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충동의 신에게 예배 드리는 자들
저자: 죠 크루스
예수께서는 타락한 본성이 우리를 끌어당길 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막 8:34.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적인 악습에 물들어 있는 본성의 요구에 대해서 끊임없이 거부하고 저항할 것을 호소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와 저항의 과정에서 항상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우리는 단 한순간이라고 투쟁이 중단될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육체의 충동과 소욕은 우리의 생애를 참혹한 전쟁터로 만들 것이다. 사단은 육천년 동안 유혹자로서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유혹물로 입증된 육적인 덫들을 우리의 오관 앞에 펼쳐 놓을 것이다. 개심한 자들과 개심하지 않은 자들이 공히,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는 육적인 매력에 의해서 유혹을 받게 된다. 야고보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 됨이니.” 약 1:14..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속에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죗된 본성이 여러가지 유혹이 주는 매력에 의해서 미혹 당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다음의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답변해 보자. 자신을 부인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누가 그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가? 먼저, 사전에서 (자신을) “부인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찾아보자. 사전에는 “그만두다, 허락하지 않다, 거절하다”로 정의되어 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가 타고난 본성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거기에는 오직 “예” 또는 “아니요” 라는 대답만이 있을 뿐이다. 의지는 항상 본성의 요구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절한다. 만일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기로 선택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단 하나의 권면이 있다면, 그것은 “자아를 부인하라”라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육적인 본성의 요구를 결정적으로 거절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과, 우리를 지배하게 될 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를 위한 청사진을 성경 속에 간단하고 완전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하늘에 가는 길이 담겨 있는 지도는 너무도 분명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아무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구원의 조건을 억지로 따르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원칙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을 거절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늘의 원칙들을 순종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신다. 다만 성령을 통하여 간절히 호소하실 뿐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어떤 삶의 형태이든지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대다수의 군중들을 따라 큰 길을 걸으면서 그들의 방종한 기준에 맞추어 살아갈지라도, 어떤 존재도 우리의 길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막은채 우리가 원하는 원칙들과 신조들만을 고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그러한 길을 따라가서는 결코 하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길 위에서도 우리는 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하늘에 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조건을 충족시킨 결과일 것이다.
하나님의 조건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있는가?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들을 요구하고 있는가? 결코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굴복되기만 하면 우리는 스스로 소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필요와 요구를 충복시키고도 남음이 있게 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 각자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굴복되어 있는가에 달려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오직 두가지의 선택이 제시되어 있다. 오직 두 길이 우리 모두 앞에 제시되어 있는데, 즉 그것은 넓은 길과 좁은 길이다. 두 본성이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서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다. 영적인 음성과 육적인 음성이 매일의 생애에서 매순간 마다 우리의 영혼 속에서 호소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세상의 음성이 우리들의 이성과 감정과 양심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선택을 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양자 택일의 초청들은 결코 서로 조화롭게 섞일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다. 이 길이 아니면 저 길을 선택해야 한다. 결코 중간은 없다. 둘 중에 하나를 받아들이면, 자동적으로 다른 하나는 거절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사단 중 어느 한 존재를 우리의 주인으로 선택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선택 이외에 어떤 다른 선택도 있을 수 없다. 어떤 일에 있어서는, 우리가 그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고 판단하는데에 있어서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누가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지배할 것인가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은 우리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을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다음 세상, 즉 하늘 도성의 입성에 대한 결정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진리는 우리 모두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경주에 참여 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경주에는 2등상이나 감투상이 없다. 이 경주에는 오직 승리한 자와 완전히 패배한 자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우리 가운데에 여러가지 일들이 막연하고 분명치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것을 얻고 하늘에 올라가던지, 아니면 모든 것을 잃고 영원한 사망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대한 경주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각 개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책임은 얼마나 진지하고 엄숙한 것인가! 한 마리의 작은 토끼를 쫓고 있는 일단의 개들에 관한 우화가 있다. 한 개가 동료 개들에게 얘기를 했다. “친구들아, 너희들이 뒤로 물러나 준다면, 내가 토끼를 포획하는 영예를 차지할텐데. 나로 하여금 어떻게 토끼를 잡는가에 대한 방법을 보여줄 기회를 주지 않겠니?” 그리하여 다른 개들이 뒤로 물러나고, 한 마리의 개가 그 토끼의 뒤를 쫓게 되었다. 그러나 토끼는 그 개보다 더 빨랐으므로 재빨리 도망가 버렸다. 마침내 그 개는 꼬리를 두다리 사이에 감춘채 다른 개들에게 돌아왔다. 다른 개들이 물었다. “어떻게 되었니?” 한마리의 개가 대답하기를, “그 토끼는 살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달렸는데, 나는 단지 한끼의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달렸단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을 찌르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 작은 토끼는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속도와 노력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개는 별로 손해 되는 것이 없었으므로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고, 신중함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 경주가 자신의 생명과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승리하든지 패배하든지를 상관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저들의 경주를 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아왔다. 경주에 대한 그들의 관심도는 매우 낮았으며, 경주를 하는 도중에 너무나 많는 주위 사물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고,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에 대해서는 무관심 함으로서 일시적인 충동과 환경의 조류에 쉽게 휩쓸려서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영원을 위한 경주는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었으며, 승리를 위한 분발은 사라진 바 되었다. 삶과 죽음의 엄숙한 현실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이 경주에서의 노력과 집중력에 달려 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선을 신뢰하는 가운데 전진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날마다 전투의 최전방에 서게 된다. 이 전쟁에서 오직 신중하고 엄숙하고 진실하게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자들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이 전투를 방관하거나 어중간하게 중간에서 서있기 위해서 애쓰는 자들은 결국 모두 사단의 포로가 되어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향한 사단의 공격대가 될 것이다. 어떤 누구도 이 전투에서 방관자나 중간에 서있는 자로 남아 있을 수 없다. 모든 영혼은 한 편에 속하거나 다른 편에 속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투쟁들이 우리의 의지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의롭게 살 것인가와 불의하게 행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매 순간마다 우리는 우리의 속에서 외치는 감정의 절규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양심의 호소에 동의해야 한다. 우리는 충동에 의해서 살아가든지 원칙을 따라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애에서 실제적인 왕이 되시든지, 아니면 사단이 우리가 섬기는 실제적인 군주가 되는 것이다.
독자들은 오늘 그대들의 생애를 누가 지배하고 다스리는지를 알기 원하는가?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결국에 가서는 행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결국에 가서는 선택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의 죄는 다음의 두가지 중 하나에 속한다. 우리가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나 내 자신의 이기적인 충동들을 만족시키고자 할 때, 죄는 형성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죄는 하나님 보다 세상이나 자신의 육에 속한 쾌락을 더 사랑함으로써 발생된다. 모든 비도덕적이고 불순결한 것들이 여기에 근원을 두고 일어나게 된다. 누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우리의 애정과 사랑을 차지하는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이신가? 아니면 그대 자신이나 세상인가?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오직 한 주인 즉,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함으로서 시작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중에 으뜸이 되시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드릴 수 있을 만큼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생애는 죄와 상관없는 것이 될 것이다. 죄는 우리 자신을 애지중지 하느냐, 아니면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것인가에 달려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하고 잊지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거듭나고 영적인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아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위로부터 거듭난 자만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 부터 거듭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을 계명을 순종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다는 그들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환상적인 것이고, 따라서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소유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의 마음은 육적이고 이기적인 상태로 남아있다. 오직 신의 성품에 참예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만이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으며, “항상 승리” 할 수 있게 되어 사단의 가장 극렬하고 치명적인 공격 하에서도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굴복한 영혼은 패역한 세상에서 예수께서 붙드시는 당신의 성채가 되며, 당신의 권위 이외의 어떠한 권위도 그 성채에서 알려지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하늘의 능력으로 소유함을 입은 영혼은 사단의 공격 앞에 함락되지 아니한다….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와 계속적인 교통이 없이는 우리는 원수에 내맡겨져서 결국에는 그의 명령을 쫓게 될 것이다.” 시대의 소망, 2권, 46,47.
유혹의 결과로서 생기는 두가지의 반응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원수에 대해서 난공불락의 성채가 되든지 아니면 원수의 지시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 둘 사이에 그토록 분명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참된 개심과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교통에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 마다 하나님의 뜻에 계속적인 굴복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얼마나 절실히 필요되는 일인가! 기도와 성경 연구를 통한 하나님과의 매일의 실제적인 접촉없이는 아무도 죄에 대해서 함락될 수 없는 성채가 될 수 없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쟁탈하려는 사단의 교묘한 공격에 대해서 살펴보자. 모든 감각 기관이 공격을 받고 있지만, 유혹에 가장 민감한 부분은 시각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눈은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 6:22). 눈을 통하여 마음 깊숙히 들어온 것들이 온 몸을 더럽힐 수 있다는 의미를 독자들은 이해하는가? 한 예로서 간음을 생각해보자. 모든 다른 죄들처럼 간음도 생각이나 상상으로 움트기 시작된다. 바울은 죄에 대해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악한 생각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보지 않았어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생성되게 되며, 이렇게 생성된 악한 생각들로 부터 공공연한 죗된 행위가 발전된다고 보는 것이 거의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보느냐 또는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는 실제적인 면에서 죄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죗된 행위가 육체적으로 행하여지기도 전에 이미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두렵지만 중요한 일이다. 죄가 이미 정신과 양심 속에서 범하여졌으면, 육체는 그것을 행위로 옮기기 위해서 적당한 기회를 엿보는 상태로 대기하고 있다.
사단은 인간의 마음과 의지를 지배하기 위해서 고도의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감각을 이용하고 있다. 창세기에는 이 점에 관한 뚜렷한 증거가 나와 있다. 인간을 범죄하도록 만든 첫번째 시도에서 사단은 이 방법을 전적으로 사용하였다. 하와가 선악과 나무 아래에서 뱀에게 유혹받았을 때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사단이 얼마나 강력한 감각적 매력을 가지고 하와를 유혹하였는지를 알게 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여기에서 우리는 시각, 청각, 그리고 미각의 독특한 조화를 보게 된다. 하와는 그 열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사단은 항상 죄악의 행로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사단은 죗된 길을 항상 논리적이고 타당하며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러한 장식으로 꾸며 놓는다. 그러나 옳고 그름은 외관이나 느낌 그리고 미각에 의해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감정은 우리가 보고 듣도록 자신을 허용함으로써 생성되고 발전된다. 사단은 하와로 부터 자만과 헛된 생각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과장된 말을 하였다. 그녀가 보고 들은 것은 그녀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감정에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의 말씀과 천사들의 경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자제력은 무너졌고, 유유하고 재빠른 불순종이 뒤따르게 되었다. 그 열매의 맛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하와는 자신이 그것을 먹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믿을 수 없었다.
에덴 동산에서 있었던 슬픈 이야기에는, 사단이 장차 펼칠 유혹과 공격 형태가 분명하게 공개되어 있다. 구약 성경은 사단의 정복들에 관한 이야기 들로 가듣차 있으며 그러한 사건들의 대부분의 배후에는 감각적인 매력을 이용한 비열한 음모가 있었다. 하와가 나무 앞에서 쳐다보고 서있었던 것과 같이 다윗도 하루는 지붕 위에서 옆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만일 다윗이 그때에 충동 대신에 원칙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다면, 다윗이 범한 그 수치스런 사건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하와처럼 눈이 멀고 판단력을 잃어버릴 때까지 그 모습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는데에 있다. 그처럼 강하고 인격적으로 고결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을 계속적으로 쳐다보고 있음으로써, 그는 사단의 손에 맡겨진 한 덩어리의 진흙으로 된 인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흥분된 감정이 지시하는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감정과 느낌이 시키는대로 그 여인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여와 간음하게 되었고, 그러한 자신의 죗된 모습을 위장하기 위해서 여인의 남편을 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한가지 죄는 또 다른 죄를 불러오는 강력한 밑바침의 역할을 하게 된다.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감각적 통로를 통하여 공격하여 왔다.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비극적 타협과 패배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여행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일한 사단의 공격에 대해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굴복하였다. 그들은 이방나라의 근방을 지나가면서 이교 신전에서 벌어지는 선정적인 예배형태를 보면서 유혹받게 되었고, 그들도 그러한 예배 방식을 흉내내게 되었다.
우리는 바알의 숭배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분노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으로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당하게 될 까 하노라.” 신명기 7:25-26.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하였는고 나도 그와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신명기 12:3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숭배의 기구들을 그들의 성막과 집으로 가지고 오는 것을 엄격히 금하셨다. 특히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관련하여 사용하지 말 것을 명하셨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방 숭배의 매력적인 잔존물들에 대해서 동일한 기준과 표준으로 정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로마의 태양 숭배로 부터 도입된 이교의 일요일 신성화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우상 숭배와 영혼 불멸설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교의 태양신에 대한 특별한 헌신을 약속하는 표인 결혼 반지는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실까? 나는 종종 현대 신학자들이 그러한 관습들에 대해서 내리는 맥빠진 해석들을 들으면서, 고대 이스라엘이 범했던 죄악의 역사를 지켜보았던 천사들의 귀에는 그러한 신학자들의 말들이 어떻게 들릴까를 생각해 본다. 몇 년 또는 수백년의 세월의 흐름이 하늘의 증인들로 하여금 이교의 우상 숭배로부터 그리스도교로 진화되어 들어온 과정을 잊어버리게 만들 수 있을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교 숭배의 관능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변 국가들과 관계를 맺지 않도록 명하셨다. 그리하여 서로 간의 혼인이 금지되었다. 가나안에 거주하던 모든 이방 족속들이 쫓겨나든지 멸절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접촉함으로써 오염되지 않도록 취하신 강력한 조치에 대해서, 우리는 오늘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녀자, 아이들, 그리고 유아까지라도 모두 멸할 것을 명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죄와 반역으로 인하여 마음이 강팍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유혹의 원천인 그들을 남겨 두실 수 없었다. 거룩하지 않은 것들을 분리시킴으로서 거룩함을 보존토록 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의 엄숙한 조치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전달하는 한 통로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이었다. 그분의 성품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죄를 이기고 세상에 그분의 의를 반사할 민족이 필요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외부의 자극에 대해서 쉽게 꿈틀거릴 수 있는 본성의 민감한 반응을 아셨으므로,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승리하고 성화되는 경험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주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이방 국가들의 타락한 영향을 멀리하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현대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동일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실까? 그분께서는 당신에 대한 사단의 고소를 반박할 수 있는 남은 백성을 여전히 필요로 하시며, 원하시고 계실까? 오늘날에도 당신의 완전한 의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하여 타락하고 육적인 세상으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분리시키는 일이 요구되고 있을까? “이방인들에게 동화되지 않기 위해서 히브리인에게 주어졌던 경고는 그리스도인에게 불경건한 자의 정신과 습관과 일치하게 하지 않도록 금한 것에 못지않게 직접적이고 분명한 것이었다.” 부조와 선지자, 하권, 82.
오늘날 이 시대의 죄악도 고대 이스라엘 시대의 범죄와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형벌이 없었다고 해서 그분께서 동일한 죄에 대해서 관용하신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는 그분의 변치않는 표준을 우리 모두에게 알려주고 있다.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이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 5:29).
여기서 예수께서는 눈이 보는 것, 손이 행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우리의 지체들이 엄격히 제어되고 훈련되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오늘날의 안일하게 환경에 따라서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신과 얼마나 대조적인 말씀인가? 현대 신학자들은 우리의 행위, 보는 것, 먹는 것, 입는 것 등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들에 대해서 아무런 강조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배우고자 하는 젊은 청년들에게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율법주의이며, 행위 위주의 신앙이 된다는 경고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을 믿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상과 가르침은 실천적 경험과 순종을 바탕으로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심각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단이 인간의 생각과 의지를 정복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공격 통로를 꿰뚤어 보시고 계심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를 죄로 유인하거나 유도하는 모든 영향들을 뿌리채 잘라버리는 강력하고 실제적인 단호한 조치가 필요되고 있다. 죄를 버리고 없애는 사업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 일은 우리의 날마다의 생애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우리의 온 몸과 혼을 지옥 불에 잃기 보다는 우리에게 육체적인 감정과 느낌과 일시적인 감각을 일으키는 감각 기관을 상실하는 것이 오히려 유익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