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점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와 특정 사설 기관들-Part 1
랄프랄슨
서론
1992년도 11월 5일자 에드벤티스트 리뷰지(매주 교회지남 1993년도 3-5월호에 번역 게재됨)는 16페이지에 상당하는 “논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와 특정한 사설 기관들”이라는 소책자를 삽입하여 출간하였다. 이 소책자는 같은 제목하에 출판된 큰 책을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라는 명시가 붙어있다. 이작은 소책자와 또한 총 467페이지의 큰 책자는 불법적이고 또한 부당하게 교회의 신학을 바꾸어 놓은 사실에 항거하여 수많은 교인들을 대거 출교시키기 위해, 교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출판된 사실이 분명하다.
이 책과 의견을 달리하는 교인들은 교회의 몸으로부터 반드시 수술되어야 하는 암적인 존재라는 사실로 단정하였다.
“정규 교회 안에 비 공식적인 교회를 운영한다는 것은 건강한 몸 가운데 활성적인 암 세포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암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받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세가지의 선택이 있다.: (1) 암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몸 가운데 점진적이 병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부인하는 방법: (2) 암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치료받는 일을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께서 치료의 기적을 베푸시도록 기도하는 방법: (3) 암은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의학적인 치료를 받는 것, 가능하면 짤라 내어버리는 방법 등이 있는 것이다.” –논점 책 19쪽
이러한 굉장한 서론과 함께 우리 모두는 드디어 종교재판의 시대로 몰입하여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완전히 비 공식적이고 비 공정한 방법으로 교회의 신학이 바뀌어 졌고 그러한 변화가 우리의 교육기관과 교회의 설교 단상들에 영향을 미친 사실에 대하여 교회 교인들과 지도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커다른 재림 교회의 배도”라는 글을 썼다. (미국 견고한 토대 월간지 1991년도 1월부터 12월까지의 랄프랄슨 박사의 글을 읽어보라)
교회가 경고와 도전을 받았을 때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다음 두 가지 방법 중 한 가지로 응답할 수 있다. 먼저, 그들이 받은 도전이 합당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자세한 조사를 실시한 후에 필요에 따라 합당하게 시정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으며 아니면, 그러한 도전들을 무조건 막아 버리고 문을 닫아 버리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 후, 경종을 울리고 개혁을 부르짖는 자들의 음성을 잠잠케 해 버리려고 애쓰는 방법이 있다.
불행하게도, 북미 지회 지도자들은 후자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며, 커다란 재림교회의 배도 후에 커다란 재림교회의 종교 재판이 그 뒤를 잇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재판이 우리의 역사직인 믿음의 원칙들을 고수하며, 충성할 것을 호소하는 교인들의 소리들을 과연 잠잠케 하는 일에 성공 할 수 있을지 아니면 반대의 현상이 일어날 것인지, 아마도 우리는 기록된 지난 교회의 역사들을 살펴 보면서 비슷한 상황들을 엿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의 철석 같은 태도가 초대 기독교회의 소리들을 잠잠케 할 수 있었는가? 개신교회 지도자들의 철석 같은 태도가 초기 재림교인들의 음성들을 잠잠케 할 수 있었는가? 아니면 그러한 태도가 오히려 그 음성들을 강하게 해주고 더 흥 황하게 하였는가?
지나간 역사를 통하여 어떤 교훈을 깨닫지 못한 자들은 그 역사를 반복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종교 재판 뿐만 아니라, 그 재판의 방법들 까지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논점’ 책자 속에 있는 재료들은 오류들과 잘못된 해석들, 그리고 잘못된 보고들로 엮어져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공정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교인들에게 심각한 신뢰심의 위기를 조성하게 될 것이다.
과연 무엇이 진짜 논점인가?
우리 교회의 교리들이 변경 되었는데, 이것이 진짜 논점(이슈)이다. 이것이 바로 공격을 받고 있는 특정한 자영 선교 기관들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교리의 변경에 대하여 경각심을 갖고 왜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변화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지를 심히 의아해 하고 있는 많은 교우들이 자양 선교 기관들에게 전격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교리의 변화는 두 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로 그러한 변경은 비 공식적이고 공인되지 않은 것으로서 세계 대총회의 대표자들 회의에게 결의된 것이 아니다. 두 번째로 그러한 변경은 아무런 성경적인 기반이 없는 것이요, 오히려 수 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바벨론의 칼빈 신학에서 가져온 잘못된 교리들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것들의 도전을 이미 받았었고 물리친바 있으나 (우리의 모든 교회지도자들이 거의 다), 우리가 우리의 젊은이들을 바벨론의 교육 기관에서 학위들을 받아오도록 보낸 이후로부터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그 후부터 승인되지 않은 교리의 변화가 우리의 교육 기관들과 교회들에서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그것들을 규정에 따라 합당한 순서를 밟아서 대총회의 회의에 상정하는 대신에 이러한 날조의 가르침들이 학교들에서 그냥 가르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북미주에 있는 재림교회의 고등 교육기관 중에서 단 하나도 칼빈 신학의 오류에서 해방되어 있는 학교가 없는 실정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교육기관의 졸업생들이 현재에 와서는 우리 교회들의 강단들을 차지하게 되었고 우리 합회들의 행정직들과 에드벤티스트 리뷰지(북미조회 교회지남)와 미니스트리지(목회지)의 편집인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가지 놀라운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안식일 학교 교과책 중 거의다가 우리의 역사적인 신앙과 조화되는 내용들을 제시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아래의 리뷰지(북미지회 교회지남)에 게재한 글과 안교 교과책을 비교하여 보자.
“어린 아이가 태어난 지 몇 시간 혹은 몇 일 후에 죽는다면, 그 아이가 계명을 전혀 범한 적이 없더라도 그 아이는 여전히 둘째 사망-정죄의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놀만 걸리 박사, 에드벤트스트 리뷰 1990년 1월 25일
“어떤 이들은 모든 인간은 우리 각자가 우리 스스로 그 죄를 지은 것처럼 아담의 죄의 죄책을 같이 지게 된다고 가르쳐 왔다. 재림교인들은 이러한 비 성서적인 가르침을 거부한다.” – 1990년 안교 교과 제2기 42쪽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두 출판물들이 서로 재림 신앙과 칼빈주의의 사상을 가지고 경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칼빈주의 사상은 그 무서운 가르침을 영아 세례와 예정설의 교리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리뷰지는 오히려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단순히 우리로 하여금 어릴 때 죽은 신생아들은 모두 이 지구를 태우는 불에서 타서 죽는다는 결론을 갖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
만일 시간과 공간이 허용하기만 한다면 우리 재림교회 안에서 서로 상충하고 있는 비슷한 신학적인 전쟁들을 꽤 두꺼운 부피의 책으로 열거 할 수 있겠다. 호주에서는 합회 사무실로부터 목사들에게, 어떻게 하면 안교 교과에서 제시된 재림신앙에 대비해서 칼빈주의를 잘 고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방법들을 제시하여 주기까지 하였다. 영국에서는 안교 교과를 출판할 때 칼빈주의에 맞도록 아예 고쳐 버렸다.(나는 이 증거 자료를 가지고 있다)
나는 논점이란 책의 저자들에게, 현재 여러 군데에서 여러 가지 형편으로 우리의 교리들이 변경되고 있다고 지적한 다섯 가지의 점들에 대한 나의 기사를 인용해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성령께서 그 내용을 이용하시어 글을 읽는 교인들에게 오류의 위험을 경각시켜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논점이라는 책자를 읽어보지 못하신 분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변경된 다섯 가지 교리들을 다시 간략하게 열거해 보도록 하자.
1. 아담에게서부터 죄책이 아니라 연약성을 물려받았다는 진리를, 죄책을 물려받았다고 정의하는 원죄설의 칼빈주의로 대치하고 있다.
2. 우리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진리를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지 아니한 아담의 본성으로 오셨다고 말하는 칼빈의 교리로 대치되고 있음.
3.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가 칼빈주의의 추측으로 말미암는 불의, 즉 죄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로 대치하고 있음.
4. 성소의 교리가 지금 부인되고 있던지, 아니면 애매 모호한 가르침으로 대치되고 있음.
5. 예언의 신의 신조들이 부인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예언의 신이 재림 신앙을 지지하고 칼빈주의를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기사가 “논점”책자에 인용되어진 것을 감사하는 한편, 내가 현재의 상황들을 다음의 예언의 신의 인용구절을 가지고 비교한 것까지 실어 주었더라면 훨씬 더 감사할 뻔 했다.
“마지막 배도의 역사의 성장 단계에서 믿음의 혼돈이 있을 것이다. 진리가 하나씩 하나씩 타락될 것이다.” (영문시조 5-28, 1894)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깨우실 터인데 만일 다른 방법들이 실패하면 오류가 우리들 가운데 들어오게 하여서 쭉정이를 알곡으로부터 분리하여 내 실 것이다.” (교회증언 5권, 707)
이러한 승인받지 않은 교리의 변화들과 이단설들이 진정한 논점(이슈)들이다. 우리는 참으로, 논점의 저자들이 20번 이상이나 언급한 것처럼 우리 개인들의 사상들을 변호하거나 선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 교인들에게 마치, 사상을 달리하는 교인들의 개인 사상들이나 해석들과 교회 사이의 싸움인 것처럼 비화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요, 이중적으로 거짓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계속 그렇게 출간하여 왔고, 1988년도의 “재림교회는 이렇게 믿는다”라는 책에서도 분명하게 표현된 바 있는(비록 부인하고 있지만) 모든 믿음에 관한 진술들을 대표하는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 책에서 우리가 견지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입장을 140번 정도나 언급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는 타락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고 죗됨 그 자체가 아니라 죄의 결과들을 취하신 것이다.” –재림교회는 이렇게 믿는다 49쪽
이러한 글들은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의 개인적인 사견들이 아니며, “논점”책자가 14쪽에서 비난 했듯이 “재림교회의 새로운 입장”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나는 자영 선교 기관들과 교회와의 문제를 개인적인 사견들과 교회 간의 문제라고 말하는 그들의 이중적인 거짓된 태도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우리가 개인적인 의견들을 사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하는 동시에, 소수의 그 저자들도 그들 자신이 교회 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고 싶다. 그들도 교회 안에서의 아주 적은 그룹에 불과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재림교회의 교인들의 10분의 9가 북미 지회의 밖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선교지역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바뀌어진 교리들에 대하여서는 잘 들어보지 못한 입장에 있는 형편이다. 그들은 우리의 교육기관을 졸업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들의 존재를 서서히 부각시키고 있는 실정이며, 그들의 대다수의 교인들이 아직도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의미에서 똑 같은 현실을 이 북미주에도 적용시켜야 할지 모른다. 북미주에 살고 있는 외국인 교우들은 이러한 교리의 변화에 대하여 익숙하지 못하고 있으며, 남미 계통의 교인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은데, 이제 그 잘못된 교리들이 점차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의 우리 교인들 가운데 대다수가 “논점”이라는 책자의 문제에 관련이 없으며 거기에서 다루고 있는 교리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지 않다. 이러한 현실에서 볼 때에 “논점” 책자를 발간한 소수가 자기들이 마치 “교회”인양 나타내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상당한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화잇 부인께서 주신 교회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상기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교회를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커다란 성전의 건물도 아니고 국가적인 설립체도 아니며, 또한 갖가지 교파들도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Upward Look, 315)
나의 친구여, 사랑하는 동료 믿음의 형제들이시여, 이 한가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진짜 논점(이슈)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진실되다고 인이 찍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제시되어 왔던 교회의 교리들이, 승인되지도 않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변경된 사실이 바로 우리가 논해야 할 것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에 의문을 솟구치게 해 줍니다. 왜 북미 지회 지도자들이 이 진짜 논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회피하려고 하는가? 왜 그들은 부수적인 것들과 진정한 논점들이 아닌 엉뚱한 토론들에만 신경을 쓰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화평을 위하여서 얼렁뚱땅 진리를 타협할 수는 없다.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또한 교회의 권위란 교회가 진리를 가르치고 옹호 할 때에만 그 권위를 행사 할 수 있는 것이지 진리를 타협하고 있을 때에는 그 권위를 상실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여야겠다. 진리 속에 권위가 있는 것이지 지도자들에게 그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다 같은 형제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와 믿음 안에서 하나로 연합 해야지 무조건 진리를 타협하면서 인간적인 평화와 연합을 이루며 같이 와서 협력하여 일하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호소가 절대 아닌 것이다. 왜 우리가 바벨론과 연합하지 않고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에게 좋은 해답을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 가지 더, 교회의 정규 조직이 십일조와 연급을 바치는 유일한 통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의 신에 맞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잘못된 신학이다.
진리가 먼저요, 교회의 권위가 두 번째이다.
또한 진리가 먼저요, 교회의 연합이 두 번째인 것이다.
진리가 먼저요, 십일금을 어디에 바쳐야 하는 것은 두 번째의 일이다.
현재 우리 교회의 진정한 논점은, 진리와 비 진리 사이의 전쟁이지, 특정한 사설 단체들과 교회와의 싸움이 결코 아닌 사실을 주지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