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신학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비결
저자: 콜린 스텐디쉬 박사 / 럿셀 스텐디쉬 박사
과연 어떤 사람이 신신학의 진정한 정체를 노출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신학은 사단이 제작한 걸작품이기에 그러하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아름답게 변장을 한 것이다. 심지어 충실한 지도층일지라도 신신학의 “몰려오는 불의의 급류를 막기에는 무력” 하다 해도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5T 210). 슬프게도 지도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어떤 이들은 신신학의 치명적인 침입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과 생애 가운데 들어오도록 지지하고 장려한다. 그런 지도자들은 종종 신신학의 침입에 대항하는 충실한 목사들과 다른 지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을 비판적이고, 혹독하며, 그리스도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정죄한다. 그리하여 충실한 종들은 빈번히 동료들과 교회에 대한 그들의 외모적 충성을 보이기 위해 음성을 낮추어 속삭여야만 되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평신도들일지라도 경고의 음성을 높이는 것은 쉽지않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지방 교회에서 자신들의 지도력과 감화력을 희생시키면서 까지 그렇게 해왔으며, 또 다른 이들은 출교시킨다는 위협을 직면하면서도 그렇게 해왔다.
호주와 뉴우질랜드같은 지역에서는 하나님의 진리에 충실한 자들이 “염려를 끼치는 형제들” (CBs: Concerned Brethren) 이란 경멸적인 칭호로서 불리우며 무시당하고 있다. 어떤 개인과 그의 감화력이 그런 칭호로 불리우는 것보다 더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손상받을 수 있을까? “염려를 끼치는 형제들”이 신신학의 지지자들보다 교회에 훨씬 더 큰 손상을 입히고 있다는 말이 종종 우리들 귀에 들려온다. 신신학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기를 드는데는 평범한 용기 이상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은 “진리를 악용하는 일에 대하여 아무 항거하는 일 없이 그냥 귀담아 듣는 일을 찬성하지 말라는 것” 이다. (가려 1권, 246).
신신학이 얼마나 사랑스럽고도 잘 보호된 형태로 꾸며졌든지간에 분열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항거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러한 항거하는 태도는 그들을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로서 보이도록 할 것이다. 빈번히 그들은 그들이 믿는 교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충실한 백성들은 그런 거짓된 참소로 인해 낙담해서는 안된다. 거기에는 “다른 길” 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신다.
“만일 하니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평가하실때 다른 어떤 죄보다 더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 있다면 (당신의 백성들이) 비상시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신앙적인 위기가운데 있을 때에 보이는 무관심과 중간입장의 고수는 하나님께 대한 가장 악한 형태의 적개심과 동등한 정도의 엄청난 범죄로서 취급된다.” 3T 281
그러나 하나님께 영예를 돌리기 위한 모든 행동은 필연적으로 반대를 맞게 된다. 인간의 본성은 그리스도 당시와 다를게 전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평화의 왕이시나 분열의 원인이 되셨다. 기쁜 기별을 선포하시고 인간 자녀들의 마음에 희망과 기쁨을 주시려고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깊숙히 타오르고 격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논쟁을 열어 놓으셨다.” 사도행적, 86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불충실한 교인들로부터 가장 강렬한 반대보다 덜한 반대를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확신을 주신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요 16:23
불충실한 교인들은 분명한 소리로 발해지는 진리의 결과로 인해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시고 계신다.
“그러나 진리를 받아들일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범죄함으로 진리를 떠나간 사람들이 비워놓은 자리들을 차지할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 진정한 의미 그대로, 그 단순성 그대로 옹호하는 충실하고도 믿을만한 주인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불충실한 자들이 진실되고 충성된 자들로부터 분리되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그같은 부류에 속하는 자들은 감소되지 않을 것이다. 확고하고 진실한 자들이 범죄하여 배도한 사람들로 인해 생긴 공백들을 메꿀 것이다.” 마라나타, 200
배도를 직면할 때 잠잠히 있는 것은 죄요, 비겁한 일이다. 무죄한 영혼들과, “죄짓고 살고”의 신신학에 희생이 된 희생자들의 피가 경고하지 않은 자들의 어깨 위에 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 곧 하나님의 성소가 하나님의 진노를 제일 먼저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늙은 자들, 하나님께로부터 큰 빛을 받고 백성들의 영적 이익을 수호하는 자들로 선 자들이 그들의 의무를 저버렸다. 그들은 우리가 이전처럼 이적들과, 현저한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을 바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시대가 변하였다. 이 말이 그들의 불신을 강하게 해주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은 선도 행치 않으시고 악도 행치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너무 자비하시므로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음성을 나팔 소리같이 높여 하나님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와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려 주지 않는 자들은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부르짖는다. 이와같이 짖지 않는 벙어리 개들은 진노한 하나님의 복수를 받을 자들이다.” (5T 211; 증언보감 2권, 64,65)
신신학을 어떻게 대할까?
무엇이 지도자들로 하여금 신신학에 대해서 올바로 대처하는 것을 그렇게 어렵도록 하는 것일까? 이미 겪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요인들을 지적할 수 있다.
1. 어떤 지도자들은 남은 교회의 초석이 되는 진리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그들은 무언가 잘못이라고 모호하게 감지하기는 하나 영원한 손실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거의 깨닫지 못한다. 곧바른 기별이 나올때, 자신도 모르게 신신학에 빠져있는 목사들은 그것을 조심하라든가, 혹은 지도층과 자신들이 믿고, 가르치는 교리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막연한 말만을 되풀이 한다.
2. 대부분의 행정위원들은 그들이 참석해야만 하는 여러가지 위원회에 발이 묶여 있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그들 자신의 탐구는 일시적이며 임기응변적인 성격의 것이다.
3.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공적인 기본 신조들에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생애, 그리스도의 본성과 대속문제와 같은 핵심적인 교리들이 극히 피상적이고 슬쩍 변죽만 울려버리는 식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까닭에 가장 열광적인 신신학의 교사들일지라도 그런 교리들을 자신있게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고로 그들에 대하여 강력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어렵다.
4. 신신학을 주장하는 많은 목사들은 중간적인 입장의 주제들을 설교한다. 그들은 현대진리를 가르치지는 않지만, 직접적으로 오류를 가르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귀중한 진리들이 많이 들어 있다. 그러나 지금 양떼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대진리’이다. 나는 기별자들이 현대진리의 중심부에서 벗어나 양떼를 결합시키고 영혼을 성화시키는데 바람직하지 못한 주제로 향하여가는 위험을 보아왔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업을 망치기 위하여 여기에 모든 가능한 수단을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성소문제와 같은 문제들은 2300주야, 하나님의 증거와 예수의 믿음 등과 더불어 과거에 있었던 재림운동을 설명해 주는 것은 우리의 현재 위치를 보며 의심하는 자들의 신앙을 일으켜 주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확증시켜 주는데 아주 적절한 것들이다.” 초기문집, 66
5. ‘죄짓고 사는’ (sin-and-live) 미묘한 신학은 대단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어서 오류에 빠진 목사가 자신의 청중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교회 직원회를 열렬한 지지자들로 쉽게 채울 수 있으며,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다른 이들은 율법주의자들 이라고 간주되어지기 때문에 직원회에서 빠지게 된다.
6. 신신학의 교사들과 설교자들은 역사적인 재림 신앙에 대해서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런고로 그들은 쉽사리 공격을 받을만한 교리를 취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종종 매우 친절하고도 오래 참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며 충실한 자들은 이스라엘을 괴롭게하는 자처럼 보이게 된다. 옛날, 충실했던 엘리야처럼 우리도 다음과 같이 말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화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왕상 18:18
7. 신신학을 가르치는 목사들의 기별은 자주 그리스도 중심의 사랑의 기별로서 보여진다. 그러나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신 생애와 가르침, 그분의 봉사 등은 그들의 입에 잘 오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자신들의 잘못된 견해 가운데로 양무리를 감히 인도하려는 목사들과 교사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의 열매가 완전히 무르익을 때까지 그 잘못된 견해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또한 그때쯤 되면 이미 큰, 아마 만회할 수 없는 정도의 손상이 가해진 상태가 되어 버린다. 마치 집이 갑자기 쓰러질 때까지 자기 집에 동록이 쓴 것을 알지 못하는 부주의한 집 주인의 경우와도 같다.
결국에는 깊은 죄 가운데로 빠뜨리는 것 없이 죄짓고 사는 신학을 설교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런고로 신신학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 아내들에게 불충실하고, 가정이 깨어지며, 심지어는 술취함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그들의 ‘사랑’ 신학의 공허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자행된 오류의 실상은 실로 가공할만 하다. 그런 가공할만한 죄악의 행각이 드러나게 되면 대회에 의해서 어떠한 조처가 취해지는데, 우리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심지어 그 지점에 이른 때에라도 많은 교인들은 신신학의 사랑 타령에 너무나 깊이 빠져있기 때문에, 오히려 대회가 사랑이 없고 용서할 줄 모른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그런 조치를 취하는 지도자들은 그런 큰 죄를 범하도록 이끈 근본 원인은 바로 신신학에 병들어 있는 교인들의 신앙관 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신신학을 어떻게 분별할까?
그러면 어떤 교사나 목사가 신신학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징표는 무엇일까? 교사나 혹은 목사 자신이 신신학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이들은 자신이 신신학을 지지한다는 것을 격렬하게 부인한다.
1. 만일 서너번의 설교를 들은 후 그 목사가 무엇을 믿는지,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당신이 알지 못한다면 그 목사는 진리에 관한 진정한 확신이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2. 만일 설교들의 주제가 하나님의 율법은 제쳐놓고 계속 사랑만 강조하는 것이라면 그는 신신학에 흠뻑 물들어있는 것이다.
3. 만일 목사가 칭의, 갈바리의 십자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강조하는데, 성화나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봉사, 하나님의 공의같은 주제들은 무시하거나 대단찮은 것으로 취급한다면 조심해야 한다.
4. 만일 목사가 부흥과 회개와 개혁을 일으키고자 하는 부담이 없다면 당신의 교회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5. 만일 당신이 재림신앙의 위대한 기둥들에 관한 기별들을 듣지 못하고 있으며, 진리와 교리들이 무시되고 있다면 당신의 목사는 충실한 목자가 아니다.
6. 만일 당신이 침례 교회에서 듣는 것과 비슷한 설교를 듣는다면 그 목사가 재림신앙에 대해서 불충성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거의 없다.
7. 만일 목사가 종교통합 운동에 관한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고, 우리와 같지 않은 믿음을 자진 목사들과 단상을 서로 교환하며, 타 교파에 대한 전도나 영혼구원에 대해서는 무관심 하다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8. 만일 목사가 예언의 신을 무시하고, 대단찮게 여기며, 적당하게 얼버무리면 당신은 그 목사가 하나님의 교회의 목사가 될 권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명확한 진리들을 설교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시대 교회의 교사나 목사가 되기에 부적합하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의 교인이 될 자격도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들을 살펴봄
오늘날 우리는 세계적으로는 거의 반수가, 미국에서는 60%가 안식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현실을 직면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미국에 있는 우리 청소년들의 70%가 교회를 떠나고 있는 현실 가운데 있다. 더우기 남아있는 자들중 얼마가 진정한 회심의 경험을 했는지를 우린 모르고 있다. 십일조와 연금은 교인수의 증가와 인플레와 정비례하여 증가하지 않는다. 너무 자주 그에 대한 우리의 해결책은 표준을 낮추고, 세속적인 유흥을 더 많이 제공하며, 교회 징계란 것은 없는 것으로 하고, 너무 신조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교인이 되는 데는 별로 큰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원한 파멸을 가져오는 신신학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사랑의 그리스도, 진리의 그리스도, 순결하신 그리스도, 그분의 품성의 사본인 율법을 제정하신 그리스도, 전능하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 사단과 그의 매개체들의 정체는 폭로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단의 기만의 걸작품을 폭로해야만 하며, 그가 제시하는 “사랑”을 무관심으로서, “돌봄”을 방종으로서, “용서”를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으로서, “친절”은 자아를 높이는 것으로서 보아야 하며 그리고 “심판이 없다”는 식의 달콤한 가르침은 거부해야 한다. 참된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보배로운 영혼들을 염려할 정도로 적극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제야말로 크게 외치고 목소리를 아끼지 말아야 할 때이다. 죄를 응당 불러야 할 이름으로 부르며, 나침반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원칙에 진실하며,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의를 위해 굳게 서며, 아첨이나 뇌물이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임마누엘 대왕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리며,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되고, 알면서 어떤 죄를 범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선택하며, 시온의 성벽위에 선 파숫군들이 되어야 할 때이다. 지금이야말로 어린양의 피를 통한 진리와 의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소집해야 할 때이다. 지금이야말로 그분의 길을 곧바르게 하여 여호와의 길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진정 지금이야말로 예수님의 오심을 촉진시켜야 할 때이며, 사랑과 자비와 오래 참음과 순결과 공의의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곧 오심을 선포해야 할 때이다.
어떤 목사들을 자신들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의 명백한 기별들을 전하면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까봐 두려워 한다. 교회 안에서 능률적이고도 실제적인 교인들을 많이 잃어 버리는 것은 교인들에게 비젼을 제시하거나 주의 길을 예비하는 강력한 도전으로 그들의 에너지를 활성화시키는 일에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결과이다. 오직 분명한 기별만이 남녀들을 하늘 왕국과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로 이끄는 힘을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의 소심함과 무관심의 사슬을 깨고 일어설 준비를 갖춘 사역자들과 평신도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사실로 인해 고무되고 있다. 은혜의 시간이 마칠 때까지 배도는 증가할 것이나 진리 가운대로 새로 들어온 자들이 불충실한 자들의 자리를 대신 채우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 충성스러운지는 엄격하게 시험을 받게 되지만 우리에겐 놀라운 언약이 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막 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