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세대 제 27 호
1950년대 중반에 재림교회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
– 인성 논쟁에 대한 종결을 기대하면서 –
저자: 손계문 전도사 (1997년 장로교에서 진리의 말씀따라 재림교회로 개혁 후, 2005년 삼육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현 주님의 다시오심을 위해 봉사하며 섬기고 있다.)
한달 전, 개신교회에 만연해 있는 <성령 운동과 종교 연합>은 ‘작은 뿔’인 가톨릭의 기만적 술수라며 경고하고 있는 <장로교 신학대학의 A목사>와 긴 대화를 나누던 중에 “안식일교회는 프리메이슨(로마 교황청을 조종하는 실제 배후) 집단”이라는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재림교회의 교리들 때문에 그러한가를 묻자, “더 연구할 필요성을 느끼지만 재림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방향이 마치 제수이트(Jesuit-개신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가톨릭의 엘리트 집단)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신교인들에게 <이단>이란 소리는 들어봤어도, 이런 얘기는 처음이라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 후 알베르토 리베라(Alberto Rivera)박사의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기록 중에 다음과 같은 증언이 나온다.
“제수이트가 제일 먼저 침투한 개신교회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입니다. 그 다음은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루터교 등입니다. 모든 신학대학들이 그 다음 순서였습니다. 제수이트는 가톨릭 청년회, 마리아회와 콜럼버스기사단에게 그 일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거듭난 알베르토, 서달석 역 p.28)
가톨릭이 제일 먼저 재림교회를 노린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각 시대의 대쟁투>는 지난 150여 년 동안 교황권의 음모를 폭로하고 있지 않은가!
“제수이트는 재림교회의 <학교, 출판, 언론, 구호> 단체에 침투해 있습니다. 저는 <예언의 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스페인 재림교회에 침투했던 사람입니다. 대총회에 신분을 감춘 제수이트들이 많이 있습니다. 왈라왈라 대학에 강의를 하러 갈 때 대총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저지하여 강의가 무산되기도 했고, 대총회에서 저의 초청을 금지하는 문서를 재림교회에 회람했는데 그 원본을 가지고 있습니다.”(알베르토 리베라 간증 Audio Tape 中)
전직 가톨릭 사제 알베르토 리베라 박사는 7세부터 로마 가톨릭 신부학교에 입학하여 14년간 제수이트 요원으로 훈련을 받은 후, 27년 동안 개신교 말살 음모에 충성하다가 가톨릭 교리와 성경의 진리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깨닫고 교황청의 음모를 폭로하며 전 세계를 순회하다가 여동생이 납치되어 죽은 데 이어 1997년 그 역시 눈을 감았다. 그의 8권의 저서는 151개 국가에서 출판되었으며 27개국에서 가톨릭에 의해 출판이 거부되었다. 그런데 마치 반(反) 종교 개혁의 일환처럼 <크리스천 투데이(Christian Today)>에 월터 마틴이 리베라 박사를 공격하는 글을 썼다. 그런데 월터 마틴이 누구인가? 바로 QOD를 나오게 한 인물이다. 교회지남 12월 p.10~11에는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복음주의 개신교와의 대화-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재림교회를 심층적으로 연구하려는 외부의 두 사람, 즉 도널드 반하우스(Donald G. Barnhouse)와 월터 마틴(Walter Martin)에 의하여 공적인 출판물을 통해 재림교회 신조들이 구체적으로 외부에 알려졌다. …마틴은 침례교회 교인으로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재림교회 교리를 연구하던 20대 후반의 젊은 학자였다. …마틴은 그의 연구결과인 박사학위 논문을 1956년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에 관한 진리라는 책명으로 간행하였다. 이 저술은 재림교회에 대한 외부인들의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월터 마틴이 대총회에 제출한 질문들을 48개 문항으로 재정리하여 그것들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내놓은 것이 1957년에 출판된 720쪽에 달하는 <Seventh-day Adventists Answer Questions on Doctrine(교리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답변, 줄여서 QOD)이라는 책이다.”
이러한 재림교회 내의 역사적 배경을 전혀 모르는 리베라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월터 마틴은 제수이트입니다.”(알베르토 리베라 간증 Audio Tape 中)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엘렌 G. 화잇 유산 관리>위원장인 케넷 H. 우드(Kenneth H. Wood) 목사는 “1950년대 개신교 목사들과 의견 결과(QOD)로서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한 후가 아닌, 타락 전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선언했다. 교회는 50년 전 이 문제에 관한 확고한 진리에서 벗어났다.”고 했으며, 유로아프리카 지회의 성서 연구소장과 총무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엘렌 G. 화잇 유산 관리>위원인 쥬커(J. R. Zurcher) 박사는 “예상한 바대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주제로 한 엘렌 G. 화잇 증언의 새로운 해석은 생생한 반격을 일으켰다. QOD의 저자들이 기존 견해를 오류로 규탄할수록 다른 한편은 교회의 본래 가르침을 더욱 확고하게 지지하게 되었다.”(영원한 본체를 붙잡다, 시조사, 25,27,213)라고 했다.
“본 교회 내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으로 자주 교회 지도부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앤드리어슨의 주장을 따라서 QOD 내용을 ‘신신학’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합당하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는 말이다.”(교회지남 12월 11)
혼란하던 시기 <재림교회 성경 주석>이 출간되었는데,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가장 직접적으로 다뤄지는 <히브리서>와 <로마서>가 역사적 입장에 서 있는 두 신학자에게 배당되었다. 앤드리어슨은 워싱턴 D.C 신학 세미나 교수였으며 <히브리서>를 담당하였다. 그는 QOD에 대하여 반박한 한 사람의 신학자일 뿐이다. <로마서>는 그래함 맥스웰(A. G. Maxwell) 목사가 담당하였는데 그 역시 신신학을 배격하였고 <로마린다 대학원>과 <태평양 삼육대학> 등 51년간 교수직에 봉직하였다.
이어 당시 대총회 <성경 연구> 위원장이었던 고든 하이드(Gorden Hyde), 1966~1982년까지 <리뷰 앤 헤럴드>편집국장이었던 케넷 H. 우드는 역사적 가르침을 되돌아보기를 멈추지 않았고, 이후 <엘렌 G. 화잇 유산 관리>위원장으로서 전통적 입장을 지지하는 기사들을 출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아틀란타 유니온 대학장이었던 허버트 E. 더글러스(Herbert E. Douglass)와 <리뷰 앤 헤럴드>편집인이었던 토마스 A. 데이비스(Thomas A. Davis)는 <안식일학교 교과>등을 통해 <QOD>와 QOD 저자 중의 한 명인 리로이 E. 프룸의 <운명의 운동(Movement of Destiny)>을 체계적으로 반대했다. 로버트 J. 윌랜드(Robert J. Wieland)와 도널드 K. 쇼트(Donald K. short) 목사는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신신학에 경계 태세를 취하도록 <1888 재조명>이란 책을 출간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논쟁이 25년 이상 지난 후, 역사적 그리스도론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을 때, 1980년대부터 신신학이 새로운 논증들을(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 후와 타락 전 각각 하나씩 취했다는 견해) 가지고 일어나 논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1986년 AIAS 신학대학 원장이었던 랄프 랄슨(Ralph Larson) 박사의 <말씀이 육신이 되심-1852년부터 1952년까지 재림교회 그리스도론(THE WORD WAS MADE FLESH: Our Hundred Years of Adventist Christology, 1852-1952)>은 엘렌 G. 화잇으로부터 와그너, 존스, 프레스캇, 헤스켈 등 재림교회 선구자들과 모든 출판물에 실린 공식적인 글들을 연대별로 집대성한 그리스도론에 대한 가장 완전한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목적은 재림교회 신학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교회가 지난 100년 동안 무엇을 믿어왔는지 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The Word Was Made Flesh, 7). 그는 결론적으로 재림교회는 지난 100년 동안 한목소리만을 내었으나, 1950년대 <QOD>와 <운명의 운동>이 전 세계 재림교회에 예상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을 일으켰다고 진단하면서 교회가 그것들을 시인하고 정정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호소한다(Ibid., 297~300).
이후 1987년 <엘렌 G. 화잇 유산 관리 위원회> 문서보관자인 팀 포이리어(Tim Poirier)목사는 엘렌 G. 화잇이 영국 성공회 목사인 헨리 멜빌(Henry Melvil)의 견해를 따라 ‘타락 전+타락 후 아담의 인성’이라는 논리(이 견해는 기본교리 27에 반영)를 지지하지 않았음을 증명하였다. 그 외 <엘렌 G. 화잇 유산 관리 위원회> 부서기인 D. A. 델라휠드(D. A. Delafield), <앤드루스 대학원> 역사신학 교수였던 멀빈 맥스웰(C. Mervyn Maxwell), <호프 인터내셔널(Hope International)>을 창시한 론 스피어(Ron Spear), <Amazing Facts> 설립자인 죠 크루스(Joe Crews), <아본데일 삼육대학/콜롬비아 삼육대학/위마 대학/자마이카 삼육대학 학장>을 역임한 후 <하트랜드(Hartland Institute)>선교 기관의 대학장 및 책임자로 있는 콜린 스탠디쉬(Collin D. Standdish), <PUC> 삼육대학에서 11년간 신학 교수로 봉직한 후 현재 <Amazing Facts>의 부흥 목사로 역임 중인 데니스 E. 프리비(Dennis E. Priebe) 그리고 <생애의 빛>은 활발한 교류를 하며 역사적 재림 신앙을 보존하는 데 그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가 왜 일어났는가? QOD는 재림교회가 외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순수했던 복음을 타협한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위 교회지남의 ‘한쪽으로 치우친’ 기사는 진실을 올바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 인성에 대하여) QOD 저자들은 부록을 통하여 강조하였다.”(교회지남 12월 10)
“QOD 저자들이 그 책의 부록에 엘렌 G. 화잇으로부터 약 66가지 인용구들을 출판하였는데 그것은 ‘죄 없는 인성을 취하심’과 같은 부제목이 달린 부분들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문구들은 결코 엘렌 G. 화잇이 기록한 적이 없는 것이다.”(Ralph Larson, The Word Was Made Flesh, 274; 영원한 본체를 붙잡다 206,225에서 재인용)
A. L. 허드슨은 <QOD> 저자들의 지적 정직성이 부족한 점에 대해 고발하였다. 그것은 <부록>에 기고한 논점에서 엘렌 G. 화잇의 인용문들을 제시한 방법 때문이었다(This letter of A. L. Hudson’s reported by Sternweg, 7,8).
“그로부터(1957년 QOD 출간 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교회 내 양진영은 반목과 갈등을 지속해 왔다. …이번에 논문을 발표한 이들은 모두 24명에 달한다. 여기에는 세칭 우파도 있고 좌파도 있었으며, …그것과 관계된 집단들의 대표가 두루 참여함으로써 공정하고 공평한 회의의 모습을 보였다.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집회가 좀더 일찍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교회지남 12월 11)
세칭 보수파로 참석한 허버트 E. 더글러스와 콜린 스탠디쉬 등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가르침은 <생애의 빛>과 동일하다. 그럼에도 유독 한국에선 ‘한쪽으로 치우친’, ‘분열을 좋아하는 사람들’, ‘극단적이고 완전주의적 경향이 있는’ 등으로 여론 몰이를 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서 어찌 올바른 학술적 연구를 개진할 수 있겠는가? 지난 <QOD 50주년 신학 회의>처럼 공정하고 공평한 대화가 한국에서도 시도되어 막힌 담을 허물고 세 천사 기별을 힘차게 전할 수 있게 되기를 교회 지도자들께 정중히 그리고 간절히 호소하는 바이다.
QOD를 통해 변경된 그리스도의 인성 먼저 그리스도 인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시작하는 것이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예수님은 타락한 육체를 취하셨으나 더럽혀지지 않으셨다. 그분은 죄를 짓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악한 생각도 품지 않으셨다. 그분은 죄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지도 않으셨으며, 후천적으 로 쌓인 “죄의 성향(propensity)”도 없으신 분이다. 그분은 도덕적 결함 속에 떨어 진 적이 결코 없으시며 그 분 의 무죄하심 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 다. “그 리스도는 희생물(구주)일 뿐만 아니라 그 희생물을 드리는 제사장(모본)이었다. 타락하기 전에 아담은 저주의 결과와 무관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된 육체의 모양으로 오셨다. 그는 유혹을 당하였으나 죄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어떤 죄의 흔적도 없었다.”(3SM 141)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성과 같되 죄는 없으시다. 이것이 생애의 빛의 견해이다.
본성(인성)과 품성-1. 거듭난 사람과 그리스도 전에 말했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이나 완전하신 품성이 아니라 그분이 성육신 하실 때 취하신 ‘인성’에 한하여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다룰 때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은 우리처럼 ‘아담의 타락 후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럴지라도 우리와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사람의 뜻”으로 난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의 뜻”으로 난 사람들이 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람의 뜻으로 났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비밀을 말해주고 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이 놀랍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12,13,14절이 따로 떨어진 말씀이 아니라 계속 연결된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육신으로 태어났지만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 성령이 충만한 상태, 즉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거듭난 상태로 탄생하셨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그리스도시다.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누구인가? 쉽게 말해 “거듭난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다는 것은 거듭난 사람들과 같은 마음, 즉 새 목적/새 동기를 가지고 탄생하셨다고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거듭난 사람들과 똑같은 품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셔서 한순간도 죄로 얼룩지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 우러러보아야 할 완전무결한 품성의 극치에 이르신 분이고, 인간은 거듭났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의 결함을 제거해야 하며 장성해야 할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우리의 본성을 그대로 취하셨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즉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을 입고 태어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의 세력 아래 있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과는 다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7-9).
위 말씀은 “육신에 있는 자들”과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자들”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마음의 주인이 자아/세상/사단인 상태, 즉 거듭나기 이전의 모습이다. 이 상태로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요한복음 3장에서 언급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독자들 중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모든 순간 성령 충만한 사람 있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 성령 충만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는가? 그렇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하느냐 아니냐”와, “거듭났느냐 아니냐”가 우리의 본성(인성)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품성에 관계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인간들의 차이는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품성에 있는 것이다.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든 인류는 동일한 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며 유전 법칙이 끼쳐온 죄의 결과를 받아들이셨다(소망, 48 참조).
어떤 신학자는 “거듭난 사람들”은 “예수님과 동일”한 입장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아담의 타락 전 본성을 쓰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인성과 품성>을 구분 짓지 않아서 오는 혼동이다. 이런 논리라면 예수님은 아담의 타락 전 인성이기 때문에, “거듭난 사람들도 아담의 타락 전 인성으로 바뀌어야 하는” 모순이 생기고 만다. 변화될 수 있는 마음과 품성을 인간의 본질에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에 오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지만 거듭남은 우리의 본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유혹이 없는가? 아니다. 죄된 본성과 싸워야 하지만, 거기에 굴복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승리의
생애를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죄된 본성을 가지고 사셨지만 항상 승리하셨고, 사도 바울도 날마다 자신을 죽인다고 고백하였으며(고전 15:31),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계속적인 투쟁”을 통해서였다(1보감, 428). 무엇과의 투쟁인가? 자아 즉 “죄된 성향(propensities of sin)”을 포함한 “죄된 본성(sinful nature)”과의 싸움이다. 선지자는 “하나의 죄된 성향이라도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다”하셨고(리뷰, 1900.4.24) 성경은 이러한 육체의 성향과 싸워 이길 수 있음을 약속하고 있다(롬 8장). 우리도 그러한 성령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예수의 믿음이다.
그러나 승리하는 생애를 산다고 해서 “타락한 인성”이 “죄 없는 인성”이 되지 않는다. 거듭났어도 “죄된 본성”은 남아있다. 만일 우리의 본성이 바뀐다고 설명하여 버리면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는데, 본성이 변하면 더 이상 유혹이 없다. 거듭났다고 해서 죄 없는 본성이 된다는 주장이 1900년대 초 인디애나 주에서 있었던 <거룩한 육체 운동>이다. 거듭났어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된 본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언제 없어지는가? 예수께서 재림 하실 때 변화된다(고전 15:51). 그것을 용서하셔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하므로 우리의 본성을 다시 만듦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본성(인성)과 품성-2. 베이커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스도를 죄의 성향(propensities of sin)을 지닌 사람으로 제시하지 말라. …죄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선천적으로 불순종의 성향을 타고난다. …그분 속에는 단 한 순간도 악한 성향(evil propensi-ties)이 없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지 못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라.”(서신 8, 1895/5BC 1128~1129)
많은 사람들이 이 편지의 내용으로 예수께서 아담의 “타락 전 인성”을 취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선지자는 베이커 목사에게 편지를 보낸 1895년, 호주에서 시대의 소망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타락한 본성(fallen nature)을 자신이 취하시는 그러한 굴욕에도 불구하고”(소망, 112), “죄 있는 본성(sinful nature)을 취하셨다.”(리뷰, 1896.9.29; 치료, 181/1902)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선지자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 버릴 것인가? <성육신>은 오묘이므로 선지자께서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표현했다는 주장을 따를 것인가?
이 편지는 선입견만 내려놓고 본다면 아무 어려울 것이 없는 내용이다. 베이커 목사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강력한 강조가 마치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타락함(죄 된 성향)”을 지닌 것으로, 그래서 듣는 이로 하여금 ‘죄를 지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분을 “죄의 성향을 지닌 사람으로 제시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분의 품성에 대한 것이지 본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특권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는 모든 죄와 품성의 모든 결함으로부터 정결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의 죄 된 성향이라도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다.”(7BC 943)
이와 같이 예수께서 “죄의 성향”이 없었다는 사실이 “타락 이전의 인성”을 취하셨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명백하게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단 하나의 죄된 성향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된 성향”을 모두 버렸다고 해서 타락전의 인성이 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베이커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본성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흠 없는 품성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인성”을 나타낼 때는 “죄 된”, “타락한” 인성이라고 언급하셨다. 그러나 품성을 표현할 때는 “죄의 성향”, “타락의 오점”, “죄와 상관”없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품성에 대한 설명은 마지막 세대에게도 또다시 적용된다.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고 계시는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지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생각으로라도 유혹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으셨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 가운데 그가 발을 붙일 어떤 곳이 있는지 찾는다. 그러던 중 어떤 죄된 욕망을 품게 되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유혹의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셨다. 그러므로 그분에게는 사단이 이용할 수 있는 죄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환난의 때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상태이다.”(쟁투, 622)
그러므로 “타락 후 죄된 본성을 취했다”는 기록과 “한 순간도 악의 성향이 없었다”는 기록은 모순됨이 없는 조화로운 말씀이며 우리에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열어놓은 가능성이다.
믿음과 신앙의 방향을 결정짓는 ‘죄’에 대한 정의
“죄를 선택이라고 보면 사람이 태어나서 죄를 선택하기 전까지는 죄인이 아닐 텐데 사람의 일생 중 죄인이 아닌 시절과 죄인인 시절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은혜(십자가)가 필요 없는 시절과 필요한 시절이 있게 된다.”(교회지남 12월 27) “만일 아기가 출생하기 몇 시간 혹은 며칠 후에 죽는다면, 그 아기가 비록 한 번도 계명을 범한 적이 없을지라도, 그 아기는 여전히 둘째 사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죽는 아기들은 구세주가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ADVENTIST REVIEW, 1990.1.25)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어느 누구도 십자가의 용서하심 없이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지금 심장이 박동하고 폐가 호흡하며 맥박이 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바로 그 일을 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그 형벌을 받게 해 주소서. 제가 사람의 자리에 서겠습니다. 사람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소서”라고 하셨다(편지22, 1900.2.13). 그날 아담과 하와가 왜 즉시 죽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사람의 죄를 몸소 지시고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죗값을 지불하기를 자원”하셨기 때문이다(리뷰, 1901.4.23).
이 이야기가 로마서 5장이다. 죄가 있자마자 구세주가 있었다. 예수께서 화목 제물(atonement)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셨다는 말이다. 그들이 죽었어야 하는데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인간은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왜냐면 예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즉시 에덴동산에 오셔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이다. “세상의 기초가 놓인 때부터 죽임당한 어린양(Lamb slain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KJV, 계 13:8). 예수님은 인류 창조 후 4000년이 지나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시다.
인류의 시조가 율법을 범했을 때 그들은 영원한 사망을 당할 운명에 처해졌다. 아담의 허리 가운데 있었던 그 자손들 역시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도 없이 존재할 수 없게 될 형편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값인 영원한 죽음을 치르심으로 다시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이 생명은 은혜로 받은 것이다. 죄를 범한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착하든지 악하든지를 막론하고 아담의 허리 속에 있는 자손들 누구에게나 한 번은 태어나서 살 수 있는 은혜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주신 것이다. 이 생명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여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아담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고 아담이 범죄 했기 때문에 그 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무언가를 갚으셨을 때는 완전히 갚으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도 둘째 사망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했을 때만 멸망당하는 것이다. 가인이 그렇게 했다. 그는 십자가를 거절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멸망을 당하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어린 아기들은 십자가의 은혜를 안고 태어난다. 아기들이 둘째 사망을 받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영원한 멸망 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들을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준 그리스도의 십자 가를 그들의 이성과 의지가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 그 전에는 죄의 결과로 온 첫째 사망만이 있을 뿐이다. 죄의 책임과 죄의 결과를 혼동하면 안 된다.
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복음의 결론이 나온다. 대부분의 기 독교인들 이 믿고 있는, 심지어 1950년대 급격한 변화로 말 미암아 재림교회의 대중적 신 학이 돼버린, 선택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유전으로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 자체를 죄라고 하는 원죄설은 성경의 근거가 없다. 우리가 숨쉬는 것처럼 본성 자체가 죄라는 것은 “비록 우리가 죄짓기를 선택하지 않을 때에라도 우리는 죄를 짓고 있다”라는 말이 된다. 우리의 죄된 본성이 우리와 늘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죄인이라 선고받는다. 이러한 신학은 끊임없이 용서받아야 한다. 죄에서 놓여나는 순간이 있을 수가 없으며 용서받은 즉시 또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다. 존재 자체가 죄인이다.
죄를 선택하지 않을 땐 십자가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죄는 필연적인 것이고, 계속적인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은 진짜 죄, 즉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 감각을 무디게 하여,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라는 자기합리화의 문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은혜의 시간이 끝난 후에, 비록 우리가 죄짓기보다는 죽기를 선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반역할 때와 다를 바 없이 우리의 본성적인 근본 죄 때문에 죄인이라 선고되는 것이며,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인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것은 재림교회의 신학이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타락한 본성”은 범죄의 결과(영향)이지 죄가 아니다. 어린아이가 죽게 되었을 때 “타락 한 본성”을 책임지고 영멸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 본성의 힘에 굴복하여 하나님께 반역하고 사단의 뜻을 따를 때 죄가 성립된다.
이와 같이 죄에 대한 개념이 빗나가면 그리스도의 인성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믿음과 신앙의 방향이 잘못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논점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죄의 책임을 지고 둘째 사망을 받도록 출생한 것이냐, 아니면 십자가의 은혜로 생명을 받은 인류가 영생의 초청을 선택하느냐 마느냐”인 것이다. 죄에 대한 성경적 정의, 어린아이의 둘째 사망에 대한 부당성 등은 <마지막 세대 26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본 글을 마무리하면서 지금은 작고하신 멀빈 맥스웰 목사(앤드루스 대학원 교회사 담당 교수였으며, ‘다니엘/요한계시록 연구’를 통해 재림 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목사. ‘재미있는 성경 이야기’의 저자 아더 맥스웰의 아들이기도 하다)의 <북미지회에 보내는 호소편지> 중 일부를 인용한다. 전문은 http://www.finalg.org와 <마 지막 세대 3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 견고한 토대 월간지(Hope International 자영 선교 기관에서 발행하는 재림 신앙 월간지)는 다른 독립 출판물들과 마찬가지로 ⑴ 1950년대에 일어난 “신신학”을 염려하고 ⑵ 예수는 아담처럼 깨끗하게 창조된 게 아니라 우리 모두와 같이 인간의 유전을 받고 태어났었음을 강조하며 ⑶ 재림 맞을 준비에 필요한 성품의 완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주장들은 교단 내의 자유주의 신신학파 뿐만 아니라 일부 보수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성가신 소리가 되고 있습니다. 분노한 그들은 그러한 교리를 강조한다고 견고한 토대 잡지를 질타합니다.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면 견고한 토대 월간지의 주장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어야 합니까?
나는 20년 이상 재림교회의 신학발달사를 강의해 오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나는 항상 연구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동 기간 동안 나의 신학적 촉각은 늘 예민한 상태였습니다. 나의 목회 생활은 1946년에 시작되었는데 지금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1950년대에 북미지회에서 가르쳐졌던 재림 신학은 분명한 변화를 겪어야 했는데, 그 변화는 <교리에 대한 질문(QOD)>의 편집인 중에서 두 명의 저자와 앤드루스 대학에서 매혹적인 설교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두 명의 세미나리 교수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그 변화는 오늘날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후에 교육과 행정의 고위직에 오른 당시의 학생들에 의해서 왜곡되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재림교회 안에 “신신학”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견고한 토대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역사적이며 올바른 재림 신앙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1950년대에 소수에 의해서 가끔씩 주장되었던 특정한 견해들이 우리들의 학교를 거쳐 간 수많은 재림 신도들에 의해서 재구성되고 새로운 강조점들이 추가되어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서 언급해야 될 것은, <교리에 대한 질 문>의 편집인들이 그 당시 그들의 책을 변호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추한 표현들이 있는데 비록 늦었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그 표현을 그 책으로부터 깨끗이 삭제해 버리길 바랍니다. 당시 수많은 재림교인들이 그 책에 소개된 새로운 신학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 책의 편집인들은 잔혹하게도 보수주의자들을 “광적인 사람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나는 그러한 “광적인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으며 또한 그들을 높이 존경합니다. 그 중엔 태평양 유니온 대학(Pacific Union College)의 훌륭한 교수님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들은 후일 나의 사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들입니다.
물론 지도자들은 그런 험한 말을 함부로 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지도자들에게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십일금을 지도자들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헌납하기를 기대하는지 내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아담의 타락 후 인성”이었다는 견고한 토대나 그와 유사한 잡지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신신학파의 아우성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견고한 토대의 편집인들 같은 구신학파가 교리 문제를 계속해서 논점화 시키므로 그들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합시다. 논쟁은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논쟁을 공개적으로 시작한 것은 1949년 판 <바이블 리딩스>, 1957년 판 <교리에 대한 질문>, 그리고 몇몇 신신학 교수들과 그들이 길러낸 후진들입니다. 그 논쟁 가마는 그 후 보수파와 신신학적 자유주의파들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끓고 있지요.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이 현재 교단의 언론과 학교들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반격은 싸움의 원인이 된다”는 옛말이 생각납니다.
북미지회의 주요 출판 기관과 대학들을 신신학파가 장악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북미지회의 각급 조직과 기관들의 인선과 선택이 빚은 결과입니다. 원인은 결과를 낳는 법이므로 그런 편집인들과 학장들을 선택한 북미지회는 그에 따른 반발을 예측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총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도 없는 신신학을 영입한 신신학의 신봉자들을 각급 요직에 앉혀 놓은 북미지회가 이제 와서 충성된 교인들이 옛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을 때 받았고 또 생명을 바쳐서 받들기로 한 옛 가르침의 근거와 정당성을 옹호하는 글을 출판한다고 하여서 이를 반칙이라 외치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신사적인 소행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믿음으로 무장하고 기도에 정진하며 예언의 신 지식에 충만한 후덕한 지도자들, 필요할 때는 과감한 공개 사과와 회개를 주저치 않으리만치 마음이 정결하고 영적 감화력이 뚜렷한 지도자들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주님께 기원하며. 베어린 스프링에서 멀빈 맥스웰.”
긴 씨름이다. 언제 끝날지 막연해 보이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느낌이기도하다. QOD를 전후로 한 신학 논쟁이 쓸모없는 일이라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 닮기까지 깎아내야 하는 품성의 결점들이 있는 필자이지만, 본래의 재림 신학이 추구해 왔던 그 예수를 만난 이후 성령과의 동행은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나의 구주, 나의 친구 되신 예수님! 진리에 대한 논쟁만으로는 남은 교회와 함께 서도록 영혼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 진리를 심령에 간직해야 하며 남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진리에 의해 성화되어야 한다. 주님과 동행하는 날마다의 산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한 중보자로서의 사업을 끝내실 때는 죄에서 정결하게 하는 속죄의 피가 없을 것이다(계 22:11). 시련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숨겨진 잘못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모든 죄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승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부조, 202).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맞고 환난의 때에 보호를 받을 자들은 예수의 형상을 충만하게 반사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거룩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그분과 함께 거할 수 없음을 우리 모두 기억하자”(초기, 71).
재림교회는 나의 어머니이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마지막 교회! 누구도 이 교회를 바벨론이라거나, 촛대가 옮기었다는 등의 말을 할 수 없다. 지난 <마지막 세대 25호>에서 밝혔듯이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생애의 빛>은 어떤 새로운 교회나 조직이 아니다. 그들은 재림교회의 순결한 가르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각 지역교회에서 지도자로 평신도로 교회에 봉사하며 음으로 양으로 생애의 빛을 지지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 생애의 빛 선교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필자의 독특성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대신, 얼마 전 합회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따르기로 하고 <예배소>등록을 신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그럴지라도 나는 재림교인이다. 비록 재림교회 안에 잘못된 가르침들이 편만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 남은 백성을 출현시키며 세상 역사를 마치실 것을 기대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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