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세대 제 28 호
대쟁투의 핵심: 여호수아와 천사에 대한 이상
저자: 손계문 전도사
오늘날 많은 재림교인들이 구원에 대한 감격도, 재림에 대한 기다림도, 심판에 대한 엄숙함도 없는 깊은 영적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마지막 예언들이 목전에서 성취돼가는 긴박한 시기에 살고 있음에도 세상의 편리와 만족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안타까운가! 이러한 때에 참 복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상고하고 그 진리대로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주님께서 완전하시므로 그분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동의하기만 하면 그의 완전이 내 것이 되므로 구원은 따논 당상인가?
요즘 TV에선 기독교계의 부정에 대해 연일 고발하는 프로가 진행 중이라 한다. 그 목사들이 다 예수를 알고 믿을 뿐만 아니라 전하기까지 하고 있다. 자신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새벽마다 용서를 구하면서도, 날이 밝으면 여전히 비리에 얼룩진 삶을 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하는 대형 교회의 수많은 목사들! 우리가 이렇게 죄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완전하기 때문에 그들 모두 구원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기엔 좀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인가? 드러난 죄와 감추인 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아니 오히려 내 상태는 그들보다 낫다는 착각마저 더 하고 있는지 모른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1-4).
“예수님께서 당신의 은혜의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동안, 사단은 그들을 범죄자로 하나님 앞에 고소한다. 이제 그는 그들의 생애의 기록을 지적하고, 그들의 품성의 결함과 그들이 그리스도와 같지 아니한 점, 곧 그들이 구속주의 영광을 더럽힌 것과, 바로 그 자신이 그들로 범죄케 한 점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 백성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들의 회개와 믿음을 보여 주시고 그들이 용서받은 것을 주장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상한 손을 하나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 앞에 드시고 “내가 저희 이름을 압니다. 내 손바닥에 저희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께 충성된 백성들을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타내기 위하여 당신의 의의 옷을 입히실 것이다(엡 5:27).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쟁투, 484).
스가랴가 본 <여호수아와 천사에 대한 이상>은 대쟁투의 핵심 주제이다. 그래서 사단은 본문의 말씀을 곡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값싼 칭의를 믿도록 이끌고 있으며, 필자 역시 한동안 위 말씀을 제시하며 “그것 봐라, 비록 우리가 이렇게 죄를 범할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옷 입혀주신다”고 가르쳤던 적이 있다. 필자뿐 아니라 많은 신학자들이 승리에 대한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의 조건은 칭의만이라는 논리를 주장할 때 이용하고 있는 본문이다. 과연 이 계시가 값싼 믿음을 말하는가?
위 인용문에서 예수님이 간구하시는 때는 조사 심판(재림 전 심판)의 과정이다. 조사 심판이란 말은 책에 근거해서 사람의 일생을 조사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말이지만 지성소 심판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조사만이 아니라 속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지성소의 심판을 대속죄일이라고 부르며 예수님은 계시 가운데서 “나의 피, 나의 피”라고 외치시는 것이다. 이것은 다만 죄를 용서하셔서 의인의 신분을 준다는 뜻만이 아니라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되는 깊은 성화의 경험까지도 포함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조사 심판의 과정이다.
성경은 현대인들처럼 칭의와 성화를 이분법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런 용어 자체가 쓰이지 않았다. 거듭남 속에 성결의 경험을 말하기도 하고 칭의속에 성화까지도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칭의)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성화)”(요일 1:9). 십자가 밑에서 칭의와 성화(완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둘을 구분 짓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화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화 역시 칭의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루어 주시는 완전한 역사이다. 성화는 오직 믿음으로 부여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생애를 바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선물이다. 번제단에서 의롭다고 선언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동시에 성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십자가-칭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성화)을 입었노라”(히 10:10).
그러므로 지성소에서 조사 심판, 즉 “예수님이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은 용서의 은혜만이 아니라 회개(개혁)의 경험을 통해 이기는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을 베푸시는 일도 포함된다.
<각 시대의 대쟁투>에서 인용된 본문은 “하늘에서 행하는 조사 심판”이란 제목으로 기술된 내용이다. 위에서 언급된 내용으로만 본다면 자유주의자들의 칭의 중심의 신앙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에서 행하는 조사 심판”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전혀 다른 뜻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조사 심판은 행위와 품성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이다(쟁투, 479~483 참조).
사람들은 가능하면 쉬운 길로 구원받기를 원해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일은 항상 뒷전에 밀린다. 이런 신앙은 이름뿐인 신자로 남게 하고 반대로 성화를 강조하다 보면 행함에 치우친 율법주의 신앙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를 다 경험하는 일인데, 선물로 주시는 칭의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충만하게 경험하고 이 거저 주시는 구원에 근거해서 죄를 이기는 승리의 경험을 갖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중한 복음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믿으라 믿기만 하면 살 수 있다. 생애가 아무리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리라는 즐거운 망상”(1기별, 373)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것은 필자의 경험에서도 분명하다. 한때 “완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굉장한 거부감을 느꼈다. “아니,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생애를 살 수 있다고?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나?” “내가 비록 이렇게 죄를 짓지만 우리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안 지을 수 없다.” “그들이 믿음으로 또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율법주의’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잘못된 복음을 적극적으로 가르쳤을 뿐 아니라 완전을 말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단이 만들어 놓은 편견과 오해를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소모적인 논쟁을 너무 오랫동안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요한 웨슬리만큼 적절히 표현한 말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성경 상에 이 표현보다 더 장애가 되는 말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완전이란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말이다. 그것은 소리만 들어도 가증한 것이요 또 누구든지 그것을 이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설교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방인과 세리보다도 더 나쁜 취급을 당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극렬합니까? 죄로부터의 구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열성이 대단합니까?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묻습니다. 왜 당신들은 그렇게 죄를 좋아하십니까? 도대체 죄가 그대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습니까? 죄로부터의 구원을 소원하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심하게 대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요한 웨슬리, Works of Wesley, 6권, 1, 424).
1888년 기별의 의미는 <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기별”(p.91~94)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본문은 재림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이며 선지자는 “주님께서는 크신 자비를 베푸셔서 와그너와 존스 목사를 통해 그분의 백성들에게 ‘지극히 소중한 기별(most precious message)’을 보내셨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전파하도록 명하신 기별이다. 이것은 셋째 천사의 기별이며, 이 기별은 큰소리로 전파(큰 외침)되고, 크나큰 성령(늦은비 성령)의 부어지심이 수반될 것이”며(목사, 92), “이 두 형제들에 의해 전해진 기별을 거부할 때 그대들은 이 기별을 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다”(Lt 51-A, 1895)라고 했다. 심지어 1892년에 선지자적 안목으로 존스와 와그너가 교단을 떠날지도 모를 가능성에 대한 암시를 언급하면서 “존스 혹은 와그너 장로가 원수의 유혹에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별을 받은 것이 없었다거나 혹은 그들이 행한 사업이 모두 실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까지 했다(Ellen G. White to Uriah Smith, Sep. 10, 1892).
당시 이 1888년 기별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실천했더라면 늦은 비 성령과 큰 외침을 불러오고 결국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업을 마쳤을 것이었는데, 슬프게도 교회의 역사는 이 기별이 인정받지 못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아들이면 지금도 그러한 늦은비 성령을 동반할 수 있는 이 기별은 과연 무엇인가?
“이 기별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신 높이 들리신 구주를 세상 앞에 더욱 현저하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증인이신 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됨을 나타내었다. 그것은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도록 초청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난다”(목사, 91; 사건, 200).
1888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성령의 기별은, 살아서 승천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준비시키는 데 그 중점을 두고 있으며, 흔히 언급되는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옹호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 속에 살고 그들이 예수님 속에 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가 계명을 순종하는 생애로 나타난다는 복음이 1888년 기별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율법에 순종하심으로써 변경할 수 없는 율법의 성격을 증거하시고, 아담의 모든 자손이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율법을 완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셨다”(보훈, 49).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세계와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과 온 우주와 타락하지 않은 세계들에게 보이시려고 인간의 육신을 쓰고 오시었는데, 그렇게 해서 인성이 신성의 능력과 합하여지면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주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속의 능력을 통하여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었다”(시조, 1896년 11월 15일).
“예수는 모든 유혹받는 영혼이 저항할 수 있는 동일한 방법, 즉 자신을 영감의 기록에 위탁하고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시므로 사단의 유혹을 저항하셨다”(3기별, 136).
얼마나 분명한가! 바로 여기서 우리는 자유주의자들이 가르치는 칭의와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신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같은 처지에 있는 우리도 같은 방법, 다시 태어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 오셨다. 이러한 진리가 전파될 때에 늦은비 성령의 부어지심이 수반될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기별을 누가 그토록 어렵게 만들어 놓았는가! 믿음으로 사단에 승리하고, 믿음으로 유혹을 물리치고, 믿음으로 모든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생애의 결론이다. E.J. 와그너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성화 역시 하나님의 선물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고 그리스도인은 죄 없는 생애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완전한 믿음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은 죄 없는 생애 이외의 다른 생애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런 능력이 없지만 우리는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힘과 능력은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분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태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의로운 삶을 살 수가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 예수를 영접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사시면서 완전히 율법을 이루신다”(와그너, 기쁜 소식, EGPA. 77, 98, 108).
선지자는 이러한 성화의 중요성과 그 근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당신의 대리자로 세상에 내보내신다. 그러므로 생활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야 한다. 이러한 간구를 드리려면 하나님의 품성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생활과 품성으로 하나님의 생애와 품성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대는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없고 그분을 이 세상에 나타낼 수 없다”(보훈, 105)고 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그대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이 일을 할 수 있다.” 이 복음에 “아멘”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도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악한 세력을 자기 스스로 내쫓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만 영혼의 성전을 정결케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강제로 들어가지는 않으실 것이다.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리라”(계 3:20)고 말씀하신다.
성화 역시 하나님의 선물임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복음이 전적으로 인간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충만한 능력을 주신다. 그는 비단 우리를 죄의 저주로부터 구하시는 능력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와 그 죄의 가책으로부터 격리시켜 보존하시는 능력까지 공급해 주신다.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그대가 믿든지 믿지 않든지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순종할 수 없는 계명은 하나도 주시지 않으셨다.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의 순종으로서 이 일은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완전”을 인간의 행위 바탕 위에 세워진 어떤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성품의 완전을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해주시겠다고 하신 그분의 약속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고 경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복음을 자기의 것으로 체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승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늦은비 성령을 받는 조건과 인침을 받기 위한 조건이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이기 때문에(참조 1증언, 619; 1보감, 66; 전도, 682 등), 우리는 지금 주님께 완전한 굴복을 드려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대와 나는 예수님의 인성 문제로 인하여 논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인성을 취하셨으므로 그분께서는 승리하셨지만, 우리는 그분처럼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한다.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부인될 때, 인성 문제는 가장 치열한 논쟁점이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인성 문제가 재림교회 안에서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는 이유이다.
위 본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사단이 공격하는 성도들의 죄는 그 문맥을 자세히 보면 그들이 현재 범하고 있는 죄가 아닌 과거에 범했던(이미 회개한) 죄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단은 그들을 의혹에 빠뜨리고, 하나님을 믿는 확신을 잃어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그분의 율법을 범하게 하고자 진력해 왔다(has sought to lead…, to cause…, to separate…, to break…). 이제 그는 그들의 생애의 기록을 지적하고(Now he points to the record of their lives), 그들의 품성의 결함과 그들이 그리스도와 같지 아니한 점, 곧 그들이 구속주의 영광을 더럽힌 것과(which has dishonored their Redeemer), 바로 그 자신이 그들로 범죄케 한 점들(all the sins that he has tempted them to commit)을 지적한다.”
교회증언 5권도 구원받는 성도들이 과거에 지었던(이미 회개한) 죄를 지칭하고 있다.
“이 사람들이 하늘에서 나의 위치와 나와 연합했던 천사들의 위치를 차지할 자들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노라고 공언하고 있는 동안, 그 율법의 조항들을 지켜왔는가(Have they kept)? … 하나님의 백성은 많은 점에서 매우 결함이 많았다(The people of God have been…very faulty). 사단은, 그들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죄들을(the sins which he has tempted them to commit) 정확하게 알고 있다”(증언5, 473).
이 처럼 위의 증언 말씀들은 믿는 자들의 죄를 언급할 때, 과거 완료형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선지자는 이러한 계시의 기록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대속죄일의 기간을 거친 후에도 “계속 결함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서술하지 않고 “결함이 많았었다(have been)”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어서 죄를 이긴 성도들의 삶을 한때 괴롭혔던 그 죄들이 이제 어떻게 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죄를 지었을지라도(have sinned), 그들 스스로를 악의 지배에 맡기지 않았다. 그들은 죄를 버리고(They have put away their sins),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다. 그리고 거룩한 중보자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탄원하신다”(5증언, 474).
이 서술은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니고 있는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다른 여러 말씀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죄에 대한 용서(칭의)’는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롬 3:25)이라는 회개한 과거의 죄에 적용됨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성경과 일치를 이루고 있다.
<선지자와 왕>의 “여호수아와 천사”계 시는 아래와 같은 말씀으로 본문을 마무리 하고 있음을 보는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들은 앞에서 서술된 내용만을 가지고 구속의 계획을 오해시키고 있으나 문맥 전체를 본다면 아무런 논리적 모순이 없다.
“그들에게서 세속적인 것은 제거되고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이 완전히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잘못 전하는 자들을 벌하시나 성실히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나타내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계발하기 위하여 당신께 힘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필요 되는 모든 도움을 주실 것이다. … 그들은 기만자의 간계를 물리쳤고 용의 포효(咆哮)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충성을 돌이키지 아니하였다. ‘이 사람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4,5)”(선지, 589~592).
“여호수아와 천사에 대한 스가랴의 계시는 특별한 힘으로 대속죄일의 마지막 장면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경험에 적용 된다”(선지, 587). 아직 은혜의 시간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참소자가 아니라 자비로운 아버지시다. 죄 용서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부모에게 자녀가 제일 사랑스러울 때는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올 때이지 않는가! 그러나 지성소에서 중보자께서 나오실 때는 더 이상 죄인을 용서하는 봉사는 없다. 지금이야말로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
스가랴의 계시에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광경은 예수님을 믿으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지는 막연한 칭의가 아니다. 거룩한 하늘 백성의 신분과 함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깊은 속죄의 성결을 경험하는 칭의이며 사단의 고소를 향하여 성도들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정결케 되었음을 입증하시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 그들의 죄를 도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엘렌 G. 화잇은 이것을 인치는 기별로 말했고, 이 경험은 마지막 때에 남은 백성들에게 힘 있게 성취될 것이라고 했다.
여호수아에게 입힌 이 옷은 무엇인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8). “이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 곧 믿음으로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실물, 310). “그 의복은 속임과 불순과 타락과 위선을 결코 가리워 주지 않을 것이다”(5증언, 221). 만일 어떤 죄라도 십자가로 덮어만 준다면 어떻게 사단의 고소를 우주 앞에서 해명하실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신 것 자체가 너무나 큰 모순이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죄가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 “환난의 때에 자복하지 아니한 죄가 그들 앞에 나타나게 되면 그들은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잘못을 고백하지 않고 숨겨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의 죄는 이미 심판정에서 도말되었다”(쟁투, 620).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그분의 절대적인 의와 완전으로 옷 입혀져 하나님 앞에 능히 설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며, 또한 이 자격에 적합하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을 힘 입어 승리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스가랴 3장에 흰 옷을 입게 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경험과 4장의 감람나무의 기름으로 상징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스룹바벨의 경험인 것이다. 제사장으로서 의의 옷을 입는 경험과 왕으로서 죄를 정복하는 경험이 삶에 적용될 때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죄의 제거와 그리스도인 성품의 완성은 재림 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시기인 지금 이루어져야 한다(2증언, 354 참조). 그러므로 놀랍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상관없이 “신의 성품”(벧후 1:4)에 참여하는 것은 지금 가능한 약속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요구되는 매우 엄숙한 일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옹호하시는 일에 두 근거를 제시하고 계신다. 첫째는 주께서 백성들을 위해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이요, 둘째는 성도들의 개혁이 따르는 참된 회개의 경험이다. 부분적인 글들로 선지자의 입장을 곡해하며 제시하려는 시도가 결국 죄를 가벼이 여기고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기별로 백성들을 잠재우지 않을까 두렵다.
역사의 시간표는 이제 그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다. 지난 2천년 가까이 이 경고가 계속되어 왔고 지난 160여 년 동안 끝났어야 할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 왜 지체되고 있는가? 우리 주님은 우리가 재림을 기다리는 것보다 당신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뜨겁고 감동적인 재회를 속히 하기를 더 간절히 기다리신다. 그런데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품성으로 세상에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자기희생, 동정, 사랑이 하나님의 일꾼의 생애에서 재현(再現)되어야 한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재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명예, 그리스도의 명예는 당신의 백성의 품성을 온전케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소망, 417, 67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당신을 나타내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분의 백성들 속에 완전하게 재현될 때에 그분은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실물, 69).
잘 알다시피 우주 법정에는 한 고소 사건이 진행 중에 있는데, 사단이 하나님의 율법은 너무 엄격하여 순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참소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완전한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믿는 자들도 주께서 사셨던 것처럼 살 수 있음을 증명해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완전한 순종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면 사단의 주장이 이기게 될 것이며 반면에 모든 유혹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온전히 순종하는 한 백성을 보이실 수 있으시면 하나님의 공의가 온 우주 앞에 영원히 옹호될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이 지체되는 이유는, 우주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사단의 끊임없는 고소에 “하나님은 공의로우셨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옹호”할 한 백성, 즉 하나님의 품성을 재현할 남은 무리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속죄일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 재림을 기다리는 백성들의 삶의 두드러진 특징은 삶에 나타난 변화와 개혁이다. 단순히 고백만 하는 것은 무가치하다. 진정한 개혁의 표징은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그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별의 내용이 죄를 지적하고 회개와 자복을 요청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된 기별의 표징들 중 하나이다. 옛 선지자들의 기별이 그랬으며(사 1:1~10; 58:1), 신약에도 그랬고(마 3:7; 23:13~33, 계 2:5; 3:15~18), 지금도 그렇다(3증언, 254). 그러나 회개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 마음속에서 쥐어 짜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회개하라는 부르짖음에 “우리 구원의 확신을 흔들리게 하는 그런 진부한 소리는 하지 말라”고 귀를 막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 아닌가?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재앙에서 구원받기를 바랐으나 헛되이 구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역사하기 이전에 먼저 그들의 장막에서 죄가 분리되어야 했다(사 59:1, 2; 렘 5:25). 만약 사람들이 계속해서 죄에 집착한다면, 그들은 결국 그것과 함께 소멸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아직 은혜의 시간이 연장되고 있는 지금, 성령께서 나의 속사람을 정결케 하도록 굴복하는 일은 얼마나 긴급한 일인가! “구속(救贖)은 영혼이 하늘을 위하여 훈련을 받는 과정이다. 그것은 곧 흑암의 임금의 학교에서 얻은 생각, 습관, 행습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 반대되는 모든 것에서 영혼이 구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소망, 330).
그런데도 우리는 십자가를 괴로워하는 양심을 달래주는 도구나 또는 죄를 지었을 때마다 용서해주는 면허증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물론 십자가의 용서는 무한하다. 그 은혜는 결코 인간의 지력으로 다 재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용서하신 것이지 “또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보증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아는가?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예수께서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즐겨 못 박을 수 있겠는가? 맨 정신으로는 그렇게 못한다. 우리는 죄에 미쳤다. 이기심이 죄인지 모르고 남을 비난하는 것이 죄인지 모르는 죄 아래 팔려있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다.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미워했고 우리의 캄캄한 마음이 그를 몰라봤으며 우리의 무지한 채찍질로 그를 내리쳤고 우리의 악독한 혀가 그를 정죄했으며 우리의 폭력의 손길이 그 몸 멍들게 때렸으며 살인자를 본받아 우리는 그를 찔렀다. 주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자들이 손에 망치와 못을 들고 주님을 못 박으면서도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가련한 사람들이다. 진짜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오늘 살아 있을 때 십자가에 달린 주님과 함께 죄로부터 죽는 영적인 둘째 사망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실제로 영원한 둘째 사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죄로부터 정결케 되든지 아니면 죄와 함께 정결케 될 것이다.
우리는 진정 세상을 향해 마지막 호소를 전파할 사명을 가진 자들이 분명하다. 그런데 복음을 듣는 많은 사람들이 그 기별에서 돌아서는 이유 중 하나는, 전하는 이들의 생애가 기별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진리를 위해 장로교에서 개혁할 때 참으로 용감했었다. 20년이 넘게 구축해온 공동체에서 분리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고, 친구들과의 어색함을 불러왔으며 새로운 직장을 찾아봐야 했다. 그러나 진리는 내 발에 등이요 나침반이 되었기에 그런 것쯤은 능히 이길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원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내가 만난 악함 중에 가장 지독한 자였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제수잇이었다.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하는 자아. 아내에게 신경질을 내고 자녀에게 짜증을 내고 있는 내 자신을 전혀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여겼는데 여전히 죄가 나를 주관하고 있었다. 무엇이 잘못됐단 말인가! 삶 속에서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심각한 기만이다. 사람의 마음에 가장 큰 기만은 진리에 동의만 하면 의가 성립된다는 생각이다. 진리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은 영혼을 구원하기에는 부족하며 그것은 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
하나님의 집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아버지의 뜻을 아는 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가르치는 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글로 쓰는 자가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설교하는 자가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변화되는가? 아버지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글을 쓰기 때문인가? 강대 상에서 복음에 대해 설교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가정과 교회와 이웃이 변화되는 것이다.
진리와 오류를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시금석은 ‘삶’이다. 교리로 잠깐은 속일 수 있어도 삶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어디에 서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고 있는가는 더 간절한 필요이다. 진리는 교리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성도의 모습이다. 그들은 모든 얽매는 것으로부터 놓여나 세상 앞에 하나님의 은혜의 기념비로 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고 온 우주의 거민들에게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계 14:6, 7, 12) 지킨 자들로 인정받을 것이며, 그들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는 말씀에 따라 “모든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증명”(원고 122, 1901)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삶이다. 바울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고후 5:15)이라고 한 후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의 실제적인 경험은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겔 36:26) 받는 것이며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고후 5:17)는 것이다.
선지자는 새롭게 된 사람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마음은 마음과 생애 즉 전 존재를 의미한다. 변화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모든 애착심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 애정을 고착시키는 것을 뜻한다. 새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새 마음, 새 목적, 새 동기를 갖는 것이다. 새 마음을 가졌다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변화한 생애이다. 날마다, 시간마다 이기심과 교만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청년, 72).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와 비천함 속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주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보좌의 명예를 걸고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성취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실물, 148 참조).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도덕적 실패의 공포를 죽음보다 더 두렵게 여길 것이다.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됨과 그것의 참혹한 흉악성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구원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나의 영원한 운명과는 상관없이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명예가 나로 말미암아 높여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사단의 말을 들을 때에 생명의 임금을 조롱하고 사단의 회 앞과 하늘 우주 앞에서 그분을 욕보이는 것이다.” “우리 주께서는 당신을 섬기노라 하면서 당신의 품성을 그릇 나타내는 자들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신다”(소망, 324, 438). “만일 자기의 결점을 숨기거나 핑계하는 자들이 사단이 그들에 대하여 얼마나 기뻐하며 그리스도와 거룩한 천사들을 조롱하는지 볼 수 있다면 그들은 속히 죄를 자복하고 버리게 될 것이다”(쟁투, 489).
우리의 영안(靈眼)이 열려서 내가 범죄 할 때마다 사단이 온 우주 거민들 앞에서 박수치며 “그것 보라 하나님의 죽으심은 헛된 것이었다”고 외치며, 그리스도를 비웃고 조롱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속히 죄를 버릴 뿐 아니라 얼마나 죄가 밉고 가증스러우며,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또다시 그리스도를 조롱거리로 내몰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조롱당하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 죄를 짓고 싶지 않다는 필자의 마음을 교회 어르신들과의 대화 중에 비취자 그 네 분의 장로님들이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답변들을 하셨다. “너무 스트레스받으며 살지 말라. 우리가 비록 아침에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지만 오전이 지나기 전에 죄를 짓지 않는가?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내 죄를 통회하며 울면서 기도한 후, 일어나 문 닫고 나가다가 죄를 짓는다. 그래서 예수님의 용서하는 은혜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
죄를 짓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삶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린 이런 형편들.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 질문해 보면 대부분 이런 대답들을 한다. 이것이 재림교회의 가르침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죄를 이긴다는 복음과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관해 설교하면 율법주의자로 취급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이 백성들은 죄를 승리케 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고 있다. 만일 모든 죄를 극복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사람이 정복할 수 없는 어떤 죄의 부분들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얼마만큼 용납하실까? 또 어떤 죄들은 극복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그 죄들을 안 지으려고 힘쓰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죄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죄에서 정결케 되지 못한 자기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자신을 속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주의 품성을 완전히 반사하는 한 무리의 백성을 소유하게 되실 것이며, 그들은 그들 속에 완전함을 이루도록 그리스도께 생애를 의탁한 자들이다. 그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무리이다. 나와 당신이 이 무리에 포함되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토록 거룩히 여김 받기를 간절히 소망하지 않는가?
주님과 우리 사이를 표현하는 여러 비유와 상징이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 양과 목자, 스승과 제자, 친구, 신랑과 신부, 몸과 지체 그리고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요, 편지요, 향기라는 표현을 썼다. 중은 중 냄새, 장사꾼은 돈 냄새, 정치가는 정치 냄새, 도둑은 도둑 냄새가 있다. 사냥개는 사람마다 다른 냄새를 추적한다.
나에게는 무슨 냄새가 나는가?
내 표정 속에
내 피 속에
내 꿈 속에
내 무의식 속에
그리고 나의 죽음 속에 예수의 향기를 풍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