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성공회 신부의 경고 – 제2부
저자: 요한 찰스 라일
제2편: 그대는 교회에서 인기가 있나요?
1816년, 요한 챨스 라일은 영국의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이튼과 옥스포드에서가장 높은 교육을 받았다. 1838년, 그는 영국 성공회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성직자로서의 부르심에 응했다. 64세의 나이에 리버풀의 주교로 임명 받았고, 후에 “교회들을 향한 경고”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글은 100여 년 전에 성공회의 신부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록된 것이지만, 그가 제시하는 원칙은 오늘날의 현대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은 “교회들을 향한 경고”라는 책 중에 나오는 “keepingthe truth or keeping
the peace?”라는 장을 번역한 것이다. 편집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11-16.
안디옥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을 살펴보자. 두 번째 교훈은, 복음에 대한 진리를 고수하는 일은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교회의 연합과 평화에 대해서 사도 바울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그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정신에 대해서 권면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말하기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하지 말라”, “서로 화목하라”, “한 몸과 한 정신으로”, “한 신앙과 한 침례로”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연합과 평화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로마서 2:16, 데살로니가전서 5:15, 디모데후서 2:2.
사도 바울은 심지어 다음과 같은 말까지 하였다.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고린도 전서 9:2. 이러한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에게 한 말을 살펴보라. 바울은 베드로를 정면으로 견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책망의 말을 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말을 함으로써 안디옥에 있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당할 수 있는 모든 도전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사도 바울은 베드로의 잘못을 영구적으로 남기기 위해서 글로서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는 복음이 전파되고 설교되는 곳마다 베드로의 외식(위선)을 교훈으로 삼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잘못을 범한 한 사도에 대한 견책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그러한 견책을 베드로에게 하였을까?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 교회 안으로 잘못된 교리가 들어 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하나의 조그만 누룩이 큰 빵 덩어리 전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기 보다는 진리의 손상을 막기 위해서 투쟁했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의 예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따라가야 할 중요한 모본이 된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평안과 평화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믿는 종교에서 어떠한 타협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이라고 불리는 것을 병적으로 볼 만큼 두려워한다. 또한 자신들이 “분열을 일으키는 자”라고 평가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그들은 진리가 파괴되고 붕괴될지라도 자신들의 안락함과 평화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외적인 평화, 조용함, 질서를 유지시킨다. 마치 그들은 다른 모든 것들은 포기할지라도 그것은 양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문제아로 보았던 아합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입을 막기 위해서 그를 감옥 속에 쳐 넣은 유대의 왕자들과 같은 입장에 자신들을 놓을지라도 그들 자신의 평화와 평판에 금이 가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그들이, 바울이 베드로를 견책하는 현장에 있었다면, 그들은 바울을 매우 교만하고 주제 넘는 사람으로 몰아부쳤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순수한 복음보다 우리의 입장과 평판과 평화를 우위에 놓는다면, 우리는 잘못된 결정과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순수하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오류에 의해서 간음 당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 만큼 능력 있는 복음이 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진리를 순수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각오해야 하며, 어떠한 위험도 각오해야 하고, 분열이 야기되는 경우도 감수해야 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죄를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것만큼 잘못된 교리에 대해서도 두렵고 위험한 것으로 취급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에 어떤 작은 것을 첨가하거나 제거하는 것도 허용해서는 안된다.
진리에 관한 문제가 걸렸을 경우에는, 우리의 사랑의 구세주께서도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비록 그들이 과거에 모세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있고, 유대인들에게 권위를 인정받는 교사의 위치에 있을 지라도….“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 외식하는 자들이여!”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8번에 걸쳐서 그들에게 “화”를 선언하셨다. 누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이 부족하고 잘못되었다는 의심의 말을 내뱉겠는가?
진리를 위하여,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의 순수성을 고수하기 위하여, 아데나시우스는 세상을 대항하여 일어섰다. 대다수의 공언하는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생애와 모든 것을 던졌던 것이다. 누가 감히 그가 무모한 잘못을 범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진리와 개혁을 위해서, 마틴 루터는 자신이 태어나서 자라온 교회의 연합과 평화를 깨뜨렸고, 온 힘을 다하여 교황을 견책한 결과로 새로운 가르침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 누가 감히 그는 건방진 잘못을 범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진리를 위하여, 크래너, 리들리, 라티머와 같은 영국의 개혁자들은 당시의 영국 왕인 헨리8세와 에드워드 6세에게 로마 교황권과 결별할 것을 촉구하였다. 누가 감히 그들을 분리주의자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진리를 위하여, 100년 전에 위트필드와 웨슬레는 그 당시 성직자와 목사들의 표준을 낮춘 부도덕한 설교들을 책망 하였으며, 모든 노력을 다하여 영혼을 구원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그리스도교계로부터 추방당할 수 밖에 없었다.
누가 감히 그들의 강력한 설교와 노력을 영적인 교만과 비난으로 낙인을 찍을 수 있는가? 그렇다! 진리가 무시된 평화는 거짓이고 위선이다. 그것은 지옥으로부터 나온 사단의 위안이다. 복음이 빠져 있는 연합은 무가치한 연합이다. 그것 역시 지옥으로부터 나온 연합인 것이다. 이러한 평화와 연합에 대해서 말하는 자들의 말재간을 경계하도록 하자. 다음의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 10:34.
주님께서 다음과 같은 교회를 일곱 교회 가운데에 세우신 것에 대해서 찬양하자. “내가네 행위의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요한 계시록 2:2.
또한 다음과 같은 교회를 책망하신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 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요한 계시록 2:20. 평화의 제단을 쌓기 위하여 진리를 제물로 바치는 죄를 범하지 말라. 유대인들은 구약 성서의 사본에서 단 하나의 잘못된 글자를 발견하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이라도 잘못 전수 받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사본 전체를 불살라 버리는 결단을 내리었다.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에 못 미치는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 교회 안에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설명한 원칙들을 어떻게 하면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한가지 충고를 하고자 한다. 나는 모든 독자들이 이 충고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만일 여러분들이 “나는 교회에서 매 주말마다 듣는 설교대로 살기를 원한다” 라는 소원과 열심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참석하고 지원하는 교회와 선교 기관에서 설교되고 있는 내용이 잘못되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은 그 교회나 선교기관과의 접촉을 중단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가 될 것이다. 나 역시 이 점에 있어서 어떠한 망설임도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나가던 성당과 교구를 등지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눈에서 매우 불안한 망설임을 보게 된다. 물론 부족함이 있는 가르침과 완전히 잘못된 오류, 그리고 극히 부분적이고 사소한 부족함을 포함하고 있는 가르침과 완전히 비 성경적인 가르침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 그러나 만일 잘못된 교리가 가르쳐지고 있다면, 교인은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교회와 성당을 나가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비 성서적인 설교를 일년에 52번을 듣게 된다면, 그것은 영혼과 신앙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유독성을 지닌 물방울이 계속적으로 마음과 영혼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것의 유해한 영향력은 그러한 설교를 듣는 교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계속적으로 은근하게 미치게 된다. 데살로니가 전서 5:21절에 나오는 “모든 것을 헤아려 판단하고 좋은 것을 취하라”라는 말씀을 명심하라. 또한 “지식의 길에서 떠나게 만드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라(잠언 19:27).
만일 교회에서 분명하게 잘못된 가르침이 설교되고 있는데, 이러한 말씀과 조언을 읽은 사람이 계속해서 교회를 나가면서 오류를 듣기로 선택한다면, 무슨 말로 그런 사람을 붙잡을 수 있겠는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이 거듭나서 거룩한 생애를 살고 있는데, 그가 자신이 다니던 교회를 떠나서 다른 종교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잃어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가?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내게 알려주기 바란다. 나는 그런 엉터리 사상을 혐오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러한 사상을 전혀 입증할 수 없다. 나는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없기를 소원한다.
교황권과 같은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 교구가 잉글랜드에 몇 개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교구에 속해 있는 신도들은 교회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 진리를 위해서 투쟁하겠는가? 아니면 평화를 위해서 잠잠히 그것을 받아들이겠는가? 사도 바울의 말처럼 평화보다는 진리를 선택하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가르치는 도덕과 윤리와 같은 수준의 설교가 잉글랜드의 몇몇 교구에서 허용되고 있다. 그리스도 교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선포되고 있지 못하다. 플라톤, 세네카, 그리고 유교주의자들도 그런 정도의 윤리와 도덕성에 대해서는 설교 할 수 있다.
평신도들이시여, 조용히 앉아만 있을 것인가? 진리를 쟁취하라.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킬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평화보다는 진리를 선택하라.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굉장히 강력한 단어와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지금 가장 예민한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지금 일반적으로 언급되지 않으며, 말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는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안수 받은 성직자로서의 의무감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어떤 교구는 오직 평신도들만이 일어나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여러 교구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무관심과 무지로 인하여 죽어 가고 있다. 잉글랜드국교에 소속되어 있는 많은 교인들이 혼돈과 혐오스러운 상황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지금은 듣기 좋고,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할 때가 아니다. 나 역시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교구 위원회, 질서, 분리, 분열, 연합, 논쟁”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말들이 은근하면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듯 하다. 나 역시 이러한 표현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이 있다. 이러한 표현들에 대한 잘못된 오용이 갈수록 빈번해지기 때문에, 이러한 말들에 대한 정의를 이해하는 것은 요긴한 일이라고 생각 된다.
분리와 분열
분리와 분열은 종교에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현상이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힘을 약화시킨다. 이것은 원수들로 하여금 모든 신성한 것들을 모독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분리와 분열”을 일으키는 장본인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들이 정말 그러한 비난을 받을만한 사람들인가를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잘못된 교리나 이설과 같은 것들이 분리와 분열보다 훨씬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분명하게 잘못된 오류와 비 성서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킨다면, 그들은 책망 받고 비난 받기보다는 칭송 받아야 하며, 그들의 그러한 결정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야 된다. 이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 분리와 분열은 선에 속한 것이며, 죄가 아니다. 신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감정적인 사랑을 말하기는 쉽지만, 매 주일마다 잘못된 가르침과 애매한 설교를 듣기 위해서 성당과 교회에 나가야 된다고 교인들을 설득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는 때때로 분리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연합, 조용함, 그리고 질서
연합과 교회에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함, 그리고 질서를 존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자세이다. 연합되고 조용하며 질서가 있는 교회는 힘이 있으며, 아름답고 효율적인 교회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금과 같이 귀중한 것일지라도 그러한 것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 이상으로 그것들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희생시키고서 얻은 연합이라면, 그것은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한 연합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연합이다. 로마 천주교회는 그들의 강력한 연합을 크게 자랑하지만, 그들은 연합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연합이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을 백성들에게서 빼앗고, 개혁자들을 종교재판으로 끌고 가서 입에 재갈을 물리고, 성경에 대한 무지를 이용해서 백성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 시킨 상태에서 이루어진 기만을 연합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옛 개혁 전사들의 표현처럼, “로마 천주교회는 교회를 황폐시키고 압제하여서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교회 안에 무덤 속만큼 고요하고 조용한 상태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는 건전하고 건강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죽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평화가 없을 때, 평화를 외치는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투쟁
종교에 있어서 투쟁은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투쟁보다 훨씬 혐오스러운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교회 안에서 아무런 저항과 항변 없이 오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개혁된 개신교회를 창출해낸 것은 바로 투쟁이었다. 만일 교회가 올바른 견해와 사상과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면, 개혁은 전혀 불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마리아를 숭배하며, 우상에게 경배한다면, 그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투쟁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 유익을 가져오는 특권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악취를 풍기는 말라리아 병보다는 차라리 폭풍우 속을 걷는 시련과 고통을 선택하겠다. 영적 어두움 속에 거하는 사람이우리에게 조용히 독약을 먹일 때, 우리는 안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눈총을 받으면서 일어나 우리를 경고하고 흔들어 댈 때,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묘약이 되는 것이다. 유다서 3절에 나오는 “사랑하는 자들아…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사도 유다의 권면은 성경이 말하는 분명한 음성이다.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쾌함을 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진리가 아닌 어떤 가르침들과 직면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대단한 위험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진리처럼 보이지만 진리가 아닌 것은 영혼에게 아무런 유익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지작거리면서 장난치지 말아야 할 3가지 작은 것들이 있는데 즉, 조금 유해한 독소, 사소한 오류, 작은 죄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말을 할 때 사람들은 “당신 같은 사람은 교인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화를 낸다. 나 역시 그와 같은 고소를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마지막 심판 날에 누가 영국 국교의 진정한 친구였으며, 누가 반역자이었는가가 밝혀질 것이다. 지나간 나의 32년간의 경험을 통해, 만일 어떤 성직자가 그저 조용하고 안락한 생활만을 좋아한다면, 그는 세상을 개심시키지 못할 것이며, 만일 어떤 설교자가 누구의 마음도 상하지 않기 위해서 곧바른 교훈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또한 나의 경험을 통해 볼 때, 어떤 사람이 영혼들의 진정한 개심을 위해서 글을 쓰고, 설교하며, 수고하고, 개혁을 위한 위대한 원칙을 고수하며, 신실하게 증거한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문제아”라는 별명을 갖게 될 것이며, 어떤 교회도 그를 초청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을 강단에 세우지 말라”고 분개하는 사람들은 사실에 있어서 참된 교인이 아니었었다는 것이 내가 경험을 통해서 분명히 깨닫게 된 교훈이다. 아무도 반역자이었던 아달랴(열왕기 하 11:14)만큼 큰 목소리로 “반역이다! 반역!”을 외치지 못했었다. 항상 개혁의 음성이 반역의 음성보다 크지 못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한번은 “누가 진짜 교인인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음성을 높여 말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결국 교회의 “높으신 분들”에 의해서 영국 국교를 떠날 수 밖에 없었는데, 내가 믿기로는 그들이야말로 영국국교(성공회)를 위한 참된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진리의 보존을 위해서 최고의 헌신을 바쳤던 영국 국교의 수호자들이었다.
나는 독자들 앞에 진리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수고를 펼쳐놓으면서, 그들의 그러한 열정 위에 독자들의 시선이 모아지기를 고대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평안함 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진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만일 우리가 안디옥으로부터 교훈을 배운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진리와 원칙을 수호하고 다루는데 있어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입장과 태도를 보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