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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딜레마

글/ 콜린&럿셀 스텐디쉬 목사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특정한 개인의 경험에서 근거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젊은 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를 매우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목회를 위해서 훈련 받은 많은 사람들처럼 이 젊은 청년도 재림 신앙으로 새롭게 개종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박동하고 있는 위대한 기별로 인해서 불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애를 복음 사업에 헌신하기로 했다.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재림교회 대학의 신학과에 등록했다. 그는 재림 기별에 대해서 폭넓게 연구했으며, 그 결과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놀라운 열심을 가지고 자신의 성경 시간에 참석했는데, 그는 그러한 강의를 통하여 어떤 교수들은 더 이상 진짜 재림 기별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교수들은 대개 세상에 있는 신학원에서 공부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자신이 근무하는 재학 안으로 이탈된 가르침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결함이 있는 “신앙”을 다음 세대의 일꾼이 될 예비 목사들에 주입시키고 있는 사단의 대리자들이다. 수년 동안의 교수경험과 교수들 간의 논쟁을 통하여 그들의 논리는 숫돌에 간 예리한 칼날처럼 되었기 때문에 강의를 듣는 “어린 양”들은 그들의 교묘한 설득력과 노련한 경험 앞에 쉽사리 굴복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더구나 자신들의 학점에 대해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의 말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다. 어떤 강의 시간에는, 교수가 성경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오히려 의심을 유발시키는 미숙한 방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교수는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아무런 답변도 제공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학생들을 미궁 속으로 밀어 넣게 된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성경의 어떤 부분들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젊은 예비 목사는 기만 당하지 않았다. 그는 교수의 잘못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충격 이후, 교수가 성경에 근거를 정확하게 두고 있는 재림 신앙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가르침을 가르치면, 그는 조심스러운 방법으로 그것을 지적하겠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시도는 교수에 의해서 점잖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교수는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고결한 그르침에 계속되는 도전을 받게 되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냈었다. 다수의 학생들도 교수의 그러한 태도에 동의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이 젊은 학생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 못했고, 이 젊은 학생이 수업 시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교수는 이 젊은 학생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서 “지혜로운 권면”을 하게 되었다. “그대는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유망한 젊은이지, 그러나 그대는 일하러 나가기 전에 경험과 학식이 폭넓은 사람들에게  배우기 위해서 대학에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네.” 젊은 청년은 교수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애썼다. 교수는 노련하지 못한 이 젊은 청년을 여유 있게 다루었다. 교수는 청년의 미숙함과 경험 부족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또한 과거에 청년에게 침례 공부를 시키고 영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은 신학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었다. 이 젊은 청년은 강의 시간에 더 조심스러워지게 되었다. 교수의 가르치는 바가 크게 의심스러울지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젊은 청년은 종종 자신의 학급 친구들에게 교수가 가르치는 바와 어긋나는 이슈를 제기했지만, 그들 대부분도 자신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교수는 이 젊은 청년이 아직도 학급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그 청년을 권면했다. 학기말 시험 때가 되었다. 젊은 청년은 진리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시험지에 진리의 원칙들을 필기 시험지에 작성하였으나, 그는 교수로부터 형편없는 점수를 받게 되었다. 이제 청년은 자신이 위기와 딜레마에 빠져 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청년은 자신이 목회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러한 포부의 성취 여부가 교수의 손에 매우 크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청년은 한 가지 현실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수들이 하는 일은 자신을 가르치고 점수를 주는 일뿐만 아니라 대회나 합회에서 자신을 목사로서 고용하기로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역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침내 이 청년은 강의 시간과 학급에서 침묵을 지켜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졸업을 하고 일할 수 있는 목사직을 얻게 되면, 자신은 순결하고 인간의 논리에 오염되지 않은 진리를 강력하게 설교할 것이라고 결심했다.

그는 졸업을 하고 인턴 목사(전도사)로서 봉사하도록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실습하고 있는 교회의 담임 목사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 청년 전도사는 용기를 가지고 재림 신앙을 설교하기 시작했으며, 신자들에게 죄를 승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신자들 대부분이 곧바른 설교와 가르침을 들어보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담임 목사에 의해서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어리석은 양”들이었다. 담임 목사 자신이 재림 신앙을 깊이 이해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담임목사는 자신이 이 청년 전도사와 대화를 나누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담임 목사의 권면은 진리보다는 인간적인 염려를 충고하는 것이었다. 담임 목사는 말하기를, “당신은 매우 유망한 장래를 가지고 있소. 그러나 당신은 매우 지혜롭게 설교하는 법을 배워야 해.” 청년 전도사의 설교는 교회의 연합을 깨고 있었으며, 몇몇 교인들은 담임 목사를 찾아와서 이 점에 대해서 경고를 했다. 담임 목사는, 이 교인들은 청년 전도사를 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 전도사가 설교하는 내용이 오랫동안 안정과 평안 속에서 지내온 교회에 논쟁과 불안정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청년 전도사는 자신이 또 다시 딜레마에 봉착되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을 부드럽게 다듬을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이 직접 담임하는 교회를 맡게 될 때까지 곧바른 진리의 선포를 미루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기회는 왔다. 그는 정식 목사로서 한 교회를 맡게 되었으며, 재림 신앙에 대한 진리를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교회에도 진리를 곧바르게 증거하는 설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준비되어 있지 못한 교인들이 있었다.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몇몇 사람들이 대회장을 찾아가서 자신들의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불평하기 시작하였다. 대회장은 자신을 찾아온 “영향력 있는 교인들”에게 그 젊은 목사가 설교한 기별에 대한 염려를 표현했으며, 대회에 있는 경험 있고 존경 받는 사역자들도 그러한 설교와 기별에 대해서 자신과 동일한 염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대회장은 젊은 목사에게 설교의 주제를 선정하는 데에 있어서 좀 더 조심을 해야 한다는 주의를 주었다. 이 즈음에 이 청년 목사는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목사 부인이 된 그 여인은 위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는 젊은 목사에게 또 하나의 짐을 안겨 주었다. 그녀는 남편을 아끼는 마음으로 목회 생활의 장래와 목사 안수를 받는 데에 방해가 되는 어떤 설교도 하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젊은 목사는 두 가지 입장 사이에서 고통 하게 되었다. 우리 형제의 눈으로 볼 때에 거의 완전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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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들에 대한 우리 형제의 생각이 그 최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언젠가 대총회에서 온 한 강사가 우리의 야영회에서 기별을 전했던 때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업을 끝마치는 것에 관한 설교를 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와서 우리들에게 설교하는 것과 같았다. 어린 우리 형제의 귀에 들려졌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에 관한 그 기별은 우리를 전율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목사들에 대한 우리의 이상적인 개념이 지금까지 우리 머리 속에 보존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늘날, 평신도들뿐만 아니라 목사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아름다운 행습과 진리에 대하여 마음 속에 은근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근래에 들어서 우리는 지도자들이 자신의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대회 종사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면들에 대해서 권면하는 모습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즉, 옷을 단정하게 입을 것, 선거 운동을 하지 말 것, 성
을 자극하는 비디오나 영화를 보지 말 것, 춤추러 다니지 말 것, 십일금을 신실히  낼 것, 자신의 부인 이외의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지 말 것 등등. 이러한 현상들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성결한 일을 하도록 선택된 자들이 “목회”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와 헌신을 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들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매 해 수십 명의 목사들이 그들의 부르심을 저버리고 교회를 떠나가고 있다. 어떤 목사들은 교리적인 배도에 빠져서 떠나며, 어떤 이들은 대회로부터 해고를 당하여 떠나가는데, 가장 비극적인 것은 많은 숫자의 목사들이 부도덕함과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하여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형제 역시 자신의 연약함을 매 순간마다 느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지 않는 어떤 목사라도 자신의 무능력과 연약함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이 글은 “우리가 그대들보다 거룩하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수호자이며, 백성들 앞에서 거룩하고 순결한 생애를 제시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에 대한 염려를 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참된 목자가 되는 것이 지금처럼 힘들고 어려웠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하나님의 마지막 기별을 위해서 완전한 헌신을 해야 할 필요성이 지금처럼 요구 되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또한 목회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완전하게 반사해야 될 필요성이 지금처럼 절실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마지막 시대에 마지막 부르심을 받은 목사의 길을 계속해서 걷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현대 진리에 대한 깊은 지식과 온 생애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하는 헌신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매일 실생활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백성들을 이끌어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껴야 한다.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하고,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그분의 성품을 변호해야 된다는 부담을 가지며,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 목사들만이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가장 높으신 부르심에 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