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저자: 럿셀 스탠디쉬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그분의 참된 안식일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모든 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입니다. 안식일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대한 참된 진리를 전할 때, 그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엄숙한 시험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는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은 진리를 깨달은 기쁨을 만끽하지만, 동시에 생계와 직장에 대한 위협과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 신실한 목사들은 새로운 신자에게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격려합니다. 그리하여 새롭게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인이 된 신자는 안식일에 대한 진리로 인해서 직장을 떠나게 되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직장을 공급하여 주실 것을 믿음으로 믿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새롭게 안식일 진리를 발견한 초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셨는가에 대한 아름다운 간증을 하시는 모습과 이야기를 수없이 보고 들어왔습니다. 진리를 고수했던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 되는 모든 것들이 적당한 때에, 적당한 방법으로 공급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편 37:25.
성경의 진리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목사들은 두려움 속에서 떠는 초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애를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새로운 수입원을 제공해 줄 것이라는 신뢰를 그들에게 가르쳐주고자 애씁니다. 그리고 신실한 목사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위해서 버리는 직장과 월급보다 훨씬 나은 새로운 일터를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목회를 통해서 수없이 보아 왔다는 격려의 간증을 초신자들에게 들려줍니다.
그런데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매우 슬픈 모습들을 보아 왔습니다. 초신자들에게 그토록 신실하고 강력한 믿음을 격려했던 목사들이, 참된 복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생계가 위협 받게 될 때는 너무도 무기력했습니다. 초신자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고무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목사들이, 초신자들이 겪었던 것과 유사한 경험 즉, 진리로 인해서 자신의 직장이 위협 받게 될 때, 힘없이 흔들리다가 주저 앉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수많은 신실한 목사들에게 이러한 순간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의 목회를 위해서 하나님께 안수 받은 모든 신실한 목사들이 두 길을 앞에 놓고 결정해야만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신실한” 목사들은 현대 진리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소홀히 여기거나, 신신학을 신봉하고 있는 목사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언급하고 있는 “신실한” 목사들은 현대 진리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신신학의 정체를 인식하고 있고, 하나님의 보상과 심판을 믿고 있는 목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신실한 목사들이 결정해야 할 순간이 다가 왔습니다. 그들의 한 손에는 각종 혜택과 은퇴 후의 보장된 생활, 그리고 안정된 직장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손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와 표준에 대한 충성, 그리고 안수 받을 때 하나님께 드렸던 엄숙한 서약이 쥐어져 있습니다.
믿기 어려운 사실은, 목사들이 남은 교회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초신자들에게 촉구했던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자신들에게는 적용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수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모든 종류의 가증한 죄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즉, 공공연하고 대담한 배도적인 가르침, 말할 수 없이 낮아져만 가는 표준들, 행정의 불공정성, 부당하고 세속적인 정책들,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세속적인 선거 풍토, 이러한 모습들을 정확하게 보고 있는 수 많은 목사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안수 받은 종으로서의 의무보다는 대회와 합회에 속한 직장인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행정자들은 남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악을 견책하고 책망하는 사역자들을 겁 없이 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성결한 의무를 등한히 하게 될 때,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인 순수한 개혁과 부흥의 외침을 다른 이들이 일어나서 외치면, 그들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외치는 자들을 핍박하였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의로운 사업의 깃발을 든 자들을 핍박하고 징계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죄인들만이 사단이 즐기는 핍박이라는 수단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단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에 활동적으로 봉사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모욕과 불확실한 자신의 장래의 위험을 감수하는 목사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한 목사들이 극히 드문 현실을 우리 모두는 보게 됩니다. 나는, 오직 극소수의 그러한 목사들을 만나 보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서 모든 위험을 감수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그러한 봉사를 “희생”이라고 당신의 기억 속에 기록하실 것을 믿습니다. 여기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습니다. “남김이나 숨김 없이 크게 외쳐야 할 수백, 아니 수천의 목사들은 어디에 있는가?” 대다수의 목사들은 “짖을 수 없는 벙어리 개”가 되어 버렸습니다(사 58:10, 교회 증언 5권 211).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목사들을 내려다 보시면서, 가장 엄숙한 경고와 심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깨달음이 없는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유익만 도모하며.” 사 58:10,11.
이러한 목사들은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배도를 인식하고 있는 목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혀가 마비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께 선택함을 받은 유대교회 안에는 “두려움”이 만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고대하는 지금, “유대인들의 두려움” 보다 더 큰 “두려움”이 하나님의 남은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분명 지금은 일어서서 의무를 수행해야 할 때입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에 속한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초림의 교훈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눈이 멀어 있음을 아무도 정직하게 부인하지 못하리라 믿습니다. 그 당시에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로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되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요 12:42.
영감의 기록은 그들의 그러한 목회적 실패의 이유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상동 43.
심지어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과 같은 훌륭한 사람들도 구세주께서 그토록 애쓰셨던 개혁 사업에 대한 믿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니고데모와 요셉 같은 목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위해서 백성들을 준비시킬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 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두려움”을 던져버리고 무기력한 혼수상태로부터 담대하게 일어서는 사역자들의 장래를 하나님께서는 책임지실 것입니다. 동료 목사들과 행정자들의 눈을 두려워하는 자마다 마지막 시대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목사들을 위협하는 사단의 최고의 무기는 고작해야 직장을 빼앗는 것이 될 뿐입니다. 남은 교회의 목사들의 양심을 조종하기 위하여 사단이 사용하는 무기는 고작해야 해고나 부당한 행정적 조치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가장 유치한 무기가 하나님의 종들에게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맺고 있는 모습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목사들을 “두려움”으로 떨게 만드는 것은 구세주에 대한 사랑의 결핍입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은 빛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던지느니라.” (요일 4:18/영문성경 번역).
또한 같은 성경절에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목사들에게 이러한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수치가 되겠는가! 또한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은 또 다른 일면을 “두려움”에 떠는 자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선생이 되고자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 1:7.
목사가 초신자들에게 믿음과 신뢰에 대해서 가르쳤지만, 그것이 자신의 생애에는 적용되거나 실행되지 않은 다면,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목사들이 영혼의 원수인 사단의 음성을 듣는 대신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목회는 그것의 위탁 받은 바를 배신하였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와 야곱 집의 죄에 대해서 나팔같이 목소리를 드높이지 않고 있습니다. 1973년 당시 대총회장이었던 로버트 피얼슨 목사는 1973년 연례회의를 마감하는 결론을 서술하면서, 그 당시의 모든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을 불순종하고 있는 모습을 지적하였습니다. 20년 전에 대총회장의 그러한 지적이 사실이었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득세하고 있는 불순종의 세력들은 얼마나 위험한 수준이겠습니까? 우리의 잘못된 목회로 인해서 소망없이 사라져간 시체들을 우리는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목사로서의 우리는 진실로 회개해야 되며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조용히 덮어서 감출 수 있겠습니까? 행정적인 요구와 압력에 굴복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수많은 목사들은 지도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보다는 도덕적 담력을 가지고 일어서는 동료 목사들과 평신도들을 “사랑이 부족한 자들”이라고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 속에 영혼들에 사랑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버리고 일어선 사람들을 “사랑이 부족한 자들”이라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사들은 예례미야 26장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신실하고 용감한 종이 예례미야에게 악을 행하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그들보다 나은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월감을 가지고 예례미야에게 악을 행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은 교훈을 자신의 생애에 적용하는 일에는 항상 실패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다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에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라고 공언합니다(마 23:30).
이러한 목사들은 심각한 기만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자들을 핍박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종들을 그분의 사업에서 격리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어떤 행정자들은 교회를 지배하기 위해서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전력을 사용합니다. 만일 그들이 그러한 정신을 버리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에 그들은 하나님의 성도를 향한 가장 무서운 원수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환란이 오고 그러한 정신을 수유하고 있는 종교인들에게 국가의 권력을 이용할 수 있는 법이 제정될 때,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성도를 잡아주게 될 것이라고 영감의 기록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잘못을 정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진리를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미혹 가운데 있는 자들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복음”을 은근히 싫어하며, 그러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설교를 교회 안에서 듣기란 점점 더 어렵게 되어 갑니다. 이러한 미혹 가운데서 방황하는 목사들이 세계적으로 교회 안에, 그리고 학교 안에 점점 더 넓게 퍼져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행정자들에 대해서는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하심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목사들이 거의 모든 대회와 합회에서 주된 세력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악인들은 재앙을 받게 될 때 몹시 화가 났다. 그것은 바로 가공할 만한 두려운 고통의 광경이었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자녀들은 부모들을 그리고 형제들은 자매들을, 자매들은 형제들을 서로 가혹하게 책망하였다. 사방에서 통곡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 재난을 면하게 해 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사람은 너였다.” 백성들은 그들의 목사들을 향하여 심한 욕을 퍼부으며 비난하기를 “너희들은 우리에게 경고를 주지 않았다. 너희들은 우리에게 온 세상이 다 돌이키게 될 것이라고 말했으며 일어나는 모든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고 외쳤다. 너희는 우리에게 이 때에 관하여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들은 우리에게 경고를 준 자들에게 우리를 괴롭히는 광신자들이요 사악한 자들이라고 하며 저주했다.” 그러나 나는 목사들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음을 보았다. 그들의 고통은 그 백성들보다 열 배나 더 컸다.” 초기문집 영문, 282.
수백만의 평신도들이 자신들이 다니는 목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진리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평신도들이 성경과 예언의 신을 연구하기를 포기한 채 목사의 말의 지배를 받기를 기꺼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인간에게 최종적인 권위를 두는 로마 천주교회의 정신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평신도들을 저주 아래 두고 계십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사야 2:2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렘 17:5.
오늘날, 우리 백성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호와께 고통을 드리는 죄를 지적하는 견책의 기별을 더 이상 듣기 원하지 않습니다. 곧바른 증언을 싫어하는 목사와 세속적인 안전감에 도취되어 있는 평신도들이 한 교회에서 매주 만나는 것은 가장 비극적인 저주가 될 것입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겔 3:17,18.
1991년 10월, 호주의 퍼스 시에서 개최되었던 대총회 연례회의에서 진리를 지지하거나 잘못을 견책하는 모든 자영 선교 사업에 대한 전쟁이 공포되었습니다. 1992년, 잇슈(논점)이라는 책이 북미지회에 의해서 출판되면서, 성화, 그리스도의 인성, 죄의 본성과 같은 중요한 가르침을 “미해결된 신학적인 문제들”이라고 표현하는 지도자들의 불신이 공개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들은 우리가 옛부터 믿어온 성경적인 진리들을 “그것들은 아직 교회에서 정의하지 않았으며, 영혼들의 구원에 필수적인 가르침이 아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잇슈 109).
그들의 그러한 주장이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북미지회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타난 그분의 희생과 공로가 인간의 마음과 생애에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두려움”은 대다수의 목사들과 평신도들로 하여금 지도자들의 “안내”를 아무런 느낌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의 고귀한 기별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달 될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 속에 잠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남은 교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두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기별을 짊어지고 나아갈 남녀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많은 재림 교인들이 알고 있는 바지만, 대총회의 종교자유부장은 바티칸으로 글을 써 보냈는데, 그 글에는 1990년 7월에 미국의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된 대총회에 참석하여 재림교인들에게 바티칸의 인사를 전달할 한 명의 대표를 알려달라는 요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 천주교회의 사제인 토마스 멀피(Thomas Murphy)가 지명되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인 연합을 위한 주교 대학”의 책임자였습니다. 그 대학의 설립 목적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로마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당시 한 명의 대표로서 대총회에 참석하였던 나는 그 사제의 따뜻한 축하의 말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어두운 순간이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교인이 나를 찾아왔는데, 그는 교단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바티칸의 사절이 대총회에 참석했던 것이 사실인가를 설명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사실을 설명해 주었지만, 그 교단 종사자는 내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남은 교회의 대총회에서 바티칸의 사자가 연설했던 사실을 그 교단 종사자는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형제는 나에게 “증거물”을 요구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을 무조건 “좋은 사람들”로만 간주하는 인간적인 애착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판단하는 일 없이 지도자들의 말을 따라가도록 만듭니다. 나는 교단에서 일하는 그 형제에 대해서 한가지 “예언”을 했는데, 그것은 그 형제가 부인할 수 없는 “증거물”을 보게 되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그는 내가 직접 보고 들었던 말을 믿기 보다는 교회 지도자들의 “착함”을 더욱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내가 1990년 7월 13일자 리뷰지에 실렸던 “증거물”을 그에게 제시했을 때, 그는 나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을 타당하고 올바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고심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나에게 “다른 교회에서 온 대표자들의 축하 인사는 없었습니까?”라고 물었고 내가 타락한 바벨론의 사자들도 약 9명 정도 참석했다고 말해주었더니, 그는 “그렇다면, 로마 천주교회의 대표도 참석하는 것이 공정한 처사가 아닙니까?”라고 설명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교단에서 일하는 그 형제의 관점으로 본다면,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결코 잘못을 범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소리 높이 외쳤던 사람들도 당시 유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하여 유사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의 지도자들의 결정이 결코 잘못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978년 대총회 연례회의에서 있었던 로버트 피얼슨 대총회장의 고별 설교에서, 그는 앤드류스 대학과 로마린다 대학의 신학원을 향하여 재림 교회 안으로 바벨론의 포도주를 더 이상 가지고 들여오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를 공적으로 남겼습니다(리뷰지, 1978년 10월 26일자). 그러나 그 이후, 교회는 점점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재림 교회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각종 교리마다 이설과 불신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와 영혼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마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결심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사 62: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31, 32.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일 “영원한 의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대들의 가정과 교회에서 죄를 억제하는 가운데 하늘의 대리자들과 협력하지 않고 악의 조류에 기꺼이 휩쓸려 가기를 바란다면, 그대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가려뽑은 기별 1권, 영문 374.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히브리서 11:6절의 말씀을 우리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영혼을 파괴시키는 오류와 배도를 정죄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서 확고하게 일어서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과 이유를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악의 모양을 책망하고 견책하기 위하여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주셨던 기별과 같은 사명을 어떤 교회의 사자가 받았다면 그 기별은 인간 대리자들을 통하여 부주의함과 패역함과 죄를 책망하여 백성들로 회개하고 죄를 자복하기에 이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결코 죄를 숨기려 하지 말 것이다. 견책의 기별 가운데 처음과 나중이시며 만유이시고 만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 상동 영문, 380.
나는 지금 내 뼈의 골수까지 재림 교회를 사랑하는 심령을 가지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지상에 남아 있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교회 안에 만연되고 있는 부패와 타락함으로 인해서 나의 마음은 아프고 쓰라린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악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 하나님의 남은 교회 안에 선택 받은 백성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에 대해서 기도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들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것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감의 기록을 깊이 명상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고대 선지자들은 그들의 시대보다도 우리의 시대를 위해서 더욱 많은 말씀을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예언은 우리를 위해서 유효한 것이다.” 가려뽑은 기별 3권 338.
이사야의 예언은 그 당시의 고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오히려 현대 이스라엘에게 더욱 더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오늘날의 우리 시대를 바라보면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슬픔을 토로하고 있는 모습을 묵상하여 봅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 1:2.
이사야를 통하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별은 점점 더 심한 슬픔과 탄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사 1:4,5.
우리는 더욱 더 패역할 것입니까? 비참함과 참담함이 우리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바로 보아야 할 때가 이미 지났습니다. 교회의 전체적인 참혹함을 보시면서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 같았으리라” 사 1:9.
주님을 찬양합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very small remnant) 두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랑하는 목사들과 평신도들이시여,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더 이상 배도의 편에 동참하지 말 것을 호소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각 개인이 “유대인의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릴 때까지, 우리는 첫째 천사의 기별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를 강력하게 선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