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불편하십니까?
저자: 케넷 우드 (Kenneth Wood)
몇 주 전 우리는 은퇴한 한 목사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오랫동안 저는 리뷰지에서 제시되는 기별들을 볼 때 무언가 맘이 편치 않은 것을 느껴왔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표준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깊은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는 아주 강력한 기별들이 실려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러한 기사는 진정으로 격렬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어떤 이들을 낙심시켜 많은 이들로 하여금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를 잃도록 하는 위험이 있다고 생각됩니다.,교회의 개혁이 얼마나 많이 요구되던지 간에 우리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요, 멸망해 가는 세상에게 마지막 기별을 줄 유일한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계승할 다른 교회가 없으며, 이 교회보다 더 나은 교회가 있지도 않습니다. 승리하는 백성들을 하늘 왕국으로 이끌어 갈 존재는 바로 이 교회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 경험에서의 성공을 이룩하고자 한다면 그는 교회 안에서 성공해야 되며 100% 교회를 지지함으로 성공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른 어떤 길이 없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은 이 편지에 나타난 의미에 공감할 것이다. 그들은 피얼슨 대총회장이 주제한 1973년과 1974년의 연례 회의에서 주어진 기별 가운데 나타난 진지한 회심의 표현을 반가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만일 교회 지도자들이 더욱 충실했었다면 우리가 지금쯤은 하늘 왕국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제안을 들을 때 불편함을 느낀다. 그들은 다만 교회의 전도 사업의 진전과 영적인 상태를 만족히 여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견해를 같이 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이 때를 위한 하나님의 교회이며, 마지막 심판의 시간에 필요 되는 특별한 기별을 주는 유일한 교회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교회의 모습을 번영하는 모습으로 색칠한다면 우리는 부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리뷰지에 나오는 소식란은 교회의 성공을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끊임없이 전개된다. 리뷰지의 전반부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사들은 용기를 주는 것들이며, 긍정적인 관점에서 진리를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리뷰지가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리뷰지는 교회 목사가 하는 역할과 동일한 역할을 해야 한다. 고통 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안락한 상태에 있는 자를 괴롭히는 역할 말이다. 교회 기관지는 위험의 때에 “평화와 안전”을 부르짖어서는 안 된다.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리뷰지는 때때로 인기 없는 기별을 주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성령의 증언들을 통하여 죄를 지적하고 개혁을 촉구할 때 하나냐처럼(렘 28:9) 감히 모든 것이 다 잘된다고 교회를 확신시켜서는 안 된다.
화잇부인이 엘리야가 고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는 경험을 상고하면서 그녀는 너무도 격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도 단호한 책망의 음성이 필요하니 이는 한탄할 만한 죄악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까닭이다… 너무도 흔히 행하여 지고 있는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설교들은 오래 지속하는 감화를 끼치지 않는다. 나팔은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하고 똑똑한 진리에도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한 감정을 표현해야 할 때에, 그처럼 분명히 말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라고 말할 그리스도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또한 왜 침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올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고 말할 필요가 있었는가 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왜 그는 동생의 아내와 사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헤롯에게 고하여 헤로디아의 분노를 일으킬 필요가 있었는가? 그리스도의 전주 자는 분명이 말함으로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왜 그는 죄 중에 사는 자들의 불쾌함을 사지 않고 행동할 수 없었을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실한 수호자로서 서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였고 드디어 정책이 충실을 대신하였으며 죄는 책망을 받지 않고 지나게 된다. 언제 충실한 견책의 음성이 다시 한번 교회 중에서 드리게 될 것인가?” 선지자와 왕, 131-133.
죗된 관용과 그 결과
최근에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지도자들이 옳은 일을 옹호하고 잘못을 견책하는 엄숙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제사장 엘리가 그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했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들과 다른 이들의 죄에 대하여 눈을 감았고, 그 땅에서 자행되는 악을 시정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죽음을 직면했고, 그의 아들들은 전쟁에서 죽었으며, 법궤는 불레셋에 빼앗겼고, 30,000명의 이스라엘 백성은 도륙을 당하였다. “이 모든 것은 견책하지도 억제하지도 않고 성행하도록 허용한 까닭이었다.” 상동 402, 403.
그러나 지도자들이 충실하게 죄를 견책하고 진영을 죄로부터 정결케 해야만 하지만,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분명하게 제시해야만 한다. 그들은 죄인들로 하여금 살아 있는 생명수 샘물로 나와서 그 물을 마시도록 격려해야만 하며, 그들의 영적인 상처를 위대하신 의원에게 가져와 길르앗의 유향이 그 상처에 얹혀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엘리야가 일했던 방법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가 일했던 방법이었다 (상동 109, 1120, 395-6, 644-5).
우리 독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만일 우리가 교회의 결점들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더 편안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심각한 잘못들은 시정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를 촉구할 때 우리는 언제나 용기와 소망을 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기별은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9’ (리뷰엔헤랄드, 1975년 12월 25일자. 2쪽)라고 말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