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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대 제 38 호

0.9% 의 비밀

왜 99%의 사람들은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저자: 강명수 장로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군사 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과거 역사 가운데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성공하였거나 실패하였던 역사를 깊이 연구했다. 왜 과거의 역사를 연구해야 했을까? 역사는 반복한다는 공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한다.”는 말은 진리이다.

역사 중에서도 종교적 핍박의 역사는 일정한 공식에 의해서 반복된다. 종교적 핍박의 역사는 어떤 공식에 의해서 반복될까? 타락한 교회와 정치가 손잡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핍박이 일어나게 된다. 종교 암흑시대에 천주교회와 로마 정치 세력이 손을 잡았을 때, 핍박의 공식에 의해서 수천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 당하는 일이 생겼던 것이 대표적 예증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환난은 어떻게 일어나게 될까? 핍박의 공식에 의해서 중세기의 역사가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이 예언 역시 종교 암흑시대의 핍박처럼 타락한 교회와 정치가 연합함으로써 짐승의 표를 강요하게 될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의 역사 공식

역사는 목적 없는 혼란한 사건의 흐름이 아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특별히 2,300주야 예언이 끝나면서 시작된 마지막 시대의 약 300년 역사는 다니엘 12장 4절 말씀에 따라 성취되어 왔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미국의 경제학자이며 미래학자인 제레미 리프킨은 역사가 일정한 패턴에 의해서 흘러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제레미 리프킨은 역사가 흘러가는 공식을 수치화하였는데, 그는 그것을 “1%가 이루어 온 역사”라고 불렀다. 그가 세운 이 역사 공식은 다니엘 12장 4절 마지막 시대의 예언이 실제로 어떻게 성취됐는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럼 이제부터 제레미 리프킨의 역사 공식이 어떻게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인 12장 4절의 예언을 성취시켜 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그가 세운 공식은 한마디로 1%의 사람들이 역사를 움직여 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역사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협력함으로써 이루어져 왔다고 말하지만, 제리미 리프킨은 이러한 사상을 부정하였다. 역사는 철저하게 1%의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99%는 어떤 사람들인가? 그는 말하기를 “나머지 99%의 사람들은 잉여 인간들이다.”라고 하였다.

잉여 인간이란 무슨 뜻인가? 역사의 흐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99%의 인류를 유기 물질(Organic Materia)로 규정하면서 이들은 단백질 덩어리로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제레미 리프킨의 역사관이다. 99%의 사람들은 평생 군중 심리에 이끌려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무덤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문제를 위해서 인생 대부분을 사용하는 사람들로서 무엇이 진리인가 생각하거나 찾으려고 애쓰지도 않은 채 그들의 삶을 마친다. 기분 나쁜 이야기이며 정말 끔찍한 이야기다. 그러나 쉽게 부정할 수 없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를 움직여 온 움직일 수 없는 공식이다.

그런데 참 흥미 있는 사실은, 제레미 리프킨이 1%에 속한 사람들을 다시 0.1%의 사람들과 0.9%의 사람들로 구분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0.1%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켜 천재이면서 창조적인 사람들이라고 했고, 0.9% 사람들은 0.1%의 사람들이 세상에 나타날 때 그것을 알아보고 그들에 동참하는 통찰력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0.1%에 속한 사람이 나타나면 반드시 그들을 알아보는 0.9%의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0.1%를 전혀 몰라보거나 무시하거나 반대하는 99%의 사람들은 잉여 인간들로 결정된다.

제레미 리프킨은 1%의 사람들이 역사를 이끌어 간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중 0.1%의 사람들을 “하늘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하늘이 0.1%를 이 땅에 보내면 그것을 분별해 내는 0.9%가 생겨나고, 그 결과 99%의 잉여 인간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결정된다. 0.1%와 0.9%, 99%의 차이점을 이해하겠는가? 이제 역사 속에서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나누어지는가를 살펴보자.

산업 혁명과 0.9%

종교 암흑시대가 끝나고 2,300주야 예언이 끝나갈 무렵 사람의 왕래가 놀라운 속도로 빨라지고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온 세상이 급속하게 산업화 될 것을 예언해 주셨는데, 이 예언에 맞추어서 필요한 인물들이 나타나서 필요한 발명들을 하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해”지는 다니엘 12장 4절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놀라운 일이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산업 혁명이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하늘은 0.1%의 사람이 영국에서 태어나도록 섭리하였고 그는 산업 혁명의 시대를 열었다. 아무나 0.1%가 되는 것이 아니다. 0.1%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람을 뜻한다. 산업 혁명 시기에 가장 먼저 나온 기계는 증기 기관이 아니라 방적 기계였다. 0.1%의 창조적인 사람이 산업 혁명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 당시 모직 옷은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베틀로 만들어졌다. 각 나라는 네덜란드로부터 모직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모직은 매우 비쌌다. 이런 점에 착안해서 0.1%의 사람이 방직 기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0.1%가 나타나면 어떤 사람들이 나타난다고 했는가? 0.1%를 통찰력 있게 알아보는 0.9%의 사람들이 나타난다고 했다. 하늘이 이 땅에서 산업 혁명 시대를 열도록 보낸 0.1%의 사람이 발명한 방적 기계를 보면서 “바로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겠구나.”라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0.9%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99%에 속한 대부분 사람이 방직 기계를 보면서 오히려 불평하였다. “이제 내 직업이 없어지겠구나. 이제 내가 돈을 벌지 못하겠구나. 모직 값이 내려가면 내가 손해를 볼 텐데.” 어떤 사람들은 “아, 이제 참 세상이 좋아지겠구나. 이제 싼 값에 모직 옷을 입을 수 있겠네.”라고 칭찬을 하기도 했지만, 0.1%가 해낸 일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0.9%에 속한 사람들은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저 기계가 저렇게 빠르게 옷감을 만드니 이제부터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양털이 필요하겠구나. 기계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양털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양의 털로 모직을 만들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0.9%의 통찰력 있는 사람들은 그 당시 영국민들의 주식이었던 감자밭을 싸게 사서 그것을 갈아엎고 목초를 심은 다음 양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0.9%의 사람들은 방적 공장이 세워지는 곳마다 감자밭을 뒤집어엎은 다음 대규모의 양 목장을 세웠다. 방적 공장이 세워질 때마다 양털의 수요는 폭등하였고, 0.9%의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영국 전국에 수많은 양 목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이로 말미암아 몇 년 후 감자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극심한 감자 파동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그 당시에 유럽을 휩쓴 감자 기근의 배경이다. 영국에서는 전국적으로 감자를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심지어 런던에서조차 감자가 없어서 굶어 죽은 사람들이 생기면서 감자 도둑들이 들끓게 되었다. 급기야 영국 정부는 감자를 도둑질하는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하는 법을 발표하게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고픔을 참지 못한 사람들은 감자를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상 속에서 영국에서 그 당시의 정치 경제의 모순을 풍자하는 소설이 나왔는데 그것이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의 서문에는 한 시가 나오는데, “양이 사람을 죽였네. 양이 사람을 죽였네.’라는 말로 시작된다. 비싼 양털 때문에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는 뜻이다. 배고픔 때문에 도둑질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교수형에 처하는 정부를 조롱한 것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였다.
하늘이 0.1%의 사람을 이 땅에 보내면, 그것을 알아보는 0.9%가 생기고, 나머지 99%의 잉여 인간들은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도 모른 채 배고프고, 도둑질하며, 교수형에 처해지는 일이 생긴다. 이것이 역사가 흘러가는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헨리 포드의 자동차와 0.9%

0.1%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흐름을 변화시키기 원할 때마다 나타나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놓는다.

세월이 흘러서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해”지는 다니엘 12장 4절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이 생겼다. 20세기 초 0.1%에 속한 사람이 미국에 나타났다. 헨리 포드가 태어난 것이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제작하여 미 전국의 언론을 상대로 발표회를 가졌다. 그다음 날 신문에 어떤 기사들이 나왔을까? “미국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제 미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자동차 대국이 될 것이다.”라는 기사가 나왔을까? 아니다. 미국 전체 신문에 헨리 포드가 제작한 자동차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기사들로 가득 채워졌다. “자동차 한 대 만드는 돈이 기차를 만드는 돈보다 많다. 기차는 수백 명을 태울 수 있는데 자동차는 고작 해야 4명밖에 못 태운다. 이런 기계를 만들어 놓고 신기술이라고 발표하니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다!”라는 식의 논설과 기사가 미 전국의 신문을 덮었다. 심지어 워싱턴 포스트 지는 헨리 포드가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머리 위로 든 채 벌서고 있는 삽화를 만평에 넣는 조롱을 하였다. 미국의 모든 주요 신문들이 이런 식으로 헨리 포드의 자동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일 미국 전체가 헨리 포드를 반겼다면 그는 하늘이 보낸 0.1%가 아니라는 것이 제레미 리프킨의 역사 공식이다. 0.1%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라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는 사람이지만, 99%의 사람들은 0.1%의 사람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0.1% 사람의 비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은 0.1%의 사람을 조롱하고 핍박하게 된다. 이것이 0.1%가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고난이다. 그리하여 그 당시 미국 전체 국민이 헨리 포드의 발명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얼마 후에 헨리 포드는 세상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내놓았다. “세상은 나를 바보로 보지만 나는 세상이 바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을 계산하지만 나는 자동차를 대량 생산할 때 드는 비용을 계산한다. 세상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길만을 다닐 수 있는 기차를 선호하지만 나는 언제, 어디서든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었다.” 이것이 세상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헨리 포드의 외침이었다.

제레미 리프킨의 공식에 의하면 0.1%가 나타나면 누가 나타난다고 했는가? 그를 알아보는 0.9%의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신문과 라디오 및 모든 여론과 국민이 “저것은 틀렸다.”라고 말하는 상황 속에서, 아무도 헨리 포드의 자동차를 보면서 투자를 생각지 않은 상황 속에서, “저것이 0.1%다.”라고 꿰뚫어 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조그만 마을의 시골 부자였다.

그는 온 국민이 전혀 거들떠보지 않은 헨리 포드의 자동차를 보면서 “이제 곧 자동차가 온 세계를 휩쓸 것이다.”라고 생각하였고, 전 재산을 털어서 주유소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아직 헨리 포드의 자동차 회사에서 자동차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전에 미국의 주요 도시의 목 좋은 곳에 주유소를 세운 것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거리를 다니는 자동차 숫자보다 주유소가 많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99%의 사람들은 마차들이 다니는 길에 주유소를 세우는 0.9%의 사람의 결정을 보면서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차 길 위에 주유소를 세우는 것, 이것이 0.9%의 통찰력이다.

얼마 안 돼서 0.9%에 속한 사람의 통찰력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헨리 포드는 거대한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하였고, 자동차들이 대량 생산을 통하여 저가로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그 당시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다니던 말과 마차를 헨리 포드의 자동차들이 내몰아 버렸다. 시골 부자가 세운 주유소 체인이 미 전국 주유소의 94%를 독점하게 되었는데, 그 주유소 회사의 설립자가 바로 “록펠러”이다.

0.1%와 0.9%와 99%, 이것이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는 공식이다. 0.1%의 사람과 0.9%의 사람들의 연합을 통하여 세상이 변화되고 역사가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99%의 사람들은 0.1%와 0.9% 사람들의 비전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시하고 조롱하면서 살다 간다.
이 세상의 역사는 하늘이 보내신 0.1%에 속한 사람과 그것을 알아보는 0.9%의 통찰력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나머지 99%는 그들의 사상과 진리를 무시하거나 반대하거나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저 내가 오늘 얼마를 벌고, 다음 달에 월급이 얼마나 올라갈 것인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킨 채 살다가 죽어 간다.

기독교 역사와 0.9%

이제부터 이번 기사의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나는 제레미 리프킨의 역사 공식을 기독교 역사에 적용시켜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의 역사 또한 정확하게 제레미 리프킨의 역사 공식을 따라서 이루어졌다. 0.1%의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기별을 전하면, 그것을 통찰력 있게 꿰뚫어 본 0.9% 사람들이 그 기별을 받아들였고, 나머지 99%의 사람들은 그 기별을 거절하거나 무시하거나 알아보지 못함으로써 잉여 인간으로 세상을 살다가 죽어 갔다. 그들은 살아 있지만 죽은 자들이었다.

종교 암흑시대에도 제레미 리프킨의 역사 법칙을 적용할 수 있을까? 그렇다! 온 유럽이 교황권의 통치하에서 깊은 어둠 속에 있을 때, 하늘은 각 시대마다 0.1%에 속하는 개혁자들을 보내셔서 종교 개혁 운동을 힘있게 일으키셨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마틴 루터가 독일에서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가 그 시대의 0.1%였다. 그가 개혁의 기별을 전파하자, 하늘의 음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99%의 잉여 인간들이 일어나서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루터의 기별을 이해하지 못했고, 맹목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따라가다가 멸망에 이르렀다. 그들은 살아 있지만 죽은 “유기 물질”들이었다.

0.1%가 나타나면 반드시 그것을 알아보는 0.9%가 등장하게 된다. 마틴 루터의 기별이 전파되자, 그것을 영적 통찰력 있는 눈으로 꿰뚫어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역사의 새 장을 연 0.9%였다. 그들의 도움과 협력에 힘입어 마틴 루터의 개혁 운동은 성공하게 되었고 새로운 개신교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는 하늘이 인정하는 개혁 운동이 생길 때마다 그대로 반복되었다.

제레미 리프킨의 역사 공식은 미국에 대한 예언에도 정확하게 적용된다.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를 뜻하는 1,260년 예언이 끝나면서 하늘이 정한 시간이 되자, 하늘은 0.1%의 사람을 이 땅에 보냈는데, 그가 콜럼버스다. 하늘은 그가 미국이라는 땅을 발견하도록 섭리하였고, 그 당시의 잉여 인간들이 신대륙 미국을 온갖 질병이 들끓고 미개인들이 사는 황무지로 생각할 때, 유럽에서 핍박당하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은 그 땅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피난처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신대륙 미국으로 피신하였는데, 요한계시록 12장은 그들을 가리켜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따라가는 0.9%의 사람들이었다. 이때부터 마지막 시대가 시작되었고, 사단이 인도하는 99%의 잉여 인간들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 사이에 대쟁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닷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청교도들의 뒤를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다른 목적을 가지고 미국으로 이주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신대륙 미국을 준비해 놓으신 목적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의 인물과 0.9%

성경의 인물들을 살펴보자. 노아, 그는 하늘이 보낸 0.1%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기별을 전했다. 그 당시 누가 0.9%였는가? 노아의 기별을 받아들이고 방주를 짓는 데 동참했던 노아의 가족들이 그 당시의 0.9%였다. 99%의 잉여 인간들이 노아의 기별을 조롱하고 거절했는가? 그 당시의 잉여 인간들은 하늘에서 온 기별을 조롱하고 거절하다가 심판이 왔을 때 물로 멸망하였다.

엘리야는 하늘이 정한 0.1% 사람이었다. 그가 하늘의 기별을 전했을 때, 누가 0.9%였는가?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았던 7천의 의인들과 사르밧 과부가 0.9%였다. 그들은 하늘이 보낸 0.1%의 기별을 정확하게 알아보았고, 그 기별을 받아들였다. 나머지 99%는 어떠했는가? 아합 왕과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다수 백성은 전혀 0.1%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핍박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기도하고 예배드렸지만, 잉여 인간들이었다. 살아 있지만 죽은 자들이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같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늘이 보낸 0.1%였다. 99%의 유기 물질들은 전혀 하늘의 기별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고 핍박하였다. 그러나 항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있어서 선지자들의 기별을 받아들였는데, 그들이 바로 각 세대마다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따라가는 0.9%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침례 요한은 전형적인 0.1%였다. 하늘은 메시아가 오는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침례 요한을 보냈지만, 99%의 잉여 인간들은 그의 사업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대교회 지도자들과 거의 모든 백성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를 핍박하였고 죽였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 침례 요한의 기별인 광야의 소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 시대의 0.9%였고 후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하늘의 신이었지만 이 땅에 0.1%로 오셨다. 그리스도는 태어날 때부터 그 당시의 잉여 인간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태어나셨다. 말구유에서 거적더기를 덮고 탄생하셨다. 거의 모든 유대인이 그를 거절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그리스도의 사명과 복음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0.9%였다. 열두 제자와 사도들 그리고 다락방에 모인 소수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이 기독교 역사의 신약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되었다.

마지막 시대의 0.1%와 0.9%

이제 중요한 질문을 던지겠다. 이 마지막 시대에는 누가 0.1%이고, 누가 0.9%이며, 어떤 사람이 99%의 잉여 인간일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누가 0.1%이고, 누가 0.9%가 될 것인가를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해 두셨다. 누가 0.1%와 0.9%가 될 것인지를 찾아보도록 하자. 제레미 리프킨의 역사 공식을 통하여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0.1%와 0.9%에 속하는 조건이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99%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되거나 거절되거나 핍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세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시하거나 거절하는 말씀을 찾으면 그 말씀이 이 시대를 위한 0.1%이다. 어떤 말씀이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킬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말씀 속에서 0.1%와 0.9%의 조건을 찾을 수 있다.

1)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단 8:14)

이 말씀이야말로 말세의 시작점에 나타나는 0.1%를 위하여 준비된 말씀이다. 이 말씀은 2,300주야가 끝나면서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를 정확하게 집어 주고 있다. 또한 이때부터 성소가 정결해지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그들이 마지막 시대의 0.1%와 0.9%이다. 다니엘 8장 14절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99%의 잉여 인간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시되고 배척될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해서 태동한 재림교회마저 이 말씀이 주는 사명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바벨론 복음에 물든 신신학자들에 의하여 성소를 정결케 하는 복음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2,300주야 예언이 끝날 무렵에 한 사람을 택해서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가 윌리엄 밀러이다. 그는 2,300주야 예언의 성취를 선포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0.1%의 사람이 기별을 전하면 반드시 그것을 통찰력 있게 알아보는 0.9%가 나타나게 된다. 윌리엄 밀러가 2,300주야 예언이 곧 성취된다는 기별을 전하자, 그 말씀을 받아들인 0.9%의 사람들이 모여서 재림 운동의 시대를 열었다. 그 시대의 잉여 인간들은 2,300주야 예언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으며, 오히려 핍박과 조롱을 하였다. 각종 신문과 교파들에서 그들을 조롱하는 일들이 생겼다. 윌리엄 밀러가 전했던 2,300주야 예언 해석은 후에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에 의해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졌다. 마지막 시대 역사의 주역이 누구인가를 밝혀 주는 두 번째 말씀은 무엇인가?

2)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닷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이 말씀을 전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사단의 최종적인 공격 대상이 된다. 오직 깊은 통찰력이 있는 소수 그리스도인만이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기독교회의 99%가 그들이 전하는 기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무시하거나 반대하게 된다. 이 말씀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람들인데, 마지막 시대에 그들은 늦은 비 시대를 열게 된다. 99%의 잉여 인간들로부터 오해받고 조롱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의 운명이다. 오늘날 99%의 기독교회가 계명은 십자가에서 폐하여졌다고 믿는다. 기독교회의 99%가 하나님의 계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계명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비웃고 조롱한다.

계명이 십자가에서 폐하여졌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라고 가르치는 복음이 재림교회 안에서 점점 더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재림교회 안에서도 편견과 핍박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마저 99%의 잉여 인간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3)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1-12)

이 말씀 역시 99%의 기독교회로부터 오해와 조롱의 대상이 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온 세상이 사단이 인도하는 99%에 속한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음으로써 잉여 인간들로 확정될 때, 누가 하나님의 인을 받은 0.1%와 0.9%인지를 밝혀 준다. 그들은 깊은 영적 분별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시대의 0.1%와 0.9%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2,300주야 예언과 성소를 정결케 하는 복음과 하나님의 계명을 중심으로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여자의 남은 자손이고 144,000인이며 마지막 시대 역사의 주역들이다. 마지막 시대에 0.1%와 0.9%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99%의 잉여 인간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핍박과 오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에게 늦은 비 성령을 퍼부어 줄 것이며 그들에 의해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들이 세상 역사의 종점을 찍게 될 것이다.

0.9%의 믿음과 삶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소수 사람만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다. 시대마다 대다수 사람이 세상에 깊이 빠져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은 것이다. 0.9%의 하나님의 백성만 그 의미를 깨닫고 반응하는 것이다.

앞에서 마지막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신학적으로 0.9%에 속하는 그리스도인인가를 살펴보았으니 여기서는 어떤 것이 0.9%에 속하는 믿음과 생애인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어떤 교리를 믿는 것과 그 교리를 자신의 생애 속으로 끌어와서 실천하는 것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성경 역사를 이끌어 온 주역들의 믿음과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마지막 시대의 0.9%에 속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생애를 살아야 하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의 믿음과 생애를 차례로 말한 다음, 그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특징을 이렇게 집약하였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믿음의 조상들 모두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그들이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을 사모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외국인(strangers)과 나그네(pilgrims)로 살았다는 것이다. 마지막 시대의 0.9%도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 삶을 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99%의 잉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시면서는 하나님께서 부끄러워하신다는 말이 아닌가? 만일 우리가 하늘을 사모하는 나그네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실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부끄러워하시는가? 저들을 당신 자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 데려가려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는데, 우리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을 사모하면서 산다면 하나님은 너무나 부끄러운 것이다.

“본향을 사모하니.”에서 “사모하니.”라는 말은 영어 성경에 “desire”, 즉 “갈망하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무엇을 간절히 갈망하는가? 이 땅에서의 부와 편리함과 존경을 갈망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결국 광야에서 멸망하는 99%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 때, 그들은 주변 이방인들을 부러워했다. 그들처럼 살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나그네처럼 살지 않았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살도록 하였는가? 광야에서 40년이라는 긴 기간 교육받은 것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하늘 본향에 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광야는 그들을 이 세상에서 타국인과 순례자로 교육하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내가 또한 그들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나안 땅, 곧 그들이 외국인이 되었던 그들의 순례의 땅을 주기로 하였으며.”(출 6:4, 킹제임스한글성경)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빼낸 이유였다. 광야에서 외국인과 순례자로서 훈련한 다음에 하늘 가나안에 데려가는 것이 하나님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주변의 아말렉 족이나 아모리 족과 같은 우상 숭배자들과 경쟁하면서 그들의 재물과 가옥을 탐하다가 광야에서 멸망했던 것이다.

“히브리”라는 단어의 원어에는 영어로 “cross over, pass over”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 단어는 애굽에서 유월절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을 건너 넘어가는 것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을 때, 그들은 주변 우상 숭배자들에게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쫓아서 광야를 건너가는(cross over, pass over) 모습으로 사람들로 비추어졌다. 히브리인들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쫓아서 이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분명한 목적지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좇아서 이리저리 순례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히브리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이 땅에 깊이 말뚝박고 사는 우상 숭배자들을 흉내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순례자와 나그네로 이 땅에 사는 동안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순례자와 나그네에게 가장 큰 도전이 무엇인가? “육체의 정욕”이다! 왜 그것이 가장 큰 도전인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례자의 신앙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육체의 정욕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육체의 정욕이 우리를 제압해 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령의 힘보다 육체의 힘이 더 강하다는 잘못된 확신을 하게 되어서 “나는 결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다.”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데 실패하는 그리스도인마다 바벨론에서 들어온 신신학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이 특징이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99%의 불평은 육체의 정욕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이 99%의 잉여 인간들이 광야에서 죽었던 이유이다.

우리는 모두 나그네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0.9%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결이다. 육체의 정욕은 하나님의 계명과 충돌한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여자의 남은 무리를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완전히 순종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일에 실패하는 사람마다 자유주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 모두 날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쫓아서 가는 순례자로 살게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