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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콜린 스탠디쉬

 그리스도인 교육을 지지하는 많은 진지한 지지자들은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인 교육의 청사진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고 해서 별로 놀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 교육을 마련하신 계획을 욕하는 자들은 그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교육 개혁을 추구하는 자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데 사용한다. 과거에 “청사진”이란 낱말이 너무도 흔히 사용돼 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 낱말이 엘렌 화잇에 의해 자주 사용된 낱말이라 생각해 왔다. 어떤 이들은 엘렌 화잇이 그 용어를 어디에 사용하였는지 보여 달라는 도전을 받을 때 좀 당황하거나 당혹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교육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정한 계획을 반대하는 적으로서 자신들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그런다고 해서 아무 말도 못하거나 혼란을 초래할 필요는 없다.
 엘렌 화잇이 청사진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으셨으나 “양식”과 “모델”이란 용어는 사용하셨다. 여기 몇 개의 예가 있다:

 “창세시에 제정된 교육제도는 모든 후세를 통하여 인류의 교육을 위한 모범[model]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교육, 26; 모든 강조는 필자가 한 것임).

 “에덴동산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온 당을 두시고서 그처럼 되게 하시고자 하시는 희망의 표현이었는데 인류의 가족의 수가 증가되는데 따라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본을 따라서 저희가 다른 가정과 학교를 세우도록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이었다”(상동, 28, 29).

 “사정은 변하였으나 참된 교육은 역시 창조주의 계획 곧 에덴 학교의 계획을 따르고 있다…….”
 “교육의 대원칙은 변함이 없다.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시 111:8) 대개 그것이 하나님의 품성의 원칙인 까닭이다”(상동, 30).

 “만일 우리의 기관들이 하나님께서 그 기관들이 마땅히 되었어야 할 상태에 있다면 그 기관들과 연결된 자들은 세상기관들의 모본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표준에 의해 다스려지며 조절되는 독특한 기관으로서 존재할 것이다”(FE, 502).

 “애본데일 학교는 세상 학교들처럼 되도록 설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로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의 본보기가 되는 학교로 세우신 것이었다. 이 학교는 어디까지나 모범적인 학교가 되어야 했으므로 이 학교를 운영해 나가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야 했으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은 버려야만 하였다”(부모와 교사와 학생들에게 보내는 권면, 349).

 “호주에서 우리들이 교육기관을 설립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는 이 학교가 과거에 세운 어떤 학교의 모본을 따라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다. 이 학교는 하나의 본보기가 되어야만 하였다. 이 학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계획을 따라 조직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사업을 번영케 하셨다.
 “나는 우리 교육 사업이 과거에 우리가 세운 학교들을 위하여 채택된 방법들을 따라서는 안될 것을 보았다”(상동, 443).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참된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해 어떤 의심을 품도록 남겨두지 않으셨다. 온 시대를 통하여 본보기 학교들은 설립되어 왔다. 이 학교들은 에덴동산에 설립되었던 학교, 모세의 교육제도, 선지자 학교들,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적용된 교육원칙들, 그리스도교 시대 당시에 켈트족의 학교들을 포함한 몇몇 충실한 학교들, 왈덴스인들의 학교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학교들을 포함한다. 재림교회의 두 학교들이 특별히 하나님의 완전한 양식을 따라 고안된 학교들이었는데, 그 두 학교는 교단이 운영하는 학교인 애본데일 대학과 자급선교 학교인 매디슨 대학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인 교육자로서 가졌던 가장 환멸을 느끼게 했던 경험중 하나는 1976년에 앤드류스 대학에서 북미의 고등교육 회의(North American higher Education Convention)에서 있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 나는 콜럼비아 유니온 (삼육)대학의 학장이었는데, 여러 대학들의 학장들만이 모인 비밀회의의 한 회의에서 한 학장이 귀에 거슬리는 발언을 한 것이다. 그 발언에서 그는 그리스도인 교육에 있어서 어떤 청사진이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는 우리 대학들은 교회 내에서 적당하게 절충하는 절충주의를 반영해야 할 것이라는 신조를 표현했다. 그는 우리 대학들이 젊은이들의 영적인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명확하게 표현했다. 그는 그러한 영적인 훈련은 초등학교나 혹은 기껏해야 중등학교에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 교육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그 같은 발언을 우리 (삼육)대학 학장들 중 한분에게서 듣는 것은 참으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놀랍게도 다른 학장들이 그 학장의 말을 옳게 여겨 반응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 같은 발언에 아무 반박이 없는 것에 깜짝 놀랐다. 나는 내가 말하려는 것에 대해 지지를 덜 받을 것을 느꼈지만 하나님의 원칙들을 옹호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이 필요하리라 느꼈다. 나는 그때 이런 식으로 말한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우리 대학들에 들어오는 많은 학생들이 영어와 수학에 있어서 뒤진 것을 뒤늦게 발견해 왔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그들이 8살일 때 처리 할 수 있었다면 훨씬 더 나았을테지만 우리는 그들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특수반을 두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대학에 들어오는 많은 숫자의 우리 학생들은 아직 그리스도와 그분을 위한 봉사에 자신을 바치지 않은 학생들이라는 것이 제가 관찰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의 대학도 저희 대학과 마찬가지라면 총 학생들 중 12%는 재림교인이 아닌 학생들이며, 또한 상당한 숫자의 다른 학생들은 재림교인이긴 하지만 재림교회 학교의 분위기 가운데서 처음으로 공부하는 경험을 갖는 학생들입니다. 우리가 뒤로 물러서서 이러한 젊은이들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이 학생들 대부분에게는 자신들이 재림교회 교육기관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아야만 할 마지막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 학교들은 그 학교들을 세울 당시에 이스라엘에 있었던 배도를 적당히 절충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나는 본보기 학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선지자 학교들은 그 학교들을 세울 당시에 이스라엘에 있었던 배도를 적당히 절충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엘렌 화잇은 말했다. “이런 학교는 당시에 널리 퍼지고 있은 타락에 대한 방벽이 되어 청소년들에게 지적, 영적 행복을 주어서 하나님을 국가의 지도자로서 또는 모사로서 그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능력이 있는 인물을 사회에 내어 보냄으로 국가의 번영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을 위하여 사무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총명이 있고 근면한 일단의 청년들을 모았다”(교육, 59, 60).

 나는 계속 말했다: “그런고로 오늘날의 우리 학교들은 우리 청년들을 교육시켜 그들이 하나님의 남은 교회 내에 광범위한 부흥과 개혁을 가져오도록 하기 위해서와, 이 세상 방방곡곡에 구원의 기별을 가지고 갈 마지막 세대를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내 앞에 말하셨던 학장의 말에 대한 반응과는 현저하게 대조된 침묵이 내 말에 대한 대부분의 학장들의 불편한 감정을 잘 말해주는 무언의 증언이었다. 그 회의가 끝난 후 한 학장이 내게 와서 내가 했던 말에 감사를 표했다. 나는 그도 그 회의에서 나와 함께 한마디 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모든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오늘날 이 세상에는 교육에 있어서 두 가지 극단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닌데, 이는 바울도 똑같은 상황을 직면했었던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1-25).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계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고전 3:18, 19).

 바울의 시대에 세상은 로마가 군사적 세력으로 지배하고 있는 반면 그리스의 문명과 교육이 그 정신을 주관하고 있었다. 심지어 강력한 법을 제정하여 로마의 엘리트 젊은이들이 그리스의 유명한 교사와 철학가들의 발밑에서 교육받게 하기 위해 보내는 것을 금하였으나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는 여전히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분주한 상거래의 장소인 고린도에서의 바울이 회심시킨 자들에게서 그리스 교육이 탁월하다는 신조를 제거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랍비 학교들에서 그 같은 사상을 배운 유대인 회심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단순성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움을 발견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모든 학문적인 훈련에서 자신이 배운 교육을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능력 있는 사도가 될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지 말아야만 했던 것을 인식했다. 이는 그가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고잔 3:19)을 이해한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바울이 직면했던 문제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을 직면한다. 적어도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이 세상의 학교들에서 교육받아 왔다. 우리는 모두 작고 독특한 한 교회에서 비천하게 시작한 것에서 이제 세상의 학자들보다 더 월등하게 경쟁할 수 있게 될 수 있다는 일종의 지성적인 행복감을 즐겨왔다. 우리는 하바드, 옥스퍼드, 하이델버그 등 이 세상의 우수한 기관들의 수준이 우리 자신들의 학교들과 대학들을 포함한 다른 모든 학교들의 수준을 측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모욕을 돌려왔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보통 수준에 머물러버렸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데 있어서의 우리의 불성실과 신뢰심의 부족을 세상 사람들에게 말없이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 왔다. 선택은 단순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이 지혜라고 부르나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택하든지. 세상이 어리석음이라고 부르나 하나님께서는 지혜라고 부르시는 것을 선택하든지 양자택일이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전자를 선택해 왔다. 우선 우리가 인정해야만 하는 것은 세상 교육에도 진실되고 선한 것이 많은데, 그 세상 교육이 위험한 것은 그 같은 논리가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실이다. 종종 우리는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가 진리와 오류, 혹은 선과 악간의 전투가 아니라, 한편에 있는 순수한 진리와 선과 다른 편에 있는 오류가 섞인 진리와의 전투인 것을 잊어버린다.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는 진리와 오류, 혹은 선과 악간의 전투가 아니라, 한편에 있는 순수한 진리와 선과 다른 편에 있는 오류가 섞인 진리와의 전투이다

 에덴동산에 있던 금지된 나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에게 오직 신령한 진리만이 있는 더럽혀지지 않은 교육을 주셨다. “당신의 자녀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친히 저희 교육을 지도하셨다. 저희는 때때로 하나님의 사자로서 오는 천사들의 방문을 받고 그 권면과 교훈을 받았다. 때로는 저희가 서늘한 때에 동산을 산보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대면하여 교제하였다”(상동, 27).

 사단은 하와를 진리와 오류가 혼합된 것으로 함정에 빠뜨렸다. 진리는 그녀가 불순종의 발걸음을 한번 디디면 악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고, 오류는 그녀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단은 하와로 선과 악이 섞인 지식은 축복이 되며 또는 하나님께서 이 나무의 열매를 따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결국 큰 유익된 일을 주지 않고 계신 것으로 보도록 하려고 희망하였다”(상동, 31).

 그 첫 번째 기만이 있은 후에 사단은 사람을 기만하기 위한 그의 노력들에 있어서 오류를 진리에 짜 넣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는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딛 1:2)보다 굉장히 유리한 점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기만과 재앙을 초래하기 위하여 오류를 진리에 한량없이 섞어 넣을 수 있는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마음과 생애에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아는 자들만이 그의 공격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컵의 깨끗한 물이 한 방울의 쥐약에 의해 독물이 되는 것처럼 가장 적은 분량의 오류가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시키는 것이다.

 아마 우리 교회 내에서 오늘날 들려오는 가장 위험한 말은 “그 안에도 많은 진리가 있다”일 것이다. 그 말은 그 안에 어떤 오류가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해주는데, 그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깨게 하여 그러한 것이 사단의 기별임을 알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의 자녀들이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교육, 그들로 하나님의 왕국의 왕자와 왕녀들이 되기에 적합하도록 준비시키는 교육을 받을 것을 요구하신다. 이 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한 원칙과 조화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진정한 교사이심을 인정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 14:26).

 인본주의와 세속주의가 오늘날 세상의 교육제도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고 있다. 많은 것들, 특별히 인본주의는 심지어 그리스도인 교육자들에게까지도 매우 매혹적으로 보이는 데, 이는 인본주의가 사랑과 인간의 가치에 그 중점을 두는 대문이다. 그러나 그 근원을 보면 그것은 사람 중심이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단에게서 온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단순하고도 신뢰하는 관계를 계발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배운 자들이 육체의 팔을 더욱 의존하도록 인도한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결국에는 자아의 가치를 파괴하게 되는 인간적 성취의 공허한 자만으로 이끈다. 참교육은 우리 자신 속에는 선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셔서 가치있게 보시는 것을 인정한다. 이러한 가치는 우리의 “성공”이나 “실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인간적 성취의 공허한 자만과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아의 가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을 인정하는데 달려 있다.

 대부분의 교육제도는 소유, 재산, 권세, 칭송, 위신, 인기, 자부심과 같은 물질적인 목표 위에 건설되었지만 그리스도인 교육은 그 같은 자아중심적인 동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이 세상의 부모들과 별로 다를 바 없이 거룩하지 못한 야망으로 불붙임으로 그 자녀들의 생애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봉사를 망쳐버리고, 그들을 영원한 손실의 위험 가운데 처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 교육을 위한 오직 세 가지 유효한 목적만을 허용한다. 이들 중 하나도 자아중심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곧 오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과 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세상에 그것들을 선포하는 최종의 도전을 받아들일 젊은 세대를 준비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러한 젊은이들은 그들이 온 정력을 다하여 일할 때 주님의 영광과 잃어버려짐 당한 인류의 구원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우리 청년들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철저한 지식과 이해를 소유토록 하기 위함이다 ―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사 60:2)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진리의 영광은 당신의 백성들의 마음과 정신에 새겨질 필요가 있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는 것의 중요성은 바울에 의해 이미 강조된 바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우리 하나님의 진정한 품성과 인류를 위한 그분의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의 지식이 없이는 생애에 있어서 철저한 회심의 역사과 있을 수 없다.

 2. 우리 청년들이 그들의 생애를 예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도록 이끌기 위함이다 ― 우리는 한 영혼도 그리스도께 굴복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이는 굴복이란 자원하는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며, 강요는 하나님의 사랑과는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년들의 생애에 그리스도의 요구를 가능한 한 효과적이고도 의미 있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것은 모든 부모와 교사들의 특권이다. 바울은 이같이 권면한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3. 우리 청년들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봉사를 하도록 교육하기 위함이다 ―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람의 생애에 한번 받아들여지면 그 사랑은 표현되기 위해 부르짖는다. 그리스도인 성장은 의미 있는 기도 생애, 하나님의 말씀의 계속적인 연구, 그리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별을 증거하는 것에 의해 있게 된다. 젊은이가 새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 경험은 그 표현할 대상이 발견되지 않을 때엔 곧 시들어 죽게 되고 만다. 그리스도인은 종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 젊은이들이 사람에게 맡겨진 것 중 가장 위대하고도 중요한 모험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자 할진대 얼마나 많은 관심이 봉사를 위한 그들의 매일의 훈련에 주어져야 할 것인가!

 어떠한 교육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제공하신 완전히 균형진 개념을 따르지 않을 때엔 완성될 수 없다. 엘렌 화잇은 종종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삼중교육, 즉 육체적, 지성적, 영적교육을 다룬다. “그것〔참된 교육〕은 또한 지, 덕, 체의 능력의 원만한 발달을 의미하는 것이다”(상동, 17).

 “물질계나 정신계나 또는 영계를 물론하고 죄의 폐해를 제외하고는 어디에나 이 지식이 나타나 있다”(상동, 18).
 “이런 교제가 사람의 신체와 마음과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상동, 19).
 “아담이 창조주의 손으로 지음을 받은 당시에는 그의 육체와 지능과 영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상동).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도록 사람 안에 조물주의 형상을 회복하고 사람을 그 창조함을 받던 당시의 완전한 상태에로 돌아가게 하여 지, 덕, 체의 발달을 증진시키는 것이 곧 구속사업이 될 것이었다. 이것이 교육의 목적이요, 인생의 큰 목적이다”(상동, 20, 21).

 “몸을 튼튼하게 하고 마음을 넓히며 품성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을 축복하시는 일로 저희에게 유익한 일들을 하도록 명하셨다”(상동, 27).

 그리스도인 교육의 목적은 전인의 건강한 성장을 최대한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 중심의 교육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계발을 위해 조심스럽게 강화시키는 교육을 제공한다. 여러 세기동안 사람은 교육의 초점을 마음(두뇌)의 계발에 맞춰왔다. 최근에 교육은 신체의 교육을 포함하도록 연장되어 왔으나, 하나님의 교육 프로그램은 영적인 영역의 조심스러운 계발이 없이는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참으로 영적인 교육은 다른 모든 교육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중심이 된다. 나는 사단이 하나님의 균형진 교육에 대한 가짜 교육을 가지고 있다고 서둘러 덧붙여야만 하겠다. 신령한 교육에 대한 개념들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으나 그 같은 교육은 대개 사단의 모조교육이다.

모조교육 1. 신체적인 면

  1) 경쟁적인 게임과 스포츠
  2) 동방의 태권도, 유도, 쿵푸 등의 무예(martial arts)
  3) 요가와 같은 동방의 강신술적인 운동들

모조교육 2. 지적인 면

  1) 인본주의적 원칙들
  2) 정신 조절 프로그램
  3) 최면술적 훈련
  4) 대치 및 감응훈련 그룹들

모조교육 3. 영적인 면

  1) 심미학적 훈련
  2) 동방의 명상
  3) 신비주의와 강신술주의
  4) 거짓 성령 운동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교육은 항상 유용하고도 생산적인 노동에 그 중점을 두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마련하신 진정한 신체적, 지적, 영적인 교육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있던 타락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셨던 교육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의 기본이다.

 신체적 계발의 근본은 늘 유용한 노동, 특별히 농사 분야가 강조된 노동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우리는 소유지의 대단위 구획과 기계농작에 의해 농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도시로부터 떠나는 운동이 점점 늘고 있다. 이러한 출애굽 현상은 도시의 거주자들에게 증거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으면서 도시 밖에 위치하려는 재림교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농사에 있어서 교육은 그저 신체적 발달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몸을 튼튼하게 하고 마음을 넓히며 품성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아담과 하와]을 축복하시는 일로 저희에게 유익한 일들을 하도록 명하셨다”(교육, 27).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교육은 항상 유용하고도 생산적인 노동에 그 중점을 두었지 결코 스포츠나 유흥에 그 중점을 두지 않는 것은 주지해야 할 사실이다. 이 계획은 선지자 학교들에서 따르던 계획이었으며, 유대의 유랑생활 이후의 학교들에서 따르던 계획이었다. 유용한 노동 프로그램은 다른 형태의 비경쟁적인 여가선용의 중요한 위치를 절대 부인하지 않는다. 늘 그 상황과 지역에 있어서 변화의 필요는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적인 여가선용은 참여자들의 영적인 봉사를 향상시킬 것이다.

 에덴동산의 거주자들을 위한 지적인 훈련은 매우 과학적인 것이었다. 창조주 자신으로부터 우주의 위대한 진리를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거기에는 어떤 이론이나 가정, 혹은 추측할 필요가 없었다. 과학의 주인되시는 분이 그들의 교사이셨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영감의 기록들에서 우리의 첫 번째 부모들이 식물학, 지질학, 천문학, 지학, 대양학, 동물학, 그리고 물리학을 공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교육, 28 참조).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우선적으로 배우는 교육의 중심은 하나님과, 그분의 품성과,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위대함과 능력을 아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아담과 하와의 영적인 생활이 예수님과 천사들과 함께 직접적인 교제를 나누는데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소생을 위한 특별한 날이 사람의 향상을 위해 필수적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창 2:3)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얼굴을 대면하여 교제할 수는 없으나 아직도 거룩한 성경 안에 계시된 그분을 볼 수 있으며,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닮는 길에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일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

 아담이 창조주의 손으로부터 나왔을 때 그는 완전하였으나 미성숙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완전을 받을 때에 우리는 가장 미성숙하다. 그러나 우리가 성화의 과정을 밟아갈 때 우리는 “한 단계의 완전에서 다른 단계의 완전으로 전진해 간다”(My Life Today, 250). 균형진 교육의 원칙들을 우리 자녀들의 교육과 훈련 속에 새겨주기 위하여 부모들과 교사들은 청소년들이 그들의 육체적, 지적, 영적인 자원을 계발시키고 확장시키도록 유아 때부터 지성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매일의 프로그램들을 고안해야만 한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신체적, 지적, 영적 계발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부모들과 교사들의 모본과 함께 수행될 것이다. 자녀들은 너무도 흉내를 잘 내는 존재들이어서 부모들이 가르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을 더 잘 본받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활양식의 성취를 매일 증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본보기는 이 세상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어서 부모와 교사들은 그 자녀의 생애에 그 모본이 효과적인 것이 되도록 그들의 노력을 배가해야만 할 것이다. 가능한대로 일찍 그러한 생활양식의 유익에 관한 자녀의 이해는 지성적이고도 매혹적으로 마음에 간직되는 것이어야 한다. 균형진 교육은 평생을 둔 헌신인데, 그 사람이 성장하는 매 계단마다 계속 다른 이들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강한 육체는 봉사를 위한 지적 및 영적 성장을 강화시킨다. 능동적이고도 확장된 마음은 신체적 계발과 영적인 봉사에 더 지성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과의 매일의 교제는 신체와 지성의 확장의 유익을 얻게 한다.

 주의 깊은 계획이 필요되는데, 이는 우리 자녀들이 매일 실제적인 신체적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데, 특히 그들이 천연계에서 하나님 중심의 지식을 반영하는 교훈들을 연구하도록 장려받는 옥외에서 배우도록 함이 건설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공부하고 암기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진리들을 다른 이들에게 제시함으로 실제적인 경험을 얻을 필요가 있다. 그러한 교육을 받는 자녀들은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리는 것인가!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깨우치시고 능력을 주실 수 있는 얼마나 큰 기회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