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세대 제 27 호
1950년대 중반에 재림교회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
– QOD가 어떻게 재림교회의 방향을 바꿔놓았는가? –
저자: 강병국 목사
QOD란 무엇인가?
지금 재림교회 안에는 QOD를 만든 50주년을 기념하여 한창 열띤 논쟁들이 오가고 있는 중이다. QOD 란 “Questions On Doctrine” 이라는 말의 약자로서, “Eternity” 라는 개신교회 복음주의 월간지의 발행인이었던 도널드 반하우스 목사와 그 당시 재림교회의 이단 시비를 연구하고 있던 젊은 학자 월터 말틴의 도전을 상대로 재림교회의 몇몇 학자들이 모여 1950년도 중반에 출판한 우리의 신조들을 설명한 “교리에 대한 질문들” 책을 일컫는 말이다.
이 책은 개신교회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우리의 정통 신앙을 타협하거나 내어 버리는 일을 시도함으로서 재림 교회 안에 큰 소용돌이를 야기시킨 책이다. 그러나 교회는 오랫동안 이 책에 대하여 항거하는 목소리를 높여 온 자들을(대표적인 예로 M.L. Andreasen 목사가 있다), 극단파 보수주의자들 혹은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자들로 지목하는 일에 서슴지 않아 왔다.
이번 앤드류스 대학에서 개최한 QOD 50주년 기념 학회에 참석한 학자들 중에서 기조 연설을 한 Herbert Douglass 박사의 글에 의하면 M.L. Andreasen 목사는 신실한 재림교회의 학자로서 재림교회의 정통 신앙을 고수하던 분으로 QOD에 나타난 타협된 부분들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한 양심적인 학자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왜 한국 교회지남에서는 그를 마치 극단적인 견해를 가졌거나, 또는 자기의 견해가 관찰되지 않자 문제를 야기시킨 괴팍한 사람처럼 묘사하였는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리고 Andreasen 목사의 항의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과거나 현재나 교회 안에 문제를 유발시켜 온, 한쪽으로 치우친 자들처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분리를 야기시켜 온 편견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앤드루스 대학교에서 열린 금번 신학회의에서 한국인인 “줄리어드 남(Julius Nam)”교수는 “The Questions on Doctrine Saga: Contours and Lessons” 라는 제목으로 소논문을 발표하고 학회 토론의 사회를 보았다. 그는 어느 한편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재림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그리고 원래 재림교회의 가르침에서 무엇이 변경되었는지에 대한 견해를 꽤 정직하면서도 공정하게 소개하였다. 그것이 바로 생애의 빛이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려고 하는 생각이다.
QOD가 도대체 무슨 일을하였 단 말인가?
QOD의 문제점은, 개신교회에게 우리가 이단이 아니라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독특한 진리와 복음을 타협내지는 버렸다는 사실이다. 물론 QOD가 개신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들과 오해들을 상당 부분 풀어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예언의 신의 문구를 바꾸어 넣거나 약간 조작하여 뜻을 오해시키거나, 심지어는 정통의 진리를 타협시키려는 의도적인 작전으로 잘못된 소제목까지 적어 넣음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재림 신앙을 잘못 이해하도록 오도한 것이 문제였다. 바로 이러한 방법이 개신교회에서 자기들의 잘못된 교리를 옹호하는 방법들이 아닌가!
이 일의 결과가 이렇게 큰 영향을 교단에 끼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 자신들도 잘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많은 비판과 호소들을 무시해 버린 채 책을 출판하였다. 그 이후부터 모든 재림교회의 학교, 특히 신학교들에서는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학생들과 선생들과 목사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50년이 지난 현시점에 와서는 많은, 혹은 거의 모든 재림교회의 목사들이 하늘 지성소의 사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아니면 외면하는 실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현대 진리인 죄의 도말, 인침의 경험, 환난의 때에 중보자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경험들에 대한 중요한 설교들을 교회 안에서 더 이상 들어 보기가 힘든 실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개신교회의 복음의 가르침이나 우리들의 가르침이나 대동소이하게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하늘 지성소로 들어 가셔서 새로운 중보 사업과 조사 심판을 시작하셨다는 깨달음으로 출발된 재림교회의 복음은 완전한 성소제도의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과거의 그 어느 세대도 재림교회처럼 성소 제도의 결론을 이렇게까지 이해할 수 있는 빛을 가지고 있던 세대가 없었다. 십자가에서는 속죄와 구원이 마련된 것이지 구속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구속 사업은 하늘 성소에서 현재 진행 중이며 주님의 대속죄일의 봉사 사업이 마쳐질 때에 완성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빛대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심판을 통과하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믿기만 하면 모든 구원의 문제가 단번에 영원히 해결되어 버리는 것처럼 가르치는 개신교회의 복음은 반쪽짜리 복음이다. 아직 바벨론의 포도주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 종교 개혁 신학에 기초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마음의 경험이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다. 성소 제도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죄의 문제를 어떠한 단계들을 거쳐서 해결하여 주시는가를 보여 주는 청사진이다. 그런데 QOD는 십자가에서 구속 사업이 완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하늘 지성소 사업을 격하시킨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재림교회의 정통 진리가 아니다.
구속(Atonement)에 대한 이슈
십자가에서 속죄가 다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재림교회의 성소 기별에 대하여 개신교회에서 도전하여 오자 그것에 반증하기 위하여 씌여진 QOD는 결국 우리 재림교회의 믿음을 격하시키는 말들을 포함시켜 놓고 만 것이었다. 예수님의 하늘 성소 봉사를 그저 십자가의 공로를 각각 개인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만 설명해 준 것이다. 인류는 예수님의 하늘 성소 봉사 사업에서 십자가 이외에 더 필요한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설명하여 버린 것이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 사업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설명하여 버린 것이다. 이 문제가 바로 신신학과 재림교회의 정통 신학을 갈라지게 하는 이슈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늘 성소 봉사의 사업은 예수님의 피를 적용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 예수님의 하늘 성소에서의 중보 사업은 그저 당신의 피를 적용시키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한 죄와 유혹에 더 이상 빠지지 아니하고 승리하도록 도와주어서 온전한 자로 세우시기 위한 역사가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지성소 봉사를 통하여 조사 심판은 물론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순종하는 여자의 남은 무리들을 최종적으로 준비시키시어 죄의 역사 시초에 일으킨 사단의 비난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밝히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언의 신이 우리에게 주는 분명한 빛이다. 재림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영원한 복음은 종교 개혁 신학에서 훨씬 더 발전한 빛이다. 요한 칼빈주의와 다르다.
예언의 신은 “하늘 성소에서 사람을 위하여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십자가 상에서의 그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긴요하다”(쟁투, 488) 라고 선포하고 있다. 초기 재림 운동 당시 재림 교인들은 예수님의 지성소 봉사 사업을 아직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의 경험과 흡사한 순결한 영적 경험을 하였다. 하지만 예언의 신은, 그들이 아직도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였다. 그들이 지성소에 따라 들어가 새로운 의무들과 경험을 발견하게 될 때에야 비로서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그 대목을 직접 읽어 보도록 하자.
“그러나 백성들은 아직도 그들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이루어야 할 준비의 과업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향하게 하는 빛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음으로 거기서 봉사하시는 대제사장을 따라감으로 그들에게는 새로운 의무가 밝혀질 것이었다. 또한 교회는 또 하나의 다른 경고의 기별과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선지자는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게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게 하되 금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말 3:2,3)고 말한다.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이 그치게 될 때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 없이 서게 될 것이다. 그들의 옷은 흠이 없어야 하고, 그들의 품성은 피 뿌림을 통하여 죄에서 깨끗해졌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들 자신의 꾸준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악과의 투쟁에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하늘에서 조사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회개한 신자들의 죄가 성소에서 도말되고 있는 동안,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정결케 하고 죄를 버리는 특별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요한계시록 14장의 기별에 이 사업이 더욱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일이 완성될 때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쟁투, 424,425)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남은 교회가 환난의 때를 지나갈 때에 하나님 앞에 중보자 없이 서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진리와 복음의 빛은 계속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재림 운동 이후에 기독교회 안에 영원한 복음을 이해하는 무리들을 일으키신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가 남들에게 변명하거나 부끄러워해야 할 사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시대에 시험하는 진리를 가지고 계셨다. 노아의 시대, 엘리야의 시대, 침례 요한의 시대 등등이 그러하다. 재림교회의 영원한 복음은 이 시대에 세상을 시험하는 현대 기별이다. 이러한 중요한 사안을 재림교회의 몇몇 학자들이 개신교회의 인정을 얻어 내고 싶은 열정에서 가장 중요한 영원한 복음의 핵심을 타협하면서까지 변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여자의 남은 무리가 어떠한 자들이 되어야 할 것에 대한 다음의 영감의 말씀을 읽어 보자.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고 계시는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지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생각으로라도 유혹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으셨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 가운데 그가 발을 붙일 어떤 곳이 있는지 찾는다. 그러던 중 어떤 죄된 욕망을 품게 되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유혹의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셨다. 그러므로 그분에게는 사단이 이용할 수 있는 죄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환난의 때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상태이다” (쟁투, 622)
만일 우리가 구속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개신교회와 동일하다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재림교회를 일으키셨는가? 또 하나의 다른 교파가 필요하셨던가? 1844년에 하늘 지성소로 옮기셔서 새로운 중보와 구속 사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재림 운동을 왜 일으키셨다는 말인가? 우리는 우리의 독특성을 변명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남은 무리들을 일이키시고 계시다. 그들은 모든 죄의 파워에서부터 해방되어 예수님의 승리의 경험을 가지게 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인성 문제에 관한 타협
예수님의 인성에 관한 타협이야말로 QOD가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큰 실수이자 과오이다. QOD는 예수님의 인성을 죄 없는 인성으로 설명하여 버렸다. 그리고 QOD의 사상을 반대하는 자들은 재림교회 안에 있는 소수의 극단파들이라고 설명하며 대다수는 그러한 극단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QOD 650쪽에서는 소제목을 “죄 없는 인성을 취하심”이라고 달아 놓는 담대함까지 발휘하였다. 이것은 1950년도 중반까지 재림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신조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화잇 부인, 프란시스 니콜, 우라이아 스미스, 윌 칵스, 하스켈, 프레스캇, 죤스와 와그너 등등 유수한 우리의 선조들도 소수의 극단파들이었단 말인가? 그들은 한결 같이 예수님의 인성을 우리와 같은 죄성인 타락된 본성을 가지고 계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죄의 본성과 타락한 성정을 가지고 있는 자체가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어야 온전한 대속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많은 재림교인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QOD 383쪽은 예수님의 인성을 우리 인간들의 유전적인 본성과 아담의 자손의 타락된 오염에서부터 제외되신 것이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인물이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천주교회의 신학을 세운 어거스틴의 신학이다. 그래서 천주교회는 예수님을 인간의 본성에서 완전히 자유케 만들기 위하여 무염시태설이라는 이상한 교리를 조작해 낸 것이었다. 즉,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죄 없는 본성으로 바꿔 놓은 후에 잉태케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죄인들과 똑같은 자로 묘사해서는 안 된다고 예언의 신은 경고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은 죄를 지어본 성정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어본 죄인의 성정(passion)은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고 말씀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슈는 많은 사람들이 본성과 품성을 혼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지니셨으나, 완전한 품성, 즉 죄의 오염이 없는 완전한 품성을 지니고 계셨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예언의 신은 우리들도 단 한 가지의 죄된 성향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R&H, 4-24-1900 참조). 그렇다고 거듭날 때에 우리의 본성이 갑자기 죄 없는 본성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영감의 말씀은 항상 동일하다. 성경 히브리서 2장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모든 일에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되심이 마땅하니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에서 친히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하여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 (히 2:14-18, 킹 제임스 역)
성경은 예수님께서 죄 없는 본성인 천사의 본성을 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음의 예언의 신의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예수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는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소망, 49)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은 불공평하고 순종할 수 없다는 증거로써 아담의 범죄를 가리켜 왔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으로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유혹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 아담은 아무런 죄의 영향을 받지 않았었다. 아담은 완전한 장년으로 몸과 마음에 충만한 활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에덴의 영광에 둘러싸여 있었고 날마다 하늘의 천사들과 교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단과 상대하시기 위하여 광야에 가셨을 때에는 그렇지 못했다. 4천 년간 인류는 체력과 정신적 능력, 그리고 도덕적 가치가 퇴보되어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퇴보된 인류의 연약함을 취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만 그는 인류를 쇠퇴의 깊은 구렁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셨다.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시험에 정복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처지에 서지 못하셨을 것이며, 아담이 얻지 못한 승리를 얻을 수 없으셨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점으로든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보다 더 혹심한 투쟁을 당한다면 그는 우리를 도우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구주께서는 온갖 연약성을 지닌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시험에 굴복할 가능성을 가진 인성을 취하셨다. 우리는 그가 당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도 질 것이 없다.” (소망, 117)
화잇 부인께서는, 1888년도에 가르쳐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기별이 바로 마지막 시대에 온 땅을 환하게 비쳐야 할 넷째 천사의 영광이요 영원한 복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은 예수님의 지성소의 중보 사업의 중요성과 마지막 남은 무리의 준비에 대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죄되고 타락한 인성을 가지시고도 모든 죄를 승리하셨으며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시는 모본을 보이셨다는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왜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인정을 받거나 내지는 이단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그 중요한 특성을 가진 기별을 타협해야만 하는가!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타협을 좋은 방향으로의 발전이라고 설명한다. 좀더 나은 교리적인 설명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러할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렘 6:16)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점이 하나가 있다. 예수님의 인성을 우리와 다른 본성인 죄 없는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결론을 보면 결국, 완전한 죄에 대한 승리와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닮은 품성을 이룰 수가 있다는 면을 무시한 채, 우리는 죄인임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리하여 승리보다는 죄에 대한 용서의 면을 더욱 강조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인성을 어떻게 믿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의도가 은연 중에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인성을 가지시고 죄 없는 생애를 사셨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화잇 부인께서는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를 하나님께 묶는 황금 고리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1 기별 , 243 참조). 여러분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어떠한 방향으로 예수님의 인성을 믿고 있는가?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글이 여러분들께 더 확실한 빛을 던져 드리게 되기를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