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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리교회 목사의 충고

죠 크루즈

하나님의 진리와 성품을 이 세상에 나타내는 데에 있어서 남은 교회는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이름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남은 무리이며, 역사적으로 계속 내려오는 남은 교회의 맨 끝에 붙어 있는 무리이다. 각 세대마다 충성스런 소수의 무리들이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당신의 성품을 전수하고 전파하여 왔다. 그들이 인내로써 사랑하고 전수해온 교리와 원칙과 표준이 오늘날 우리의 손에까지 내려와서 드디어 마지막 세대까지 전달되어 온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초기 그리스도 교회는 원칙으로 인해서 고통 당했으며,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왈덴스인들과 개혁자들, 그리고 청교도들은 성도들이 처음에 부여 받았던 믿음을 고수하기 위해서 그들의 삶을 포기해야 되었다. 우리 역시 처음에 하늘로부터 부여 받았던 그 동일한 복음의 선포와 고수를 위한 사명을 가지고 우리의 생애를 불살라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사명과 목적이 흐려지거나 변질되도록 허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조부들이 인기 없는 진리 위에 곧바로 서있기 위하여 어떠한 박해를 받았으며, 믿을 수 없는 용기의 생애를 살았는가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1593년, 영국 국회는 영국 국교 이외에 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을 “불 충성한 자들”이라는 낙인을 찍었는데, 그 이유는 신실하고 개혁의 정신을 소유한 청교도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그들은 영국 국교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조직적인 예배를 드렸는데, 그것이 그들을 박해하는 이유가 되었다. 영국 국교를 떠난 모든 자들에게 죽은 또는 추방이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개혁의 정신은 압제될 수 없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 이후에 제임스 왕이 즉위하였을 때, 영국 국교의 성직자 중에 10퍼센트의 성직자가 개신교적인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들은 제임스 왕과 협력하여 킹 제임스 성경을 편찬하였는데, 당시 청교도적인 개혁정신을 가지고 있던 주교들은 다음과 같은 청원문을 킹 제임스 성경의 별책으로 추가하였다. “십자가 형상의 장식물은 침례를 받음과 함께 제거되어야 하며, 결혼할 때에 반지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모자를 쓰지 말고 주례를 맡은 목사에게 사례금을 주지 말고” 청원문, 222

 그 당시 영국의 개신교적인 신앙을 받아들였던 성직자들이 주장했던 결혼 반지와 십자가 형상의 장식물의 금지 건의가 오늘날의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소하고 이해가 안 되는 것으로 이해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들의 주장의 저변에 흐르는 정신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당시 그러한 이교적인 행습의 근원지인 로마 천주교와 근접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화잇 부인은 그들의 개혁 정신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영국의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교의 교리는 버렸을지라도 그 교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형식은 간직하고 있었다. 비록 로마교의 권위와 신조는 부정되었을지라도 그 관습과 의식은 영국 교회의 예배에 적지 않게 혼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양심 문제가 아니며, 성경에 특별히 명령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꼭 필요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금지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원칙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되었다. 또 그들이 그와 같은 것들을 지킴으로 로마교회와 개신교회의 간격을 좁히고 동시에 로마교로 하여금 신교를 받아들이기 쉽게 만드는 것이라고 해석되었다.

 “보수적이며 타협적인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주장을 논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와 같은 관습을 그대로 지키게 되면 ‘로마교와 종교 개혁파 사이에 생긴 깊은 구덩이에 다리를 놓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관점에서 결정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의식들을, 한번 해방된 후 다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노예 제도의 표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예배에 관한 규칙을 정하여 주셨으므로 사람들이 거기에 더하거나 감할 자유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큰 배교는 하나님의 권위 위에 교회의 권위를 첨가함으로 그 발단이 이루어졌다. 로마교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을 하라고 명령함으로써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신 것을 금지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많은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특징이었던 순결과 단순성으로 돌아가고자 열망하였다. 그들은 영국 교회가 세운 대부분의 관습들을 우상 숭배의 유물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영국 국교의 예배에 연합할 수 없었다.” 각시대의 대쟁투, 영문 289.

 위의 인용구절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종교적 선조들이 왜 로마천주교회와 이교에서 유래된 예배 관습들을 거절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결혼반지와 십자가 장식물을 금하라고 지시하는 구체적인 성경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자들은 그러한 것들이 유래된 배경과 근거를 명백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것들을 “우상 숭배를 위한 조각물”들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배교한 천주교회와 관련 있는 어떤 전통이나 유전도 원하지 않았다.
 화잇 부인 역시 청교도들의 원칙에 동의하였다.

 “청교도적인 단순함과 검소함이 이 시대를 위한 엄숙한 진리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가정과 의복에 나타나야 한다.” 교회증언 5권, 영문 630.

 “의복을 단순하게 입고 모든 종류의 장식물을 삼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교회증언 3권 366.

 신대륙을 찾아 멀고먼 여행을 떠나서 미국에 개신교의 정신을 정착시킨 사람들은 오류와 우상숭배에 대해서 거절하며 저항하기로 선택한 용기 있는 청교도들이었다. 종교 개혁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이 순례자들의 후예들에게 전수되지 못한 채 저지되고 무시되는 오늘날의 종교계를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 19세기 중엽에 어떤 사람들이 일어섰는데, 그들은 참된 믿음을 붙잡았으며, 무너진 원칙들을 회복시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게 접속시켜 주었다. 그들은 성결과 개혁을 주장했는데, 그들의 지도자는 요한 웨슬러였다. 요한 웨슬러는 기존 교회 안에 부흥과 개혁의 청교도적인 정신을 일으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초기 리뷰앤 헤럴드의 우리의 지도자들은 요한 웨슬러가 그리스도인의 높은 표준을 옹호한 것에 대해서 찬사를 보냈다. 보석 장식품에 대한 재림교회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그들은, 요한 웨슬리가 초기 감리교인들에게 호소한 내용의 글을 인용하였다.

 “나는 그대들이 금이나 진주나 귀중한 보석 류로 치장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인들이 반지나 목걸이, 귀걸이를 하지 않기를 권면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하찮고 하찮은 것들입니다. 다른 말 하지 말고, 그것들을 포기하고 던져 버리십시오. 아주 작은 바늘이 우리의 육체에 고통이 가져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자기 방종의 정신이 그대들의 영혼에 상처를 가져올 것입니다.” 리뷰앤 헤럴드, 1855년 7월 10일.

 오늘날, 수백 년 전에 요한 웨슬러가 던진 경고와 두려움이 섞인 기별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 될 것이다. 당시 요한 웨슬러는 오늘날의 우리 교회보다 훨씬 작은 교회를 지도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원칙과 표준은 우리 재림교회의 입장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초기 감리교인들은 결혼 반지뿐만 아니라 차 마시는 것과 춤추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작은 바늘로 표현했던 세속적인 행위들이 천만의 교인 숫자를 가진 현대 감리 교회의 성직자들 중의 82퍼센트 해당하는 목사들이 성경의 영감성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상상하기 어려운 혼돈 상태를 가져왔다. 이제 음주, 흡연, 도박과 같은 행위들은 더 이상 그들의 기본 신조가 되지 않는다.

 감리교회의 어떤 목사들은 지금 그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는데, 그들은 감리교회가 교인들을 얻기보다는 더 많은 숫자의 교인들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감리교회의 안수 받은 목사요, 교회 성장학의 전문가인 캘리 박사는 우리 재림교회의 목회지에 “재림교회가 어떻게 성장을 중지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했다. (1983년 2월호) 그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감리교회뿐만 아니라 몇몇 큼직한 개신교단의 교인 숫자가 감소하고 있는 사실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정직한 충고를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목사들과 지도자들에게 보내었다.

 “만일 재림교회가 성장하기를 중단하고, 다른 개신교회처럼 오히려 쇠퇴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은 카페인과 담배와 알코올의 사용 여부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기만 하면 됩니다. 또한 채식주의는 실제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며, 세족예식과 같은 것은 너무 우스운 것이라고 결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노동 조합에 가입하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며, 십일금을 요구 조건으로 말하는 것은 행함으로 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일 수 있다고 가르치면 됩니다…… ‘본인이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의 재림 운동의 독특한 성격과 요구 사항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재림 운동을 설득력 있고 엄숙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각 종파의 교회들은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방법으로 ‘당신들은 우리 교회의 교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만일 재림교회가 재림교회만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요구 조건들을 없애 버린다면, 교회는 사람들에게 연약하고, 힘이 없으며, 평범한 재림운동을 소개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질문에 대한 답변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성장하기를 멈출 수 있을까?’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감리교회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목회지, 1983년 2월호 7쪽

 우리가 능력과 생명과 교인들을 잃어버리기 원한다면, 감리교회처럼 되면 된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자기 부정과 희생을 요구하는 높은 표준, 즉 그들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특성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감리교회의 목사가 우리에게 충고로써 지적하고 있는 것을 통하여 교훈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지금은 부패하여 패기를 잃어버렸지만 한때는 강력한 교회로서의 모본을 이룬 요한 웨슬러의 청교도 정신이 충만했던 감리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지 않을까?

 나는 이제 여러 독자들에게 감리교회의 목사의 글이 실렸던 바로 다음 달에 목회지에 실렸던 4통의 편지를 소개해야 되는데, 그 편지들은 감리교회의 목사가 쓴 기사에 대해서 반대하는 내용을 다룬 것이었다. 누가 편지로서 항의 했을까? 감리교회의 자유주의적인 목사들이었을까? 아니다. 믿든지 말든지 간에, 그들은 재림교회의 목사들이었다. 반대의 서신을 띄운 재림교회 목사들의 주장은 감리교회 목사의 글이 지나치게 행함 위주의 글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행함을 강조한 감리교회 목사의 충고를 반대하는 일에 있어서 열심이었다. 그들은 그 당시에 재림교회의 출판물에 자주 등장되었던 다음과 같은 글을 잃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잘못된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빼앗기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믿고 있는 한, 그들은 캘리 박사의 기사의 마지막에 나와 있는 다음의 글에 대해서 전혀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을 위탁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어떠한 행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여러분들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성경은 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캘리 박사의 신앙이야말로 요한 웨슬러의 후예다운 신앙이다. 모든 감리교인들이 이미 잊어버린 요한 웨슬러의 신앙을 그는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우리 재림교회는 어떠한가?

 과거에 가장 강력한 종교적 운동을 추진하다가 이제는 가장 퇴락한 타협의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일깨워준다. 과거에 감리교회가 걸었던 길을, 오늘 우리가 한 교회로서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재림교회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표준과 원칙을 낮춤으로써 더 많은 교인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계가 걷고 있는 그 길을 우리 역시 따라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기발한 전략을 가지고 더 많은 교인들을 확보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나약한 교인들이 될 것이며, 결국에는 교회의 진정한 연합을 헤치는 무리들이 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화잇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표준보다 조금 높게 우리의 표준을 올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보이는 경계선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교육의 기초, 288

 “자진하여 침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제자 되는 자격을 시험하는 일을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엄밀히 하지 않고 있다. 개심하였다고 공언하는 자들은 그들이 단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이름만을 취하는 것과, 세상에서 나와서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고 분리되어서 주님의 편에 자신들의 입장을 세우는 것의 차이를 이해해야 된다.” 목사에게 보내는 권면, 영문 128.

 사단이 재림교회 안에서 믿을 수 없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이유를 4가지로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종교에 있어서 외형적이 주의와 절제는 율법주의이며, 구원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사상에 기만 당하고 있다.

 둘째, 죄를 정복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일이므로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는 가르침에 기만 당하고 있다.

 셋째, 우리는 유혹이 들어오는 길의 문을 닫는 일에 있어서의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유혹이 범람하는 환경과 장소에 우리 자신을 방치하지 않아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

 넷째,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에서 고립되고, 냉대받고, 유별나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문화와 관습들을 수용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조금씩 또는 대담하게 흉내 내는 기만 가운데서 살고 있다.

 나는 우리의 재림 청소년들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앤드류스 대학에서 나온 보고서의 의하면, 19%의 재림 청소년들이 결혼 전의 이성 간의 성교에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또한 또 다른 19%의 학생들이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총 40%에 달하는 대학생들의 도덕적인 표준이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세상의 환락과 유흥을 거절하는 방법을 교회 안에서 배우지 못하고 있다. 교회의 청년 지도자들은 청년들을 교회에 묶어두기 위해서 세상의 스포츠와 게임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말라기서와 마태복음 사이에는 약 400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위하여 준비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헬레니즘과 그리스 문화에 그들의 정신을 송두리째 빼앗겼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두 번째 오시기 직전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당신의 교회 안에서 온갖 상업적인 스포츠 경기와 그것들을 우상화하고 있는 우리의 자녀들을 보고 있다. 우리는 교회 학교와 교회의 활동에서 즐길 수 있는 각종 운동 경기들을 공식적인 회의를 통해서 결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우리는 눈을 크게 떠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슴에 찍혀 있는 라오디게아의 표식을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질문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악한 영향력에 민감하고, 육체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강력한데 우리에게 승리에 대한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소?” 가장 강력하고 집중적인 유혹일지라도 인간이 정신적으로 그것에 동의하고 육체적으로 유혹자에 협력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 사단에게 지배 받기를 선택한 결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협력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즉각적으로 강력하고도 도무지 저항 할 수 없는 승리의 원천을 공급받게 된다. 우리가 시험 중에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결정함으로써 하늘은 다니엘과 요셉을 시중들던 천사들을 우리에게 보내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 사단의 힘을 과대 평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능력 되기를 즐거워하는 하늘의 존재들의 힘을 과소 평가하고 있다. 우리가 낙망하고 포기해야 할 단 하나의 이유도 없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한 그분께서는 사단보다 훨씬 강력하고 중단 없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접근하고 계신다. 비밀은 의지에 있는데, 그것은 선택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 속에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고 그것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는 성령의 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성령의 보호하심은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위한 능력이 존재하고, 승리도 분명히 우리를 위해서 보장되어 있지만, 인간의 오감을 통해서 들어오는 죄의 문을 단속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이것이 행동하는 믿음이다. 승리에 대한 어떠한 공로도 우리에게 돌아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든 자가 승리할 수 있다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발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대수의 교인들이 라오디게아의 뜨뜻미지근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된 믿음의 의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존경과 불변성에 대한 경고의 기별이 부족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해야 되며, 할 수 있다는 기별이 우리 가운데서 들려 나오지 않고 있다. 모든 평신도와 지도자들 가운데서……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정확한 대가를 개인적으로 지불해야 한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의를 날마다 받아들이지 않는 한, 아무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지 못한다. 인간적인 노력을 다할지라도 개인적인 헌신의 시간과 성경 연구의 시간을 갖지 않는 한, 아무도 사단의 계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으로 스며드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지 않는다며, 우리는 사단의 제물로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행정자로서 선택 받는 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 받는 것이다. 라오디게아의 사상과 타협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우리는 혹시 벌거벗고 눈멀어 있는 것은 아닌가? 뜨거워야 할 우리의 영혼이 미지근한 상태에서 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하여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온 개혁의 횃불이 우리의 손에서 소멸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감리교회의 목사가 우리에게 전해준 충고는 우리가 그들에게 전파해야 할 복음이 아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