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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 가지만 제외하고 모든 면에
데니스 프리비

  앞의 기사에서 우리는 놀만 걸리 박사가 인성을 쓰고 오신 예수님이 죄를 제외한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시다고 할 것을 언급하였다. 그가 죄를 타락한 본성으로서 정의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지 않으셨거나 최소한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서 죄에 해당하는 부면들은 취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해야만 했다. 그것은 그가 애드밴티스트 리뷰(Adventist Review) 지에 실은 그의 기사에서 표현한 것과 같은 매우 흥미 있는 사상들을 전개해 나가도록 유도한다.

무염시태설(기적적인 잉태)

  놀만 걸리 박사는 예수님께서 타락한 본성과 타락하지 않은 본성 둘 다를 취하셨다고 믿는다. “상실된 것에 있어서는 우리처럼 타락한 본성이지만 타락한 것에 있어서는 우리와 같지 않은 타락하지 않은 본성이셨다”(Adventist Review, 1990년 1월 25일). 그러나 정상적인 유전 법칙에 의하면 “타락한” 특성을 물려받음 없이 “상실된” 특성들만을 물려받을 수 없기 때문에 걸리 박사는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는 그 해결책으로서 천주교에서 고안한 교리인 무염시태설이란 말을 사용하기를 꺼린다. “무염시태설이라기 보다는 성경에 명시된 대로 기적적인 잉태이다”(adventist Review, 1990년 1월 25일). 다른 말로 하면 마리아의 유전적 결함들이 성령에 의해 변화되어 그녀가 그리스도에게 물려준 유전은 우리가 우리 부모들로부터 물려받는 유전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독특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떤 난문제에 대한 설명으론 꽤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영감의 말씀과 조화되는지를 물어 보아야만 한다. 바울은 로마서 1:3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말한다. 걸리 박사가 제시한 해결책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그렇다는 것이다. 예언의 신에 기록된 그 주제에 관한 명백한 진술이 시대의 소망 1권, 46,47에 있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의 영향으로 생기는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예수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서 볼 수가 있다. 그는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오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물려받으신 유전이 다른 사람들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꼭 같지는 않다고 하는 어떤 한 가지 암시라도 있는가? 엘렌 화잇은 강력하게 그분의 물려받으신 유전이 그분의 조상들과 똑같았다는 정반대의 진술을 한다. 셋은 그리스도의 조상 중 하나였는데, 엘린 화잇은 셋에 대해 “셋은 가인처럼 그 부모의 타락한 성질을 유전받아 태어났다”(부조와 선지자 상권, 87)고 말한다. 셋이 유전을 통해 물려받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예수님께서는 그 유전을 물려받으셨다. 이것이 위의 영감의 기록들을 보고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며, 이러한 기록들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오직 죄의 본성에 대한 선입견이 있을 때만 그런 것이다.

  해리 쟌슨(Harry Johnson)은 그의 책, 구세주의 인성(The Hunanity of the Saviour)에 아주 간단명료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유전의 고리가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에서 깨어졌다고 하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London: The Epworth Press, 1962년, 44). 이것은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다. 그러나 걸리 박사는 그 유전의 고리가 부분적으로 깨어졌다고 주장한다. 신학적인 가정을 벗어나면 그것에 대한 증거가 어디 있는가?

  무염시태설이 천주교회에서 발전시킨 교리가 된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께는 죄의 아무 흔적도 없으셨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마리아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예수님도 물론 그녀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을 수 없으셨다. 개신교도들은 무염시태설의 교리가 성경에 근거된 것이 아니라, 죄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인 가정에 기초 된 것이어서 그 교리를 거절했다. 그러나 개신교도들도 천주교도들처럼 해결해야 할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도 타락한 본성이 죄라는 견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도 예수님 어떤 죄의 흔적도 지니지 않으신 분이라고 주장해야 했다. 그들은 그 문제를 걸리 박사가 마리아의 타락한 본성이 단지 부분적으로만 예수님께 전가된 것이라고 함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마리아의 태에서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서 어떤 죄악적 경향이나 욕망이 마리아에게서부터 예수님께로 전가되지 않아다는 것이다. 걸리 박사는 이것을 “기적적인 잉태(Miraculous conception)”라고 부른다.

  진짜 해야 할 질문은 우리가 영감의 기록에 있는 간단명료한 진술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방금 본 것과 같은 신학적 논리를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한 교회로서 우리는 무염시태설의 교리를 거절한다고 공언하면서도 가장 심각한 요점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그 교리의 늪 속에 주저앉아 버린다. 마리아는 죄가 없다는 것과, 마리아가 예수님께 유전을 통해 아무 것도 전가해 준 것이 없다는 가르침은 부정하면서도 죄악적인 경향과 욕망은 유전으로 물려받지 않은 부분적인 유전이라는 이론은 열렬히 받아들인다. 그 같은 논리는 무염시태설을 살짝 바꾸어놓은 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걸리 박사가 말하는 “기적적인 잉태”는 사실 무염시태설이란 신학적 이론의 사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걸리 박사의 논리는 몇 문장 뒤에 기록한 아주 이상한 사상으로 유도한다. “그분은 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하나이시지만 죄(본성 혹은 행위)에 있어서는 우리와 같지 않으시다”(Adventist Review, 1990년 1월 25일). 이 말은 그리스도의 본성은 우리와 같으시지만 본성이나 행위에 있어서는 우리와 같지 않다고 하는 말이다. 참으로 이상한 논리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시험 받으셨나

  걸리 박사는 예수님 안에는 사단의 유혹에 반응하여 아무 죄됨이 없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단지 불법적인 방법으로 그분의 죄 없으신 정욕(passions)을 사용하도록 하는 시험을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영감의 말씀 그 어디에서도 사단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타락한 성향에 호소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본성적으로 그분은 죄 없으시기 때문이다”(Adventist Review, 1990년 2월 1일).

  우리, 이제 영감의 기록들 몇 개를 살펴보자. “획득한 승리는 식욕의 세력 하에 타락해온 자들을 위한 모본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비애 깊숙이까지 미치시려는 그분의 특별한 사업을 위한 구속주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도 고안된 것이었다. 사단의 유혹의 힘을 그분 자신이 경험하심으로 인간적 고통과 연약 가운데서 자신들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할 자들을 돕는 방법을 그분은 아셨다”(리뷰 앤 헤랄드 1권, 160).

  그렇다면 사단의 유혹하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영감의 기록은 “그[그리스도인]을 향한 가장 강력한 유혹은 안에서부터 올 것이다. 이는 그가 본성적인 마음의 성향들을 대항하여 싸워야만 하는 때문이다”(Bible Echo,1892년 12월 1일)고 말한다.

  만일 우리를 향한 가장 강력한 유혹들이 우리 속에 있는 본성적인 마음의 성향을 대항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도 사단의 유혹하는 힘을 그분 자신 안에서 경험하셨다면 그러한 성향들은 그리스도 안에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만일 우리가 예수께서 겪지 않으신 어떤 일을 겪어야 한다면 사단은 이 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에게 충분하지 못하다 이 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에게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받는 모든 시험을 겪으셨다”(시대의 소망 1권,20).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매일 겪는 시험이 분명하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러한 매일의 내적인 시련을 당하는데서 제외 되셨었다면 사단은 그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이 불충분한다고 선언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께서 겪지 않으신 어떤 일을 겪어야 한다면 사단은 이 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에게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받는 모든 시험을 겪으셨다

  걸리 박사는 죄의 본질에 대한 선입견적인 가정을 한 때문에 예)수님이 당하셨던 시험에 대해서도 매우 흥미로운 이론을 전개한다. “그분의 인성은 죄 없었기에, 예수님은 죄된 인간이 갖는 내적 죄된 충동을 경험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의 모본으로서 그분은 비록 죄 없는 인간이셨지만, 그 정도에 있어서는 다른 인간과 동등한 것을 경험해야 된 필요가 있으셨다…. 그러나 40일간의 창자가 뒤틀리는 듯 한 굶주림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죄된 성향과 대등한 것이 되었다…. 거의 6주간이 금식으로 인간 예수는 너무나 야위고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먹고자 하는 불같은 욕망은 인간의 죄된 욕망과 대등한 것이 되었다”(애드밴티스트 리뷰, 1990년 2월 1일; 미주 교회지남, 1990년 8월).

  예수님의 죄 없으신 본성이 40일간의 금식 기간 중 초자연 적으로 증강되었으며, 그분의 죄 없으신 욕망이 이 세상의 가장 악한 죄인의 죄된 욕망처럼 강렬하게 되었다는 이런 이론은 성경이나 예언의 신에 의해 아무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론이다. 이런 이론은 추정과 가정을 전제한 후 그 가정을 지지하기 위해 영감의 기록들을 인용해 버린 때문에 이런 이론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는지 참 어려움을 느낀다. 창자가 끊어질 듯 한 굶주림이 너무도 강렬해져서 이기심, 교만, 질투, 분노, 실망 등과 같은 우리의 경향과 대등한 입장에 놓여질 수 있으며, 굶주림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는 우리의 죄된 경향들을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를 가르쳐준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제안은 이미 전제한 가정이 맞다는 것을 지속시키기 위해 어떤 증거에 의해서 지지되지 않는 어떤 이론을 꾸며내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증거는 그와는 다른 견해를 지지하는데 훨씬 설득력이 있다. 예수님의 죄 없으신 식욕이 우리의 죄된 식욕처럼 강렬해진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그분이 물려받은 죄된 식욕을 금식하는 기간 동안 성령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두심으로 그 후 영원토록 그분과 타락한 인간이 죄된 식욕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고 증거는 말한다.

  각주(참조)에서 걸리 박사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시험에 관한 “인지력(insight)”을 전개해 나가는데 스티브 왈라스(Steve Wallace)의 도움을 얻었다고 했다. 걸리 박사와 왈라스의 죄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해 표현된 견해가 현저하게 유사하여 그들의 견해 사이에 아무런 중요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여기에 명시해 두어야겠다.

모양

  걸리 박사는 로마서 8:3에서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갖추셨다는 말이 모세가 광야에서 치켜들었던 구리뱀과 대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마치 구리뱀이 단지 뱀처럼 보였던 것처럼 죄 없으신 예수님도 단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신 것이었다”(애드밴티스트 리뷰, 1990년 2월 8일; 미주 교회지남, 1990년 9월).

  빌립보서 2:7에도 헬라어로 똑같은 형태의 동일한 낱말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무언가 어떤 중요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걸리 박사는 예수님께서 단지 사람처럼 보이신 것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아니셨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로마서 8:3을 로마서의 기작 아닌 다른 성경 기자가 문맥을 설명하도록 하는 것보다 로마서의 기자가 쓴 다른 책, 빌립보서 2:7과 대조하여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이고 문맥에 맞는 것이리라, 우리가 한 전체를 얼마나 열렬히 맞다고 하고 싶은지에 상관없이 “모양(혹은 같이)”이라는 말이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란 말이다.

완전한 순종?

  신학적인 이론이 우리의 개인적 경험에 적용되어야 실제적인 것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속에 거하도록 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할 수 있을까? 의롭다 하심을 입은 성화된 그리스도인이 죄 없이 사는 일이 가능할까? 이에 대한 걸리 박사의 답변은 명백하다. 영화롭게 되기(glorification)전까지는 불가능하다이다. “율법은 본성에 있어서 죄 없다는 얘기는 절대 성립될 수 없으므로 우리가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여전히 부패한 것이 명백하며, 이런 본성의 부패는 재림 때까지 지속된다“(애드밴티스트 리뷰, 1990년 2월 5일)

  걸리 박사에게 있어서 사람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 때문에 부패한다는 것을 유의하라. 시험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영하며, 잘못된 행동을 범하기보다는 기꺼이 죽음을 택할지라도 모든 사람은 재림 때까지 늘 “대속적인 중보”를 필요로 하는 부패하고 죄를 짓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아담이 순종했던 것처럼 순종할 수는 절대 없다…. 심지어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하는 순종과 예배조차도 우리의 부패로 더럽혀져 있다…. 그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하는 일일지라도 더럽혀지게 되는 육적인 본성 때문이다”(애드밴티스트 리뷰, 1990년 2월 15일).

   걸리 박사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죄된 본성을 소유하셨었다면 율법을 완전히 순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분께서 완전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완전한 성품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죄 없는 본성을 취하시는 길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완전한 순종은 완전한 본성을 가져야만 가능하기에 죄된 본성을 가진 자는 그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거나 죄 없는 생애를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가? 영감의 말씀들을 점검해 보자.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주님의 뜻 편에 두어야 하며, 그분의 은혜로 죄에서부터 자유케 되도록 단단히 결심해야 한다”(리뷰 앤 헤랄드 3권, 70).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한 모든 자들에게는 죄 없는 삶을 살 특권이 주어진다”(상동 5권,277).
  이런 모든 기록들은 재림 때까지 죄된 본성을 지니고 살 수 밖에 없는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명심하라.
  “그분[그리스도]은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The Upward Look, 303).
  “그리스도께서는 그대가 죄 짓기를 그리는 것이 가능토록 하시기 위해 돌아가셨다”(상동 3권, 181).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진실로 성화된 자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드릴 것이다”(상동 4권, 331).

  “그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시므로 모두에게 그 율법의 불변성을 증거하셨고, 동시에 그 율법의 가르침이 그분의 은혜를 통해 아담의 모든 아들 딸들이 완전하게 순종할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하셨다”(영문 시조 3권, 190).
  영감의 말씀은 타락한 마녀들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가르친다. 완전한 순종이 가능한 것이 되기 전에 죄 없는 본성이 필요하다는 암시는 한 군데도 없다

  놀만 걸리 박사는 우리의 “신앙적 봉사들”이 “인간의 부패한 통로들을 통하여 전해짐”으로 너무 부패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피로 정결함을 받지 않는 한” 하나님과 함께 할 가치가 없다는 엘렌 화잇의 증언을 크게 강조한다(본교 성경 주석 6권,1078). 부패한 통로가 타락한 본성이라는 가정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을까?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했으나 부패하지 않은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으며,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사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분은 부패되지 않을 것이었다”(Manuscript Release 1211,3-4)고 말한다. 부패란 말이 유전적인 것이라기보다 불순종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되어 질 수 있을까?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타락한 통로를 부패시키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불충성이 될 수 있을까? 엘렌 화잇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양심에 아무 죄책의 흔적이나 영혼을 더럽히는 오점이 없다”(본교 성경주석 7권,909)고 말했다. 비록 우리가 타락한 본성이라는 제약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야만 할지라도, 우리는 부패의 오점과는 무관할 수 있다. 만일 우리 인류의 부패한 통로들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아닌 우리의 부패된 동로들을 언급하는 것이라면 그녀의 진술은 모순될 것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것이다.

  이 점에 관해 기록한 걸리 박사의 기록을 부디 다시 읽고 영감의 기록들과 조심스럽게 비교해 모라. 너무도 명확한 모순이어서 더 이상의 해설은 장황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죄업승신 대속

  히브리서 2:14,15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17절은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으셨던 유일한 길은 어떤 것들이 아닌 “범사(모든 것)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으로써였다. 영감의 기록은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구속이 위대한 사업은 구속주가 타락한 아담의 자리를 취하심으로써만 수행될 수 있었다”(리뷰 앤 헤랄드 1권, 140). 그것(구속사업)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입장을 취하셨거나 혹은 다른 어느 누구의 입장도 취하지 않으셨다면(부분적으로 각각 아담과 우리의 본성)성취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의 죄 없으신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서 그분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불리한 점을 극복하셔야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저항할 수 없는 세력이 된 것을 정복하셔야만 하셨다. 본교 성경주석에서 인용한 다음의 글이 영감의 글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하시는 행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그 지배권을 장악하고 행사했던 죄를 만나셔서, 이기시고, 꾸짖으셨다. 이전에 승승장구했던 죄, 곧 육체는 이제 패배하여 쫓겨나게 되었다“(6권, 562).

  성육신의 주요 문제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사단의 최후 보루인 인간의 타락한 마음 안에서 죄를 이길 수 있으셨는가? 이었다. 만일 인간의 연약함과 경향과 욕망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굴복될 수 있었다면 사단은 큰 쟁투에서 패배했을 것이며, 대쟁투는 진정 판결이 났을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인간의 어떤 경향과는 무관하도록 하셨다면 대쟁투는 사단이 하늘에서 쫓겨났을 때보다 더 빠른 종국을 가져왔을 것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을 때 하늘에서 큰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죄없는 대속물”로 만드는 변장 하에서 예수님의 큰 승리를 그분에게서 빼앗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그분이 죄의 행위뿐만 아니라 사단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 최상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타락하고 연약한 죄된 본성 위에도 새겨놓으신 온전한 구속을 계속 부인할 것인가? 우리,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 없으신 대속으로서뿐 아니라 우리의 거룩한 모본으로서도 받아들이도록 하자. 우리 믿음의 살을 죽어버린 중심에 맞추지 않도록 아주 조심하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재림신앙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잃을 위험 가운데 빠지게 될 것이다. 오직 진정한 구속을 제공하는 진정한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교회를 최후의 승리까지 인도할 수 있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