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험한 가장 큰 위험
저자: 럿셀 스탠디쉬 박사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서있는 백성들이 받게 되는 가장 큰 위험은 교회로부터 출교에 대한 위협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핍박이 아니며, 교회에서의 직책을 잃어버리게 되는 고통도 아니다. 그것은 한 때 우리를 사랑하였던 사람들로부터 받는 질책이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와 같은 것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을 가져와서 눈에 보이는 엄청난 배도의 현장에서도 침묵을 지키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위험은 진리를 고수하면서 서있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달콤한” 태도로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가져다 주는 위험이다. 사랑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대항하여 우뚝 서 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남은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치명적인 배도에 동조하는 어떤 사람이, 진리를 곧 바르게 고수하는 사람에게 개인적인 친절함을 보이면서 다가와 무엇을 이야기 할 때, 그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에게 곧 바르게 말하는 것은 왠지 잘못인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1992년 8월 18일 아침, 나는 극동 지역에서의 나의 봉사와 직책을 해고한다는 결정을 통고 받게 되었다. 그날 아침, 나에 대한 해고 결정을 심의 했던 극동지회의 지회장과 대총회 부총무가 나의 사무실에 와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럿셀, 우리는 정말 극동지역에서 당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수년 동안 교회를 위하여 놀라운 봉사를 해왔소. 만일 지금이라도 당신이 우리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글도 인쇄하지 않을 것과 우리가 인정하는 장소에서만 설교하겠다는 약속을 해준다면, 기꺼이 우리는 돌아가서 지난 밤에 이루어진 결정을 다시 번복하겠소.” 그 두 사람은 내가 오랜 세월 동안 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과거에 나의 봉사와 헌신에 대해서 존경을 표했던 사람들이었다. 대총회의 부총무는 이전에 극동지회에서 함께 일했었던 사람이다. 그들이 나에게 최후의 통지를 가지고 왔을 때에도, 나에 대한 그들의 존경과 예의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진정으로 나에 대한 대총회의 지도자들의 “해고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수년 동안 친구로서, 또한 동료로서 함께 일했었다. 그들은 내가 설교할 때 나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던 자유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신학에 대해서 대항하던 사람들이었다. 나를 찾아왔던 지회장은 나에게 호주의 아본데일 삼육대학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적인 가르침에 대한 염려를 여러 번 표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에 나의 봉사와 일을 망가뜨리려고 했던 남태평양 지회의 지도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이었다. 그는 남태평양 지회가 나에 대한 모종의 다양한 “교육”을 촉구하는 편지를 나에게 보여주었으며, 그들의 모든 요구를 거절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는 매해 봄마다 열리는 연례회의 때마다, 나의 고향인 호주의 지회장으로부터 내려오는 나에 대한 불만들을 처리해 주던 사람이었다. 그 두 사람은 그릇된 예배 방식인 “축제”스타일을 전혀 동의하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동 인도네시아 삼육대학에서 안식일에 연주되었던 축제형 음악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과 같은 일은, 그들이 나와 유사한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증거하였다. 그들에 대한 나의 이러한 기억들은, 그들이 그날 아침에 내게 보여주었던 친절과 애정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당신의 파수꾼으로서 나를 부르셨다는 사명을 거절하지 말아야 했다. 그날 아침, 내가 그 두 사람의 호의를 거절 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의 신에 대한 나의 지식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나의 결정이었다. 그날 아침, 만일 내가 그들의 친절을 받아들였다면, 나는 교회 안에 들어온 배도와 축제식 예배와 무너져 가는 표준에 대해서 더 이상 설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순결한 복음을 변호하는 일에 있어서 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높일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사단의 역사를 선동하거나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단이 영혼들을 파괴하는 일을 저지하고 막을 수 있는 목사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보다 사단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스러운 진리를 지지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낮추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숫자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까? 왜냐하면 그들에게 어떤 “명예와 직책”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배도의 물결이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증가일로에 있는 배도적인 교리를 진심으로 억제하고자 하는 합회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합회는 이러한 문제들을 오히려 가능하면 회피하고자 한다. 지도층의 이러한 태도 아래에서, 우리의 예배와 인쇄물과 의료선교사업과 교육은 점점 더 성경의 표준을 외면해 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남은 교회에서, 목사로서 또는 어떤 높은 직위에서 봉사하라는 부르심을 받을 때 그들은 이제부터의 자신들의 첫째 의무는 어떠한 배도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 “충성”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특히, 만일 그들이 안수 받은 목사나 합회의 지도자인 경우에는, 침묵을 지키는 상태에서 사람들과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을 지혜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목사”라는 타이틀은 “충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들은 가야바에 대한 유대인들의 충성을 무의식 중에, 또는 의식적으로 따라가고 있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과거에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남은 교회에서 장로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와룬가 교회였는데, 그 교회는 꽤 큰 교회였다. 30년 전, 거의 모든 장로들은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와룬가 교회에 커다란 일이 발생했었다. 한 부부를 출교시키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교회에 제기되었다. 그 당시, 와룬가 교회의 거의 모든 장로들은 교단에서 몸을 담고 일하던 사람들이었다. 공교롭게도, 다른 어떤 장로보다도 내가 그 부부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그 부부의 출교 문제를 다루는 장로회의가 열렸다. 나는 그 부부가 잘못 고소 받고 오해 당하고 있는 면에 대해서 장로들에게 말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회의에서, 그 부부의 진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였다. 그 부부가 가지고 있던 진짜 “죄”는 그들이 당시 적지 않은 재림 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밥 브림스미드의 견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회의에 참석하였던 다른 장로들처럼, 나 역시 브림스미드의 견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적어도 그 부부에 대한 문제를 심사하는 일에 있어서 공정한 입장을 취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 부부를 와룬가 교회에서 제거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어 내기에 급급하였다. 나는 그 부부가 비록 브림스미드의 견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교회는 그 부부에게 자신들이 믿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들이 진리에서 어떻게 빗나갔는가를 성경적으로 증거해 주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들과 그들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제거하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 후, 그 부부는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잃어버렸다.
그 회의에서 나타냈던 나의 비겁한 태도에 대해서, 이미 주님과 그 부부에게 개인적으로 회개하였지만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지금, 아직도 그 부부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통감하게 되며, 수치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30년 전, 그 부부를 출교시키는 회의에서,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장로들에게 불충성하게 들릴 것 같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회의에 참석하였던 연합회장과 지회 재무와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이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인 발언을 할 때,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부부를 출교시키는 데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반대를 표하지도 않았었다. 나이 많은 교회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던 “착하고 순종적인” 젊은 장로라는 평판을 잃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러한 나의 태도에 대한 후회와 수치스러움은 그 이후 나의 신앙과 확신을 형성하는 데에 계속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만일 여러분들이 교회로부터 어떤 직책을 맡아달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나의 충고는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 직책을 받아들인 후, 하나님께 충성하고 신실하며, 그 직책이 요구하는 책임과 표준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수행하라는 것이 나의 권면이다. 직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진리를 옹호하며, 진리를 옹호하는 교인들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오류를 거절하며, 오류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만일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러한 것에 대하여 확고한 신념과 태도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는 그 직책에 합당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리를 위하여 분명하게 말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데, 그가 형제들과 동료들을 두려워하여서 자신의 책임을 신실하게 감당하지 못하는 연약한 성품과 기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남은 교회와 자신을 위해서 훨씬 유익하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고, 하나님의 남은 교회 전체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이 책임 있는 자리에 앉게 될 때, 그는 진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며, 충성의 소리를 저항과 항의의 소리로 듣게 된다. 목사들과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어깨 위에 올려 높으신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가장 큰 위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