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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대 제 32 호

엘리야들이 오고 있다!

현 경제 위기와 그 영적 의미

저자: 강명수 장로

2009년 에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해야만 할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금년에 무슨 경험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실까?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미국을 중심한 세계 경제가 거세게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신문 기사들은 금년에는 경제가 더 악화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세계 경제의 파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경제가 더 악화되어서 몰락하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거대한 규모의 천연 재해나 9/11과 같은 테러가 쓰러져 가는 경제를 덮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해 갈까? 세상은 성경 예언이 말하고 있는 지구 역사의 마지막 장면으로 신속하게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 경제 파탄은 짐승의 표 환난과 아마겟돈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만일 금년에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된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며 무슨 경험을 해야만 할까? 그리고 마지막 환난과 세계 경제 파탄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번 호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요한계시록 16장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을 살펴보아야 한다.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계 16:12-16)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은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 연구할 때, 구약 시대에 갈멜산에서 있었던 엘리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투쟁을 살펴본다. 왜 그런가? 구약 시대에 있었던 갈멜산에서의 투쟁은 마지막 시대의 아마겟돈 전쟁을 표상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세 더러운 영, 귀신의 영들이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모여든다고 하였는데,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고 불리는 곳은 어디인가? 아마겟돈은 헬라어로 “할 므깃도”인데 이것은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므깃도”란 어디를 말하는가? 므깃도란 갈멜산이 있는 지역을 뜻한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 신의 거짓 선지자들 사이에 대쟁투가 벌어졌었던 “갈멜산” 말이다. 사도 요한은 세상 끝에 있을 귀신의 영들과의 대쟁투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 시대에 갈멜산에서 있었던 엘리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투쟁을 끌어와서 사용했던 것이다.

사도 요한이 세상 끝에 있을 아마겟돈 전쟁을 설명하기 위해서 투쟁의 장소로 갈멜산을 언급한 이유는 구약 시대 갈멜산의 투쟁의 패턴이 마지막 시대의 아마겟돈 전쟁에서 그대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 패턴이 어떻게 반복되는가 살펴보도록 하자.
정치와 종교의 연합 : 구약 시대에 정치 세력인 아합 왕권과 이세벨을 중심으로 한 거짓 선지자들이 연합하여, 다시 말해서 정치와 종교가 연합하여 엘리야를 공격하였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도 사단의 거짓 종교 세력과 그들에게 미혹당한 세상 정권들이 연합하여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들을 향하여 핍박하는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이다.

투쟁의 결과 

구약 시대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투쟁했던 거짓 선지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의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사단의 대리자인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은 못에 던지우고” (계 19:20).

승천 

갈멜산의 투쟁에서 승리한 엘리야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했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하게 될 것이다.

갈멜산의 투쟁은 아마겟돈 전쟁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 준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엘리야의 경험과 믿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갈멜산에서 승리한 엘리야는 하루 아침에 갑자기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어느 날 갑자기 갈멜산 위에 데려다 놓고 사단의 무리들과 대결시킨 것이 아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의 전쟁에서 하나님 쪽의 대리인으로 나서기까지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련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하였다. 우리는 이번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갈멜산의 투쟁을 위하여 엘리야를 준비시켜 가는 과정에 대해서 깊이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엘리야의 믿음과 신앙을 연구할 때 유의해야 할 것은 엘리야의 생애를 둘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떤 신앙을 가졌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알아야 우리도 마지막 시대에 엘리야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엘리야를 부르셨을까? 그 당시 바알 신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이 오직 엘리야 한 사람뿐이었는가? 아니다. 엘리야 외에도 7천의 의인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야만 누가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로서 부르심을 받게 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신 후에 바로 갈멜산으로 보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갈멜산의 투쟁을 위해서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갈멜산의 투쟁을 위해서 엘리야를 하나님의 훈련 학교에 입학시키셨다. 부르심을 받은 이후의 엘리야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훈련을 받았고 영적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해야 우리도 마지막 시대의 갈멜산, 즉 아마겟돈 전쟁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부르심을 받기 전의 엘리야

엘리야가 부르심을 받기 전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아야 마지막 시대에 어떤 사람이 엘리야로 부르심을 받을 것인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엘리야를 이렇게 설명한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 (왕상 17:1). 매우 짧은 설명이다. 엘리야는 길르앗에 우거하던 사람이었다. 우거하는 사람이 마지막 시대에 엘리야로 부르심을 받게 된다.

그런데 “우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아무 것도 안하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은둔하며 산다는 뜻인가? 선지자와 왕은 엘리야의 우거 상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합의 시대에 요단강 동편 길르앗 산중에 신앙과 기도의 사람이 살았는데 그의 두려워할 줄 모르는 봉사는 이스라엘 중에 신속히 퍼지는 배도를 막도록 되어 있었다. 이름 있는 도시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평생 높은 지위를 차지한 일이 없는 디셉 사람 엘리야는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였다. 엘리야는 그들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완전히 멸하실 정도로 악을 행하게 되기 전에 회개하는 것을 보기를 갈망하였다. … 엘리야는 주의 사자가 되고자 애쓰지 않았다.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다.” (선지, 119, 120)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의 엘리야의 삶을 보면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조용히 산중에 우거했다.
2) 이스라엘의 개혁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탄원했다.
3) 이스라엘 교회의 죄와 배도를 막기 위해서 두려움 없이 광야의 소리로 봉사했다.

엘리야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선택하셨던 것이다. 세상 끝이 되어 엘리야들이 나타나야 할 때가 되었지만, 잘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과 교회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 교회의 죄와 배도를 지적하며 탄원하지 않는 사람들, 두려움 없는 광야의 소리로 봉사하지 않는 교회의 지도자들 때문에 재림교회 속에서 엘리야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믿음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갈멜산을 위해서 준비된 것은 아니다. “우거하고” 있는 상태가 갈멜산의 투쟁을 위한 준비의 끝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아합 왕에게 보내지도 않을 것이고 그릿 시냇가와 까마귀의 경험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시골에 살고, 곧바른 증언을 믿으며, 교회의 죄와 배도를 지적하고, 부흥과 개혁의 기별을 전하는 것이 마지막 시대의 아마겟돈 전쟁을 위한 준비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엘리야를 불러내어 다음에 이어지는 세 가지 경험들을 주시면서 아마겟돈을 위해서 준비시켜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겟돈 전쟁 준비를 위한 4가지 경험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마지막 시대에 엘리야로 부르심을 받는가를 살펴 보았으니, 이제는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에 극심한 가뭄을 주셨으며 엘리야는 그것을 통하여 어떤 훈련과 경험을 갖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이 문제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온 세상에 경제 파탄이 온 이유를 엿볼 수 있게 된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상 17:1). 첫 번째 훈련 과정은 왕궁에 들어가서 아합 왕에게 “수년 동안 우로(비와 이슬)가”없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비와 이슬이 이스라엘 땅에 내리지 않게 하는 재난을 주셨을까? 출애굽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비옥한 땅을 허락하셨다. 그들은 거기서 비옥한 땅과 풍부한 비로 인하여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바알 신에게 돌리고 말았다. “바알의 예배자들은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비가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요 자연을 지배하는 세력들에게서 오는 것이며, 땅을 비옥하게 하고 풍성한 수확을 가져오게 하는 것을 태양의 창조적인 힘을 통하여 온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가 더럽혀진 이 땅에 무겁게 내려야 하였다. 배도한 이스라엘 지파들은 현세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바알의 능력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나타냈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모든 축복의 근원으로 인정하기까지는 땅에 이슬이나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었다.”(선지, 120)

하나님께서는 누가 이스라엘을 위한 축복의 근원인지를 밝히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갈멜산의 투쟁이 있기 전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고 의지하는 풍요로움을 말리셨다. 마지막 시대에도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온 세상 사람들이 축복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마르게 된다. 엘리야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 신을 섬겼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의 사람들은 돈의 신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근원이 돈의 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지금 온 세상의 돈 줄기를 말리고 계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계 경제 파탄이 오게 된 이유이다.

첫 번째 경험 : 순종

아합 왕에게 기별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엘리야가 어떻게 하였는가? 즉시로 순종하였다. 사람들은 “엘리야의 능력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라고 의아해 한다. 그의 능력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에서 나온 것이다. 엘리야는 아합 왕의 호위 부대를 생각하지 않았다.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무엇이 능력있는 삶의 비결이었는가? 그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라는 말로써 믿음을 순종으로 옮겼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자마다 그분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순종을 하게 된다.

때때로 힘겹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의 도전을 받게 될 때, 가장 큰 시험은 내 꾀와 인간적인 아이디어로 고난을 피하고 싶은 유혹이다. 그 결과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도전을 피해 다닌다. 그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훈련 학교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순종하지 않기 위해서 핑계를 대면서 피해 다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훈련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아합 왕 앞에 보내고, 말라 가는 그릿 시냇가에 보내며, 까마귀를 기다리라고 명하겠고, 가난한 사르밧 과부에게 가서 먹을 것을 요구하라고 보내겠는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노독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훈련 학교에 들어갔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남으로써 믿음과 신앙을 온전하게 하는 길을 걷게 되었고,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물 위를 걷다가 빠지는 실패를 경험했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배우는 가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실패가 두려워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교훈을 배울 수 없게 된다.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쓰다가 실패할지라도 그 사람의 영적 생애는 성장하게 된다.

하나님의 훈련 학교에 입학하는 유일한 조건은 순종이다. 이유를 잘 모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그 다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신앙과 경험이 엘리야가 부르심을 받은 이후 첫 번째로 한 경험이고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을 위하여 준비하는 첫 번째 경험이다.

두 번째 경험 : 숨는 경험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왕상 17:2-4)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숨는 경험을 주셨다. 아합 왕에서 강력한 기별을 전한 엘리야로 하여금 북방 이스라엘 제사장들을 모아 놓고 우로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기별을 전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엘리야가 아합 왕 앞에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기별을 전했다는 소문이 온 이스라엘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을마다 모여서 저마다 엘리야의 용기와 경고의 기별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시골에서 조용히 우거하며 살아 온 엘리야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 되었을 것이다. 준비가 안 된 사람이 갑자기 스포트라이트(spotlight, 집중 조명)를 받으면 이상하게 변한다. 연예인들 중에서 미성숙한 사람이 갑자기 유명해지면 이상하게 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연약한 본성을 아셨고 그래서 그를 그릿 시냇가로 숨기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겸손하지 않은 종들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 숨는 경험을 해야 한다.

-노아는 세계적인 홍수에서 자신의 가족만 살아남는 드라마틱한 구원을 경험했다. 환상적인 스포트라이트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 안에 숨는 비결을 배우지 못함으로써 무슨 시험에 빠졌는가? 술에 만취하여 수치를 당하고 말았다.

-롯, 소돔과 고모라에서 모두 불타 죽는데 롯은 천사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는 경험을 하였다. 강렬한 스포트라이트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 안에 숨는 비결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쓰러졌는가? 자신의 딸과 수치스러운 죄에 빠졌다.

-미리암,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모세를 도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스포트라이트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 안에 숨는 비결을 배우지 못함으로 어떤 비극을 당했는가? 질투의 시험에 빠져서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

-베드로,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였다. 스포트라이트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숨는 비결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물에 빠지고 말았다.
하나님 안에 숨는 비결을 터득한 그리스도인만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세 번째 경험 : 시냇물이 완전히 마르는 경험

a. 그릿 시냇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숨겨 놓으신 다음에 어떤 훈련을 시키셨는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왕상 17:2-4)

만약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러한 명령을 받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은가? 엘리야의 마음속에 순간적으로 고민이 스쳐 지나갔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수년 동안 우로가 없겠다고 했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약속해 주신 것은 아주 작은 시냇물과 유대 지방에서 가장 작은 새 중의 하나를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매우 불안한 약속이다. 그릿 시냇가는 얼마 가지 않아서 말라 버릴 작은 시내였다. 물이 콸콸 흐르는 시내가 아니었다. 나일강처럼 폭이 넓고 수량이 풍부한 강이 아니다. 엘리야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순종하였다. “엘리야는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라고 묻지 말라. 엘리야의 능력은 단순한 순종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유를 묻지 않고 순종한 것이다.

b. 까마귀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왕상 17:4)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를 통하여 우리를 육적, 영적 필요를 채워 주실 때 때때로 그것은 까마귀의 모양을 하고서 나타난다. 시커먼 까마귀가 아니라 성령을 상징하는 햐얀 비둘기의 모습을 하고서 나타나면 믿음과 신뢰가 갈텐데 그렇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할 때 그것은 검은 색으로 임한다. 이단이라는 포장을 하고서 나타나고 극단이라는 소문과 함께 나타난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이상한 모습을 한 까마귀들이 나타날 때가 가끔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과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것들을 거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투쟁의 길에서 낙오하게 된다. 마지막 시대는 기만의 시대이다. 충성이 배도로 취급되고 배도가 사랑과 충성으로 비추어진다. 철저한 순종이 율법주의로 인식되고 자유주의 복음이 십자가 중심의 참된 복음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지금이다.

까마귀에 대해서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점은 까마귀의 주둥이가 매우 작다는 점이다. 까마귀가 얼마나 많이 먹을 것을 물고 올 수 있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한꺼 번에 많이 나를 수 있는 독수리나 주둥이가 큰 펠리컨 같은 새를 사용하지 않고, 까마귀같이 작은 새를 시켜서 먹을 것을 배달하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독수리에게 명하셨다면 독수리는 크고 날카로운 발로 토끼를 웅켜 잡고 두 날개 사이의 넓은 등 위에 떡 광주리를 이고 날아올 수 있었을텐데 왜 작은 새에게 명하셨을까? 왜냐하면 그것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먹이고 입히시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보내 주신 일용할 양식은 작은 시냇물과 아침 저녁으로 까마귀가 물고 올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이었다면, 오늘날 나와 우리 가족에게 날마다 공급되어야 할 일용할 양식의 양은 얼마나 될까? 아주 작은 시냇가와 까마귀가 물고 올 정도의 식량,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종들에게 약속하신 보장인데, 우리는 너무나 크고 높은 것들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가?

“하루하루.”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공식이다. 우리의 믿음을 키워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이다. 내일 일은 주께 맡기고 날마다 보내 주시는 까마귀를 기다리면서 사는 것, 이것이 마지막 시대의 갈멜산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경험이다. 바람이 불고 날이 너무 더워서 작은 새들이 날기 어려운 날에 엘리야의 믿음은 시련을 받았을 것이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어떤 상황에서도 까마귀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였다. 크고 힘이 센 새를 사용하시면 엘리야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새를 믿게 되었을 것이다. 엘리야가 까마귀를 기다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도우심을 기다리는 방법을 배우도록 섭리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혜였다.

어떤 인간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도록 훈련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선택하셨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여러분은 까마귀를 기다리는가? 아니면 까마귀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는가? 이것이 아마겟돈에 가기 전에 하나님의 종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다.

c. 시냇물이 말라갈 때 배우는 교훈

금년에 온 세계 경제가 정말 힘들어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마지막 시대의 갈멜산의 투쟁에 참가하기 전에 시냇물이 마르고 까마귀가 날라와 먹이는 경험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가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갈멜산의 투쟁을 위하여 온 이스라엘을 말리셨던 것처럼, 아마겟돈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지금 온 세상의 돈 줄기를 말리고 계신 것이다. 시냇물이 마르고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가 원해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경험을 통과하도록 인도되는 것이다.

그릿 시냇물은 엘리야가 예측했던 대로 얼마 안 가서 말라 가기 시작하였다. 점점 말라만 가는 시냇물을 보면서 엘리야의 믿음은 시련을 받았을까? 그렇다! 그때는 정말 강렬한 시험을 받게 된다. 물이 풍부한 곳을 찾아가고 싶은 유혹을 깊숙이서부터 느꼈을 것이다. 여러분은 말라 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면서 살아 본 적이 있는가? 시골 생활을 시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의지하는 시냇물이 말라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특별한 기술도 없는데 가지고 온 돈이 말라 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떤 때는 몸이 아파서 일을 못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나의 시냇물이 말라 간 경험이었다.

부르심을 받기 전에 엘리야가 우거해서 살 때는 “내가 먹을 것은 내가 책임진다.”는 사상으로 농사지으며 살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생각이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비는 언제나 풍요한 수확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바싹 말라 가는 그릿 시냇가 옆에서 엘리야는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 수 없었다. 하나님이 주셔야만 먹고 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로를 끊으시면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자기가 잘나서 돈을 벌고 사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시냇물을 말리시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업이 도산해서 직업을 잃어버리고 은행이 파산하고 살던 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지금이야말로 날마다 까마귀가 물어 주는 것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 세계 경제 파탄,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며, 지혜이며, 동시에 은혜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아마겟돈을 위해서 준비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지금은 비록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짐승의 표 환난이 오고 아마겟돈 전쟁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될 때, 우리는 지금 통과하면서 배운 경험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시냇물이 말라 가는 것을 보면서 믿음의 시련을 받았지만, 엘리야는 보따리를 싸지 않았다. 물이 풍부하게 흐르는 요단강 쪽으로 가지 않았으며, 무엇을 억지로 만들어 보려고 애쓰지 않았다. 엘리야의 믿음이 극렬하게 시련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명하신 그 장소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는 믿음 말이다.

시냇물이 어느 정도 말랐을 때 또 다른 길이 열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릿 시냇가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 또 다른 물줄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을 따를 때 우리의 시냇물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대책이 세워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할 때라도 여전히 날아오는 까마귀를 기대하면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엘리야가 갈멜산에 가기 전에 배웠던 믿음이다.

d. 왜 시냇물은 말랐을까?

시냇물이 마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로 엘리야를 인도하신 것은 데에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을 좀더 깊이 만나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마귀의 세 더러운 영들, 귀신의 영들과 전쟁하는 아마겟돈 전쟁에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야만 한다. 하나님을 가볍고 엷게 만나는 그리스도인들은 폭풍과 시련이 올 때 길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냇물이 마르고 까마귀가 날라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는 경험은 한 번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환경과 여건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에 의해서 우리의 필요가 항상 채워진다는 것을 배우는 데에는 여러 해가 걸릴 수도 있다. 폭풍이 불어도 까마귀가 날아올 수 있고, 눈이 내려도 까마귀가 날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것은 우리의 생애 속에서 반복적으로 배워야 하는 훈련 과정이다. 좀더 높고, 좀더 깊은 경험을 통하여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e. 상반된 경험

하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상반된 경험을 하게 된다. 한편에서는 시냇물이 말라 가는 것을 보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고 날아오는 것을 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한쪽에서는 내가 의지하고 있던 것이 말라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까마귀에 의해서 필요가 채워진다. 한쪽에서는 고난이 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도우심이 찾아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 코스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서 시냇물도 마르고 까마귀도 날아오지 않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지금 여러분의 시냇물이 말라 가고 있는가? 지금 하나님께서 명하신 까마귀가 어디선가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외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번제로 드릴 양을 준비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시냇물이 마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준비되어 있었다.

-야곱은 얍복강 앞에서 에서가 자신과 가족들을 죽이기 위해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곱의 시냇물이 말라 갔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에서의 마음을 부드럽게 변화시켜 주시는 역사를 이루고 계셨다.

-요셉, 형제들 때문에 노예 상인에게 팔려 가고 주인의 집에서 충성을 다했지만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갔다. 왜 요셉의 시냇물은 계속해서 말라만 갔는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반드시 까마귀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요셉은 애굽의 최고 자리에 올랐다.

-성경의 선지자들, 왜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훌륭한 선지자들의 시냇물이 말랐는가? 곧바른 진리를 선포하고 교회의 배도와 죄를 지적했을 때, 그들의 시냇물은 즉시로 말라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단한 생애 속에서도 꾸준하게 까마귀를 보내 주셨다. 시냇물은 바싹 말라 갔지만 까마귀가 여전히 날아오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믿음을 배웠고 실망과 좌절을 극복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 왜 바울의 시냇물은 말라 갔는가? 왜 그는 3번이나 길에서 맞아 죽을 뻔했으며 그가 탄 배는 난파하였고 배고픔과 목마른 시련을 당했는가? 왜냐하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까마귀는 반드시 날아온다는 믿음을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침례 요한, 왜 그의 시냇물이 완전히 말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까마귀는 날아오지 않았는가? 부당하게 투옥당해서 목이 잘려 죽을 때까지 왜 예수께서는 그를 구출해 주지 않았는가? 침례 요한에게 까마귀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날라왔다. 감옥 속에서 믿음의 시련을 받고 있는 요한에게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내주셨다.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 7:22-23).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침례 요한에게 있어서 분명한 까마귀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 기별을 요한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요한은‘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 전파하여’(사 61:1,2)라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상기하였다.”(소망, 217)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우리의 시냇물이 말라 갈 때에는 어디선가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까마귀가 날아오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당신을 따르는 종들에게 그런 방법으로 역사해 오셨다. 까마귀가 날아오는 시점과 타이밍은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용히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하다.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시냇물이 바닥을 드러내며 완전히 마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까마귀가 날아오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내곁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이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들이다. 그들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고 살아서 승천하게 될 것이다.

f. 알곡과 가라지

그릿 시냇물과 까마귀 이야기는 알곡과 가라지 이야기이다. 시냇물이 흐를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다가 물이 말라가기 시작하면 금새 조급해져서 불안해 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갈멜산으로 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까마귀가 눈에 보여야만 믿음이 유지되는 사람도 아마겟돈 전쟁에서 하나님의 편에 서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완전히 말라 버린 시냇가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을 붙들고 서서 선(善)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삼고 사는 자들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어떤 사람은 시련과 환난을 통과하면서 잘 익은 알곡으로 익어가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똑같은 시련과 환난을 통과하면서 불평과 원망을 토해 내는 가라지로 변모해 가게 된다. 평안할 때는 우리의 성품과 신앙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게 된다. “그분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는 경험을 배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과 같은 경제 위기를 허락하신 것이다(욥기 13:15, 한글 킹 제임스 성경).

네 번째 경험 : 사르밧 과부

디셉에 우거하고 있을 때의 엘리야는 자기 먹을 것을 자신이 만들며 살았지만 그릿 시냇가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먹는 훈련을 배웠다. 그러나 이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가서 그동안 자신이 배운 신앙과 믿음을 나누어 주는 경험을 배우게 된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왕상 17:8-9). 시돈은 이세벨의 고향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엘리야에게 이세벨의 고향으로 가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그곳은 이세벨의 일가친척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시돈에 속한 사르밧”은 이세벨을 위한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 있는 곳이다. 이세벨이 지금 엘리야를 죽이기 위해서 백방으로 찾아다니고 있는데, 이세벨의 고향으로 가서 과부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엘리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뿐 아니라 오랫동안 우로가 없어서 온 땅이 말라 있는 때에 가장 가난한 과부에게 가서 먹을 것을 부탁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엘리야는 순종했는가? 순종하였다. 이것이 엘리야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이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 이것이 마지막 시대의 갈멜산 투쟁에 가기 전에 소유해야 할 경험이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간 것은 얻어 먹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다. 자신이 배운 믿음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간 것이다. 엘리야가 전한 기별은 마지막 남은 한 웅큼의 밀가루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별은 사르밧 과부에게 “네가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가?”라는 도전으로써 던진 것이다.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 속에 있는 여인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떡 한 조각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여인의 신앙을 시험하는 최고의 경험이 되었다.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왕상 17:11-12)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였다. 우리가 마지막 시대에 전해야 할 세 천사의 기별도 이런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복음이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만드는 복음이어야 한다. 엘리야가 전한 기별은 단순한 가르침과 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냇물이 바짝 말라 가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까마귀가 날아온다는 복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가 배운 동일한 믿음을 가르쳐 주기 원하였던 것이다. 교리의 전파는 교리에서 끝난다. 성서적 교리 속에 우리가 깊이 만난 하나님의 능력이 새겨져 있을 때, 그것은 드디어 세 천사의 기별이 되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능력이 될 것이다.

준비된 자들의 영광

엘리야가 받았던 훈련 과정들을 우리도 무사히 마치고 나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마겟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대표자들이 되서 마귀의 영들과 싸우게 될 것이다. 거짓 기적과 귀신의 미혹을 완전히 압도할 만한 능력으로 싸우게 될 것이다. 말라 버린 시냇가와 까마귀와 사르밧 과부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믿음 때문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엄청한 이적의 현시도 우리에게는 하찮은 마귀의 장난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구약 시대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었고, 거짓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였다. 마지막 시대에도 아마겟돈 전쟁에서 하나님의 종들은 승리를 거둘 것이며, 마귀의 영에 속한 거짓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계 19:20). 엘리야가 승리하고 하늘로 승천했던 것처럼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하나님의 백성들도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 하늘로 승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다. 우리 모두 온 세상을 강타하고 있는 경제 파탄의 위기 속에서 엘리야의 경험을 하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