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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 있는 두 그리스도

마샬 그로스볼

 많은 신실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교인들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견해가 엇갈려 있다.

 “아, 그거야 어의학적 문제에 불과한 거죠,”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독자가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알게 되겠지만 그리스도의 속성 문제는 영혼구원 사업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 때문에 사단은 초대교회 이래로 가짜 그리스도를 교회 안에 확립시키려고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휴거 론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원수는 여기서도 이론적 근거를 철저하게 다져놓았다. 만약 사단이 가짜 그리스도를 남은 교회에 소개해서 거기에 거짓 기독론을 요지부동하게 세워놓을 수만 있다면 세 천사의 기별의 능력과 구령사업의 효율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고 있는가?

 나의 목회사역 초년병 시절에 나는 매우 젊고 열심 있는 천주교인 한 분을 구도자로 얻은 일이 있었다. 그는 폴란드계의 미국인으로 종교적인 배경은 그가 어려서 받은 신앙이 그 전부였다.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러 가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 이 사람은 천주교인이고… 마귀는 처음부터 자기 교회에 거짓 예수를 소개해 왔는데 … 그렇다면 그 목적이 영혼을 파괴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이 사람에게 참 그리스도를 소개했을 때 사단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짐 팔로스코빗츠 씨를 만나 첫 시간부터 나는 신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어떤 분이셨는가에 대한 복음을 같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성경의 심오한 진리가 점차 이해되자 그렇게도 무뚝뚝하던 그가 얼마 안가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날 밤 당장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십여 년이 지난 오늘도 그는 자기가 나가는 교회에서 겪은 허다한 풍파와 배도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충성되고 겸손한 평신도 지도자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말씀하셨다.

영혼구원의 비결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치켜드는 것이 영혼구원의 비결이다. 그것이 오순절의 경험을 갖게 만든 비결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드는 것이 우리의 대규모 전도 집회와 소규모 성경연구 모임들을 유려하고 효과 있게 만드는 비결이라는 사실에는 거의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그리스도를 높여야 하는 것일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무리 가운데 거짓 그리스도를 높이 치켜드는 자들이 있을 것을 암시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저들도 예수님을 주로 섬기고 그의 오심을 기다린 그리스도인들이란 사실이다. 저들은 예수를 높였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에 다녔고 예수의 이름으로 십일조와 연금을 바치고 했으나 문제는 예수께서 저들을 모르신다고 하신 것이다. 그들이 경배하고 높이던 사람이 누구였던지 간에 참 그리스도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저들은 거짓 그리스도를 믿고 섬겼던 것이다. 저들이 섬긴 예수가 엉뚱한 예수였음을 주께서 지적하셨는데 그 증거는 바로 그들이 섬기던 예수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저들을 인도하지 않았던고로 저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에는 그리스도도 많고(마 24:24) 주도 많을 것(고전 8:5)이나 참 그리스도는 오직 한분이 계실 뿐이다.

 거짓 그리스도와 참 그리스도가 있다는 증거는 요한일서 3:4-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참 그리스도)가 우리 죄(불법)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참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저들은 그저 그리스도라 하는 어떤 누구를 알기는 알았으나 그는 거짓 그리스도였으므로 저들이 죄를 이기도록 인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계명을 지키면 이로서 우리가 저(참 그리스도)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참 그리스도)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2:3-4)

 이 말씀은 물론 일요일을 지키는 무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이 남은 교회에게 과연 안전할까? 벌써 교회 안에는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느니,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느니,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라느니 등등 별 소리를 다하는 이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아는가?  이와 같이 “불법”을 가르치는 소리가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참으로 참람 된 일이 아닌가! 성경의 빛으로 조명해 볼 때 저들은 분명히 거짓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들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신자로서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다음과 같은 진행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가? (바로 그 사람이 당신이라고 상상해 보라.)

심판대 앞에서

 “주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제가 주님의 교회에서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가르치고 십일조 잘 내고 교회 잘 받들고 예언의 신도 다 믿었습니다.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대 이름을 생명책에서 찾을 수가 없네. 오직 ‘이기는 자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 하겠’다 했고 또 그런 사람만 ‘흰옷을 입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리라’ 하였네. 내 앞에서 물러가서 사단과 유다의 무리 편에 가 서게. 그대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나니’라고 한 대로 그대가 누구에게 속하였는가를 보여주고 말았네.” (계 3:5; 2:7; 요일 3:8).

 “그렇지만 주님!” 당신은 너무도 놀라고 낙담하여 부르짖는다. “제가 율법을 다 지키진 못했겠지만 어느 정도는 지켰습니다. 제가 제대로 못한 부분에 대해선 그저 주님의 은혜만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제 대신 모든 것을 다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전 그것만 믿었습니다. 사람은 도저히 온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게 아닙니까! 그렇지가 않았나요? 제가 섬긴 그리스도는 제 마음에 율법을 새겨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님의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은 율법주의이며,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공로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고, 우리는 그저 주님의 은혜만 믿으면 된다고 배웠거든요. 우리처럼 믿은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사실 순종의 좁은 길을 택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광신자 또는 완전주의자들이라고 불렀지요. 우리는 그들이 우리 죄를 지적하면서 자주 회개하라고 하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사람들로 생각했습니다.

 “주님,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 주님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그 말씀들이 주님을 분명히 높이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주여, 우리는 주의 앞에서 주의 만찬을 먹고 마셨으며, 목사님들을 통해 주의 교훈을 길거리에서 배웠습니다! (눅 13:26)

 그 때 예수께서는 비통한 어조로 대답하신다. “유감일세, 사랑하는 낯선 자여, 그대가 그렇게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사람의 가르침을 믿었으니 참으로 유감이오. 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증거 되었소. (마 1:21) 나는 그대의 마음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기를 힘썼으나 그대는 나를 모른 체 하고 다만 육신적 안일에 빠져 만족하고 있었소.

그들은 그들의 집에 찾아오는 비천한 왈덴스 인들로부터 진리를 배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부들의 가르침을 따라 가짜 그리스도를 믿고 가짜 신앙을 했다

 그대는 과거 그대가 자신을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교인이라고 간주했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나의 사면을 기대하시오? 암흑시기에 살았던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대가 받았던 빛의 절반도 못되는 빛을 받았지만 그대와 꼭 같은 이유로 구원을 상실하였소. … 그들은 그들의 집에 찾아오는 비천한 왈덴스 인들로부터 진리를 배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부들의 가르침을 따라 헛된 그리스도를 믿고 헛된 신앙을 했기 때문이오. 그대는 성경과 예언의 신을 소지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읽고 공부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가 있었으니 그대의 사면은 전적으로 불가하오. 더구나 이점에 대해 내가 분명히 경고하지 않았소? (신부, 목사, 학자, 유명인사 등)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고. ‘의를 행하는 자는 그분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 하였지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주장만 하는 자가 의롭다 한 적이 있었는지? (요일 3:7) 그뿐 아니라 이 말씀도 있지 않소?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3) 고 이보게, 낯선 피고인! 그대 생각에는 인자인 내가 어떻게 깨끗했다고 생각하는가? 실제로 깨끗했다고 보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으나 법적으로 깨끗하다고 쳐준 것 때문에 깨끗했다고 보는가? 나는 그대의 완전한 모본이었으니 그대는 내 본을 따라 살 수 있었네. 왜냐하면 그대가 나의 믿음을 통해 받을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성격이나 능력도 나는 나타내 보였거나 사용한 일이 없었으니까. 나의 ‘완전한 인성’은 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내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기만 하면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인성이었네.(시대의 소망3권, 154)

 “낯선 피고인! 그대는 핑계가 있을 수 없소.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에 부가해서 나는 엘렌 화잇을 통해 특별한 기별들까지 그대에게 보내 주었으니까. 그대의 책장에는 참 그리스도를 그대에게 소개해 주기 위한 시대의 소망이란 책이 꽂혀 있지 않았는가. 거기에서 나는 매우 단순한 말로 그대가 오해할 수 없도록 이렇게 말했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악적인 특성을 복종시키고 아무리 강력한 시험이라도 이를 모두 대항할 방도를 그리스도 안에 준비하셨다.’ (상동 2권, 202)

 “이보게, 낯선 피고인! 그대는 나를 안다고 주장하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눅 13:27)

슬피 울며 이를 갊

 성경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눅 13:28)고 말한다. 주의 종은 말하기를 이들 중에는 많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이 주께서 모른다고 말씀하신 그 무리에 속할 것이다.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를 따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참되고 진실해 보이는 사람들 중 상당한 다수가 천한 금속이었음이 입증될 것이다.” (5T, 136)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그러나 이와 같은 미혹의 이면에는 사단이 재림신앙의 심장부 깊숙이 파고들어 가능한 한 많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짓 그리스도를 믿도록 계략을 베풀어 놓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재림교회 안에는 두 그리스도가 있게 되었다. 한 그리스도는 지상봉사 기간 중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인성을 가지고 완전한 칭의를 주기 위해 오셨으나 성화는 완전히 이루어주지 않는 그리스도요, 다른 그리스도는 자기가 구원하고자 하는 인생들의 인성 즉 타락하고 연약한 인성으로 오신 분으로 인간에게 완전한 칭의와 완전한 성화를 주시는 분이다. 이 두 그리스도의 차이는 실로 막대한 것으로서 그리스도교와 구원론의 핵심을 좌우하는 문제로 단순한 어의학적 범주를 훨씬 능가하는 영역의 문제이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자기의 주장을 교회 안에 확고히 심을 수 있다면 자신이 확립한 모든 종교적 철학을 교회에 견고히 세울 수 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데스몬드 포드가 처음 일어났을 때 그리스도의 본성 문제를 별난 각도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어의학적인 문제로 밀어버리기도 했으나 데스몬드 포드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예리한 조직신학적 통찰력이 있는 그는 만일 그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자기의 주장을 교회 안에 확고히 심을 수 있다면 자신이 확립한 모든 종교적 철학을 교회에 견고히 세울 수 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엘렌 화잇은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는 열쇠가 된다. … 이 문제는 우리의 연구과제가 되어야 한다. … 우리는 참회하는 정신으로 배우는 자의 겸비한 태도를 가지고 이 문제를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연구는 숨은 진리를 깊이 탐구하는 연구자에게 보상을 주는 풍성한 결실의 밭이다.” (가려뽑은 기별 1권, 304)

 그리스도의 본성 문제는 모든 문제의 중심이 된다. 그래서 데스몬드 포드가 자기가 확립한 그리스도의 본성 론을 내세웠던 것이려니와, 실은 그보다 앞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죄의 문제 즉 죄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죄의 정의 여하에 따라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바로 아담의 타락 이전의 본성이냐 타락 이후의 본성이냐로 달라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본성 문제에 대한 이해 여하가 구원에 대한 신앙여하를 결정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죄의 정의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죄는 불법이라”(요일 3:4)고. 불법이란 법을 어겨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 때문에 같은 성경절의 전반부에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분명하게 일러준다. 그렇기 때문에 엘렌 화잇은 이렇게 기록했다. “죄란 무엇인가? 성경말씀에 주어진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것뿐이다. 사도는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 4:15)고 하였다”(RH, 1890, 6, 10). “하나님의 말씀에 주어진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란 율법을 범하는 것이란 정의이다.”(영문 대쟁투, 493)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다한 신학자들이 5세기의 어거스틴을 비롯해서 이렇게 단순한 죄의 정의를 불만족스럽게 생각해왔다. 그런 식의 단순한 정의는 신학적 깊이가 결여된 정의라 느낀 것이다. 그 결과 본 교회의 신학자들 중에도 엘렌 화잇의 글에 비추어 볼 때 맞지 않는 새로운 죄의 정의를 거론하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그리스도-즉 거짓 그리스도를 창출해 낸 것이다.

 새로운 죄의 정의란 이런 것이다. 죄란 사람이 무엇을 행함으로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적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죄는 인간 의지의 행사 여하에 따른 것이 아니고 타고난 인간의 상태이다. 행사(행위)는 인간 속에 있는 죄의 결과에 불과하다. 물론 이 말 속에는 어느 정도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연약한 인성과 그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이기적 성질 때문인 까닭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죄는 의지의 행사가 있었을 때 성립되는 것이지 그러한 의지의 행사를 유발한 나약한 인간의 본성 그 자체가 죄는 아닌 것이다.

 예컨대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머리를 길게 기르지 말라고 했는데 아들이 장발족이 되었다 하자. 이때 죄는 아들의 몸에서 머리털이 자라도록 하는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힘이 아니고 이발을 하지 않은 행위 그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자라게 되어 있듯이 천성적으로 죄로 기우는 경향, 이기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경향이 죄는 아니다. 죄는 사람이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와 연합시키지 않은 까닭에 그 경향에 굴할 때 오는 것이다. 이점을 깨닫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런고로 죄란 근본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이지 인간의 어떤 본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사실은 매우 상식적이요 또 성서적이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이와 정 반대 되는 새로운 정의를 내놓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으려 하나 성경은 이율배반적인 책이 아니므로 적절한 말씀을 찾지 못하고 그저 몇 군데 있는 말씀을 문맥을 무시하고 그 의미를 곡해해서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다. 그들의 주 무기가 로마서 14:23이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니라.”

 그들은 말한다. “이것 보시오. 그러니까 죄는 믿음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의지의 행사가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아기가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인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허점은 본문의 말씀을 펴서 그 구절과 문장 전체를 잘 읽어보면 밝히 드러난다. 그 구절의 전반부는 후반부를 설명하고 있는데 독자가 읽어보면 알겠지만 신학자들의 주장은 빗나간 것이다.

 만일 믿음이 없으면 무엇이나 다 죄라고 한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무도 돌멩이들도, 심지어 새예루살렘의 진주문들도 믿음이 없으니까 죄라고 해야 옳지 않은가?

 그들은 “그런 게 아니고 거기서 ‘모든 것’이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고 대답한다. 그게 사실인가? 본문의 말씀을 읽어보면 ‘모든 것’이 사람이 아닌 게 너무도 분명하다. 본문의 전반부를 읽어보면 그것이 전혀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신학자들은 절대로 본문의 전반부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 본문을 보면 이렇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23)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만일 사람이 믿음이 없이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죄를 짓는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믿음이 없이 하면 그것이 죄이다. 이 말씀은 요한일서 3:4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오직 믿음이 있어야, 즉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믿음 없이 하면 그것은 율법을 범하는 결과를 낳는다.(요일 5:3-4 참조)

엘렌 화잇은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요일 3:4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죄의 정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새롭고 비성서적인 죄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성경구절로 이사야 59:2이 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그러니까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다”라고 저들은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저들은 말씀을 제멋대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분명히 죄가 관계의 단절을 유발한 것을 말하고 있다. 단절된 관계는 죄의 원인인 동시에 죄의 결과이지 죄 그 자체는 아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죄의 정의를 통해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세상에 소개되고 있다. 엘렌 화잇은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요일 3:4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죄의 정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제발 어떤 새로운 죄의 정의를 창안해 내려고 애쓰지 말라.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새로운 죄의 정의를 꾸며놓고 그 위에 인간적 논리에 입각한 새로운 교리적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 결과 앞에 보는 바와 같은 교리적 차질을 노출하고 있다. (독자는 먼저 한쪽을 다 읽고 다른 한쪽도 다 읽은 다음 양쪽을 하나하나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 그리스도의 비교

새로운 죄의 개념 위에 확립된 새 그리스도
역사적 재림신앙에 입각한 그리스도와 죄에 대한 개념
1. 죄는 우리가 타고난 상태이지 의지의 행사가 아니다. 죄는 인간의 상태이지 행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죄는 아담의 타락에 연유한 것이며 우리의 잘못에 의한 것이 아니다)

2. 죄는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의지의 행위이다. 따라서 그 책임은 죄인이 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율법을 지킬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3. 죄는 우리가 타고난 상태이므로 그리스도는 보통 우리가 출생한 상태와는 다른 상태로 출생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재림교회에 들어온 새로운 가르침인데 우리의 역사적인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위에 지적한 죄의 정의를 받아들이면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이해도 변경되지 않을 수 없다.)

4. 예수는 인간의 타락하고 연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진 것이다. “인성을 쓰신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과 같이 되셨다. 그는 우리의 저하된 상태의 본성을 취하셨다”(영문 가려뽑은 기별 1권, 252, 253). 비록 그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했으나 전혀 죄에 동참하지 않으셨다.”(상동, 256) 이는 그가 육신의 연약함에 굴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그의 신성에 연합시키심으로 승리하셨다. 이로써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할 때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모본을 보여 주셨다.

5. 예수는 출생한 상태가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그와 같이 닮는 다는 것을 전혀 바랄 수 없다. (사단은 항상 인간이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사상에 대결해 싸웠다.)

6. 중생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에게 새로운 영적 속성을 주신다. “진정한 신앙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게 하며,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더불어 승리자가 되게 한다. 그 까닭은 인간이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며 신성과 인성이 그의 안에서 결합되기 때문이다.”(상동, 364)

7.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가 법적으로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복된 소식이다. 복음은 칭의가 그 전부요 성화란 사실상 이룰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인간이 모든 죄를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는 “행함으로 구원 얻으려는 자”로 낙인이 찍힌다.)

8.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성화시키시기 위해 오셨다는 복된 소식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인성을 누구나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소망 3권, 154)

9. 따라서 예수께서 행하시는 구속사업은 우리를 대신해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의 본으로 행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봉사는 승천 후 주후 31년에 개시된 칭의의 봉사가 그 정부다. (그래서 1844년의 의미심장한 역사적 의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10. 예수님은 1844년에 성소를 정결케 하기 위해 새로운 봉사사업에 착수하셨다. 이 사업은 당신의 백성을 조사 심판하고 죄에서부터 정결케 하는 것인데 이로써 저들은 최후의 대 환란을 중보자 없이 견디게 되며 승천할 준비를 마치게 된다. (그러므로 1844년이란 시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위에 보여준 왼쪽의 이론은 데스몬드 포드의 신신학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이론은 그가 창안한 것이 아니다. 그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 그 깃발을 높이 들고 제창한 결과 교회 안에 홍수사태를 유발한 바 있다. 비록 그 교리를 가르친 장본인인 그는 교회 밖으로 추방되었으나 그의 가르침은 그대로 남아있어 누룩처럼 퍼져 결실을 맺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기본적 연구를 통해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다음 달에는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전개해 보기로 하자. 항상 올바른 증거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제시하는 쪽이나 그것을 검토해보는 쪽 양편 다 건전한 이성과 건전한 권위(근거)를 존중하고 열려진 마음자세로 증거를 공정하게 저울질하려는 성의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 당시 “무지한” 백성을 책동하여 참 그리스돌 따르지 못하도록 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백성이 성서적 진리의 빛에 대해 편견을 가지도록 만들어 결국은 증거를 저울질 할 생각도 못하게 밀고 갔었다. 나는 독자에게 이 기사의 결론을 끝까지 다 읽고 많이 기도하며 증거를 신중하게 검토할 것을 호소하는 바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받은 모든 빛에 대해 충성되게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는 우리 각자가 구원의 도리를 깊이 깨달을 시간을 허락하고 기다려 주신다. 우리는 타인의 신실한 신념을 비판해선 안 된다. 어느 누가 안식일을 믿던 일요일을 믿던 그리스도의 본성이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본성이라 믿던 타락 이전의 본성이라 믿던 그들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류를 믿는 신실한 신자들이라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이 조금도 진리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무엇을 믿으면 그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주도 많고 그리스도도 많으나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참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밖에 안 계시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조금도 인간적 생각으로 짐작하고 더듬을 필요가 없다. 다음 호에서 이 문제가 분명히 밝혀질 것을 믿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 10:2-5)

* 캔사스 주, 위치타에서 성경통신학교 및 성경교사 양성소인 Steps To Life Institute와 TV방송 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