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세대 제 28 호
성경적 완전에 대한 이해
저자: 강병국 목사
재림 교회의 교역자들의 복음 사상이 옛날과 달리 많이 변해온 것 같다. 왜 그러할까? 과거 재림교회가 정통 사상이라고 믿어 오던 구속에 대한 이해와 영원한 복음에 대한 이해가 놀라우리만큼 변화되어 있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많은 경우에 교역자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물론 알고서도 자신의 편리대로 진리를 거부한 경우들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그렇게 훈련 받고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교역자들은 원래 재림교회의 올바른 가르침을 한번도 제대로 들어 보지도 못한 채 새로운 사상으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종종 요즈음 한국에서나 미국에서 출판되는 책자들이나 녹음된 설교들을 들어보노라면 정말로 이상할 정도로 달라졌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그 예를 들자면 많다. 그러한 이슈들을 열거하자면 또 다시 두꺼운 한 권의 책을 써야 할 것 같다. 미국에 있는 한 재림교회의 대학 신학과장은 공공연하게 예언의 신의 권위를 비판하는 한편, 교황권이 너무나도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일요일 휴업령은 조건적인 예언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 지구의 역사가 수 백만 년 되었을지 모른다는 언급까지 서슴지 않는다. 참으로 많이 달라져도 너무나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쉽게 칭의를 얻게 만드는 값싼 복음의 가르침이 이제는 재림 교회 안에서도 낯설지 않게 가르쳐 지고 있는 실정인 것을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벨론 교회에서 시도해 온 축제식 예배 형식은 불길처럼 번져 가고 있는데도 오히려 현대 재림 교인들은 그것을 진보라고 부른다. 참 성령의 역사가 부재한 곳에 인간적인 감정을 유발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예배 형식을 마치 개량되고 발전된, 특히 젊은 이들을 사로잡는 예배 형식이라고 설명들을 한다. 최근 미주 교회지남에는 여자 목사 안수에 대한 문제를 아무 일도 아닌 듯 아주 자연스럽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성품의 완전에 대한 예언의 신의 가르침을 경시하는 태도들이 완연하며 완전이란 단어 자체를 싫어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성품의 완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생겨난 것 같다. 적어도 재림 교회 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성소 사업을 이해했기에 생겨난 교회 안에서 말이다.
최근 미주 교회지남 5월호의 권두언을 읽으면서 필자는 의아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 글은 요한 웨슬리가 편벽된 완전주의자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웨슬리 목사의 완전에 대한 신앙을 완벽주의 사상, 즉 극단적이고 뒤틀어진 복음의 이해였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러한 사상이 재림교회 안에 들어 오게 되었을까? 이 글을 쓴 목사님은 경건한 분이요 말씀을 잘 가르치는 존경 받는 분이라고 필자는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상이 현존하는 많은 재림교회의 교역자들의 생각과 동일하다는데 있다. 품성의 완전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편견, 온전한 죄의 승리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 예수님의 승리가 죄인들에게도 가능하다는 예언의 신의 말씀을 극단적으로 보는 시선 등등 말이다. 필경 이것은 본인들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사상을 가르침 받고 계속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미주 교회지남의 권두언은 요한 웨슬리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세 명의 대표적 인물은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그리고 조지 휫필드였다. 조지 휫필드는 칼빈주의자였기 때문에 완전주의적 사상이 없었다. 존의 아우인 찰스는 수천 개의 찬미를 작시한 사람인데, 그는 훌륭한 신자가 죽은 후에야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존 웨슬리는 죄 없는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존 웨슬리는 사람이 ‘하늘 아버지의 온전(완전)하심과 같이 온전(완전)하게’ 될 수 있으며, 사람이 하나님의 영의 작용에 자신을 더욱 많이 굴복시킬수록 단계별로 그런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의 동료인 존 플레처가 그런 완전에 도달한 표본이라고 주장하였다. 플레처는 그 칭찬에 대하여 매우 겸손하게 반응하였지만, 1760년 오틀리의 어떤 감리회원들은 완전에 도달하였다고 스스로 주장하였다. 존 웨슬리는 그들을 개인적으로 조사하였으며, 그들의 주장을 기쁘게 인정하였고, 그러한 ‘성화’(sanctification)는 그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의 표라고 생각하였다. 1761년 3월 런던의 감리회원들 중에서만 한 주일에 30명씩 완전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완전을 주장한 사람들은 죄의 본성을 극복했다고 느꼈다. 완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많이 드러나자 존 웨슬리는 죄가 마음에 들어가면 완전의 생애를 잃는다고 주의를 주었다. (Gary Best, Charles Wesley, 2007, 258-260)
존 웨슬리의 결점투성이의 완전주의는 재림교회 안에도 그 유산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 안에서 완전을 추구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완전 바로 곁에는 불완전이 도사리고 있다. 참된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은 옆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플레처처럼 나의 완전은 나의 불완전을 보는 것이며, 나의 소망은 하나님을 온 몸과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라는 태도가 완전주의자가 가져야 할 자세이다.” (미주 교회 지남 5월호 권두언)
이러한 평가는 웨슬리 형제를 출교하고 그들을 “Methodists” (방법론자들 – 즉, 구원을 이미 받았는데 왜 또 다시 성화의 문제를 구원에 결부시키는 새로운 방법론을 끌어 들이느냐고 조롱하며 놀리는 말로 불렀던 단어) 라고 불렀던 영국 국교(장로 교회의 전신)의 편견과 오해이었다. 웨슬리 형제들의 가르침을 완벽주의로 평가하고, 웨슬리 파들이 자신들은 완전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고 오해하며 비웃던 사람들은 그들을 출교했던 장로교회 사람들이었다. 재림교회의 평가가 아니다. 완전과 완전주의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모든 죄를 승리하는 생애가 가능하다고 믿는, 즉 완전의 가능성을 믿는 자였다. 완전해 져야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적인 완전주의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루터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가르침의 토대 위에 더 성숙하고 온전한 성화의 진리를 확립해 준 사람이 웨슬리였다.
그리고 한가지, 교회지남 권두언의 저자가 인용한, 웨슬리 형제들에 대하여 책을 저술한, Gary Best 씨는 신학자가 아니라, 사회 역사가이다. 그는 영적으로 완전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하나님의 의의 표준과 요한 웨슬리가 말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경험이 무엇인지 조차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의 글을 인용하여 웨슬리의 완전론을 극단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Best 씨는 과거 웨슬리를 출교한 장로교회의 폄론을 인용한 것이다. 필자는 교회지남의 저자를 비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의 실례를 들어 현재 재림교회의 교역자들의 생각을 짚어보자는 것이다. 그 글이 현재 재림 교회의 교역자들의 주류의 사상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언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잘못은 교육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다른 교단에서 교육을 받고 학위를 받아 온 많은 교수들이 재림교회의 교역자들을 오래 동안 가르치고 훈련시켜 온 결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바벨론의 사상이 남모르는 사이에 우리들 속으로 깊이 스며 들어왔다. 지성소의 경험을 강조하던 재림교회가 과거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의 신학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예언의 신이 가르치고 있는 완전에 대한 말씀과 개인의 노력과 굴복을 강조하는 말씀들에 대하여 은근히 격하시키려고 애를 쓰며, 또한 그러한 말씀들은 옛날 시대의 극단적이며 율법적인 견해로 인식시키려는 경향들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예언의 신은 웨슬리에 대하여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혹 많은 분들이 전혀 읽어 보지 못했거나, 읽었다고 해도 시간이 많이 지나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대쟁투에서 말씀한 화잇 여사의 요한 웨슬리와 그의 가르침에 대한 글을 다시 한번 읽고 확인해 보도록 하자.
웨슬리 형제
“그로부터 백년 후, 곧 영적 암흑 시대에 휫필드(Whitefield)와 웨슬리(Wesley) 형제는 하나님의 빛을 전하는 사람들로 나타났다. 당시의 영국 사람들은 국교회(國敎會)의 통제 아래 이교도와 거의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적으로 쇠퇴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성직자는 자연 종교를 즐겨 연구하였으므로 그들의 대부분의 신학은 그런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상류 계급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냉소하였고, 소위 그들이 광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위에 있다고 자랑하였다. 하류 계급은 심한 무지 상태에서 부도덕에 빠져 있었다. 그와 반면에 교회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진리의 사업을 지탱할 힘이나 믿음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루터가 그렇게도 분명히 가르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는 이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로마교의 교리가 그 대신 자리를 차지하였다. 국교회의 교인이었던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찾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경건한 생활과 종교적 의식을 모두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은 참된 종교는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은 말과 행동에는 물론이요, 생각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외부에 나타나는 행위의 바름뿐 아니라 마음의 성결이 또한 필요한 것을 확신하였으므로 새 생애에 들어가기를 힘썼다. 그들은 가장 근면하고 경건한 노력으로 그들의 육신적 마음의 사악함을 극복하고자 애를 썼다. 그들은 극기와 박애와 겸비의 생애를 살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게 해주는 성결, 곧 그들의 가장 열망하는 것을 얻는 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방법을 매우 엄밀하고 정확하게 준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였다. 정죄의 상태에서 놓여나고 죄의 세력을 깨뜨리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은 허지로 돌아갔다. 그것은 바로 루터가 에르푸르트의 외로운 방에서 경험한 것과 똑같은 투쟁이었다. 그것은 그의 심령을 괴롭게 했던 문제, 곧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고 한 바로 그 문제였다.”
웨슬리의 회심 전후
“영국으로 돌아오자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의 전도자의 교훈 아래 성경상 신앙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기의 행함을 의지하던 것을 모두 버리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온전히 신뢰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런던에서 있은 모라비아 교도들의 한 집회에서 하나님의 영이 믿는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여 변화를 일으킨다는 내용으로 된 루터의 글이 낭독되었다. 그 말을 듣자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신앙의 불이 타올랐다. 그는 말하였다. “나는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때에 한 가지 확증 곧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심지어 내 자신까지도 제거해 버리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여 주신 데 대한 확증을 얻었다.
괴롭고 쓸쓸한 고투의 긴 세월, 엄격한 극기와 자책과 겸비의 긴 세월을 통하여 웨슬리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한 가지의 목적에 굳게 사로잡혀 있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기도와 금식과 자선 사업과 자기 희생으로 얻으려고 애쓴 은혜가 실상은 하나님께서 “값없이”주시는 선물임을 깨달았다.
일단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굳게 서자 그의 온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관한 지식을 어느 곳에든지 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불탔다. 그는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지방에서든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나의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엄격한 극기의 생애를 계속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신앙의 근거가 아니고 결과였으며 성결의 기초가 아니고 열매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기초이며, 그 은혜는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다. 웨슬리의 생애는 그가 받은 위대한 진리,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새롭게 하는 능력,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생애에 이루어지는 열매 등에 관한 진리를 전하는 일에 바쳤다.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자기들의 소망 없는 상태에 대하여 오랫동안 심각하게 느낌으로써 그들의 사업을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이 대학 시절과 전도 사업을 착수한 당시에 받은 멸시와 조롱과 박해의 격렬한 시련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군병으로서 어려움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그들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소수의 다른 사람들은 경건치 않은 동료 학생들로부터 메소디스트(Methodists-규칙 준수자)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칭호가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세력 있는 교파의 하나로 명예로운 이름이 되었다.
초대 메소디스트들의 고투
초창기의 메소디스트 교인들은 전도자들과 일반 신도들을 막론하고 국교인들과 혹은 국교인들의 무고로 말미암아 격분한 불신자들로부터 조롱과 박해를 받고 그것을 견디었다. 그들은 법정에도 이끌려 나갔는데, 당시의 법정은 유명 무실하여 정당한 재판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박해자들의 폭행으로 자주 고통을 당하였다. 폭도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기구와 물품들을 파괴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약탈하였고, 남녀들과 어린이들을 잔인하게 취급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메소디스트들의 집을 파괴하고 약탈하려는 자는 어느 때 어느 곳으로 모이라는 광고를 공공연하게 써 붙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공공연하게 국가의 법률과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여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아니하였다. 메소디스트들은 죄인들을 멸망의 길에서 성결의 길로 돌이키고자 힘을 썼기 때문에 이처럼 철저한 박해를 받았다.
존 웨슬리는 자기와 자기의 동료들을 비난하는 데 대하여 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가르치는 교리가 허위요, 오류요, 광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것들이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교리이며, 퀘이커주의요 광신이며 법왕교라고 한다. 그 모든 구실들은 이미 그 뿌리까지 모두 뽑힌 것이다. 이 교리의 모든 부분은 우리 자신들의 교회가 해석하는 성경의 분명한 교리이다. 그러므로 만일 성경이 참된 것이라면 그 교리가 허위나 오류일 수는 없다.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교리가 너무 엄격하여 하늘로 가는 길을 지나치게 좁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반대 이론이며(오랫동안 이 문제로 공격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은연 중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 많은 반대 이론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이 가리치신 것들보다 더 하늘 가는 길을 좁게 만들었는가? 과연 그들의 교리가 성경의 가르침보다도 더욱 엄격한가? 몇 구절의 명백한 성경절들을 생각해 보자.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사람이 무슨 망령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로 인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다.
만일 그들의 교리가 이러한 성경 말씀보다 더욱 더 엄격할 것 같으면, 그들은 책망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대들은 그대들의 양심에 비추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누가 능히 하나님의 말씀의 순결하고 그 엄격함을 조금이라도 늦추어 놓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맡은 어떤 청지기라도 그 거룩한 위탁물의 어떤 부분을 변경할 것 같으면 그를 충실한 청지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청지기는 하나도 감할 수가 없고 약화시킬 수도 없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그대들의 기호에 맞도록 성경의 표준을 낮출 수는 없다. 그대들은 반드시 그 표준에까지 올라가야 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할 것뿐이다’라고 선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은 사랑이 없다’고 평가하는 참된 이유이다.
웨슬리 시대 직전에 영국에 나타난 영적 쇠퇴는 대체로 율법 무용론의 교리가 빚어 낸 결과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도덕률을 폐지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났고, “선을 행해야 할 책임감”에서도 해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율법의 영원성을 인정하면서도 목사들이 사람들에게 율법을 순종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무용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택한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과 덕성을 실천하게 되고, 이와 반대로 영원히 버림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 괴상한 교리는 본질적으로 후세의 일반 교육자와 신학자의 가르침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의의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이 결코 불변(不變)의 것이 아니라 도덕의 표준이 사회 자체의 현실에 의하 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항상 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모든 사상은 다 사단의 정신에서 온 것이며, 그는 죄 없는 하늘의 거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율법의 정당한 제재를 없애 버리기 위한 그의 사업을 착수하였던 것이다…
웨슬리의 율법과 복음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의문의 율법과 함께 십계명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웨슬리는 말하였다. ‘십계명이 포함되어 있고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견고하여진 도덕적 율법은 주님께서 결코 폐지하지 아니하셨다. 그분께서 오신 것은 그 율법의 어떤 부분을 삭제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이 율법은 결코 폐할 수 없는 것이며, ‘충실한 증거자로서 하늘에 굳게 설 것’이다. …
그 율법은 태초부터 있었는데, 그것은 ‘석판에 새기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인류의 자녀들이 창조자의 손에서 나올 때 그들의 마음에 모두 새겨졌다. 그리고 한 때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문자로 기록되기까지 하였지마는 오늘날에는 죄로 말미암아 그것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선악에 대한 의식이 다소나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한 그 율법은 완전히 폐지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율법의 모든 부분은 각 시대의 온 인류가 지켜야 할 의무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와 환경에 따라 좌우될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 그리고 그 상호간의 변경될 수 없는 관계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
‘나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다. 그 말의 뜻은 의심할 여지없이 다음과 같다. 나는 사람의 온갖 곡해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것을 완전케 하러 왔다. 그 속에 있는 모든 애매하고 분명치 않은 점들을 완전히 천명하러 왔다. 그 모든 부분의 진정하고 완전한 의미를 선포하고,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각 조목의 범위, 곧 그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각 항목에 들어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순결과 영적 성질 등을 나타내기 위하여 왔다.’
웨슬리는 율법과 복음의 완전한 조화를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율법은 끊임없이 복음을 위한 길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로 가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복음은 항상 우리를 인도하여 율법을 더욱 정확히 성취시키도록 한다. 예컨대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성결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든 요구에 대하여 부족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으로는 불가능하지마는 이처럼 사랑을 주고, 겸손하고 성결케 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게 된다. 우리는 복음, 곧 기쁜 소식을 붙들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진다. 곧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또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장 큰 원수 가운데는 율법을 기탄없이 공격하고, ‘율법을 악한 것으로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깨뜨리도록(율법에 대한 의무를 폐기하는 것)가르치되, 율법의 가장 큰 조항이나 가장 작은 조항뿐 아니라 율법 전체를 온전히 깨뜨리도록 가르친다. … 그러나 이러한 허망된 일 가운데도 가장 놀라운 일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율법을 전복하면서도 그것을 높이는 줄로 믿고, 그분의 교훈을 폐하여 버리면서도 그분의 사업을 확장시키고 있는 줄로 여기는 일이다. 주여 평안하니이까라고 말하면서 입을 맞춘 유다와 같이 행동한 그들이 예수님을 과연 높이고 있는가.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네가 입맞춤으로써 인자를 파느냐’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의 보혈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분의 면류관을 벗기는 일과 그분의 복음 사업을 발전시키는 체 하면서 그분의 율법의 어느 부분을 삭제해 버리는 일은 입맞춤으로 그분을 배신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믿음을 전하는 자로서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순종하여야 할 어떤 적은 부분이라도 제해 버리려는 태도를 취하거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을 조금이라도 약하게 하거나 무효로 만드는 자는 유다에게 한 정죄의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복음을 전하면 율법의 모든 목적을 다하는 것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전연 부인한다. 복음은 소위 율법의 첫째 목적, 곧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아직도 음부의 구덩이에서 그냥 잠자고 있는 자들을 깨우는 일을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죄를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속량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진정으로 느끼지 아니한다. …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건강한 자, 혹은 스스로 건강한 줄로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의원을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대들은 먼저 그들에게 그들이 병든 사람인 것을 깨닫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그대들의 수고에 대하여 그들은 감사히 여기지 아니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가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아직 그 마음을 깨뜨리지 아니한 자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웨슬리의 위대한 공적
웨슬리는 그의 주님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한편 ‘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업을 충실히 감당하였으므로 영광스러운 결과를 보게 되었다. 그는 나이 80세가 넘은 만년에 가서, 곧 반세기 이상의 봉사의 생애를 통하여 50만명 이상의 영혼들을 신자로 얻었다. 그리고 그의 봉사를 통하여 타락과 멸망의 구덩이에서 고상하고 순결한 생애로 들어간 무리들과 그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더욱 깊고 풍부한 체험을 얻은 사람들의 수는 구속 받은 가족이 하나님의 나라에 모일 그 때에 가서야 비로소 밝히 알려질 것이다. 그의 생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교훈을 준다.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종의 신앙과 겸손, 불굴의 열성, 극기, 헌신은 오늘날의 교회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웨슬리를 따르는 자들 가운데 광신자들이 있었음
“루터 역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들의 사상이나 의견을 성경의 증언보다 더 높이는 광신적인 사람들 때문에 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였다. 신앙과 경험이 부족하면서도 자부심이 강하고 어떤 새로운 것을 듣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새 교사들의 주장에 속아서 하나님께서 루터를 통하여 세우고자 하셨던 사업을 파괴하는 사단의 부하가 되고 말았다. 또한 감화와 믿음으로 세상을 복되게 한 웨슬리 형제와 그 밖의 다른 사람들도 그들이 나아가는 매 걸음마다 과격하고 불안정하고 거룩하지 않은 자들을 각종 광신자로 만드는 그런 사단의 간계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특별한 진리들을 주어 오셨다
“지나간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똑같은 시련을 경험하였다. 위클리프, 후스, 루터, 틴덜, 박스터, 웨슬리 같은 사람들은 모든 교리를 성경으로 시험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성경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나 버려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하여 가혹한 분노로써 박해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전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교회 역사의 각 시대는 그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필요에 적합한 어떤 특별한 진리의 발전으로 각각 구분되어 왔다. 모든 새로운 진리는 증오와 박해를 대항하여 싸우면서 그 길을 개척해 왔다. 진리의 빛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유혹당하고 시련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비상시에 특별한 진리를 주신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그 진리를 전하기를 거부할 수 있을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마지막 은혜의 초청을 세상에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들은 잠잠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잠잠하면 그들의 영혼은 위험에 빠진다. 그리스도의 사신들은 결과를 전혀 괘념치 않아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진센돌프 백작이 완전함에 대해 심히 반대했을 때에 웨슬리가 그에게 쓴 답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The Works of Wesley, 6권 1 페이지)
“성경 말씀들 가운데서 이보다 더 미움을 받는 말씀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완전이라는 말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완전에 대하여 설교하며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경험이라고 가르치면, 그것은 그들의 귀에 마치 멸망의 가증한 것처럼 들리며, 또한 이방인이나 세리들과 같이 여겨지게 됩니다. 진센돌프 백작께서는 이렇게 말씀했죠. ‘이것은 큰 오류요, 내 마음으로 나는 이것을 증오합니다. 나는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하여 세상의 모든 불과 칼들을 가지고 대항하여 싸워 나갈 것입니다’ 라고요. 아니 왜 그렇게 분을 내십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죄로부터의 구원에 대하여 그렇게 반대를 하고 있나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묻습니다, 왜 그렇게 죄를 좋아하십니까? 죄가 당신을 위하여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서 죄가 도대체 무슨 좋은 일을 해 주었으며 또한 무슨 좋은 일을 해 줄 것이란 말입니까? 당신은 왜 죄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하게 소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렇게 난폭하게 구십니까?”..
다음과 같은 예언의 신의 말씀들이 극단이라는 말인가?
시대의 소망, 311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은 가장 높은 인간의 생각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 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명령은 일종의 약속이다. 구속의 계획은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을 계획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겸비한 영혼에게서 죄를 분리시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역사를 멸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모든 회개하는 영혼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로 죄를 범하지 않도록 보전할 만반의 대비책을 세우셨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이상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인자(人子)께서 당신의 생애에서 완전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그들의 생애에서 완전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셨다. 그는 시장하시고 목마르시고 피곤하셨다. 그는 음식을 잡수심으로 생명을 유지하셨고 수면을 취하심으로 원기를 회복하셨다. 예수는 인간의 운명에 동참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예수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셨다. 예수의 품성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목사들에게 보내는 증언, 173
“우리는 증가된 빛을 갖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전해야 할 엄숙하고 중대한 기별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택함을 받은 제자들이 깊은 체험을 갖고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지도록 의도하셨다… 우리는 이 땅의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기간에 살고 있다. 진리의 빛이 우리 위에 비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제 낮은 수준에 머물렀던 순간에 대해 변명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동역자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바라보고, 그분의 성품을 연구하고, 모본되시는 분을 모방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완전한 인성에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영원을 위해 품성을 형성해야 한다.”
시대의 소망, 123
“예수께서는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요 14:30)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안에는 사단의 궤변에 반응한 것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죄를 짓기로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는 생각으로라도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는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투쟁할 태세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고 있는 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손을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굳게 붙잡게 함으로 우리로 완전한 품성을 얻게 하시려고 하신다.
그런데 이 일을 성취하는 방법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는 어떤 수단을 통하여 사단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셨는가?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서만 시험을 대항할 수 있었다. “기록되었으되” 라고 그는 말씀하셨다.”
실물 교훈, 67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당신을 나타내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분의 백성들 속에 완전하게 재현될 때에 그분은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촉진시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벧후 3:12).”
시대의 소망, 671
“죄는 신성의 제 삼위의 강력한 작용을 통하여만 물리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으며, 그분은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가운데 오실 것이었다. 세상의 구주께서 이루신 일을 효력 있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마음을 순결하게 만드신다. 성령을 통하여 신자는 거룩한 품성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유전적이며 배양된 악에의 성향들을 이기며 당신 자신의 품성을 당신의 교회에 새기는 거룩한 능력으로서 당신의 성령을 주셨다… 성령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다. 구주께서 당신의 사랑을 표명하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려고 오신 것처럼 성령께서도 당신의 은혜를 세상에 나타내심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려고 하셨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재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명예, 그리스도의 명예는 당신의 백성의 품성을 온전케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각 시대의 대쟁투, 622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의 때가 곧 우리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경험하고 있지 못한 경험 즉 사람들이 얻기를 너무도 게을리하고 있는 한 가지 경험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실제로 당하는 환난이 가벼운 것이 상례이지만 우리 앞에 있는 위기는 그렇지 않다. 가장 자세하게 묘사하여도 그 시련의 크기를 여실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 환난의 때에 각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겔 14:20).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고 계시는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지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생각으로라도 유혹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으셨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 가운데 그가 발을 붙일 어떤 곳이 있는지 찾는다. 그러던 중 어떤 죄된 욕망을 품게 되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유혹의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셨다. 그러므로 그분에게는 사단이 이용할 수 있는 죄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환난의 때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상태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죄와 분리되어야 한다.”
성품의 완전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다시 한번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중요한 시점이 온 것 같다. 바로 이 가르침이 지성소의 정결 사업에 대한 요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대속죄일의 정결 사업을 하시기 위하여 지성소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사람들이 세운 교회가 바로 재림교회이다. 예수님의 지성소 사업은 우리의 죄의 도말과 그리고 남은 교회 성도들 품성의 완전함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일이다. 이 중요한 일에 대하여 우리는 더 깊이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결단코 완전한 성품을 이룰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는 불완전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의 믿음으로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을 승리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 오는 사단의 유혹들을 이길 수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 성령의 은혜 역사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들의 경험에 의의 가르침을 가져다가 맞추려고 하는 것 보다 우리가 물려 받은 진리와 하나님의 분부하심에 굴복하여 따라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남은 무리들을 통하여 이루려고 하시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예수께서 속히 오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