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죄를 지을까, 아니면 죄를 짓지 말까?
데니스 프리비 박사
*전 P.U.C. 대학 신학과 교수, 현 Anazing Facts 의 부흥강사
1990년도 1,2월에 “애드벤티스트 리뷰”에 게재된 기사들을 읽고 난 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고려하도록 촉구함을 받게 되었었다.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실린 시리즈에서 놀만 걸리 박사는 “예수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회의 기본 교리에 있어서 마치 바퀴의 철사들로 만들어진 살들에 비하여 바퀴의 중추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두 개의 살이 휘어져 있다고 해도 괜찮을지 모르나 바퀴의 중추가 중심을 잃으면 그 바퀴 자체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과 같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우리의 교리적인 난처한 궁지이다”(1990년도 1월 18일 애드벤티스트 리뷰). 얼마나 잘 말하여진 글인가! 예수가 누구이며 무엇을 성취하셨는가를 잘못 오해하게 되면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복음, 그리고 교회의 선교 목적을 왜곡 시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 존재하는 이유의 중심부를 다룰 때에는, 우리는 그 본 이슈나 혹 투쟁적인 성격을 띤다 할지라도 무시하거나 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죄의 문제
그 일련의 기사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증거들을 고려하도록 고안 되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자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하여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들은 아닌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죄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며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우리의 결론을 결정짓게 하는 것이다. 걸리 박사는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에 대한 서로 상이한 두 견해는 “죄란 어떻게 성립되는 것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1990년 1월 25일자 애드벤티스트 리뷰)이라는 언급에서 인정하였다.
우리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여겨서는 안된다. 죄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을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우리의 믿는바에 영향을 미칠 뿐만아니라 칭의와 성화가 이루어지는 우리의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며 또한 성품의 완전과 죄짓지 않는 생애가 합법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극단적인 황상인가를 결정짓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라는 그의 책에서 리챠드 테일러 목사는 수년 전에 이 점을 인식 하였다. “죄에 대한 질문은 제일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의 경륜에 관계된 문제요, 그 문제야 말로 다른 모든 교리들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설명케 만드는 질문이다. 더 나아가서 죄에 대한 정의는 다른 가르침들의 정확성을 조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논리적인 측정표가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교리를 중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신한적인 문제들을 쌓아 나가는 것이다…. 많은, 아마도 거의 모두의 기독교 신학 속으로 들어온 오류들의 출처를 찾아보면 결국은 죄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연유된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의 죄에 대한 개념이 빗나가 있기 때문에 그의 전체적인 논리의 방향이 잘못 틀어져 버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잘못된 전제에서 비롯된 논리는 끝없는 잘못된 결론들의 연속을 불러 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은 다른 어느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질 수가 없다고 말하는 바이다. 이것은 특별히 그 사람의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과 구속에 대한 그의 논리에 있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올바른 관념ㅁ을 갖자고 주장하는 것은 기본적인 진리에서 멀리 떠나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Beacon Hill 출판사, 1945), 9-11.
이 주제가 그렇게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 중의 하나는 단순한 정의들의 결핍 때문이다. 죄의 영향과 죄 자체에 대한 구분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언급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아담의 죄는 이 지구상에 많은 영향들을 미쳤다. 죽음이 인간과 동물과 식물계를 지배하고 고난과 고통이 우리의 날들을 채우고, 자연계는 이빨과 발톱으로 장악하는 생리를 드러내고 있으며 지구 자체는 죄의 저주인 폭력과 비극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비록 죄의 영향이 너무나도 치명적이기는 하나 그 어느 누구도 죄의 영향에 대하여 개인적인 죄책이나 정죄를 부여하지 않는다. 어느 식물이나 동물이나 인간도 죄의 치명적인 영향아래 갇혀있다고 해서 죄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한편, 죄의 개념은 죄책과, 정죄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됨과 심판과, 둘째 사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혹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토의 할 때 우리는 죄의 영향이 아니라 죄 그 자체에 오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우주로 부터 죄의 영향을 모두 제거 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적인 복음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죄란 무엇인가, 죄는 어떻게 용서 받는 것이며, 어떻게 지금 정결케 됨을 받고 있는 징 대해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요즈음의 토론하는 주제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대한 문제이다. 타락한 인성이 죄 그 자체의 일부분인가, 아니면 죄의 영향 가운데 하나인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결론들은 이 간단한 질문에 부여하는 우리의 해답에 의하여 결정지어 지는 것이다.
원죄
우리는 놀만 걸리 박사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그리고 간결하게 밝혀 준데 대해 빚을 지게 되었다. 죄를 행동과, 관계와 본성 등으로 표현한 세 가지 주된 정의를 나열하고 나서 걸리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죄란 이 세 가지 정의들 모두를 포함할 수 포함할 수 있을까? 죄됨과(본성, 깨어진 관계), 죄들(행동)을 원인과 결과로 볼 수는 없을까?”(1990년 1월 25일자 애드벤티스트 리뷰). 다른 말로 말해서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그 자체로서의 죄는 근본적인 죄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법을 어기는 그 다음의 죄로 인도한다는 논리이다. 걸리 박사는 더 나아가서 이것은 어거스틴의 죄에 대한 견해라고 설명을 한다. 이러한 견해에 있어서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성적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요, 이미 하나님의 정죄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죄의 행위를 필연적으로 짓게 마련이요 그렇게 함으로 그는 부가되는 정죄를 받게 되는 것이 된다. 아마도 이러한 죄에 대한 견해의 가장 정확한 설명은 수 세기 전에 요한 칼빈이 그의 책 “기독교 신앙의 설립”에서 설명하였다. “모든 사람은 원래부터 부패하게 되었다…. 죄의 책임은 본성에 있는 것이다…. 어린 아기까지도 그 어머니의 태속에서 고통할 때부터 그의 정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인간들은 포악하게 태어난다…. 우리 모두는 본성적으로 죄인이다.”(2권1장,p,5,6,7,8,9,10,27).
이것이 올바른 입장이라고 믿는 사람은 또한 죄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라고 믿어야만 한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받고 태어나서 출생이후로 줄곧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여러 가지 종류의 죄짓기를 선택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근본적인 죄는 항상 우리 생애의 한 부분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출생으로 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적으로 죄를 지으며 또한 우리의 계속적인 죄책 때문에 계속적인 용서를 가져야만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걸리 박사가 인정하는 이러한 식의 죄에 대한 이해는 초기 재림교회의 신학이 아니었으며, 또한 몇 가지의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떻게 어린 아기가 자기의 개인적인 죄책감 때문에, 죄책이나 용서를 전연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개인적인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누가 이기를 위하여 선택하여 주는가? 우리가 침례의 물무덤에서 올라온 후에 우리는 새로 태어나기 이전과 꼭 같은 죄인으로서 남아있게 되는 셈이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본성적인 원래의 죄가 회개함으로 제거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게 된다. 은혜의 시간이 끝난 후에, 용서하는 은혜의 향로가 땅에 던진바 된 후에도 우리는 본성적으로 계속 죄를 짓게 된다는 말이 된다. 비록 우리가 죄짓기 보다는 죽기를 선택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할 때와 다를 바 없이 우리의 본성적인 근본 죄 때문에 죄 있다고 선고되는 것이다. 또한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계속적인 죄의 용서가 필요한 것이다. 죄인들을 위한 은혜의 역사가 끝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중보자 없이, 죄에 대한 중보의 기도가 없이 서게 될 때에 어떻게 용서의 은혜가 공급될 것인가? (영문 초기문집 48,71; 대쟁투614; 남은 무리들 403을 참조 할 것).
이러한 칼빈주의식 조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우리가 타락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비록 “우리는 죄 없는 생애를 살 수 있다”(R & H, vol 4, 395)라는 영감의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In Heavenly Places,146참조)… 죄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는 기독교 역사에 풍만한 전통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재림교회가 이해하는 대쟁투의 견해와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다.
걸리 박사가 그의 이론을 위하여 제시하는 기본적인 성경적 증거는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아담과 인류 간의 비교이다. 이 비교에 근거해서 그는 말하기를 “이 죄의 상태, 혹은 죄의 본성은 그 자체가 처음 의식적으로 죄를 알고서 짓기 훨씬 이전에 구원의 필요 속에 있는 것이다…. 죄와 죽음을 개인적인 죄지음에 국한 시키는 자들은 이 분명한 비교를 간과하가는 것이다”(1990년 1월 5일 애드벤티스트 리뷰). 이것은 이상한 결론이요, 그 성경절의 내용은 전혀 반대의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전체장의 명백한 골자는 18절에 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이 이르렀느니라.” 걸리 박사는 우리가 이 성경절의 평행법을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에 있어서 그는 가장 분명한 평행을 간과해 버렸다.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은 참으로 정죄함을 받았다. 그의 반역함 때문에 아담은 즉시로 죽음(둘째사망)을 당학 되었고 모든 인류가 같은 정죄와 죽음을 당면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성경절의 절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아담에 의하여 정죄당한 같은 모든 사람들의 형벌을 바꾸어 주신 사실을 말하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해서, 아담에 의하여 가져오게 된 집단적인 정죄는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집단적인 칭의에 의하여 취소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대속의 죽음 때문에 모든 사람은 아담의 정죄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영감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죽음은 “온 인류를 하나님께 은총을 입도록 회복시켰다”(가려뽑은 기별 1. 영문 343)라고 한다. E.J. Waggoner 목사는 백년 전에 이 성경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죄가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처럼 칭의가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 값없는 선물이 모두에게 임한다.”(영문 시조, 3012,1896).
이 로마서 5장의 곧바른 이해는 수세기의 기독교 역사의 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을 잘못 도도해온 원죄설의 잘못된 개념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이 장은 절대적으로 죄인들은 본성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실상은 이 성경절이, 우리는 아담이 이 세상에 가지고 온 어떠한 정죄로 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인류의 참된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며, 비록 우리가 죄의 모든 영향을 받고 태어날 지라도 우리는 죄책을 가지거나 정죄받아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성경절의 절번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아담에 의하여 정죄당한 같은 모든 사람들의 형벌을 바꾸어 주신 사실을 말하고 있다
걸리 박사는 구약 성경 중에 원죄설을 명확하게 지지하는 성경절이 시편 51장 5절에 있다고 믿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성경절 자체가 죄인이 본성적으로 죄인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죄 중에 잉태”하였다는 것은 단지 아담의 죄의 영향이 인류에게 임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무엇이 죄를 구성하며 개인적인 죄책을 만드는지에 대하여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다. 아담의 죄악 때문에 모두 다 죄의 본성을 가지고 죄된 환경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본성이 죄를 구성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훨씬 명확한 증거를 얻어내야만 한다.
걸리 박사의 가장 잘못되게 사람들을 인도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애기가 출생한지 몇 시간 혹은 며칠 후에 죽는다면, 그 애기가 비록 한 번도 계명을 범한 적이 없을 지라도, 그 애기는 여전히 둘째 사망-죽음의 정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죽는 애기들은 구세주가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1990년 1워 25, 애드벤티스트 리뷰).
로마서 5장은 애기가 둘째 사망을 당한다는 그의 논리를 완전히 파괴하고 있다. 모든 애기들은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말은 요즈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사상 중에 상투적인 문구이다. 구속의 역사 때문에 전 인류는 아담의 죄 때문에 얻는 자동적인 정죄로부터 해방을 받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계속적인 죄의 영향을 가지고, 예수님 재림시와 천년기의 끝에 재창조의 구속의 국면이 이를 때까지 이 영향력들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은 진실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되는 구속에 의하여 서취되는 것이다. 그러나 애기가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흔한 이해는 개인적인 죄의 책임으로부터 개인적이 용서를 베푼다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애기도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고통하는 지구도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장님과 앉은뱅이도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죄와 죄의 책임의 의미에서 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죄의 영향과 죄 그 자체를 혼돈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 언급한 바대로, 중점적인 문제는 타락한 본성이 죄의 영향이냐 아니면 죄 그 자체냐의 있는 것이다. 죄의 문제에 있어서 성경 가운데 가장 명확한 빛을 던져주는 성경 절 중 하나를 가지고 그 질문을 해답해 보도록 하자. 요한일서 3장 4절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죄는 불법이니라”, 거기에 “죄를 짓는 자마다…”라는 말이 붙어있다. 이 말씀 전체는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 하는 우리의 선택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법을 범하기 이전에 선제하는 계속적이며 필연적인 죄의 상태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이나 적용이 없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다른 종류의 죄에 대한 정의를 지지 하고 재해석하기 위해 열심을 낼 필요가 있겠느가!
엘렌 화잇 여사는 여덟 번이나 각기 다른 경우에 다음의 언급과 같은 말씀들을 하였다. “성경에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법을 범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영물 시조 2권, 363; 가려뽑은 기별 1권 영문 320; 재림교회 성경주석 7권, 951; 영문 대쟁투 493l 등등). 만일 요한 일서 3장 4절이 참으로 우리에게 가장 명확한 죄에 대한 정의라면, 돼 다른 종류의 죄에 대한 정의를 지지하고 재해석하기 위하여 애매모호한 다른 성경 절들을 찾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찾을 필요가 과연 있겠는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과연 우리가 어거스틴과 같은 철학자의 비 성서적인 정의를 받아 들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는 이 논리에 맞지 않는 신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죄의 정의와는 상관이 없는 분명치도 않은 성경 절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 이들이 여혼불멸설과 일요일 신성설을 지지하기 위하여 뜻도 맞지 않는 이것 저것의 성경 절들을 강제로 재해석하여 사용하려고 애쓰는 비슷한 행습이 아니겠는가?
로마서 14장 23절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니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그 성경 절 내용 자체가 의심과 믿음을 말하고 있고 둘 다 분명히 알고서 선택하는 범주 안에서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약4장 17절은 우리에게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도 죄는 아는 것과 선택에 제한되어서 말해지고 있다. 분명한 성경 절들은 죄를, 지을까 말까하는 선택 여부와는 상관없이 계속적인 죄의 상태나 필연적인 타락한 본성 그 자체라고 말하는 언급이 전연 없다. 본성이 죄라고 말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죄 짓기를 선택하지 않을 때에라도 우리가 죄를 짓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죄가 필연적이요 계속적인 상태로서 이해하는 것은 진짜 죄(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하여서, 사소한 죄악들을 단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큰 죄의 하나의 표현들에 불과 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죄짓는 것을 정상적인 생활, 아니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한 부분처럼 용납해 버리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깨어진 관계,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 상태로 정의한다. 이사야 59장 2절은 죄와 분리의 관계를 묘사해 주고 있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죄가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요, 그분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지 깨어진 관계 자체가 죄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엘렌 화잇은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실과를 먹은 것이 “하나님의 불변의 법률을 범한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게 한 것이다”라고 정로의 계단 33페이지(영문)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 죄는 참으로 어떠한 상태이다. 그러나 그 상태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성택에 뒤따르는 것이요, 그러한 상태는 마음이 회개하지 않은 채 머물러 있는 한 용서는 불가능하고 우리는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것이다. 죄의 상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요, 우리가 현재 어떻게 가르침을 받고 있던지 간에 그리스도인의 필요한 조건이 아닌 것이다.
타락한 본성 자체가 죄의 영향이 아니라 죄 그 자체라고 증명하려고 애쓰는 자들은 아직 그 입장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몇 가지를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함과 고통과 아픔과 죽음에 종속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된 부모에게서 태어나 죄의 본성을 받고 죄된 환경 속에서 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죄의 책임을 가지고 태어난다거나, 혹은 타락성 때문에 정죄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타락한 분성을 포함해서 모든 죄의 영향들을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죄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아나기 때문에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를 범하도록 기울어지게 되었다. 죄의 행위는 그 행위가 일어날 때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생각에 머물러 있거나 그러한 동기를 품도록 선택하였을 때이다. 죄를 지을 선택은 회개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죄의 상태로 인도하는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와 방황을 초래하게 된다. 죄의 상태는 그 영혼이 밤처럼 어두워 질 때까지 반역과 흑암을 증가시키는 길로 인도한다.
원죄설과 재림신앙
그의 기사 거의 끝에 가서(1990년도 1월 25일자 애드벤티스트 리뷰) 놀만 걸리 박사는 엘렌 화잇의 글을 몇 가지 인용하며 인간의 본성은 아담의 죄를 인하여 타락되었으며, 그러므로 결론 짓기를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대어나는 것이요, 나면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이려고 애썼다. 이러한 모든 인용구절들은 모든 사람은 그의 깊은 본성 속에 아담의 죄의 영향들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상은 성경에서 온 것도 아니요, 재림신앙에서 온 것도 아니요, 곧바로 바벨론에서 온 사상이다. 그 뿌리는, 멀리는 로마 천주교회의 어거스틴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사상은 루터와 칼빈의 서적들을 통하여 개신교 주류파들에 스며들어 오게 되었다. 오늘날 복음주의 개신교회들이 죄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을 옹호하게 되었고, 또한 그들은 이러한 견해가 재림교회의 사상이 되도록 무척이나 애써오고 있다.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아연 실색할 뿐이다. 이러한 죄에 대한 복음주의 개신교회들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교회 고위 신학자들과 여러 분야의 고위층 행정자들에게 스며들게 되었다. 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그 결가로 재림교회의 신학에는 위기가 점점 깊어만 가게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의 죄에 대한 입장은 우리 재림교회가 오랫동안 고수해온 입장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본성을 취하시고 그러한 위험스러운 본성으로 죄를 승리하시고, 죄의 치명적인 영향에 사로잡힌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이 용서와 변화시키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피할 길을 지시해 주시고 계시다는 사상을 용납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재림신앙은 오랫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속주와 동시에 모본이 되신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죄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입장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출생하실 때에 진실로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면 우리의 대속주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단순하고 곧바른 복음을 대신하여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유전법칙을 어떤 부분은 받았으나 반면, 어떤 부분은 유전의 법칙에서 제외되셨다고 설명하는 복잡 미묘한 고안을 꾸밀 수밖에 없이 되어 버렸다.
또한 이러한 식의, 죄에 대한 새로운 재림 신앙은 은혜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완전히 죄를 승리하는 가능성에 대한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에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비 재림교회의 사상과 타협하기 위하여 우리의 분명함과 단순성이 희생을 당하여왔다. 우리는 신학적인 남들의 인정과 용납을 추구해왔다. 우리는 신학적인 남들의 인정과 용납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지불한 댓가가 너무나도 값비싼 것이 아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