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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저자:  A.T. 죤스

제1부 – 무엇이 믿음이며, 그것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좇아 하지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며 죄는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롬 14:23.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지식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길러야 하는 필요성을 강조해 보았자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주님이 믿음에 대해서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는 교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들은 믿음의 정의가 무엇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실제가 무엇이며 그 정의에 들어 있는 사상이 무엇인지를 알거나 깨닫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먼저 믿음의 정의를 다루는 것보다는 믿음에 관한 예화를 들어서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하여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를 보면서 믿음의 실제 자체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르러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믿음을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느 날 어떤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 8:6-10

    여기에 예수님께서 믿음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임을 발견할 때에 믿음이 무엇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가 되시는데 그분께서 백부장이 나타낸 것을 믿음, 곧 큰 믿음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백부장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그는 주님께서 그 일을 해주시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백부장은 그것을 막으면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주님의 말씀대로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제 백부장은 무엇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는가? “다만 말씀으로만” 하셔도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그의 하인을 치료하기 위하여 오직 무엇에만 의존했는가? “다만 말씀”에만 의존하였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형제 자매들이여 믿음이란 무엇인가?
리뷰 앤 헤랄드, 1898.12.6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마음속에 넣어 주기 위하여 말씀 그 자체안에 그 말씀이 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한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것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으로 “미쁘신 말씀” 곧 믿음으로 충만한 말씀인 것이다.

    성경의 맨 처음 장의 대부분이 믿음에 대해서 가르치는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믿음을 분명하게 깨우쳐 주는 성경절들이 등장한다. 사람에게 믿음을 넣어 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하는 바를 스스로 이룬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성경의 맨 처음 절부터 읽어보도록 하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시 33:6-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없었지만 말씀하시니 “이루었다.” 단지 말씀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이루어지게 했는가? 오직 말씀이 그것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흑암이 모든 깊음 위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빛이 있기를 원하셨다. 모든 것이 완전히 흑암이었을 때에 어떻게 하여 빛이 있을 수 있게 하셨는가?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빛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 빛을 창조하셨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 (빛이) 비취”었다 (시 119:130).
   
첫째로 궁창 곧 공중이 없었는데 하나님은 궁창이 있기를 원하셨다. 어떻게 궁창이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궁창이 있어 … 그대로 되니라.” “그대로 되니라”는 말의 다른 번역은 “이렇게 되었느니라”고 했다. 무엇이 궁창을 이렇게 있도록 만들었는가? 오직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에 말씀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자체가 이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뭍이 있기를 원하셨다. 이 뭍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그리고 채소와 과목이 없었다. 이것들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 그대로 되니라.”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뭍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 그대로 되니라.” 이와 같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는 말씀만 하였으며 모든 것이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의 하신 말씀 자체가 만물을 창조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구속 사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오로지 말씀으로 병자를 치료하셨고, 마귀를 쫓아 내셨고, 태풍을 잔잔케 하셨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셨으며,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죄를 용서하셨다. 이 모든 일에서도 역시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라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언제나 창조주이시며 언제나 말씀으로만 모든 일을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하신 일을 스스로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말씀 그 자체가 그 말씀한 일을 이룰 것을 기대하는 것이며, 그 말씀한 것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믿음을 가르치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이 이러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것이며, 사람들에게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가르치려면, 하나님의 말씀 스스로 그 말씀하신 바를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하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또한 믿음을 기른다는 의미는 말씀이 그 말씀한 일을 이루도록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 말씀하는 바를 이루도록 그 말씀 자체만을 의존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그 의미하는 바는 어떤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여러분은 믿음을 기르고 있는가?
리뷰 앤 헤랄드 1898.12.27

말씀은 스스로 이룬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하는 바를 스스로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이 말씀하는 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때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는 말씀에서 말씀하는 바의 실상을 창조할 수 있으며, 믿음은 말씀 자체가 그 말씀하는 바를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하는 바를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발씀 자체 안에 창조의 능력이 있으므로 존재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들을 창조하여 존재하도록 하고 볼 수 있도록 하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만이 그 일을 하도록 기대하고 그 일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다만 “말씀 만” 을 의존하는 것이므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라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와같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라.” 히 11:3.

    믿음을 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지금 보이는 것들이나 그러한 것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가 말씀하셨을 때에 그 말씀 자체가 세계를 존재하게 하였으므로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사이에 존재하는 차이 점이다. 사람은 말을 할 수는 있으나 그의 말에는 말한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만일 그가 말한 일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말을 하는 것 위에 다른 어떤 일을 부가적으로 해야 하며 그의 말을 실행하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하신 일이 실재로 존재한다. 단순히 그가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들 처럼 하신 말씀 외에 다른 어떤 일을 행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의 말씀에 어떤 능력을 더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 그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그는 “말씀 만”을 하실 뿐이며 그러면 그 일이 이루어 진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 2:13. 곧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행사하는 우리의 속에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시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 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것은 단순히 거짓말 하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시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때에 그 하신 말씀속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다만 말씀만 하면 말씀하신 그대로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시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사람의 말에는 그 말대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렇게 된다. 미래에 다가올 수백년 간의 예언과 같이 어떤 때에 해당하는 말씀을 하셨을 때에 그 때가 실제로 이르러오면 그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 때에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말씀 외에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 아니고 그 때를 위하여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며 그 말씀 속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그때에 말씀하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소리치지 않았더라면 돌들이 즉시 소리쳤을 것을 보여주며, 또 이것은 사흘이 되던 날에 그를 더 이상 무덤 속에 붙들어 두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다! 그 안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으며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성취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이러한 말씀으로 신뢰하고 의존한다면 그것이 곧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리뷰 앤 헤랄드 1899.1.3

믿음의 성장에 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그 의미하는 바를 아는 지식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다른 어떤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가져야 할 어떤 필요성에 대해서 아주 많이 말씀하고 있다.

    처음 신앙할 때에 모든 사람이 믿음을 받았으므로 그들에게 남아 있는 문제는 오직 믿음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이미 받은 믿음을 기르지 않고서는 그 받은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을 기를 때에 믿음만큼 빨리 자라는 것이 일찌기 없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이 더욱 자라고” 라고 말씀한다 (살후 1:3).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그 말씀하는 것을 이룰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루도록하기 위하여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다만 말씀으로만.” 그 말씀하신 것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을 기르는 것이 곧 믿음을 기르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엡 2:8) 이며, 이 선물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로 12:3.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이 믿음의 분량은 각 사람들로 하여금 장사를 하도록 시키는 자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 자본을 가지고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장사하고 기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이 자본은 이용할 때에 언제나 감소할 위험은 절대로 없다. 이것은 사용하는 만큼 늘어날 뿐이며 굉장히 잘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라나는 만큼 분명히 주님의 의와 평화와 기쁨이 주어지며 영혼의 완전한 구원을 보장한다.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 일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에덴 동산에서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에 그들은 완전히 사단을 믿었다. 사단에게 완전히 굴복하여 사단의 완전한 포로가 되었다. 그 후 그들과 사단 간에는 완전한 연합과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그렇게 버려두지 않고 그들의 연합과 평화를 깨뜨렸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사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창 3:15.

하나님만이 여자의 후손과 사단의 후손사이에 혐오감을 넣어줄 수 있다. 인간이 타락한 후에 그 본성이 악하게 되었고 그 후 사단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는 평화가 있었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던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연합을 형성하였을 것이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계속 싸움만을 하였을 것이다. 타락한 천사들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는 본래부터 적의가 없었다. 둘 다 악하며 배도를 통해서 더욱 악하게 되었다. 악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항상 악이 선을 대적하기 위해서 연합을 이룬다. 타락한 천사들과 타락한 인간은 친교를 맺는다. 타락한 천사들의 간교한 대장은 만일 악한 천사들처럼 인간을 끌어들여서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 참여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들은 동맹하여 하늘에 반역하도록 인간을 끌어들이는 그의 대리자들로 설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는 즉시 사단을 혐오하는 능력은 없어진다. 지상에서 인간과 사단 간의 혐오감은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서 넣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개심시키는 능력이 날마다 인간의 마음속에 역사하지 않는다면, 신앙으로 자라나는 마음은 없어지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인이 되는 것보다 사단의 포로가 되기를 선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혐오감을 넣어주신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할 때에만 그 혐오감이 인간의 마음과 의지를 완전히 돌이키도록 하여 주의 편에 서게 한다.

    이와 같이 각 사람의 마음속에 사단에 대한 적의,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 할 수 있는 구원을 바라며 악을 미워하는 증오심을 심어주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주신 믿음의 선물이다. 이것은 각 사람에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 이며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입과 마음속에 있는 “믿음의 말씀” 이다.

    이것이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 10:8-10).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다 주겠는가 하고 말하지 말며 누가 음부에 내려가거나 멀리 가서 믿음을 찾아 우리에게 가져다 주겠는가 하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신 30:11-14, 롬 10:6-8.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세상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행사하자. “믿음을 행사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
리뷰 엔 헤랄드 1899.1.10

제2부 – 우리가 소유해야 할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

    성경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그 의미하는 바를 아는 것은 다른 어떤 지식을 얻는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하시는 일을 이루도록 기대하는 것이며, 그 말씀하시는 일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대하여 기록한 것은 믿음, 곧 믿음이 무엇이며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자에게 무엇을 행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은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아브라함은 80살이 넘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늙었으나 아이가 없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창 15:5,6).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 말씀하신 일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라는 그의 기대를 하나님의 말씀에만 두지 않았다. 아이를 낳기 위하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창 16:2

    그 순간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에서 떠나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끝까지 바라고 의존하는 대신 “사라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아이가 태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사라에게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서 생긴 일을 거절하였다. 하나님께서도 이 일을 거절하시고 한 아이가 태어난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여 버리셨다. 그런 후에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약속하신 후손을 통하여 그를 열국의 아비가 되도록 할 것이며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후손과 언약을 세우는 일에 관하여 계속 말씀하셨다. 또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바꾸셨다. 왜냐하면 사래도 약속하신 후손을 통하여 “열국의 어미”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미 태어난 그 아이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을 알고 이 문제에 주님의 관심을 끌려고 하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증가하여 그로 크게 번영케 할찌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창 17:15-21).
이 모든 일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사라는 약속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데에 있어서 오직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사라는 그의 계략은 단지 불화와 고통 만을 가져오고, 약속의 성취를 지연시킬 뿐이라는 것을 배웠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하게 붙잡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이제 그 모든 계략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은 아흔 아홉살이 되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성취는 어느 때보다도 더 요원한 것같이 보였지만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고 보다 큰 믿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믿는 것외에는 다른 무엇을 의존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 말씀하신바를 이루시도록 완전히 그 말씀에 매달렸었다. 그들 자신들의 모든 행위와 책략과 계획과 노력을 버리고 그 말씀하신 일을 이루시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믿음에 의지하고 오직 말씀에만 의존하였다.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여 약속하신 “자손”이 태어났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다시 말하면 인간은 무력하지만 말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가 신실하신 줄 앎이라.” 히 11:11

    “그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12
    이와 같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그에게 하신 말씀이 성취가 되었다.

    이것이 믿음을 가르친 성경의 교훈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소유하는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사용하는 교훈적 이야기 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 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3-25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 3:9. 자신들의 모든 행위와 책략과 계획과 노력을 거부하고 인간적으로 완전히 무력한 가운데서 그 말씀하신 일을 이루도록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자들은 모두 믿음에 속한 자들이며 믿음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의로 복을 받을 자들이다.

    오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아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과학은 과학 중의 과학이다. 누가 이것을 깨달으려고 모든 힘을 기울이려 하지 않겠는가!
리뷰 앤 헤랄드 1899.1.24

말씀만을 신뢰한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스마엘을 낳게 하였던 모든 불신의 계획을 완전히 청산하고 오직 믿음 위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했을 때에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낳았다.

    아브라함이 사래의 말을 들었을 때에는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노선과 참된 믿음에서 벗어났었지만, 이제 오직 말씀과 참된 믿음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때문에 하나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실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을 신뢰하여 이스마엘이 아닌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이 이삭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이삭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결정해야만 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

    아브라함은 오직 말씀만을 신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받았다. 이삭 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약속하신 자손이었다. 이삭이 태어난 후에 하나님은 그 말씀을 확증하시면서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창 21:12) 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이르러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할 것이며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 26:4) 고 하셨는데 지금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삭을 번제로 드려 불사른다면 그를 통해서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이 어떻게 될 것인가?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하게 많을 것이라는 약속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지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이미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이스마엘을 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정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이삭을 버려야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면서 이삭을 드렸다.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되리라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고 칭하리라고 하셨던 그 “씨”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들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 두가지의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그가 아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이것을 알았을 때에 그는 말씀을 믿었고, 말씀을 따랐으며, 말씀의 조화나 설명이 꼭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또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전에는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여 방해가 되었지만,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말씀으로만 돌아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의 자손 이삭을 주셨다. 그런데 이제 약속의 자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기적으로 이삭을 주셨으므로 기적으로 그를 다시 살려주실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번제로 바칠 때에 그는 죽을 것이다. 그 때에 그를 다시 돌려 주실 수 있는 기적은 오직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기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하실 수 있으시므로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할 것이며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자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삭을 다시 살리는 일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행하신 일과 조금도 다를 바없이 하실 수 있다. 나의 몸과 사라의 몸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삭을 낳을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수 있으시므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으로 여호와를 찬야하라!”

    이제 그의 마음은 정하였다. 아브라함은 일어나서 종들과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을 향하여 사흘 길을 갔다. 사흘째 되던 날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창 22:4,5. 누가 갈 것인가? “내가 아이와 함께 … 가서.” 그러면 누가 다시 돌아올 것이가? “내가 아이와 함께 … 가서 …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간 것처럼 꼭 그와 함께 돌아올 것을 기대하였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 그 다음에 이삭이 잿더미에서 살아나 함께 돌아갈 것을 기도하였다. 왜냐하면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자손이라 칭하리라 또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를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였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다 (약 2:23). 그러나 더 나아가서 “저의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 (롬 4:23-25).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가져다 주는 믿음이다.

    이것이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기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그 의미하는 바이다. 그리고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깨닫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과학은 과학 중의 과학이다.
리뷰 앤 헤랄드 1899.1.31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1
믿음은 말씀하는 일이 이루어 지도록 오직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단순히 말씀만을 의존하여 의로 여김을 받는 것을 말한다.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오직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은 말씀속에 계신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하나님만을 의존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존하므로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죄 많고 경건치 않은 죄인들일 따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는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 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는 범죄를 하여 하나님의 큰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셨다. 7년 기근이나 다윗이 그의 대적에게 쫓겨 석달을 도망다니거나 또는 3일 동안의 온역이 셋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택하려 하지 않고 모두 여호와께서 알아서 하시도록 맡기면서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고 말했다 (삼하 24:14).

    우리가 말씀속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의존할 때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와같이 하면 정말로 의를 얻으며 그리고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 기 때문이다 (사 32:17).

    우리가 말씀속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의존하여 의를 얻을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린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 (하나님과 인간) 로 하나를 만드사 … 원수된 것 … 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 (하나님과 인간) 로 자기의 안에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4,15. 더 나가서 말씀 속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의존하여 의를 얻을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화평을 누린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오직 말씀 속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계속 의존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화평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아주 분명한 길과 완전한 칭의와 확실한 평강을 이루어 놓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만을 의지하여 이 모든 것을 받기만 하라고 요청하실 때에 왜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려고 하지 아니하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믿음을 행사하는 필요성을 강조할 때에 성경에서 뜻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믿음을 행사하고 있는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는가?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을 믿으라.” 막 11:22
리뷰앤 헤랄드 1899.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