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율법주의자 인가요?
저자: 콜린 스텐디쉬 박사 / 럿셀 스텐디쉬 박사
지난해, 네델란드에서 열렸던 대총회의 회기 중에, 나는 현재 대총회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나는 그가 월간지 견고한 토대를 매우 위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견고한 토대가 항상 순종, 구원의 조건, 법을 지키는 문제, 성품의 완전 문제와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용서, 죄사함, 그리고 투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칭의에 대한 주제들을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 견고한 토대의 기사들 가운데는 그러한 글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진실로 듣기 원하지 않는 말을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 견고한 토대의 신학보다는 차라리 신신학의 기수인 포드 박사의 신학을 택하겠다고 하였다. 그 말은 내 마음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아픔을 안겨 주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우선, 나와 견고한 토대의 모든 직원들은, 칭의와 성화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더 모든 독자들에게 확언하고자 한다. 오늘날,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안에서, 특히 서구의 물질 문명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지역 안에 있는 재림교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패배적인 도덕주의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나와 견고한 토대의 직원들은 승리를 쟁취하게 하며,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집중적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하였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롭게 하시는 용서를 믿지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만큼 강력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균형 있는 복음을 믿어야 한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떼어낼래야 뗄 수 없는 샴 쌍둥이와 같은 것이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키는 것은 둘 다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율법과 복음, 믿음과 행함,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며, 동등한 힘과 능력으로 제시되어야만 한다.” 가려뽑은 기별 3권, 영문 184.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받고 있는 가장 큰 도전은, 용서와 승리하는 생애 사이에 존재하는 완전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확인해야 될 진리는, 용서와 승리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서의 봉사를 통하여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칭의만을 강조하면서 성화를 경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전 대총회장이었던 피얼슨 목사가 한번은 내게 말하기를, 자신은 성화에 대한 언급 없이 칭의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때 내게 하였던 그 말이 17년이 지나간 지금에도 나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원칙을 고수해 왔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견고한 토대에서 글을 정리하는 모든 편집인들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사함과 정결함에 대한 진리를 조화시키는 것을 움직일 수 없는 원칙으로 삼아왔다. 잠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죄에 대한 용서가 없이는 우리의 인생이 회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죄책감과 정죄가 우리 모두의 위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께 자신의 생애를 완전히 굴복한 사람들은 정죄와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정죄와 죄책감은 불순종과 죄의 노예로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 동안 칭의와 성화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견고한 토대 지에 소개하였다. 독자들의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성경절을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칭의),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성화)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0.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칭의)과 나를 믿어 거룩케(성화)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도행전 26:18.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칭의)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여(성화) 주옵소서.” 마태복음 6:12,13.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롭고(칭의)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성화) 하라.” 요한계시록 22:11. 나는 이미 여러 번, 칭의는 곧 성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우리를 의롭게 하며, 거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로마서 5:9.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0. 또한 나는, 칭의는 우리의 정신적인 동의 이상의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이루어진 놀라운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인간이 의롭다 하심을 받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의 전적인 굴복을 요구하시는데, 사람이 칭의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역사하며 영혼을 순결하게 하는 활동적이고 살아있는 믿음을 통한 계속적인 순종이 있어야만 한다.” 가려뽑은 기별 1권, 영문 366. 이것은 우리 혼자서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결정과 행동을 취해야 되지만, 그러한 결단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2,13.
우리가 진리에 대한 지식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로마서 5장에서 계시되어 있는 내용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는 반역적인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취하셨던 바에 대한 명상은,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경이로움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하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로마서 5:8,9.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동정적인 방법으로 은혜를 공급하시고 계신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초기 시절에, 안식일과 율법에 대하여 도무지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도의 증거를 제시하면서 설교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백성들 앞에 제시하지 않음으로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E.J. 와그너가 1888년 대총회에서 기별을 전하자 커다란 반박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1888년 이후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받아들였다. 그 기별은, 율법의 구속하는 성질과 법을 지키는 자만이 하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성경의 말씀을 분명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요한계시록 22:14. 승리를 가능케 하는 능력 역시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율법주의자들과 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의 가르침과 행습에는 문제점이 있다. 하나님의 진리와 치명적인 율법주의와 도덕적 패배주의(신신학)를 비교하여 보자.
1. 성도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는 오직 한가지 방법은 그들 속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 2:20. 슬프게도,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비할 수 없는 능력 앞에 자신의 생애를 날마다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은 채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굴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 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야고보서 4:7. 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구원에 있어서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목적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는 진리를 무시한 채,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말만을 되풀이 한다.
2.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한 감동이 법을 지키고자 하는 동기가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린도후서 5:14.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기초로서 법을 지키려고 한다. 행함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따라오는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있어서는 행함이 구원을 이루는 기초이며 공로가 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8~10. 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은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노력 자체가 율법주의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을 위한 열정적인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3:24.
3.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른다. 그들은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들은 사랑한다. 그분께서는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간음한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1. 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지만, 그분께서 가지고 계신 죄인에 대한 동정은 죄인들의 마음에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율법주의자들은 죄인을 다 함께 미워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 들은 육체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엄격하게 심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극복하지 못하는 죄를 다른 사람들이 범하였을 때, 그것을 확대하고 정죄하는 경향이 있다. 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은 알고 있는 죄를 품고 있는 죄인들도 “관대하게”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 한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진지하게 고백하고 회개해야만 되는 죄인들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다음과 같은 사랑의 찬가를 부른다. “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이해하시죠.” 죄인들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사랑의 표현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그들은 모른다. 그들은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죄에 대한 경계를 마냥 느슨하게 한다. 그들은 죄인의 생애를 관대하게 봐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게 사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4.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는 생애를 살지만, 스스로 완전하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기 1:8. 그러나 욥은 자신이 스스로 완전하다고 공언하는 위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가령 내가 의로울 지라도 내 입으로 나를 정죄하리니,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 구나.” 욥기 9:20,21. 하나님의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로부터 돌렸을 때는 쓰러지게 된다. 그런 경우,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함 마음을 가지고 요한일서 2:1절에 나오는 약속에 의지해야 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율법주의자들의 경험에 대해서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로마서 7:15,19. 율법주의자가 다음과 같이 절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불행하게도 율법주의자는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께 온전히 굴복하므로 얻게 되는 구원의 해답을 발견하지 못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을 정죄하며 좌절, 비관, 신경과민 증세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교를 떠날 뿐만 아니라 자살하는 극한 상황에 까지 도달하게 된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장 비참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의 경험은 율법주의자들과 유사하지만, 동시에 매우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율법주의자들처럼,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의 어떤 사람도 율법주의자들처럼 좌절감과 신경과민에 의해서 시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가운데서도 완전하게 안전한 느낌 가운데서 살아간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자신이 잃어버린 바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들의 놀람과 고뇌와 분노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0-23.
5. 하나님의 성도들은 마음 속에 평화를 소유하고 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편 119:165. 반면에 율법주의자는 죄책감과 좌절과 계속되는 실패의 경험을 되풀이 하면서 깊은 자기 정죄에 빠져들어간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능력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며 죄와 악을 저항할 영적인 기력도 없다. 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은 육적인 안전감속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신신학이 재림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게 되자, 그 결과로 인하여 교회 안에 짙은 화장과 각종 장신구들이 범람하게 되었으며, 집사들과 장로들까지도 술과 담배와 도박을 즐기게 되었다. 커피와 차를 금하는 설교는 더 이상 재림교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언의 신을 지나치게 율법주의적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그들은 엘렌 화잇의 글을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신신학에 대한 확신이 강한 사람들은 예언의 신을 태우거나 팔아버리기도 한다. 음식물을 철저하게 선택하여 먹는 것, 안식일을 일곱째 날로 철저하게 지키는 것, 십일금과 각종 연금을 기억하여 철저하게 드리는 것은, 그들에게는 율법주의적으로 느껴진다. 그들은 첫째날이나 일곱째 날이나 잘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재림교회와 바벨론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정확한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며, “결국에는 다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6. 성도들은 영생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인데, 이것은 그들 자신의 생애 속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존귀”를 노래하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5:12).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들인지 아는 사람들이며, 오직 가치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절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늘에서 영생의 면류관을 받게 될 때, 그들은 그것을 벗어서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내려 놓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인생은 그리스도와 함께 수놓아 지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사랑의 행위들이 자신들의 참된 개심을 증거하는 전시품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보상과 칭찬을 전혀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듣게 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40. 그들은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시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2,23. 그러나 슬프게도,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자들과 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이 함께 논쟁하고 싸우면서 서로를 정죄 하다가, 마지막 날에 그들 모두는 서로가 동일한 운명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율법주의자와 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참된 복음을 설교해야 할 시대이다. 지금 이 시대는, 율법주의자들과 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멸망을 깨달을 수 있게 만드는 강력하고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설교해야 할 때이다. 그들은 율법주의와 도덕적 패배주의에서 구원해 낼 수 있는 구세주를 소개하고, 우리 모두의 칭의와 성화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이끌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인을 회복케 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영감적인 설교가 절실히 필요 되고 있다. 율법적인 생활에 지쳐있는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나의 호소는,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포기하고 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의 진영에 가담하고 싶은 유혹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대들을 위한 최선의 처방은 매일, 그분의 십자가와 생애를 명상하는 가운데, 아침마다 모든 시험과 사단의 기만을 승리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그리스도께 탄원하라는 것이다. 나 역시 나의 경험을 통해서, 나의 연약한 면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루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사기 위한 능력을 달라고 간구할 수밖에 없다. 그날 하루의 승리를 위해서. … 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을 향한 나의 호소는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을 보면서 율법을 경시하게 되는 유혹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혹시 자신의 나태하고 방탕하며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잃어버린 신앙을 깨달았을 경우,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단의 덫인 율법주의에 걸려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나 만일 그대들이 일단 율법을 경시하게 되면 그대들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표준도 없으며, 원칙이 허물어져버린 생애가 될 것이다. 그대들의 그리스도인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의 인생관과 개념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그러한 태도와 모습은 하나님의 교회에 욕을 돌리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들을 위한 최선의 처방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라는 것이다. 그분의 희생과 공로를 깊이 명상할 때, 그대들의 마음 속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이 솟구쳐 올라올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능력에 의지하여 그대들의 죄를 용서 받고, 그대들의 영혼을 치료 받도록 하라. 재림교회 안에 있는 불쌍한 율법주의자들과 깊은 기만 속에서 만족하고 있는 도덕적 패배주의자들이 하늘 왕국을 향하여 곧 바르게 뻗어있는 길을 발견하기를 기도하면서….
1. 율법주의자는 그리스도께 대한 매일의 전적인 굴복 없이 법을 지키려고 노력함.
2. 도덕적 패배주의자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믿지 않는다.
3. 참 그리스도인은 자신 속에 내재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법을 지킨다.
1. 율법주의자는 자신의 구원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 법을 지키는 동기가 된다.
2. 도덕적 패배주의자는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율법주의라고 믿는다.
3.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이 법을 지키는 동기가 된다.
1. 율법주의자는 죄와 죄인을 미워한다.
2. 도덕적 패배주의자는 죄인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하여도 관대하다.
3. 참 그리스도인은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한다.
1. 율법주의자는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실패하게 된다.
2. 도덕적 패배주의자는 예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3.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날마다 승리를 경험하지만 스스로 완전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1. 율법주의자는 죄책감, 좌절감, 계속되는 실패로 인하여 여전히 고통 당한다.
2. 도덕적 패배주의자는 육적인 “안전감”에 도취되어 있다.
3. 참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평화를 소유한다.
1. 율법주의자는 영원한 멸망 가운데 고통 당하게 된다.
2. 도덕적 패배주의자는 영원한 멸망 가운데 고통 당하게 된다.
3. 참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