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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대 제 35 호

예언의 신을 따라야 합니까? 사람을 따라야 합니까?

제2부 –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이 들여온 잘못된 복음

제1부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1950년대 중반 이후에 새로운 복음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옛 신앙을 일관성 있게 유지해 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리에 대한 질문들(QOD)”이 발간된 이후 새로운 복음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그 사건으로부터 다시 5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우리의 선조들이 세운 옛 신앙이 교회 안에서 오히려 이단이나 극단처럼 취급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혀 있는 돌을 빼 내고 오히려 주인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이 전하는 복음은 지금까지 재림교회에 존재해 온 신신학과는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른 점이 있지만, 그 결론은 기존의 신신학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 책 역시 1950년대 이전의 복음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가르침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신신학을 주장하던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반대를 받지 않은 채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이 말하는 복음의 줄거리와 그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죄의 정의

A)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주장

복음을 신학적으로 설명할 때 그 시작점은 죄에 대한 정의를 규정하는 것이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저자는 선악과를 먹어서 생긴 결과, 즉 사망이 된 상태를 죄로 규정하였다. 죄의 성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상태 그 자체가 죄이며, 죄 자체가 후손들에게 유전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죄는 도덕적 죄들이 아니다. 그렇게 남을 해롭게 하는 성질이 된 그것이 죄다.”(죄, 예수 그리고 구원, 44)
“예수 종교에서는 죄 문제를 말할 때 언제나 창세기 3장에 여자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는 죄라는 말이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 선악과를 먹으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하셨다. … 이런 사실에 의하여 생각하면 죄는 곧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다. 죄=사망이다. … 죄가 사망이라는 공식은 성경의 구원을 바르게 깨닫는 데 아주 중요하다.”(죄, 예수 그리고 구원, 46~47)

“이미 육체에 죄 자체가 있는데, 마음은 깨끗하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이해인가?”(죄, 예수 그리고 구원, 165)

B) 문제점

재림교회에서 신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이 책에서도 죄의 정의를 “상태”로 규정하였다.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로 생긴 상태인 “죽음” 또는 “사망”을 죄로 규정한 것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의도적인 불순종이었다. 1950년대 이전까지 재림교회가 가르쳐 온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의지력의 행사에 의한 불순종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이다.”(쟁투, 492)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사망으로 태어난 상태 자체가 죄가 아니다. 아담과 하와의 본성이 사망과 죽음이 된 것은 죄를 범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삯이 사망이지, 사망 자체, 곧 죄의 형질을 가진 자체가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함으로 의의 옷을 잃게 되었고 그 결과로 타락한 본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차이는 매우 작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신학적으로 설명할 때 죄의 정의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복음의 전개 과정과 결론이 크게 빗나가게 된다. 복음을 설명하는 첫 번째 단추인 죄의 정의가 이렇게 잘못 채워지자 두 번째 단추도 빗나가게 되었다.

2. 원죄설

A)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주장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사망(죄)이 되었고 그의 후손인 인류도 사망의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되고 만다는 것이 원죄에 대한 이 책의 주장이다.

“아담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될 그의 모든 후손도 아담과 함께 아담 안에서 죽어 버린 것입니다. … 이렇게 된 것을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원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갓난아기라도 죄인인 것입니다. 그가 도덕적으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 77 -죄, 예수 그리고 구원과 동일 저자)

B) 문제점

죄에 대한 정의가 상태로(죽음) 세워지면 그것은 바로 원죄라는 오류로 연결된다. 죄의 결과인 타락한 본성은 유전되지만 죄 자체는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1950년대 이전의 가르침이다. 죄는 빛을 받고 깨달음을 받은 이후에 오는 선택이라는 것이 재림교회의 가르침이었다.

“천사는 다시 말했다. 빛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등한히 하거나 거절하면 심판을 당하게 되고,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1증언, 1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겔 18:20)

한국 재림교회 안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면 원죄를 부인하는 극단으로 지목을 받지만, 미국 재림교회는 아직도 1950년대 이전의 복음을 고수하는 충성스러운 종들이 있다. 얼마 전에 대총회에서 발간한 안교 교과에서도 원죄에 대한 재림교회의 옛 신앙을 다음과 같이 다루었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범하는 ‘죄의 행동’과 우리가 지닌 ‘죄의 본성’을 구분하곤 한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패했으며, 심지어 죄를 짓기 전에도 죄인으로 간주한다. 유아 세례는 이러한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갓 태어난 아이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그 아이는 죄인이기 때문에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습은 전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죽은 아이가 멸망 당한다는 개념 또한 성경과 맞지 않다.”(2009년 제2기 안교 교과, 92페이지)

안교 교과 저자의 말처럼 원죄를 인정하면 그것은 곧바로 유아 세례라는 비성서적 관습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천주교회는 어거스틴의 가설 중의 하나인 원죄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아 세례를 교회에서 베풀기로 결정한 것이다. 원죄와 유아 세례는 신학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은 원죄를 부인했기 때문에 유아 세례의 관습을 거절했던 것이다. 오늘날 재림교회에서 원죄에 대한 어거스틴의 가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유아 세례의 관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인도한다.

생애의 빛에서 “우리는 원죄를 부인한다.”고 말했을 때, 많은 지도자가 생애의 빛을 이단으로 지목했는데 이번에 대총회에서 나온 안교 교과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진다. 한국 재림교회 지도자들이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생애의 빛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한국 재림교회에서는 1950년 중반 이후에 들어온 신신학의 음성이 크게 들려오지만, 미국 재림교회와 대총회에서는 아직도 옛 신앙(1950년대 이전의 복음)을 가르치는 종들의 음성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애의 빛과 같은 신학적 노선에서 옛 신앙을 전하는 종들 중에서 한국 재림교회에 알려진 분들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3. 로마서 5장 12절에 대한 해석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 말씀을, 한 사람이 범한 죄 때문에 인류 전체가 유황불의 정죄를 받는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해석해야만 하는가?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지목하면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사망”적 본성(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스스로 범죄하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사망”(정죄)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사실을 설명한 것이다.

2009년 제2기 안교 교과 저자도 이 말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남겼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최초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죄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되었다.”(2009년 제2기 안교 교과, 92페이지)

로마서 5장 12절에서 몇 절 내려가면 이 말씀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나온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여기에서 한국어 성경 번역은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 대신에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KJV 성경과 헬라어 원어는 “많은”이 아니라, “모든”이라는 단어로 기록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 있어서는 오히려 한국어 성경이 그 의미를 더 잘 전달해 주는 것 같다. 사도 바울이 말하려고 한 의미는,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각기 다 범죄하였으므로 정죄와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현재도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의의 능력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언제든지 그의 의로 모든 사람이 의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죄를 지은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다 각기 죄를 범하여 죽게 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의의 선물,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받아들이면 누구나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사람이 의와 생명의 선물을 받지 못하는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 의와 생명의 선물이 이미 와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 15절과 19절은 다음과 같이 정확한 포인트를 지적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many)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many)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many)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many)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5,19) 여기서는 KJV 성경과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 “많은”(many)이라는 뜻의 단어를 사용하였다. 만일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죄인 되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믿든지 안 믿든지 자동으로 다 의인 된다는 말인가? 믿지 않고 굴복하지 않는 악인들도 자동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심판받고 멸망 받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롭게 되는 일에는 “나의 선택”이라는 조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 때문에 자동으로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은 것이며, 인간이 아기로 태어나는 그 자체가 죄라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되는 말이 되는가? 자기가 각각 죄를 지어 사망에 이르고 자기가 각각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여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장에 나온 두 말씀 중에서 하나만을 택해서 원죄에 대한 증거로 삼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해석이다. 로마서 5장 12절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려면 뒤에 나오는 말씀들의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로마서 5장 전체에서 바울은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온 인류가 죄인이 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의 힘보다도 예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이 비록 사망적 본성(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를 말하려고 로마서 5장을 쓴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5장의 마지막 절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결론짓는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아담의 죄 때문에 온 인류가 지옥불의 정죄를 받고 태어난다고 가르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성경과 화잇 부인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균형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양심을 증거로 심판하실 것이다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율법 없는 이방인의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비록 이방인 가운데서도 친절한 정신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으며 생명의 말씀을 듣기 전이라도 그들은 선교인들을 도와주었으며, 저희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섬긴 자들이었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르고 섬긴 자들, 즉 인간의 도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였으나 자연을 통하여 저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율법이 요구하는 일들을 행하였다. 저들의 행위는 성령께서 저들의 마음을 감화시킨 증거이며 저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다.”(소망, 113)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을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실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무지와 타락 속에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오직 주인의 채찍밖에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짐승보다도 더 낮은 수준에 있는 노예들을 하늘에 데려가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동정심 많은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시는 반면에 그들의 주인들은 …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초기, 275)

4. 그리스도의 인성

A)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주장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죄, 예수 그리고 구원” 저자의 결론은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인성을 취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한 번 죽어야 할 존재로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첫째 사망)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타락한 그 자체가 사망이기 때문”에 “타락한 아담의 인성과 같다고 하면 이미 사망에” 속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예수님) 썩을 수 있는 상태(죽을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나지 않으신 것이다.”라고 말한다(죄, 예수 그리고 구원, 90~91, 110~112).

여기서 저자가 그분의 신성을 너무 강조하고 싶은 나머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 영생했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 것은 너무 앞서가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를 창세기 3:15에서부터 풀어나간다. “내가 너로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여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예수께서는 여자(마리아)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생명을 가지셨지만, 인류는 남자의 후손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사망으로 태어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여자(마리아)로부터 태어나는 그리스도의 인성에는 죄에 대해 연약한 성질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여자에게서 났지만, 남자의 씨가 여자에게 들어가서 아기가 되어 여자에게서 난 것이고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씨) 자체로 남자와 상관없이 여자에게서 나신 것이다. … 만일 그 탄생이 아담의 후손들의 태어나는 것과 동일하다면 그도 아담의 후손이요,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아담과 그의 후손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능력도 자격도 없는 것이다.”(죄, 예수 그리고 구원, 76~77)

저자는 예수께서 죄를 범할 수 없는 존재로 오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재림교회의 이해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면서 중생하셨다고 해도 그가 사람의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그 육체의 지체 안에 죄의 법이 있다고 우길는지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지체를 죄의 법에서 구원할 수 없다. … 참으로 (예수님의) 육체의 지체 안에 죄의 법이 있다면 우리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을 대신 지실 수가 없다.”(죄, 예수 그리고 구원, 90)

B) 문제점

죄를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고, 타락한 본성의 상태 또는 사망의 상태로 보는 사람마다 예수께서는 결코 타락한 인성을 취하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만들 뿐 아니라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잇 부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타락한 인성을 취하지 않으면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유혹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 아담은 아무런 죄의 영향을 받지 않았었다. 아담은 완전한 장년으로 몸과 마음에 충만한 활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에덴의 영광에 둘러싸여 있었고 날마다 하늘의 천사들과 교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단과 상대하시기 위하여 광야에 가셨을 때에는 그렇지 못했다. 4천 년간 인류는 체력과 정신적 능력 그리고 도덕적 가치가 퇴보되어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퇴보된 인류의 연약함을 취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만 그는 인류를 쇠퇴의 깊은 구렁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셨다.”(소망, 117)
“타락한 이래로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나타나신 그때까지 인류는 점점 그 몸집과 체력에 있어서 쇠퇴하였으며 도덕적 가치의 저울이 점점 밑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타락한 인류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인류가 처하여 있던 그 위치에 이르러야만 하였다. 주님께서는 인성을 쓰셨으며 인간의 유약성과 타락한 상태를 취하셨다.”(1기별, 268)

죄의 정의를 “타락한 본성” 또는 “사망”으로 정의할 때, 원죄라는 어거스틴의 가설을 받아들이게 되고 결과적으로 예수를 우리와 전혀 다른 인성을 취한 분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첫 번째 단추를 잘못 채운 결과 그것에 따라오는 단추들이 전부 잘못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저자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이 눈에 띄지만, 결론은 기존의 신신학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저자는 예수께서는 남자의 씨가 아니라 여자(마리아)의 씨로 태어났음을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리아도 그의 조상들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유전적으로 받았고 예수께서도 모친을 통하여 그것을 받았다는 것이 1950년대 이전의 재림교회 가르침이었다.

천주교회의 가르침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천주교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죄로 오염되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마리아 무염시태설이라는 오류를 세웠는데, 이 가르침은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임신하기 전에 기적적으로 죄의 오염이 없는 상태로 변화되면서 원죄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는 전혀 죄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무염시태설을 통하여 예수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에서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망이 된 남자의 씨를 받지 않고 여자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원죄로부터 벗어났으며 그리스도의 인성 또한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에서 천주교회의 가르침과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가르침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논리를 전개하는 과정이 매우 유사할 뿐 아니라 결론 또한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바벨론 교회에서 들어온 신신학을 따라가게 되면 재림교회 선구자들이 세워 놓은 복음과 싸우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예언의 신의 가르침을 허물어뜨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화잇 부인의 가르침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신신학을 끝까지 고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 역시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와 같으시나 죄는 없으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천사의 본성을 취한 것이 아니라”, 영어 KJV 성경 역)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오직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였음이라”, 영어 KJV 성경 역)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4-18)

화잇 부인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언급했던 이유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화잇 부인의 글을 살펴보면 거의 대다수의 경우에 인성 자체를 설명하기보다는 우리도 그분처럼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복음의 논리적 근거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언급하였다. 예수님의 인성과 그리스도인 승리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인성 자체가 무엇이었는가에 초점을 맞출 경우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에서 핵심을 놓치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주님의 인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 때문에 많은 잘못을 범한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인성에 사람이 사단과의 투쟁에서 가질 수 없는 그러한 능력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인성의 완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1기별, 139)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흑암의 권세로 말미암아 모든 생애의 단계에서 공격을 받으셨다. 주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이후에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시게 되었으며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다. 나에게 수많은 편지들이 왔는데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성정을 갖고 계시지 않았으며, 만약 인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지셨다면 그와 같은 시험들을 받을 때에 패배하셨을 것이므로 과연 그리스도께서 어떤 성정을 갖고 계셨는지 확증해 달라는 편지였다. 만약 주님께서 인성을 취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모본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인성의 참여자가 아니었다면 우리 인간이 시험을 당하는 것처럼 시험을 당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시험에 굴복하는 일이 가능치 않았다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자격으로 인간을 위하여 싸움을 싸우시려고 오셨다는 것은 하나의 엄숙한 진실이었다. 주님께서 당하신 시험과 쟁취하신 승리는 우리 인간이 모본이신 주님을 모방하여야 하며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1기별, 408)

“만일 우리가 예수께서 겪지 않으신 어떤 일을 겪어야 한다면 사단은 이 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에게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겪으셨다.”(소망, 24)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인류가 에덴동산을 떠나 4천 년 동안 유리방황하며 본래의 순결과 정직에서 떠난 그 인성을 친히 쓰셨다. 죄는 여러 세대를 통해서 인류에게 무서운 형적(形迹)을 남겨 놓았으며 신체적, 정신적 및 도덕적인 타락이 전 인류 세계에 편만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도우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을 그때에 존재했던 인류의 죄들과 유약성을 지닌 몸을 가지고 계셨다. 인류를 대신하여 타락한 인류의 약점들을 취하신 채 인간이 당해야 할 모든 점에 있어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셔야만 하였다.”(1기별, 267)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이 끼쳐 온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예수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소망, 49)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를 다룰 때 주의 사항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이나 완전하신 품성이 아니라 그분이 성육신 하실 때 취하신 ‘인성’에 한하여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없이 밝혀온 바이지만,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 안에 감추어진 바 된 것은 신비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베들레헴의 아기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딤전 3:16)신 하나님이다. 그는 우리에게 “나는(I AM) 선한 목자라.”, “나는(I AM) 산 떡이다.”, “내가(I AM)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호렙산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출 3:14)라고 말씀하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다룰 때에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은 우리처럼 ‘아담의 타락 후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럴지라도 우리와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사람들 간의 차이는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품성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에 대하여 다룰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이나 그분의 품성이 아니라 이 땅에 오실 때 취하셨던 인성에 한하여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올바로 이해하게 될 때, 주께서 시험받는 자들을 어떻게 능히 도우실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며(히 2:17),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어떻게 구원하실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히 7:25).

“그분께서는 육신적 마음의 성향이 얼마나 강한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시험을 받을 때마다 도와주실 것이다.”(5증언, 177) 이것은 하나님으로서 전지(全知)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경험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모형을 모방하고 닮는다고(resemble) 하더라도 우리가 그 모형과 똑같을(equal) 수는 없다.”(2증언, 549)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된 인성을 가지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희생 제물이 되어 죽으셨고(구속자), 우리의 모본으로 생애 하셨으며(모본자),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중보자) 하늘 가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그분은 인자로서 우리에게 순종의 모본을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순종할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당신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가질 수 없는 어떤 특성을 나타내시거나 어떤 능력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의 완전한 인성은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소망, 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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