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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 기별 – 서론(The 1888 Message – An introduction)

저자:  저자: 롸벌트 제이. 윌랜드 목사

   제 7 장  1888년 기별자들에 의하여 이해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만일 1888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늦은비와 큰 외침의 시작이었다면,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억지로라도 그것이 진리라고 인정하게 하되, 오순절에 이른비가 부어진 이래 어느 이전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에 의하여 보여진 것보다 더욱 분명히 나타난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1888년 이후 10년 동안에 엘렌 화잇은 문맥으로 보아 틀림없이 죤스와 와그너의 기별을 언급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순절 이래 주의 하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은 위대한 진리들이 그 본연의 순결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빛날 것이다. 성령께서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마음에서 사라진 진리들을 나타내실 것이며, 또한 전혀 새로운 진리도 나타내실 것이다(교육의 기초, FE 473).

           종교 개혁자들의 교리가 그들의 세대에 중요하긴 하였지만, 1888년의 기별이 어떻게 16세기의 그 개념들을 단순히 재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엘렌 화잇은 1888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진실로 셋째 천사의 기별” 이라고 말하였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0, 4, 1). 만일 1888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루터가 가르쳤던 것과 같았다면, 루터는 그 당시에 셋째 천사의 기별을 가르쳤으므로,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회가 있어야 할 참된 정당성이 없다고 콘래디가 말하였을 때에, 그가 맞았다(L R. Conradi 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단의 기초 60-62).

           1888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하심(Justification By Faith)의 개념이 진실로 셋째 천사의 기별로 알게 된 이상, 그 안에는 일반개신교의 개념과 구별하는 독특한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된다. 만일 그것이 일요일 지키는 교회 신학자들과 복음 전도자들이 전파하는 동일한 기별이라면 다음의 질문은 심각한 것이 된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하심에 관하여 아무 분명한 공헌도 하는 것이 없지 않느냐? 아니면 그들의 공헌이란 다만 행위에 있지 않는가? 주님께서 일반 교회들에게는 복음을 전파하라 하시고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인들에게는 율법을 전하라고 명하셨는가? 아니면 기껏해야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인들은 나도-또한 이라는 음성이, 사실상 다른 이들과 꼭같은 상품을 습격 하면서, 마치 오늘날 그 차가 이름만을 제외 하고는 실제적으로 똑같은 자동차를 가지고 경기하는 자들 같이, 복음의 노선 위에서 경쟁하는 단순한 하나의 경쟁자들인가?

           죤스와 와그너의 기별은 의롭다 하심의 두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1)    법정의 혹은 사법적,-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루어진, 전적으로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면과

(2)    믿는 자들의 마음의 효과적인 변화, 그리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하심 –의 면. 엘렌 화잇은 그것이 개혁자들과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개념을 훨씬 초월하여 나아간 것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기별의 독특성을 기뻐하였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와그너와 죤스 장로들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가장 귀한 기별을 보내셨다. ···그것은 보장 되신 분을 믿음으로 받는 의롭다 하심을 제시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받도록 백성을 초대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으로 나타나게 된다.—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제시하라고 명하신 그 기별이다. 그것이 셋째 천사의 기별인데, 그것은 큰 음성으로 포고 되어야 하며, 대량으로 당신의 성령의 부으심이 수반하게 되어 있는 기별이다(목사들에게 보내는 권면 91, 92).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하심에 대한 그들의 개념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주의(주목)하자.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는[바울의]말···의 정확성은 명확하다. 의롭다 하심(to justify) 이라는 것은“의롭게 만든다”(to make righteous) 혹은 어느 사람이 의롭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죄 있는 사람이 이루어 놓은 행위들은 자기를 의롭게 하기에는 아무 효과도 없다. 그와 반대로 악한 마음에서 나왔으므로 오히려 그 행위들은 악하며 자기의 죄의 총계에 더욱 악을 더 부가할 뿐이다. 악은 오직 악한 마음에서 나오며 쌓아올린 악은 하나의 선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려고 한다면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가 자기에게 요구되며, 자기가 하기를 원하는 선을 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의롭게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 하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할 것이며 좀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정당하게,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

           “값없이 의롭게 된다” 달리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

           하나님께서는 죄 있는 사람을 깨끗하다고 하시지 않으실 것은 사실이다. 그분이 그렇게 하시고 여전히 공의로운 하나님이 되실 수 없으시다. 그러나 그분은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어떤 일을 하신다. 그분은 전에 죄 있는 사람이 깨끗하게 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죄(guilt)를 제거하신다.-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는 죄를 결코 짓지 않은 사람처럼 간주된다. —

           [슥3: 1-5에서] 더러운 옷을 벗기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죄를 제거한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의의 겉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는 때에 죄 있는 옷을 비치해 두시지 않고 죄를 치워버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죄의 용서가 형식 이상의 어떤 것, 즉 죄가 취소됐다는 취지로 단순히 하늘 기록 책에 기재하는 이상의 어떤 것 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 사람을 죄책감(guilt)에서 깨끗하게 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죄책감에서 깨끗하게 된다면 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정당하게(의롭게) 되며, 그는 근본적인 (철저한, 혁명적, Radical) 변화를 경험 하였다.···그래서 충만하고 거저 주시는 죄의 용서는 그 용서에 새로운 (마음) 혹은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동일한… 새로 남이라고 알려진 그 놀랍고도 기적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또 다시, 무엇이 의롭다 하심 혹은 죄의 용서를 초래하는가? 그것은 믿음이다.···이 동일한 믿음의 행사가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그리스도와 그의 의 51-67).

           [A.T.] 죤스도 완전히 일치 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왜냐하면 의롭다 하심은 의롭다고 선언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롭다 하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성취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로 나아간 하나님의 말씀은 말이 발하여지기 전에는 없던 것이 존재 하도록 그것을 일으킬 수 있다.·

           사람의 생애 중에는 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공포하시고(발표하셔서) 사람에게 그리고 사람 위에 의를 선언 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는 그 말씀만을 발하셨다. 그러므로 인간 생애의 어두운 공허 속에 의를 받고자 하는 자마다 거기에는 의가 있다.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전에는 즉 정밀하게 최초의 피조물에게는 아무것도 없던 그 사람 안에, 그 생애 안에 의를 산출 해낸다.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대하고 의지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롭게 된, 정당하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9, 1, 17).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야 할(become just) 뿐 아니라 의로워야(being just)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의로운 사람은 엄밀하게 같은 방법으로, 엄밀하게 그가 의로운 사람이 되던 그와 같은 방법으로 산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9, 3, 7).

           여기에 그대에게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 의의 말씀이 있다. 지금 그대가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겠는가? 지금 그것으로 살겠는가?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이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 그것이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6, 11, 10).

           질문이 당장 일어나는데, 이 1888년 기별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의롭게 만드는 것(making righteous)”이라고, 반복하고 강조하여 말하였을 때 그들이 맞았는가? 아니면 이것이 실로 행위로 말미암는 의가 변장된 천주교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개념의 부흥인가? 하는 질문이 일어난다.

           어떤 이들은 신자가 일찍이 의로워 진다(becomes), 의롭게 된다(made)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가상 한다. 이는 신자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의롭다고 선언 받았(declared)을 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이란 의롭게 만드는 것(making righteous)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로마 천주교 자체의 훈장이라는 말을 들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엘렌 화잇이 1888년 기별 자체의 바로 그 핵심을 “진실로 셋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보증한 것이 있다. 만일 이것이 변장된 로마천주교의 교리라면 엘렌 화잇은 하나의 잘못 안 천진난만한 열성가이었으며,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회는 비극적인 혼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임에 틀림 없다.

           엘렌 화잇이 이 기별 가운데서 독특한 요소를 보았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것은 보장되신 분을 믿음으로 받는 의롭다하심을 제시 하였다. 그것은 백성들을 초청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받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에 순종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예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제시한 어떤 증언을 주셨는데, 그것은 명확하고 분명한 계열로 셋째 천사의 기별이다. ··…그것은 두가지를 하나의 완전한 전체로 묶어 매는 율법과 복음을 제시한다(목사에게 보내는 권면, TM 91-94,).

           “의롭게 만든다”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에 대한 죤스와 와그너의 개념은 자기 자신으로 인하여 고유의 공로를 자기 안에 창조함으로, 자기의 공로 때문에 그의 계속되는 죄스러운 행위들이 죄가 되기를 그친다는 “성도”안에 쏟아 붓는 부어주시는 의라는 로마 천주교적 개념이 아니었다. 로마 천주교의 개념(광범위하게 다른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지지 받는)은 죄가 “성도”안에서 죄 되기를 그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욕망(색욕)”이 성례적(혹은 법적)인 의롭다 하심이 있은 후에는 더 이상 악이라고 판단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죤스와 와그너의 가르침은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이란 그것이 신자로 하여금 율법에 순종하는 행위자가 되도록 만드는 그러한 의미에서 신자를 의롭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들은 회개한 죄인의 편에서 수 백만 년의 순종이라도 결코 자기의 죄를 속죄할 수 없으니 이는 그가 한점의 공로도 없으며, 한점의 공로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은 율법에 불순종하는 자신의

포로로부터 구출해 내어 자신을 순종의 길에 세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된 의롭다 하심 안에 작용하는 그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행하는 믿음)이며, 속죄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 즉 그분의 거룩한 율법에 순종과 참된 조화일치의 효과가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참된 화목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일부러 계속 불순종하는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소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이 어느 것이든지 일종의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롭다 하심과, 믿음과, 이해를 모두 곡해하였기 때문이다.

           1888년 기별자들로 그들의 요점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자(의롭게 된 혹은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었느니라.” ···자기 안에 의가 될 수 있는 아무것이라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가 문자 그대로 믿는 모든 사람 속에 주입되며 입히운다(put into and upon). 그러면 그들은 성정에 따라 의로 옷 입히우고 의로 채움을 받는다. 사실 그때에 그들은 의가 될 수 있게 된다. 그때에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당신의 의를 선언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말씀 하시기를 ·–“너는 의롭다”고 하신다면 그 즉시 믿는 죄인은 죄인이기를 그치고 하나님의 의가 된다. 의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안에 의 자체가 있으며, 죄인이 믿고 그 말씀을 자기 마음 가운데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마자, 그 순간 그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있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으므로 새 생명이 그 안에서 시작되는 결과가 된다. 그런데 그 생명(생애)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생명(생애)이다(와그너 창조 중에 복음 26-28, 1894).

           주님은 당신의 계산에 있어서 결코 아무 실수도 하지 않으신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을 (계산되다. 간주되다) 때에, 그것이 참으로 의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근거를 두었을 때에 물론 그는 영원한 의 위에 근거를 두었다. ···그는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그 자신의 것이 되었다. (상동 35)

           의롭다 하심은 율법과 관계가 있다. 그 말은 의로움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2 : 13에서 누가 의로운 사람들인지 듣는다 :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은 율법을 행하는 자이다. 의롭게 (just) 된다는 것은 옳게(의롭게, righteous)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의로운(옳은) 사람은 율법을 행하는 자인 이상, 어는 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는 것 즉 그를 의롭게 만든다는 것은 결국 그로 하여금 율법을 행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단순히 믿음으로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은 그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신다. 그것이 옳지 않은가? 확실히 그렇다(옳다). 그것은 사람의 실수를 보기 좋게 겉치레 하여 그가 사실은 악할지라도 의롭다고 간주 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오히려, 그분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행하는 자로 만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그 순간, 그 사람은 그 순간 율법을 행하는 자이다(가 된다). 확실히 그것은 자비로운 일임에는 물론 선한 일이며 의로운 일이다. —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신분보다 더 높은 신분(혹은 상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의롭다하심은, 오직 부활시에만 이루어지는 불멸성으로 그를 불멸하게 만드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것을 한다. ···의를 유지하기 위하여-율법을 행하는 자로 머무르기 위하여-하나님께 향한 믿음과 순복함은 계속 행사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말씀의 세력을 분명히 보게 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3 : 31). 즉, 우리의 생애로 율법을 범하며, 율법을 아무 효과가 없게 하는 대신에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을 우리 마음 가운데 세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순종하는 이 한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시며 그의 순종이 믿는 각자의 마음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실 오직 그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서만 사람들이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영원 무궁토록 영광이 있을 지어다(와그너, 영문시조 1893,5, 1).

           아마도 우리는 왜 엘렌 화잇이 이 기별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는지 그 이유를 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인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묘사한 계시록14장의 “무엇”에 대하여 “어떻게”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 여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입혀주신 그리스도의 의에 대하여 말하였을 때에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이 의미 하였던 것이다. 그 여인은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 책 같은 사건을 독특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았다. 그 여인은 어떤 실제적인 것,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거짓된 개념의 위험”이라는 표제를 붙인 원고를 쓸 때에, 그 여인은 죤스와 와그너의 기별을 논박하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여인이 그들의 기별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반대하였던 꾸며낸 이야기의 관점을 논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백성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에 대한 거짓된 개념을 용납하는 그 위험이 몇 번이고 나에게 제시 되었다.-나는 사단이 이점에 관하여 마음을 혼란시키려고 특별한 모양으로 늘 역사하는 것을 여러 해 동안 보여 주심을 받았다.—여러 해 동안 나의 마음에 촉구 되었던 점은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 이었다. ···나는 백성에게 제시한 거의 매 강의와 매 설교마다 그것을 주제로 삼았다.

           15세와 20세 때에 기록한 나의 기록을 검토 하면서 (나는 그것들이) 이 같은 빛으로 … 실제(실천)적인 경건의 산 원칙들로 그 문제를 제시하는 것을(발견한다). ·–

           [목사들은] 이 문제-참된 경건의 단순성-를 매 설교마다 백성 앞에 분명히 해야 한다. ···사람들은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며, 사람들을 높이는 습관이 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보기도 듣기도 떨리게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사람들의 가정 생활과 내적인 행위가 이기심이 가득한 경우가 적지 않음을 나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패하고, 더럽혀졌고, 악하며, 그들의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과 더불어 그들을 향상 시킬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이는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이 그분의 보시기에 가증하기 때문이다. 죄를 포기하지 않고 죄의 악화 시키는 특성을 분간하지 않으면 창된 회개가 있을 수 없다. ·–

           믿음에 관한 공로의 자리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을 생각할 위험이 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총명을 주시고 마음을 감동 시키셔서, 갈바리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도록 먼저 마음을 이끄신 하나님께, 즐겨하는 헌신과 봉사로 마음을 매는,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에 동의(찬성) 하는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께 대한 행동 법칙은 받아들이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게 한다. 그것은 사람이 신성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그를 데려간다. ···신의 능력과 인간 대리자가 결합하면 완전한 성공이 있을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의 의가 모든 것을 성취 시키기 때문이다(원고 36, 1980).·

           * 엘렌 화잇의 믿음에 대한 이해는 1888년 기별을 이해하기 위하여 결정적이다. 1888, 7, 24일자 리뷰 앤드 헤랄드지에 그 여인은 믿음에 대한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정의를 기록하였다.

           “그대가 구원의 값을 이해하는 때에 그대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갈바리의 잔인한 십자가 상에서 그대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그대가 감지할 때에; 즉 그대가 그분의 죽으심이 그대를 위하여 죄를 끝낼 수 있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그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로운 성품을 완성시킬 수 있게 하는 믿음을 총명하게 이해할 때에 그대는 이러한 주장(예수를 믿는다는)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 1888년 기별자들과 충분한 조화를 이루는 한 발표를 가지고 있다. 그 여인은 그리스도의 재 강림을 위하여 한 백성을 예비시키도록 하는 주님께서 보내신 새로운 빛을 인정하였다. 그 여인은 일요일 지키는 교회들의 보편적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이 하나의 곡해임을 분명히 알았다.

           한 부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의 교리를 곡해하며,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놓인 조건은 응하기를 등한시 하면서,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한다고 주장은 하나,-그들에게 새로워서-갈바리 십자가로부터 반사된 귀중한 광선에 반대하는 처지에 자신들을 두는 사람들 편에 아주 큰 오류가 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설교한답시고 강단에 서고 있다. 그들 자신들의 마음들이 살아 있는(믿음과), 매어 달리는(믿음과), 신뢰하는 믿음을 통하여, 자신들의 죄를 용서 받은 향기로운 증거들을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런데 모든 죄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동정과 용서를 어떻게 설교할 수 있을까? 그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갈바리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그대는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갈망이 있을 것이다.… 어느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드님의 희생을 바라볼 때에, 마음과 심령을 하나님께 즉시 바치도록, 그들의 마음들이 녹아지고 부서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각 사람의 마음에 이점이 아주 안착 되도록 하자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분을 주권자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순종하기까지는 우리의 구세주로써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없으며 완전히 위탁하는 신뢰를 할 수 없다. ···그때에야 우리는 우리 믿음의 진정한 연륜을 가지는데, 이는 그것이 역사하는 믿음(행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상동).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에 대한 이러한 관점이 성경적으로 맞는가? 몇 성경 구절들을 보자:

1.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사법적 혹은 법정적인 의롭다 하심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빛이 세상에 왔으되”(요3:16-l9).

           그[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4-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고후 5:14, 15).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심판은 한 사람으로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모든(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많은)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6-18)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광채를(찬란함을) 빼앗겼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으로 그분의 자유케 하시는 행위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느니라(롬 3 : 23, 24 NEB*).

*새 영어 성경(NEB)으로부터 판권 소유. 옥스포드 대학 인쇄소 대표자들 및 캠브리지 대학 인쇄소의 특별 평의원들 1961,1970. 허가에 의한 재판

       죤스와 와그너가 그것들을 이해한 대로 이 성경절들을 분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A.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주셨을 때에 모든 인간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영원하신 희생으로 말미암아 빛을 비추기 위하여 두개의 선물-생명과 불멸성-을 가져 오셨다.

       B. 생명이 인류를 위하여 주신바 되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거나 또는 그리스도를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신 바 되었다; 한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는데, 그분이 그렇게 죽지 아니 하셨더라면 모든 사람이 죽을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은덕이 아니면 아담이 타락한 이래 호흡이 있는 아무 인간도 이끌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그들의 신체적 존재까지 그리스도께 은혜를 지고 있으며, 무덤의 유일한 예외를 제하고는 그들이 가진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그분에게 무한히 그리고 영원히 빚지고 있다. 오직 무덤만이 유독이 권리로 우리의 것이며, 무덤만이 유독이 우리가 벌은 것이다. “모든 떡 덩이마다 갈바리의 십자가의 인이 찍혀 있다. 모든 물 샘에도 십자가가 반사되어 있다”(시대의 소망 3권 147).

       C. 이 생명의 선물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가능 하므로 그분은“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빛”빛이시다(요 1 : 9). “성도나 죄인이나 아무도”자기의 행복의 근원을 알든지 모르든지, 그리스도의 피로 산 바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순간의 기쁨이거나, 행복한 웃음이거나 알지 못하였다.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그리하여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모두]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 : 6,5).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마 5 : 45).

       D.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받을 것은 정죄밖에 아무것도 없으므로 인간의 생명이 “많은 사람들에게 풍성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의 선물”로 말미 암는다. “우리가 아직 죄인[원수]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모두]를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그리스도의 희생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효력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그의 후손에게 물려준 것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그리스도는(그것을) 지워 버리셨다. 이것이 인간 생명이 지속할 수 있다는 유일한 이유이다.

       E. 범죄가 많은 대로 꼭 그만큼 “거저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오므로 생애를 의롭다하심에 까지 [이르게] 된다.”새 영어성경(NEB)은“모든 사람들이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롬3 : 24)고 한 바울의 말을 정확하게 번역한다.

       F. 그러면 복음은 비록 그것이 믿는 것일지라도, 사람들에게 만일 그들이 먼저 어떤 것을 한다면,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복음은 (사)법적으로 또한 법정적으로 그들은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영문에 현재로-역자주 they are already justified)고 모든 사람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신다”(고후 5:19). 그러므로 우리의 일은 다만 화목의 직책을 활용하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다. 그분은 이미 성취된 소식을 전파하는,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 하셨다.

       G. 성도와 이방인 사이에 있는 유일한 차이는, 성도는 그 소식을 듣고 믿었고, 이방인은 그 소식을 듣지 못하였거나 믿지 않았다는데 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활동적으로 역사하시고 계시며,“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 : 4). 거절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그분에게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거절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며, 대 다수가 거절하고 잃어버린 바 될 것이다)

2. 죤스와 와그너는 그리스도의 선물과 희생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즉시로 생애 가운데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 위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을 기초 하였다.

       마음의 이러한 변화는 결코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트렌트 회의로 말미암아 가르침 받은 바와 같이 본래의 의도 아니고 주입된 의도 아니다. 믿음 자체가 마음의 변화를 포함하며 하나님과 화목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원수가 실제로 믿음을 통하여 한 친구가 된다. 1888년 믿음 자체에 대한 이해는 예수님 자신의 정의에 근거 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 : 16).

       율법에서 아주 독립하여 하나님의 의가 빛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것은 잘못을 바로 잡는 하나님의 방법인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그러한 믿음을 가지는 모든 사람,-구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죄를 범하였으며(have sinned) 거룩한 광채를 빼앗겼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으로(안에서) 그분의 자유케 하시는 활동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희생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속죄하는(expiating) 방편이 되게 하사 믿음을 통하여 효과적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관용으로 과거의 죄들을 간과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공의를 입증하실 작정이셨는데 당신 자신도 공의로우시고 예수를 믿는 그 누구든지 의롭다 하시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지금 현재에 당신의 공의를 입증하시기를 뜻하셨다(롬 3: 21-26 NEB).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그의 믿음]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러므로 이것[그의 믿음]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 4 : 3-5, 2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혹(은) 누가 음부에 내려 가겠느냐? 하지말라.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 6-17).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으로 말미암아-영문 성경) 사는 것이다.—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 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아래 메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와 갈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니라(갈 2 : 16-5 : 6).

이 성경절들을 죤스와 와그너가 이해한대로 분석하여 보자.

       A.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인간의 마음에서 울어나는 당연한 반응일 뿐이다. 믿음은 단지 올바른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나 자아 중심적인 안전을 붙잡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십자가의 말씀을 전파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속죄가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이 호소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며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B.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으로 제공되는 법정의 혹은 율(사)법적인 의롭다 하심을 진심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나타내셨으나, 오직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서만“불멸성을 나타 내신다.”

       C. 그러한 믿음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구성한다. 아무 종류의 행위들을 생각하지 않고, 신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영광의 왕자가 그 위에서 죽으신 기이한 십자가, 내가 바라볼 때

            내가 얻은 최대의 부, 다만 손실로 여기며

            나의 모든 자랑에는 경멸을 퍼부으리(쏟으리라).

       이것은 고통스러운 투쟁으로 자신을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이것은 자동적으로 일치하는 행동이다. 하나님의 사랑만을 비추도록 하라. 간음에서 벗어난 그 순수성으로 복음만을 전파되게 할 지어다. 그러면 믿는 영혼은 아무 희생도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천연의 온 영역이 나의 것이라면

            바치는 것은 너무도 미미한 것이리라

            사랑은 아주 놀랍고도 거룩하여

            나의 온 생애, 온 영혼, 나의 모든 것을 요구하도다.

       D.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을 믿는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거나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

믿는 순간에 마음에 변화가 있다!

믿는다는 것은 마음의 변화이다!

경건치 않은 자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면, 그의 마음은 녹는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 17에 있는 이 구절은 의롭다하심(justification)을 묘사하고 있다.

       죤스와 와그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단순히 신자들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수백만 광년 떨어진 데서 일어나는 사법적인 사건일 뿐이라는 소위 종교개혁의 관점을 넘어 갔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이 신자 밖에서 사법적인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역사에 아무리 많이 의존한다 할지라도 그것의 바로 그 진수는 신자 내부의 변화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에 끼치는 공로는 결코 믿는자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 자체는 믿는자 안에서 “나”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갈2: 20)다는 것이 분명하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은 비록 법정적 의롭다 하심에 의존은 한다 할지라도 법정적 의롭다 하심과는 성질이 다르다.

       E. 믿는자의 믿음이 의로 계산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 전체를 포함한다. 주님께서 죄인에게 요구 하시는 것은 참된 믿음이 전부이며 그분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 전부를 그의 대변에 적는다. 1888년의 관점은 믿음이 의와 같다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께서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계산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단순히 사법적인 사건, 서류적인 작업을 훨씬 능가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히 11:1). 이 소위 믿음에 대한 정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 주심의 빛으로 라야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만일 죄인이 믿음을 갖는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증으로 혹은 선물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의 실체(실상)로 받아 주신다. 오직 신약의 믿음의 참된 본질이 이해되기만 하면 이 훌륭한 입혀주심이 효과적이 될 수 있다(롬 3: 25, NEB)

       만일 성품에 흠집을 내는 가장 작은 죄의 잔존물(나머지)이라도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을 하늘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실 수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나의 작은 씨앗 크기만한 것이라도 허용한다면 그것이 자라나 마침내 또 다시 우주를 오염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하시기 전에 그 죄인이 성화되기까지 기다리신다면 성화 과정이 영원이라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다만 죄를 눈감아 주시는 뜻으로 용서하시거나 믿지 않는 상태로 하늘에 들여 보낼 허락을 함으로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면 그분은 다만 죄를 영속시킬 뿐이며 당신 자신의 아드님의 희생을 멸시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행위들이라도 완전히 제쳐 놓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자신도 의로우실 수 있으시며 믿음 있는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설명(말 혹은 발표) 함으로 말미암아 그 피를 믿고 그 결과 화해가 일어나게 되는 하나님의 의를 진심으로 감사히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가 없고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의롭다 하심을 위한 아무 법적인 근거가 없었을 것이며 죄인 편에 아무 믿음도 없었을 것이다. 그 피가 객관적 속죄, 주관적인 속죄를 모두 성취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 비록 겨자씨 같을지라도 바라는 것들의 실체(실상)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외치시며, 그 믿음을 의로 계산하시고, 죄인의 목적이 되시는 구주의 공로를 통한 의를 그 믿는 죄인에게 선언하신다.

       F. 종교 개혁의 관점은 그 시대에 편만하던 자아 중심적인 관심 반경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개혁자들은 본성적 영혼불멸*의 법왕교리를 받아들임으로 그들은 그 제한된 반경의 한계를 탈피할 수 없었다.

* 루터 자신은 본성적 영혼 불멸의 교리를 개인적으로 거부 하였다. 그러나 일반 개혁자들과 특히 칼빈은 이교-교황의 이 개념에 여전히 집착하였다.

       죤스와 와그너는 재림 운동사의 초기 얼마 동안과(적어도 사도시대 이래) 그리스도교 역사 초기 얼마 동안의 참된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의 보다 더 광대한 관심을 감지(感知, to sense) 하도록 자아 중심적인 관심의 한계를 깨트려 버렸다. 이러한 보다 더 광대한 관점은 성경주석들을 정독함으로나, 개혁자들 또는 개신교 저자들의 저서들을 숙독함으로가 아니라, 분명히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의 독특한 성소 정결에 대하여 이해한 그들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발견 및 정립을-역자삽입) 가능하게 하였다. 그들이 하여야 했던 모든 것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성소 정결의 메마른 교리이었을 그 교리와 신약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개념과 관련 시키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나의 심장의 모든 섬유질마다 아멘 이라고 말하였”(원고5, 1889)던 그 여인의 열렬한 승인에 이르도록 엘렌 화잇을 고무한 그 기별을 발견하였다.

       G.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과 행위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반면에 행위들은 믿음 그 자체속에 고유하게 들어 있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works). 죤스와 와그너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강조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이 전파한 믿음은 행하였다(worked). 그러므로 그 행함(works)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그리스도인 경험을 문장으로 표시한 아주 중요한 동사를 가지고 있다면, 주님이 오실 때에 승천을 위한 준비로 항상 신자들(과 믿는 교회 단체들)을 인도하는 그 동사의 목적이 될 명사들에는 끝이 없다.

       H. 이와같이 성화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의 계속 진행되며 항상 깊어지는 실재이다. 그 두사이 희박한 구분에 대하여 지나치게 구분할 필요가 없으며, 머리털 같이 가는 차이가 있다, 혹은 없다는 지점에 동의하지 않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파문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일찍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히(충분히) 성화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그렇게 주장하는 아무 경향도 즉시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하심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다. 회개하는 시작부터 주께서 오실 때 그분을 만나는 영광스러운 경험에 이르기까지 주어진 아무 순간이라도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만을 의지한다.

             망하게 되고 잃어버린 나

            그분의 이름과, 말씀으로 용서 받았으니

            나의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을 말게 하옵소서

       I. 죤스와 와그너의 기별은 늦은비와 큰 외침의 시작이었다. -그 큰 외침은 대쟁투를 마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명예와 그를 옹호하기 위하여 보다 더 큰 관심으로 자아 중심적인 위험을 삼켜버릴 그러한 정도이었다. 이리하여 입혀주신(imputed) 의를 의지하는 개인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는데서 부여된(imparted) 의의 실증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 가운데서, 보기를 기뻐하신다는 보다 더 큰 욕망에 대한 관심으로 그 초점이 변경되었다. 1888년 기별을 주석 하면서 엘렌 화잇은 입혀주신 의는 우리의 “하늘에 들어갈 자격”인 반면에 나누어 주신 의는 우리의 “하늘을 위한 적합성”이라고 말하였다(리뷰 앤드 헤랄드 1895,6, 4). 하나님의 큰 시계가 16세기 개혁자들 당시에 결코 울리지 않았던 어떤 음을 쳐서 엄숙하게 울렸다-시간은 늦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고 포고할 때가 되었다는 음성이었다.

       우리가 겸손히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 발 아래 머리를 숙일 때, 그 영광스러운 중요성에 대하여 천진난만하게 포착하므로 우리는 모두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 한 교회로써 우리 생애에 스며드는 널리 퍼져 있는 자랑과 교단적인 자만, 잘못을 면치 못하는 남녀들을 명예롭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계속되는 그 경향, 이 세상의 기쁨과 현세의 사물에 우리가 열중하는 것-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을 얼마나 적게 이해하는지에 대한 표식들이다.

       치료제는 새로운 행위(들)의 형태로 좀더 행하는 그 무엇을 찾는 데서 발견되지 않고 믿는 어떤 것에서 발견된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아니면 아무도 믿을 수 없다. 과거와 현재의 우리 역사는 우리가 아직도 하나의 필요한 공과를 배우지 못하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 14).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하였음이라

(고전 2: 1, 2).

       참  고

       엘렌 화잇이 “입혀주신” 의에 대하여 많이 말하는 고로 언뜻 보기에 그 여인이, 전적으로 죄인 밖에서 단순히 법적인 선언으로써 입혀주시는 의를 보는, 소위 종교개혁이나 칼빈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어 왔다.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할 세가지 설명이 있다.

1. 엘렌 지. 화잇의 저서들을 많이 읽은 솔직한 학자들은 그 여인이 자주“입혀주신”과 “나누어 주신”을 서로 엇바꾸어 사용하는 것을 인정한다. 많은 문서들은 이것을 쉽게 인정한다.

2. 입혀주심(imputation)에 대한 그 여인의 사용은 신자 밖에서 단순히 어떤 사법적인 선언에 그 의미를 제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1888년 기별의 열성으로 고조되는 동안에 만들어진 어떤 문장의 이러한 실예가 있다.

       입혀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는 거룩함(holiness), 정직함(uprightness), 순결함(purity)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입혀 주신 바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받으실 만한 회개를 할 수 없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는 그 의는 사랑과 용서와 은유와 모든 그리스도인 덕성들로 구성된다. 그리스도의 의가 여기서 파악되며 우리 존재의 일부분이 된다. 이러한 의를 가지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works)을 행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결코 애착하는 죄들을 덮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 위에 있는 혼인 예복이 없이는 아무도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편지 le, 1890, 1, 14).

       엘렌 화잇 자신의 문맥으로 그 여인의 말에 대한 우리의 정의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우리의 “대리인과 보증인(보장)”이라고 그리스도에 관한 그 여인의 빈번한 문구는 사법적인 또는 법정의 사건에 제한된 일반 종교개혁자 추종자(Reformationist)들의 관점을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의 독특한 신의 본질(신성) 때문에, 마치 그분이 독특하게 응용된 어떤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을 단독으로 둘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대표자로 서셨으며 인간 대리인과 보증인 (보장) 으로써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이다(원고 1, 1892).

       엘렌 화잇은, 자신의 문맥으로 죤스와 와그너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에 대한 관점을 굳게 지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