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세대 제 35 호
예언의 신을 따라야 합니까? 사람을 따라야 합니까?
제3부 –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하지 못하는 통속적인 복음
제3부에서는 “죄, 예수 그리고 구원”에서 소개하는 복음 중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거듭남과 그것을 경험한 이후에 따라오는 성화의 경험에 대해서 설명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에서 소개하는 복음이 한국 재림교회 입장에서는 그 책자의 “발간사”와 “추천의 말씀”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탁월하고” “영명한”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일반 개신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존의 신신학이 개신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복음에 기초를 두는 것처럼, “죄, 예수 그리고 구원”에서 소개하는 복음도 그 구조와 결론이 개신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복음과 매우 유사하다.
1. 그리스도인이 거듭나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죄에 대한 충동이 사라지는가?
A)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주장
저자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면 더 이상 속에서 나오는 죄가 없어지게 된다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 곧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공격을 받아 영생의 생명으로 생활하는 일에 상처를 입는다. 그것이 거듭난 사람들이 범하는 죄라고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스스로 죄를 선택하지 않는다. 즉, 자기 안에서 죄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죄가 공격할 때 그것을 미처 방어하지 못하여 죄가 들어오는 것이다.”(죄, 예수 그리고 구원, 212)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거듭날 때 죄된 본성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죄는 없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탄생하신 것은, 말하자면 모태에 잉태되시고 탄생하시는 그 자체가 바로 거듭나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것이, 우리의 처지에서 말한다면, 바로 중생으로 탄생하신 것이고, 우리는 태어나는 것이 죽은 자로 태어났으나 예수님이 성령으로 탄생하신 것과 같이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탄생하신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올리워진다는 말입니다. … (예수님은) 중생의 생명으로 탄생하셔서 중생한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시고, 우리를 성령으로 중생하게 하셔서 예수님의 거룩한 상태로 끌어올려 놓으심으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으로 중생했다면 예수님이 사신 것과 같이 능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 104)
저자는, 예수께서는 죄성이 없는 상태로 성육신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거듭나면 “예수님과 같은 자리로 올리워지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신 것과 같이 능히 살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과 같은 승리를 거두려면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본성이 예수님처럼 속에서부터 죄가 올라오지 않는 본성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중생을 경험할 때에 그 본성이 예수님과 같은 본성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저자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사신 것과 같이 능히 살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중생한 생명, 곧 새로운 창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은 항상 의롭고 항상 거룩합니다.” (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 207)
“거듭난 사람은 신성의 본질을 예수 안에서 받은 사람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 본질이 하나님의 의가 된 것입니다(고후 5:21). … 이것이 구원이요,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며, 이것이 거룩이요 이것이 생명입니다.” (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 230)
B) 문제점
거듭남과 성화의 문제에서 저자는 기존의 신신학과 분명하게 다른 주장을 펼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모본이시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탄생하여 영으로 세상을 이기며 사신 것처럼 예수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도 예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이길 수 있음을 모본으로 드러내신 것이다.”(죄, 예수 그리고 구원, 85)
기존의 신신학은 예수께서는 우리와 다른 인성, 즉 타락하지 않은 인성을 취하였기 때문에 승리의 생애를 사실 수 있었지만,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죄를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죄의 정의와 원죄,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는 신신학에 기반을 두었다가 거듭남과 성화 문제에 와서는 승리와 완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류에 오류를 연결해 오다가 거듭남을 통하여 승리와 완전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오류를 만들어 내었는데, 저자의 주장처럼 만일 예수님이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성을 취하셨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승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죄 없는 본성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승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 전개를 통하여 한국 재림교회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복음을 도입하였다. 그리스도인이 중생(거듭남)의 경험을 통하여 본성이 그리스도와 같이 죄성이 없는 본성으로 변화되면 그분처럼 더 이상 자기 속에서부터 죄가 올라오지 않게 되므로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게 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스스로 죄를 선택하지 않는다. 즉, 자기 안에서 죄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죄, 예수 그리고 구원, 212)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서) 죄는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것입니다.”(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 203)
이 책의 저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처럼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의 본성이 죄성이 없는 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달아 놓았다. 정말로 거듭남을 통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면 더 이상 속에서부터 죄에 대한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재창조가 되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우리의 죄성과 자아가 제거된다는 말인가?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죄의 법과 성령의 법 사이의 투쟁이 없다는 말인가?
거듭날 때 변화되는 것은 마음과 성품이지, 본성이 아니다. 물론, 화잇 부인은 자신의 저서에서 본성의 변화에 대하여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품성의 변화를 의미한다. 화잇 부인 생존 당시에 품성이라는 단어를 본성으로 대신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화잇 부인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우리의 자아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수없이 강조했다.
거듭남을 통하여 생명으로 태어나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자아가 존재한다. 살아 있지만 힘을 잃은 육이 영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이 중생의 경험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 … 로 여길지어다.”라고 한 것이다(롬 6:11). 자아가 완전히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죽은 것으로 간주하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본성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 몸이 홀연히 변화되어 영화로운 새 몸을 받을 때까지 변화되지 않는다. 우리 생애 속에서 죄된 충동과 투쟁이 완전히 없어질 때는 절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본성이 아닌 품성의 변화
흔히들 본성, 본질과 품성에 대한 구분이 분명치 않은 것 같다. 본성은 우리가 유전적으로 타고난 육체 속에 있는 성질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죄의 본성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품성이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죄의 본성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성령의 은혜 속에서 어떠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느냐 하는 부분이 바로 우리의 품성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대들은 사단의 마술에 걸린 땅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도록 마음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대들은 행복해질 수 있으며 또한 행복해져야 하고 자제의 습관도 가져야 한다. 그대들의 생각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하고 그대들의 감정은 이성과 신앙의 지배 아래 놓여야 한다. 그대들의 상상력은 함부로 날뛰고 제지나 규율 아래서의 어떤 노력 없이 제 마음대로의 길을 가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이 잘못되면 감정도 잘못될 것이다. 그리하여 생각과 감정이 합하여 도덕적 품성을 이룬다.”(5T, 309)
“부지런한 습관과 품성의 힘은 계발에 의하여 얻어져야 한다. 고상한 도덕적 품성과 훌륭한 정신적 특성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5T, 321)
사도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
먼저, 사도 바울이 경험한 구원의 경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그의 성화의 생애 속에서 우리는 참된 거듭남과 구원의 경험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볼 수 있다.
“바울의 성화는 자아와 더불어 치르는 끊임없는 싸움의 결과였다.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말했다. 그의 의지와 그의 욕망은 매일 의무와 하나님의 뜻으로 더불어 싸웠다. 자기 자신의 육신에 대해서는 아무리 고통스러웠을지라도 그는 기질을 따라가는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싸움이요, 전진이다. 이 싸움에는 면제가 없다. 노력은 계속적이고 끈기로워야 한다. 우리가 사단의 유혹에 대하여 승리를 지속하는 것은 중단 없는 노력에 의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실은 불가항력의 힘으로 얻어지고 확고부동한 목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을 위한 엄격하고 줄기찬 노력 없이는 향상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이 싸움을 치러야 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그 싸움의 계쟁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비록 노아와 욥과 다니엘이 이 땅에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의로 아들도 딸도 구원할 수 없었다.
우리는 타고난 기질과는 반대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반드시 정복되어야 할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악으로 기울어지는 기질들이 있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는 자가 되도록 때로는 일생 동안 받은 훈련과 교육을 버려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확고해지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유혹을 저항할 수 있게 해 줄 생각의 습관을 형성해야 한다. 우리는 위를 향해 쳐다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성령의 귀중한 은혜들은 한순간에 계발되지 않는다. 용기, 견인 불발, 온유, 믿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확고하게 의지하는 것 등은 여러 해 동안의 경험에 의하여 얻어진다. 거룩한 노력의 생애와 정의에 대한 확고한 고수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운명을 인 쳐야 한다.”(8증언, 313)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죄에 대하여 저항하는 생애를 사셨다. 다음과 같은 말씀은 예수께서 어떤 인성을 취하였으며 어떤 경험을 하면서 사셨는가를 보여 준다. “잘못된 행위를 하도록 강력하게 영향을 받으셨을(influenced) 때에도 유혹을 저항하셨으며(resisted), 잘못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믿음으로 신성의 능력을 붙잡음으로써 유혹을 저항하셨다(resisted).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통과한 시련이었다.”(Youth Instruct, 7-20-1899)
“It was a difficult task for the Prince of Life to carry out the plan which he had undertaken for the salvation of man, in clothing his divinity with humanity. He had received honor in the heavenly courts, and was familiar with absolute power. It was as difficult for him to keep the level of humanity as it is for men to rise above the low level of their depraved natures, and be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Christ was put to the closest test, requiring the strength of all his faculties to resist the inclination when in danger, to use his power to deliver himself from peril, and triumph over the power of the prince of darkness. Satan showed his knowledge of the weak points of the human heart, and put forth his utmost power to take advantage of the weakness of the humanity which Christ had assumed in order to overcome his temptations on man’s account.” (R&H, 4-1-1875)
“생명의 왕자께서 신성에 인성을 취하시고 인류의 구속을 이루시는 계획을 이행하시는 것은 어려운 임무였다. 당신께서는 하늘 조정에서 존귀를 받으셨고, 절대적인 능력에 익숙하여 계셨다. 그분께는 인성을 유지하시는 일이 참으로 힘드신 것이었는데, 마치 우리 인간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낮은 수준에서부터 올라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위험에 빠졌을 때에,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여 위험에서 자신을 구원하여 악의 왕자의 능력을 승리하고 싶고, 기울어지는 경향을 저지하기 위하여 당신의 모든 기능들의 힘을 사용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시험에 처하실 것이었다. 사단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연약한 점들에 대한 그의 지식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입장에서 유혹들을 승리하시기 위하여 취하신 인성의 연약한 점들을 이용하기 위하여 최상의 능력을 펼치었다.”(리뷰&헤랄드, 4-1-1875, 한글 번역)
2. 거듭남이 거룩함의 가장 높은 단계인가?
A)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주장
저자가 주장하는 거듭남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개념은 거듭나는 순간이 거룩함의 가장 높은 때라는 가르침이다.
“성소가 헌당되었을 때가 가장 거룩하였던 것처럼 사람, 곧 아담의 후손, 썩어질 씨로 태어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정으로 회개하여 그분의 재창조에 의하여 중생하므로 썩지 않은 씨로 태어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니 그때가 가장 거룩한 때입니다.”(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 191)
B) 문제점
이 책의 저자가 중생하는 순간이 최고의 거룩함의 수준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거듭나는 순간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태어났던 바로 그 수준으로 재창조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는 씨앗에서 시작하여 줄기와 열매로 성장하는 성화의 단계들이 빠져 있다.
거듭남을 통하여 최고의 거룩함에 도달한다는 가르침은, 구원이 거듭남(칭의)에서 완성된다는 기존의 신신학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주장 역시 화잇 부인의 다음과 같은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성화는 한순간이나 한 시간 혹은 하루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 가운데서 계속 자라나는 과정이다. 우리는 다음날의 투쟁이 얼마나 강할 것인지 모른다. 사단은 살아 있고, 활동적으로 일한다. 우리는 그를 저항할 힘을 얻고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열렬히 부르짖을 필요가 있다. 사단이 통치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굴복시켜야 할 자아가 있고, 극복해야 할 ‘빠지기 쉬운 죄’가 있을 것이며 정지할 곳은 없다. ‘이제 우리는 다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없다.”(재림교 성경 주석 7권, 947 -엘렌 G. 화잇 언급)
3. 거룩한 육체의 가르침과 무엇이 다른가?
A)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주장
저자는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의 본성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속으로부터 죄된 충동이 올라오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곧 중생한 사람에게는 세속과 종교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한 인격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중생한 인격뿐인 것입니다. 중생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그 중생의 생명이 나타내는 생태가 있을 뿐입니다. 그 생태가 바로 성경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 230)
“하나님께로 난 사람, 곧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공격을 받아 영생의 생명으로 생활하는 일에 상처를 입는다. 그것이 거듭난 사람들이 범하는 죄라고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스스로 죄를 선택하지 않는다. 즉, 자기 안에서 죄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죄가 공격할 때 그것을 미처 방어하지 못하여 죄가 들어오는 것이다.”(죄, 예수 그리고 구원, 212)
B) 문제점
1898년, 인디애나 주에서 오순절파식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거룩한 육체 운동”이라는 가르침을 재림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날 때 죄의 본성이 변화하기 때문에 속에서부터 더 이상 죄가 올라오지 않는다는 가르침이었다. 1898년에 일어난 거룩한 육체 운동의 주요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하기 이전의 죄 없는 인성과 거룩한 육체를 취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의 경험을 하였는데, 예수님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은 그분처럼 죄성이 없는 본성을 얻게 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육체를 가지게 된다.
화잇 부인은 “거룩한 육체 운동”을 지적하면서 은혜의 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거룩한 육체 운동”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드리는 축제식 예배가 재림교회 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축제식 예배가 크고 작은 모든 교회 속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는 지금, 우리는 재림교회 안에 “거룩한 육체 운동”과 유사한 가르침이 소개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거듭나는 순간 예수님처럼 본성이 변화되어 더 이상 속에서 나오는 죄가 없어진다는 가르침에 대해서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4. 거듭난 자의 죄와 거듭나지 않은 자의 죄는 다른가?
A)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주장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저자는 속에서부터 나오는 죄가 있고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죄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거듭난 사람 속에서는 죄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이제 밖에서 오는 죄만 해결하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모든 죄는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죄에 대해서 다시 놀랄 만한 설명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 곧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공격을 받아 영생의 생명으로 생활하는 일에 상처를 입는다. 그것이 거듭난 사람들이 범하는 죄라고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스스로 죄를 선택하지 않는다. 즉, 자기 안에서 죄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죄가 공격할 때 그것을 미처 방어하지 못하여 죄가 들어오는 것이다. … 가만히 있어도 죄의 먼지가 거듭난 사람에게 날아와 앉는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 212)
“마귀는 멀리서 불화살을 쏜다. 그리스도인은 이 불화살을 멀리서 막아야 한다. … 그러나 미처 막지 못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자주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죄이다. … 가만히 있어도 죄의 먼지가 거듭난 사람에게 날아와 앉는다. …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썩은 모습이 도덕적 죄들로 나타난다. 거듭난 사람들이 사단의 공격을 받아 입는 상처도 도덕적 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원인과 상태가 다른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썩지 않으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야 하지만 거듭난 사람들의 상처는 길르앗 의사에게 가면 그냥 치유되는 것이다.”(죄, 예수 그리고 구원, 214)
B) 문제점
두 사람이 같은 죄를 범했는데 한 사람은 정죄를 받고 다른 사람은 정죄 받지 않는다는 말인가? 거듭나지 않은 자가 음욕을 품으면 간음죄가 되어 지옥불의 정죄를 받지만, 거듭난 자가 멀리서 쏜 사단의 불화살에 맞아서 음욕을 품게 되면 그 죄는 정죄 받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저 치료를 받으면 되는 정죄 받지 않는 약한 죄가 된다는 말인가?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죄는 그 책임이 사단에게 있기 때문에 죄의 종류가 다르다는 말인가? 거듭나고 나서는 죄를 범하고 싶어서 범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쏜 화살에 맞아서 할 수 없이 범죄한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말인가?
다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단 한 계명을 범했거나 가장 작은 세목 하나를 범해도 율법을 범하는 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부 측 입장에서 그 죄에 대한 형벌을 집행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것이 죄가 될 것이다.”(재림교 성경 주석 7권, 951 -엘렌 화잇 언급)
“죄, 예수 그리고 구원”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거듭난 자는 속에서 올라오는 죄가 없다. 만일 거듭난 자의 죄는 오직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죄일 뿐이고, 죄의 종류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죄와는 다른 것이라면,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이 범한 죄들은 그로 하여금 구원을 잃어버리게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다음과 같은 화잇 부인의 말씀은 이 점에 있어서 오해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시기심, 악의, 악한 생각, 악한 말, 탐심,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이 불멸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성공적으로 경주하고자 할 경우, 반드시 버려야 할 무거운 짐들이다. 죄악으로 인도하고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모든 습관이나 행위는 어떠한 희생을 하더라도 반드시 버려야 한다. 영원한 의의 원칙들을 범하는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하늘의 축복은 함께할 수 없다. 마음속에 품은 한 가지 죄는 품성을 타락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에 넉넉하다.”(행적, 312)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는 죄를 덮는 가면이 아니다. 품성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제어함이 생애의 원칙이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전체를 바치는 것이며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원칙에 마음과 생애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소망, 555)
“그리스도의 의는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죄라도 가려 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마음속에서도 율법을 범하는 자가 될 수 있다.”(실물, 328)
그리스도인이 거듭난 이후에 범하는 죄들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면 또 하나의 오류로 접근하게 되는데 그것은 “Once Saved, Always Saved(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이다. 개신교회에서 인기리에 퍼진 이 가르침 역시 한 번 거듭남을 경험했던 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특별한 혜택을 주었기 때문에 생긴 오류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가 거짓말을 하면 죄가 되어 지옥불을 받고,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는 거짓말을 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는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공격을 받아 영생의 생명으로 생활하는 일에 상처를 입는다.”(죄, 예수 그리고 구원, 212)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 번 거듭나고 구원받으면 그 본성이 변화되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죄가 없다는 가르침은 백 년 전에 이미 “거룩한 육체 운동”을 통하여 재림교회에 소개된 적이 있는 오래된 오류이다. 또한, 거듭난 이후에 범하는 도덕적인 죄들은 구원과는 상관없으며 단지 치료를 받기만 하면 된다는 가르침 역시 재림교인들에게 새로운 복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일반 개신교회에서는 오래전부터 통용되던 매우 흔한 복음이다.
기존의 신신학은 예수를 믿고 중생할지라도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칭의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침으로써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바벨론의 복음 속으로 들어갔는데, 이 책의 저자는 밖에서 들어오는 죄들을 구원과는 상관없는 다른 종류의 죄들로 만듦으로써 “한 번 거듭나면 영원히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가르침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죄의 정의를 “의도적인 불순종”이 아닌 “태어난 상태”로 정의할 때, 결국에는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만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이 거듭나는 것이지, 본성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한 번 중생을 경험했을지라도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자아, 자기 속에 있는 죄된 본성과 매일 싸워나가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물론 우리의 노력과 행위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매일 성령의 은혜를 받고 그분의 내재 하심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6,27)
물론 우리의 모든 승리는 예수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에게는 죄와 싸워 승리하는 파워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자신을 주 앞에 굴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위로부터 받아야 한다. 거듭날 때에 우리의 죄의 본성이 없어진다는 가르침은 많은 사람을 혼돈 시켜 영원한 복음을 곡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5. 누가 하나님의 인을 받고 늦은 비 성령을 받는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복음 사업을 끝마치고자 부어 주시는 늦은 비는 누구에게 내리게 되는가? 누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고 마지막 환난을 위해서 준비될 것인가?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이 가르치는 새로운 종류의 복음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인을 맞고 늦은 비 성령을 받아서 온 세상의 복음 사업을 끝마치는 사명을 가진 144,000인을 준비시키기에는 너무나 부족함이 많다.
“개국 이래로 없던 환난이 미구에 우리에게 닥쳐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경험하고 있지 못한 것이면서 많은 사람이 얻기를 너무도 게을리 하고 있는 한 가지 경험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 … 그 환난의 때에 각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고 계시는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지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생각으로라도 유혹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으셨다. …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셨다. 그러므로 그분에게는 사단이 이용할 수 있는 죄가 전혀 없으셨다. 바로 이것이 환난의 때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상태이다.”(쟁투, 623)
이 인용 구절에서 “각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라는 문구가 마치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 의미는 예수님의 은혜로 꼴 지워지고 인 침을 받아 고정된 품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중보 사업이 마친 후에 성도들은 중보자 없이 거룩한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살게 될 것이다.”(살아, 403)
“인 치는 천사는 알고 있는 죄를 범하고 아는 의무를 게을리하는 어느 남녀나 아이 위에 하나님의 인을 치지 않을 것이다.”(1기별, 366)
“우리들 중 아무라도 우리 품성에 하나의 점이나 흠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더러움에서 영혼의 성전을 깨끗게 하기 위하여 우리 품성 가운데 결점을 고쳐야 할 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다음에 오순절 날 이른 비가 제자들에게 내렸던 것처럼 늦은 비가 우리에게 내리게 될 것이다.”(5증언, 214)
물론 이 말씀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의의 역사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매일 의의 소원을 심어 주셔야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분의 뜻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실물, 311)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남녀가 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몸부림치고 있는가? 우리는 그의 충만함을 구하여 우리 앞에 세워 놓은 그 목표, 즉 그리스도의 품성의 완전을 향하여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는가? 주님의 백성이 이 목표에 도달할 때, 그들은 그들의 이마에 인 침을 받게 될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될 것이요, 그때 기록하는 천사는 ‘다 이루었다.’라고 외칠 것이다.”(R&H, 1902, 6/6)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 편에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 늦은 비가 임하여 그들의 과오를 제거해 주고 그들의 잘못을 시정해 주기를 기다리고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서 육체와 정신의 모든 더러움을 제거하고 셋째 천사의 큰 외침에 가담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어 주기를 기대한다면, 그들은 부족함이 발견될 것을 나는 보았다. 유쾌함 또는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일, 곧 육체와 정신의 모든 더러움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중에 거룩함을 완성하는 일을 행함으로써 그것을 받을 준비를 갖춘 자들에게만 임하는 것이다.”(1증언, 619)
“만일 누구든지 진리를 순종하므로 순결해지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과 교만 그리고 악한 욕망들을 승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천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들은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그대로 두어라.’ 그리고는 그들의 정복하지 못한 악한 습성들과 함께 그들을 악한 천사들의 조정에 버려둔 채 다른 일을 위하여 떠날 것이다. 모든 점을 극복하고 모든 시험에 이기고 어떤 결과가 생기더라도 참된 증인의 권면에 따르고 극복한 자들이 늦은 비를 받고 변화되어 승천하기 위하여 준비될 것이다.”(1증언, 187)
6. 어떤 복음이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곳에서 불러내는가?
생애의 빛은 지난 20년 동안 “1950년대 이전의 복음”을 전파해 왔다. 그 복음은 하나님께서 재림교회를 마지막 남은 교회로 인 치셨을 때 화잇 부인과 선구자들에게 주신 복음이다. 재림교회가 백여 년 전에 받았던 그 복음을 가지고 일반 개신교회에 전파하자 개신교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깨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교회의 영원한 복음으로 당신의 백성을 불러내셨다. 만일 생애의 빛이 재림교회에서 주류를 차지해 가고 있는 1950년대 이후의 복음(신신학)을 전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바벨론 속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처럼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1950년대 이후의 복음(신신학)은 그들이 다니던 이전 교회에서 듣던 말씀과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다는 식의 복음, 그리고 거듭날 때에 본성이 바뀌기 때문에 거듭난 자의 죄들은 치료만 받으면 되므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식의 복음으로는 바벨론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낼 수 없다.
생애의 빛이 만나는 영혼들은 개신교회에서 뜨거운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죄를 미워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과 생애를 바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문제는 영혼불멸설이나 지옥과 같은 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지 마음에 알고 있는 죄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에 대해서 회의와 의심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오늘날 재림교회에서 인기 있는 신신학이나 “죄, 예수 그리고 구원”에서 소개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전한다면, 그들은 우리의 기별 속에서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고, 전혀 충격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생애의 빛은 마지막 남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분명한 차이점을 제시하였고 그렇게 했을 때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호소의 말씀
생애의 빛은 화잇 부인과 선구자들이 세워 놓은 1950년대 이전의 복음을 바벨론에 전파해서 놀라운 결과를 거두어 왔다.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아 왔다. 그러나 생애의 빛이 전하는 복음의 원산지인 재림교회 안에서는 이단 취급을 받고 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생기는가?
제2부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 재림교회 안에는 여전히 1950년대 이전의 옛 신앙을 전하는 설교자와 신학자와 지도자들이 재림교단의 인정 속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그중 어떤 분은 전 세계의 재림교인들을 교육하는 안교 교과를 집필하기도 한다. 미국의 재림교회에서는 생애의 빛과 같은 신학적 노선을 걷던 분들이 대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봉사하기도 했으며, 앤드류스와 PUC 신학교에서 교수로서 헌신하였고, 높은 행정자가 되어 그들의 생애를 바쳤다. 똑같은 복음이 미국 재림교회에 가면 재림교회의 보수로 인정받고 있는데 한국 교회에서는 이설로 거절당하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가?
왜 한국 재림교회에는 옛 신앙을 지키고 고수하는 지도자들의 음성을 듣기가 어려운가? 참된 재림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 만한 연로한 목회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재림교회에서 태어나고 삼육 교육을 받은 나이 든 장로들과 집사들이 축제 예배와 신신학을 말없이 따라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이런 일들이 생기고 있는가?
재림교회는 깊이 잠들어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이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성경과 예언의 신을 따를 것인가? 인기 있는 인간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재림교회가 남은 교회로서 확정될 때 하나님께서 남은 교회의 복음으로 인 치신 영원한 복음을 따라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여러 해 전에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저자는 교회지남에, 14만 4천이란 아담 때로부터 예수님 재림 때까지 구원 얻을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는 상징 언어라고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저자의 책에 쓴 내용의 복음대로라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예언의 신 영감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오류이다. 그것은 바벨론이 된 개신교회들의 가르침이다. 예언의 신은 14만 4천을 마지막 시대에 사는 참된 증인들로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하는 자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14만 4천은 모든 진리와 빛이 다 회복되고 깨닫게 된 상태에서, 다시 말해서 죄에 대한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을 통하여 모든 죄를 승리하며 계명을 지키는 경험을 보여 주는 증인들이다. 그들의 증거 때문에 하늘이나 이 땅 위에서 그 어느 누구도 반역이나 죄에 대한 핑계를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구속하시고 죄인들을 멸망시키시는 심판 사업에 대하여 온 우주는 더 이상 아무런 의혹을 품지 않게 될 것이다. 모두가 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예언의 신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사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가? 결정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이어지는 제4부 도표를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