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ect Page

두 잔치

랄프 랄슨 / Ralph Larson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해에 베풀어진 두 개의 큰 잔치 중에 하나를 볼 수 있다. 두 개의 큰 잔치 중 하나는 갈릴리 해변가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잔치였고, 다른 나머지 하나는 주님께서 베푸신 마지막 만찬이었다. 두 개의 잔치에서 주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셨다. 그 잔치의 결과로써 그분을 거절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그 종국에는 크게 실망하는 일이 생겼다. 그 두 잔치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간절한 호소의 말씀을 전하셨다.

갈릴리 호수 북서쪽으로 3마일 지점에 벳새다라는 마음이 있다. 벳새다, 그 곳은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인 안드레가 태어난 곳으로써, “고기 잡는 곳(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벳새다, 그 곳은 고기를 잡는 어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옮겨가서, 사람을 낚는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보내신 첫 번째 전도 여행으로부터 방금 돌아왔으므로 한적하고 조용한 시간을 필요로 했으며, 그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돌아오는 길에 침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은 그들에게 혼돈을 가져 왔고, 침례 요한을 죽도록 허용하신 그리스도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요 6:1). 가버나움으로부터 갈릴리 호수 반대쪽으로는 아름답게 녹색으로 물들어 있는 언덕이 있었다. 그 때는 봄이었고, 유월절이 시작되는 때라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서 수많은 여행자들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여행 도중에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만나보기를 원했다. 어떤 이들은 배를 타고, 어떤 이들은 걸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 갔다.

멀리서부터 찾아온 사람들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의 말씀의 강론이 있었다. 식사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말씀이 계속되었고, 말씀을 마치자 즉시 먹을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아는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나온다. 이 놀라운 사건으로 인해서 큰 소동과 흥분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곳에 운집해 있던 오천 명의 사람들은 그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군중들의 숫자 중에 가장 큰 규모의 군중이었다. 제자들은 흥분했으며, 예수님의 위엄에 압도되었다. 제자들은 이렇게 큰 군중이 모인 것을 이용하여 이것을 큰 운동으로 발전시켜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의 왕국을 세우고 권력을 선포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군중들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우는 것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군중들의 그러한 이야기 소리는 제자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렸으며, 제자들은 그러한 군중들을 실망시키는 어떠한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들의 그러한 움직임을 이미 아셨다. 그래서 해가 질 무렵에 제자들의 이기적인 환상을 깨뜨리기 위해서 그들을 가버나움으로 배를 타고 돌아가도록 명하셨다. 제자들을 군중들과 격리시켜서 배를 타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대화가 오고 갔는데, 우리가 그 대화를 살펴볼 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말로 사람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살피시고 이해하시며 부드럽게 어루만지시듯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대화 중에는,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긴장감마저 돌고 있는 모습을 느끼게 된다. 대화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랍비여, 언제 여기에 오셨나이까?” 질문을 한 사람들은 어제 갈릴리 호수가에서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뒤쫓아 왔던 것이다. “무리가 예수가 없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를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요 6:24)

그 무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보라. 예수께서 한동안 그들을 보시고 하신 말씀은, “너희가 떡을 찾고 있도다.” 이었다. (요6:26)

얼마나 이상한 대화의 시작인가?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있었다. 무리들도 당황하여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다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라는 어색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요 6:28)

예수께서 대답하시길,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역시 직선적이고 부드럽지 않은 표현이 나왔다. 그 다음의 30절과 31절에서, 그들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떡”에 대해서 질문함으로써 대화를 계속 진행시키고자 하였다.

무리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고, 기록되었으되 ‘그가 조상들에게 하늘로부터 먹을 떡을 주었더라.”

그들은 만나의 선물을 모세가 준 것으로 이야기 했으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떡을 주나니 나를 믿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답은 계속해서 부드럽지 못하고 직선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과 말하고자 한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4절. 그들은 아직도 대화를 그들이 원하는 분위기로 이끌어 가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시길,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니라.” 그러자 무리들이 웅성거리면서 불평하기 시작한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가 어떻게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는가? 33, 42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처음보다 더욱 강한 상징적 표현을 하신다.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 그러나 내게 오면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나는 생명의 떡이라.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으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그것을 먹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조금도 듣기 좋거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그리고는 조금 더 강한 표현으로 말씀하신다. “내가 줄 이 떡은 나의 살인데,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줄 것이니라.” (요 6:43, 44, 48~51)

그때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며 화내면서 말하기를, “어떻게 이 사람이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겠느냐?”52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전히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하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의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살며 나도 그 사람 안에 사느니라.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 역시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53~58절

기록된 바와 같이, 바로 이 시점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의 대부분이 더 이상 그분을 따르지 않고 떠나갔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그러한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태도가 자신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나가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셨을까? 그분은 왜 수많은 군중을 잃어버려야 했을까? 당신을 찾아서 교회(회당)에 온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대하셨을까? 그러한 그분의 태도와 방법이 최선이었을까? “예수께서 시험하는 진리를 제시했을 때, 그분을 따르던 제자 중의 많은 이들이 등을 돌리고 떠나갔다.” 시대의 소망, 영문 394. 그분께서는 그러한 태도로 하시는 말씀이 초래할 결과를 이미 알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위기를 불러 오셨는데, 그리하여 그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당신을 진실로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셨다.” 상동.

주님께서는 그로부터 1년 후에 이 땅에서 마지막 유월절을 맞게 될 것을 아셨다. 그리고 그 유월절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히 알고 계셨다. 만일 개심하지 않았거나 반만 개심한 군중들이 당신을 진실로 따르는 자들과 함께 섞여서 계속 몰려 다닌다면, 군중들은 제자들까지도 자신들 편으로 끌어오고자 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던 자들 가운데서 쭉정이를 분리시키기 위해서 논쟁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그들과 대화하셨던 것이다. 많은 무리들이 제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가는 경험을 그들이 겪도록 함으로써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십자가의 대 실망을 극복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과는 달라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숫자에 민감하지 않으시다. 어떻게 해서든지 많은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교회에 나오는 어떤 사람들은 떡을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생활과 명예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교회의 직책을 선호하지는 않는가?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있어서 그 효과와 필요성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 조직과 기관이다. 그러나 물질과 명예를 위해서 조직과 기관을 넘보는 자들이 항상 존재해 왔다. 그들은 항상 교회에게 문제와 고통을 주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다루어야 하셨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살아계신 동안 제자들에게 직접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교훈을 주시고자 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 이제는 너희들이 결정해야 돼”라는 말과 함께 선을 분명하게 그음으로써 개심하지 않은 자들을 당신의 참 제자들과 분리시켰던 것이다. 그러한 분리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너희들은 하늘의 복음을 원하니? 아니면 세상의 안락을 원하니?”라는 질문을 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선택의 기회를 그들 모두에게 주셨을 때, 그들 중의 거의 대다수는 “우리는 세상을 원합니다.”라는 대답을 그들의 행동과 선택으로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군중과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은 분리되었고, 그러한 분리를 통해서 참 제자들은 대다수의 사람들, 형제들, 친구들, 가족들, 교우들이 자신들로부터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 속에서 의미 있는 교훈을 배우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실망과 분노의 마음을 품게 되었으며, 그들을 떠나가는 군중들을 아쉬움으로 바라보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곁에서 그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교훈을 설명해 주셨다. 만일 군중들이 십자가까지 따라다니다가 마지막 순간에 한꺼번에 떠나가 버린다며, 그 충격은 제자들에게 너무나 컸을 것이다. 그때는 예수께서 무덤 속에 계실 때이기 때문에 그분께서 제자들을 도와줄 수 없을 것이다. 화잇 부인은 마태복음 3:12에 나오는 침례 요한의 말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실 것이고,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 이것은 키질하는 때에 대한 말씀이다.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쭉정이는 알곡으로부터 분리될 것이다.” 시대의 소망, 영문 392.

쭉정이, 알곡, 키질, 정결케 함, 이러한 단어들을 들을 때 무엇인가 생각나는 말씀이 없는가? “교회가 순결하게 될 때가 신속하게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순결하고 진실된 한 백성을 가지고 계신다. 곧 일어날 엄청난 체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힘을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징조들은 주님께서 당신의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결케 하실 때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굵은 알곡들만이 있던 것으로 보이던 마당에서 쭉정이들이 구름처럼 바람에 날려 갈 것이다.” 교회증언 5권, 영문 80~81.

나는 최근에 로마린다 대학의 도서실에서 1956~1957년까지의 목회지를 살펴본 적이 있다. 그 목회지의 어떤 기사의 제목이 나의 시선을 끌었는데, 그 제목은 “이제 일백만을 가진 강한 교회”였다. 우리는 “이제 6백만을 가진 강한 교회”라는 기사를 써도 될 때가 되었다. 그러한 기사가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6백만 명이 참된 영적 떡을 위해서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6백만이라는 숫자가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교회에 들어온 신자들의 숫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신자들의 중심과 의도와 동기와 목적을 보신다.

두 번째 잔치는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것인데, 그 잔치도 실망과 거절을 가져왔을 뿐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첫 번째 잔치에서 왕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것으로 인해서 몹시 실망하였다. 그런데 두 번째 잔치에서도 여전히 동일한 모습을 일관하였다. 예수께서는 두 잔치에서 모두 중요한 호소를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하셨는데, 그분의 호소에서 사용하셨던 용어와 방법이 너무나 유사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십자가의 위기를 보시면서 두 번의 잔치를 베푸셨다.

독자들이 요한복음 6장 전체를 읽은 다음, 7장의 첫 성경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6장의 잔치 이후 시험하는 진리를 무리에게 말씀하신 이후로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1년 동안을 계속해서 그분을 죽이려는 시도를 중단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6장의 첫 번째 잔치 이후 십자가까지의 마지막 12달은 그분의 생애와 제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위험한 시기가 될 것을 아셨다.

독자들은 기억하는가?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 “유대의 베다니로 가자”라고 하셨던 것을. 그러자 제자들이 물었다. “선생님, 최근에 유대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었는데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그래도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과 함께 죽기 위해서 그곳에 가겠다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문제와 위험을 내다보실 때의 그분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보라. 그분께서는 “앞으로 위기가 다가오니 교회를 단단히 지켜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교회가 중요하지만 교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또한 “위험이 다가오고 있으니 너희들이 믿는 신학을 올바르게 하라”는 경고도 하지 않으셨다. 신학이 매우 중요하지만 주님께서는 위험을 앞두고 그것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위기와 위험을 앞두고 무엇을 경고하셨는가?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너희들은 내 가까이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가까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들은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13장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나누어 돌리시면서, “이것이 너희를 위해 줄 나의 몸이니 이것을 모두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포도즙을 돌리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너희를 위해서 흘리게 될 나의 피니 마시라”(마 26:27). 두 번의 잔치를 통해서, 그분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것인가?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을 먹고 그를 개인의 구주로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그의 사랑을 쳐다보고 그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거기서 깊은 감명을 받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양식이 신체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식은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는 한, 또는 그것이 우리 신체의 한 부분을 구성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칠 수 없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알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 역시 우리에게 아무런 효험이 없다. 이론적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우리는 그로부터 먹고 그를 마음에 받아들여 그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여야 한다. 그의 사랑과 그의 은혜에 우리가 동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너무도 완전히 복종하심으로써 당신의 생애에는 하늘 아버지만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분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가 받는 것과 같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자신을 두른 악으로 더럽힘을 받지 않으시고 세상을 사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처럼 이겨야 한다.” 시대의 소망, 영문 389. 이것이 바로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의미이다. 두 잔치에서 말씀하셨던 진리는 가장 강력한 언어로써 표현된 가장 중요한 진리였다.

기도로써 예수께 가까이 머물러 있도록 하자. 우리가 하루에 5분 기도하였다면, 우리의 기도를 10분으로 연장하자. 그분의 말씀으로 잔치를 벌임으로써 그분께 가까이 머물러 있도록 하자. 우리가 하루에 10분 성경을 읽었다면, 그것을 20분으로 연장함으로써 그분 곁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좀더 갖자. 예언의 신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권면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우리에게 안전한 지대가 될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우리 마음대로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말자. 문제는 우리 안에 있지만, 그 해결책을 우리 안에서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기도로써 그분께 가까이 머물고, 당신의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그분께 가까이 머물자. 그분의 권면을 소중히 여기면서 그분 곁에 머물러 있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내 곁에 가까이 머물러 있으라. 내 곁에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