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였다. 나는 주님의 음성을 붙잡았다. 주님을 찬양하자! 나는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리기로 이미 약속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분의 음성에 굴복하였다. 그런데 나의 사랑하는 아내 샐리가 갑자기 유리병을 설거지 통에 떨어뜨리지 않는가! 설거지 물이 나의 셔츠에 잔뜩 튀겼다. 내 마음 속에서는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육신이 말하기를,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는데!” 라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영은 말씀하시기를, ” 짐, 이건 별 것 아니야. 소환란, 대환란도 인내해야 되는데, 이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 라고 하셨다. 여호수아 24:15 에서 말씀하셨듯이 “너의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다시 한번 나의 의지를 구세주께 바치고, 나의 모든 신뢰를 그분께 맡기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구원하는 복음. 하나님께 대하여 “네”라고 대답하고 나 자신에게 대하여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친구들이시여, 복음을 발견했는가? 일주일에 한번 정도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교리나 어떤 개혁 운동에 참석하거나 동의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신 전체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에 온전히 바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있어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도록, 내 자신 밖에 있는 초능력에 계속해서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루 종일 나의 모든 행동, 생각 그리고 말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것은 내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게 될지라도, 온 생활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애는 누구나에게 가능한 것이다. 복음은 교리나 교적이나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교의 근본이고 첫째로 중요한 것이다.
창녀로서 살았던 막달라 마리아도 가장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 교적도 없었고, 고등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사회에서 높은 지위도 없었던 막달라 마리아 같은 타락한 죄인이 그렇게 살 수 있을진대, 우리 모두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마지막 중요한 걸음을 옮기기만 한다면….
그날, 하나님께서는 나의 의지를 그분에 뜻에 굴복하라고 여러 번 요구해 오셨다. 굴복하라는 요구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굴복은 단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루 종일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고 있다.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죽어 있다고 간주해야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사도 바울의 깨달음을 들어보라. “나는 매일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그는 자신의 의지와 욕망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그분의 뜻에 상충될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굴복한 삶을 살았다.
이것이 큰 발걸음의 첫번째 부분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기꺼이 굴복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굴복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 두번째 부분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신뢰하여 의지할 때마다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 받게 된다. 바로 이러한 것이 믿음인데, 이러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믿음을 행사하는 자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중요한 발걸음”이란 한마디로,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항상 의지하는 믿음의 발걸음을 말한다. 이러한 발걸음이 약동하고 계속되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으며, 마침내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던 것처럼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 이제 그분께서는 나를 보다 더 높게 준비시키어서 예수님과 같은 걸음을 걷도록 훈련시키고 계신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이 마지막 중요한 발걸음을 나와 함께 움직여 보지 않겠는가?
이 기사는 버지니아주에 계시는 S교우님께서 번역하여 주셨습니다. 지면을 통하여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내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