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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히마아스는 다시 달리고 있다.

저자: 랄프 랄슨 박사

    “우리는 요한계시록 14장의 세천사 기별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이 말은 다른 교회에 속한 어떤 선교사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목사에게 한 말로서 이것을 들은 재림교회의 목사는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재림교회 이외의 어떤 다른 조직이 세천사의 기별을 그들의 신조라고 하는 것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신이 번쩍 들은 그 목사는 이렇게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세천사의 기별에 나오는 짐승의 표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선교사는 대답하기를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둘째 천사의 기별인 바벨론의 무너짐은 무엇이지요?” 다시 대답하기를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그렇다면 첫째 천사의 기별의 심판의 시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전히 대답하기를 “아직 모르겠는데요.”
   
그들은 세천사의 기별을 세상에 전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우리는 다윗왕 시대에 요압 장군의 부하인 아히마아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하였을 때, 요압은 반역군을 진압하였고 압살롬을 죽였는데, 그때 다른 부하인 구스 사람을 다윗에게 보내어 승전보를 전하는 전령으로 삼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구스인은 그 사건을 매우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히마아스는 자신을 왕에게 달려가는 전령으로 삼아달라고 요압을 졸랐다. 요압은 비록 아히마아스가 빨리 달릴 수 있을지라도 그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그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그래서 걸음이 빠른 아히마아스는 천천히 가는 구스인을 앞질러 먼저 왕에게 도착하였다. 그러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라는 왕의 근심 어린 질문에 아히마아스는 다만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큰 소동하는 것을 보았으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성경에 나오는 아히마아스의 예화는 기별이 없는 기별자의 문제를 예증할 때 사용되어 왔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기독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도 이러한 예는 되풀이 되어 왔다. 만일 우리가 과거 교회 안에서의 들려진 설교의 역사를 되돌아 본다면, 우리는 언덕이나 계곡 같이 높고 낮은 변화의 곡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휴 톰슨 케르는 교회의 설교 역사에서 4기간의 높낮이를 볼 수 있는데, 그들 중 3번의 기간에서 기별자들은 그들이 전해야 할 기별을 잃어버렸으며 아히마아스 처럼 달리기만 했다고 말했다.

    케르는 기독교 설교 역사의 4번의 정점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1. 1세기의 제자들의 설교. 2.  4, 5세기의 앰브로스, 어거스틴, 베이실, 크리소스톰 그리고 그레고리의 설교. 3. 16세기의 종교개혁시대의 설교. 4. 18세기의 죤과 챨스 웨슬리, 화잇휠드의 설교

우리가 잠시 멈추어 지난 날의 가장 성공적이었던 설교의 특징을 생각해보는 일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신약에서 베드로에 의한 5번의 설교, 스테반의 1번 설교, 사도 바울의 여러번의 설교를 볼 수 있다. 이들 설교를 통하여 우리는 사도시대의 설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관점을 엿볼 수 있게 된다.

1. 그것은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으며 성경의 예언적인 부분을 특히 강조하였다.

2. 그것은 타협하지 않았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12.

3. 그것은 곧바르고 직선적이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고” 사도행전 5″30.

4. 그것은 윤리를 요구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은 복음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과거의 생활은 그분의 용서로 덮여지고 죄에 대한 계속적인 의도는 없어졌다.

5. 단순하고, 실제적이며, 직접적이었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기별을 옷 입힌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며 오직 정확성이 요구될 뿐이다.

6. 거기에는 개인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호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항상 그들의 설교 가운데에 포함되었으며, 청중들의 죄책감은 자신들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거절되었음을 깨달음으로서 크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 희망이 없지 않았다. 용서가 회개한 영혼들에게 제공되었으며, 어떤 사람도 절망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특징들이 과거 성공적인 사도들의 설교와 4 기간의 설교들에게서 나타나진 바 되었다. 그렇다면 3 기간 동안에 성공하지 못했던 설교들의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설교자들이 자신들이 전해야 할 기별을 잃어버렸을 때였다. 그 당시의 아히마아스는 무작정 달리기만 하였다. 그러면 이제 사도 시대와 4,5 세기 시대 사이에 있었던 사향길 때의 설교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사도들과 그들의 동료의 죽음 이후에 거기엔 사향길이 있었다.”

2. “우리는 사도 시대의 설교 이후부터 크리소스 톰과 어거스틴의 웅변술까지에 3-4세기의 간격이 있음을 알고 있다.”

3. 설교가 지녀야 할 특질이 흐려졌던 이유는 당시의 아히마아스들이 우화와 철학적인 성경 해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교회의 대부들” 이라는 책에 나오는 오리젠의 설교를 살표보면 그 때의 형편을 알 수 있다.
    “매일 우물가로 가는 리브가는 매일의 헌신을 의미한다. 이 우물은 성경이다. 아브라함의 종은 예언의 말씀이다. 그의 낙타들은 이성이 없고 고집센 사람들이며 어깨로부터 물동이를 내려 놓는 것은 그리스의 자존심과 웅변술을 거절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들과 함께 이삭을 만나러 가는 것은 예언적 말씀을 따르는 교회를 뜻한다. 그의 낙타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악으로부터의 분리이다. 리브가의 손과 귀에 있는 보석은 금같은 말씀과 행동이며, 이삭과의 결혼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의미를 터무니 없이 파괴시킴으로서 설교의 사명은 퇴색되어 갔으며, 설교자들은 그들의 기별을 잃어버렸고 아히마아스는 다시 달리고만 있었다.

4. 일반적으로 목사는 설교를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설교는 없었으며, 사람들이 교회에 모일 때에는 예식만 있었으며 성가와 기도문을 외우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설교가 주어졌을지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라틴어로 설교되었을 뿐이다. 설교를 예식으로 대체하고 성경의 적당한 사용을 우화로 대체함으로써 5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은 설교자가 기별이 없고 아히마아스가 다시 달리는 전형적인 시대였습니다. 기독교 초기의 제자들과 사도들의 설교의 절정 이후에 극심한 설교의 사향길이 있었듯이,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절정 이후에도 심한 사향길이 몰아 닥쳤다. 불란서의 물질주의, 영국의 자연신론, 독일의 계몽주의는 설교의 체제와 내용에 전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5. “종교개혁시대 이후, 개신교회의 설교는 사향길 위에 있었다.”  성경은 더욱 “추리적인” 것이 되었으며 설교자들은 성경을 참조하는 대신에 인간의 뜻을 그들의 설교 속에 포함시켰다. 성경에 나오는 “거듭남”의 자리에 인간적인 예의와 성품의 점진적인 향상을 올려 놓았다. “어떤 설교자들은 충분한 흥미가 있다고 생각되기만 하면, 경제나 사회, 농업과 같은 주제들에 대한 강의도 하였다.”

당시 영국의 이곳 저곳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여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를 들은 후에 변호사 블랙스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자가 공자, 마호멧 혹은 그리스도의 추종자 인지를 발견하기가 매우 힘이 들었다. 왜냐하면 설교 중에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의 진실한 표현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기별자들이라고 추대되던 자들은 실제에 있어서 기별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아히마아스는 그곳에서 또 다시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죤 웨슬리가 했던 42,000 번의 엄청난 설교와 18,000 번의 설교를 한 화이트 휠드는 새로운 성공적인 설교 시대를 도래케 하였다. 이들 설교의 영향은 대서양의 양쪽 지역에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해 동안 그 결과가 지속되었다. 다시 성경의 높은 권위와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의지를 굴복시켜야 된다는 회개의 촉구가 세상을 울리게 되었다.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는 강력한 설교가 교회에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지나간 과거 역사에 있어서 성공적인 영향을 미친 설교들 가운데서 우리는 유사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증거하였으며, 성경의 권위를 유일한 것으로 삼았다. 또한 듣는 청중들의 양심에 직접적인 호소를 통하여서 성경이 요구하는 높은 표준을 제시하였고, 회개와 심판을 강조했고 단순하고 실제적인 기별들이 사람들의 생애 속으로 파고들었다. 기별자들은 하늘이 인정하는 그 당시의 현대 기별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기별은 생명이 되어 전파되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는 제칠일 안식일 재림교회의 경험을 배경으로 설교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는 설교에 의해서 구축되어진다는 사실이다. 최초의 재림교인들은 윌리암 밀러와 그의 동역자들의 설교에 반응을 나타내었던 사람들이었다. 1,844년의 대실망이 있었던 이후, 죠셉 베이츠, 제임스와 엘렌 화잇, 걸니, 피얼스, 니콜 등과 같은 사람들은 진리를 더 깊이 연구하게 되었고, 자신들이 깨달은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 대실망 이후로 흩어졌던 재림신도들을 찾아서 여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제칠일 안식일 재림교인의 집단이 그들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1,863년 재림교회는 3,500 명으로 조직되었다. 연합과 통합을 목적으로 야영집회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870년에 교인의 수는 5,440명, 1,880년에는 15,570명으로 증가 되었다. 이때부터 더 많은 설교자들이 새로운 교육 기관에서 훈련되었으며, 그들은 더 넓은 지역, 특히 서부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2-3 주간의 야영집회로부터 한번에 여러 달 동안 지속되는 집회가 이루어졌으며, 이것은 새로운 교회의 설립을 이루게 하였다. 1,901년에 교인 수는 75,000명이 되었으며,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 만났던 94세의 은퇴 목사님은 자신의 생애 동안에 재림 교인의 숫자가 75,000명에서 8백만 명으로 증가되었음을 회고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설교의 열매라고 인정되어야 한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설교와 과거의 사도 시대의 설교, 종교개혁 시대의 설교, 그리고 요한 웨슬러 시대의 설교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설교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하였으며, 역사적인 예언을 강조하였고, 독특한 현대 기별을 가지고 있었으며, 파괴된 하나님의 율법과 거룩한 안식일의 더럽혀짐을 지적하면서 직설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식사, 의복, 오락, 그리고 청지기 직분에 대한 성경 원칙을 고수하도록 요구하였으며, 단순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함으로써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전 생애를 굴복시키는 거룩한 생애를 살기로 선택하였다.

    초기 재림 교회의 설교자들이 전한 설교는 과거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게으름이 부지런하게 되고, 죄인이 성도가 되었으며, 방탕자가 순결하게 되었다. 기별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별을 확신을 가지고 힘차게 전하였다. 거기에는 아히마아스가 발붙일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에 대한 비극적인 이야기는 여러번 들려졌기 때문에 여기서는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하자. 우리를 지도하는 몇몇 형제들이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만일 우리들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신앙의 어떤 신조들을 굴복하기만 한다면, 재림교회를 이단이라고 부르기를 멈추겠다고 제안하였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우리 형제들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우리 형제들의 굴복의 표현을 포함하고 있는 “교리들에 관한 질문”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은 주의 깊게 변형된 재림교회의 신조들을 실고서 각 교회와 가정을 파고 들었다.

    또한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기형적인 기만을 진술하고 있는데, 그때에는 이미 우리 재림교인들이 우리들의 신조들을 변질시키지 않은 약 1,200 종에 달하는 출판물이 나와있던 상태였고, 그 중 400 종은 화잇 부인의 글을 수록한 책자였다. 이러한 상당량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형제들은 그때까지 우리가 결코 받아들인 적이 없었던 것을 마치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믿어왔던 것처럼 표현하면서, “예수님은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증언을 하였다. (교리들에 관한 질문, 650페이지 참조) 당시 이것은 우리의 형제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바로 그것이 교회를 실질적으로 파괴해 온 장본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피할 수 없는 논리의 전개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의 변질된 주장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다면 그분은 우리가 유혹받고 시험받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분이 죄없는 삶을 우리가 사모하고 기대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공정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다. 또한 성소 봉사에서 가장 중요한 “죄를 없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성소에 관한 모든 교리들을 일순간에 허망한 것들로 변모하게 된다. 따라서 성소에 관한 진리를 강조하고 주장하는 예언의 신은 매우 의미없는 것으로 되어 버리고 만다. 만일 진정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왜 안식일 준수로 인하여 이 땅에서 고통당해야 하며, 일요일 준수로 표현되는 짐승의 표를 거절하기 위하여 생명을 내놓아야 한단 말인가!

    이 글의 시작에서 나왔던 모습, 즉 요한계시록 14장의 기별을 전하지만 그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기별을 전한다고 열심히 달리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우리 가운데서 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죄에 대한 승리의 기별과 성소 기별이 각각 따로 떨어져서 소홀함과 무시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세천사의 기별을 전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점점 더 많은 신학생들이 세천사의 기별을 전하기 위해서 신학교를 나오고 있지만, 점점 더 많은 목사들이 그들이 전해야 하는 세천사의 기별의 진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열심을 갖고 목적없이, 기별없이 달려가는 아히마아스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설교단상 위에 세천사가 공중을 날아가고 있는 모습을 붙이고 설교를 하지만 그들의 설교 가운데서 세천사의 기별이 좀처럼 분명하게 전파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많은 목사들이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매력적인 기별을 가지고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성소 진리가 너무 위협적이고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결정하면서, “바벨론이 무너졌도다”라는 둘째 천사의 기별을 뒷주머니 깊숙이 집어넣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황폐해진 기별은 짐승의 표에 관한 셋째 천사의 기별이다. 예언의 신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우리의 역사적인 입장은 “짐승은 천주교회이고, 짐승의 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일을 대치하여 사단의 거짓 예배일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어떠한 진실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칼빈주의자들의 신조는, 우리의 셋째 천사의 기별에 의해서 가치없는 거짓으로 드러난다.

    거짓된 칼빈 신조에 의해서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신약 성경에 50여개의 순종에 관한 성경절이 나와 있음을 확인할지라도 자신들의 신조를 움직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예언의 신에 나와있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된다는 4500 여개의 인용귀절을 그들의 눈 앞에 보여줄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증언의 말씀도 개의치 않는다.

“대쟁투의 시작에서, 사단은 하나님의 법은 순종할 수 없다고 선언해 왔다.” 시대의 소망, 영문 761.

    “지구에서 사단은 그가 하늘에서 시작했던 일을 계속해서 진행하기를 추구하였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시조 4권, 252.

    “사단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그는 그 법을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시대의 소망, 24.
    엘렌 화잇은 1888년부터 1915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교회에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35번의 경고를 하였는데, 그것들 중에서 가장 두려워할만한 글은 다음과 같다.

    “사단은 아담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부족하다고 비난하였다.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비난을 되풀이 하고 있다'” 영문시조 3권, 264.

    사단의 거짓말을 진리라고 확신시키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출판물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가를 우리가 생각해 볼 때, 위의 말씀은 참으로 진지한 것이다. 위와 같은 하나님을 향한 사단의 비난을 되풀이하는 자들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기별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기별을 가지고 있지 않는 전령자들이며, 전해야 될 기별을 알지 못한 채 달려가고 있는 아히마아스의 현대판 사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실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기별을 잃어버렸을 때,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세우셨다. 천주교회가 그들의 기별을 잃어벼렸을 때, 주님은 개신교회를 세우셨다. 개신교회가 그들의 기별을 잃었을 때, 주님은 웨슬러와 그의 동료들을 세우셨다. 웨슬러의 교도들이 그들의 기별을 잃어 버렸을 때, 주님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을 세우셨다. 지금 어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그들의 기별을 잃어버린 현대판 아히마아스의 사본이 될 때, 주님은 전 세계를 통하여 같지 않은 이름의 신실한 형제들의 모임을 세우시고 있는 모습을 엄숙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재림교단으로부터 “염려되는 형제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으며, 역사적인 재림교인, 또는 독립적인 자영 선교단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고 있다. 그들은 순수한 복음에 대한 강력한 애정과 집착심이 있으며, 칼빈의 거짓 신조들을 단호하게 거절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투쟁의 모습을 일으키기도 한다.

    세천사의 기별은 반드시 세상으로 전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은 인간에 의해서 저지될 수 없다. 자신들의 불신 때문에 하나님의 전달자로서의 자격이 박탈된 사람은 다른 기별자로 대치될 것이다. 그들의 불신으로 자격이 박탈된 교회 또한 대치될 것이다. 이것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교회 역사를 통하여 계속해서 일어났으므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방법과 계획은 변하지 않으며, 차별적으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시여, 결코 실수하지 맙시다. 우리가 칼빈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지막 남은 교회에게 주어진 영광스럽고 웅대한 기별에 대한 죽음을 뜻한다는 사실을 …. 칼빈주의에 새로운 매력을 느낀 우리의 신학생들과 목사들이 그들이 들고 뛰어야 할 기별을 잃어버린 채 기별없는 전령자가 되어 의미없는 열심을 다하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염려와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만 두려움과 실망을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고 계시며, 교회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어떤 것들도 하나님을 놀라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냉혹한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손에 사단의 지옥의 횃불로부터 불을 붙힌 거짓 예언의 횃불을 들고 우리의 강단에 설 것이다.” 목사에게보내는 권면, 409.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들을 저버릴 때, 승리가 거의 없을 때, 진리와 의를 방어하기 위해서 주님의 전쟁터에서 싸우기 위해서 … 이것이 우리에게 시험이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다른 이들의 냉정함에서 따뜻함을, 그들의 비겁함에서 용기를, 그들의 배신으로부터 충성을 모아야 한다.” 가려뽑은기별, 2권, 108.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이 이번 제56차 세계 대총회에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