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세대 제 26 호
2007년 교회지남 7,8월호에 대한 유감과 부담
– 재림 신학과 그리스도의 인성 –
저자: 손계문 전도사 (1997년 장로교에서 진리의 말씀따라 재림교회로 개혁 후, 2005년 삼육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현 주님의 다시오심을 위해 봉사하며 섬기고 있다.)
논쟁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예수님의 인성이 “아담의 타락 후 인성”이었다는 재림교회의 역사적 견해에 대해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라고 외치고 있는 신신학파의 외침을 우리는 듣고 있는데, 이 논쟁은 1950년대 교회 안에 신(新)신학이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최근 교회지남 기사는 글쓴이도 밝히지 않은 채 ‘정말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 정도로 신신학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염려와 답답한 심정으로 교회를 위해 기도했지만 오히려 지금은 감사한다. 정로에서 벗어난 그 기사를 보고 깨어있는 수많은 재림성도와 목회자들이 오히려 현 교회의 신학적 위기를 절실히 느끼고 스스로 말씀을 연구하는 자세를 더욱 견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인성이 “아담의 타락하기 전의 인성이었는가, 타락 후의 인성이었는가?”의 과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그릇된 이해를 갖게 되면 구속의 경륜에 대한 모든 면들에 있어서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람들 간의 차이는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품성에 있다. 그러므로 오해하지 말 것은, 예수님의 신성이나 그분의 품성이 아니라 이 땅에 오실 때 취하신 인성에 한하여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올바로 이해하게 될 때, 주께서 시험받는 자들을 어떻게 능히 도우실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며(히 2:17),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어떻게 구원하실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히 7:25).
그분께서는 육신적 마음의 성향이 얼마나 강한지를 아신다(5T 177). 이것은 하나님으로서 전지(全知)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경험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모형을 모방하고 닮는다고(resemble) 하더라도 우리가 그 모형과 꼭 같을(equal) 수는 없다”(2T 549).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된 인성을 가지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는 어려운 신학적 문제여서 한편은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한편은 절대적으로 틀리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논쟁보다는 성경과 예언의 신에 기초하여 더욱 연구하는 일이 필요하”다(교회지남 7월 p. 31).
이것은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신학자들의 논란거리로 치부하고 말아야 하는 것인가? 사람마다 이해하기 나름인가? 이처럼 분명하고 명확한 개념을 애매모호한 신학으로 만들어 버리는 주장은 신신학자들이 자신들의 논지를 펼 때 쓰는 방법들이다. 저자는 ‘논쟁보다는 성경과 예언의 신에 기초’해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도 두 차례에 걸친 연재 기사 동안 단 하나의 성경구절이나 예언의 신을 인용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만을 피력하고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는 신비이지만, ‘어떤 사람이 되셨는지’는 우리에게 명확히 말씀하여 주셨다. 우리는 그 단순한 말씀들을 이제 살펴 볼 것이다. “진리가 경멸과 멸시를 받는 일이 있다 해도 진리가 제시된 후 조사되고 살펴지고 논쟁되기를 바라신다. 사람들의 마음에 소요가 일어나야만 한다. … 그러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잠자는 영혼을 깨울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들을 일깨우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들이다”(MB 33).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타락한 후의 죄된 본성을 취하셨다면 무슨 말로 변명해도 그는 죄인이 된다. 죄 된 본성만 취하셨지 죄인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죄된 본성이란 무엇인가? 아담이 타락한 후 죄된 본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신분이 이제는 죄인으로 바뀌었다는 말과 같다”(교회지남 7월 p. 31).
위 글은 태어나는 것 자체가 죄라는, 원죄론의 한 단면을 설명하고 있지만 다음의 말씀에서 보듯이 선지자는 ‘죄 된 본성이 죄’라는 어거스틴의 <원죄사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시험당하는 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알기 위하여 그분의 죄 없는 본성(sinless nature)위에 우리의 죄된 본성(sinful nature)을 취하셨다”(MM 181). “타락하기 전에 아담은 저주의 결과와 무관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 된 육체의 모양으로 오셨다”(3SM 141).
왜 예수님께서 타락한 죄된 인성을 쓰고 오셨는가? “우리의 타락한 속성을 취하심으로 그분은, 그것을 위하여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넉넉한 준비를 받아들일 때, … 그가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신다.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그 동일한 신성의 능력의 도움에 의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가능함을 입증하셨다”(3SM 132, 134).
이것이 바로 대쟁투의 초점이며 사단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그토록 공격하는 이유이다.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KJV, For verily he took not on him the nature of angels; but he took on him the seed of Abraham)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6,17).
“일부 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우리와 똑같은 처지가 되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와 동일한 본성 곧 ‘죄된 본성’을 취하셨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다시 말하면 타락한 이후 아담의 죄된 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다”(교회지남 7월 p. 30).
일부 교인들이 누구인가? 신신학에 물들지 않은 재림성도들뿐만 아니라 바로 재림교회 선구자들과 선지자이다. 1950년대 신신학을 재림교회 안에 들여온 리로이 E. 프룸과 동료 목사들은 개신교 신학자(월터 마틴)에게 선구자들과 선지자의 인성론에 대하여 변명하면서 “어디에나 무책임한 극단주의자들이 있기 마련”(Donald Grey Barnhouse, “Are Seventh-day Adventists Christians?” Eternity, Sep. 1956. p. 75)이라고 보고한 뒤, 드디어 그 “초기의 잘못된 견해가 수정”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Froom, “Movement of Destiny” pp. 472, 473).
1888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셋째 천사의 기별)”의 복음을 선포한 두 젊은 목사는 미네아폴리스 총회 때부터 20여 년간 일관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음에도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분과 같은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다.
A.T. 존스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다. … 이것은 하나를 빼놓은 모든 일이 아니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RH, Sep. 1, 1896). “하나님의 비밀은 죄 없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니고 죄 있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죄 없는 육신, 곧 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 안에 나타나시는 것은 조금도 비밀이 될 수가 없다”(RH, Sep. 29, 1896; RH, Apr. 18, 1899)고 하였으며, E.J. 와그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주께서 이 땅에 계실 때의 복음과 같다. 그때에도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고, 오늘날에도 인간의 모든 성정과 욕심을 지닌 바로 그 육신과 만나 정복하신 하나님이시다”(RH, Sep. 18, 1900; RH, Oct. 2, 1900)라고 하였다.
선지자의 견해도 빠뜨릴 수 없는데, “죄 범한 세상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fallen nature)을 자신이 취하시는 그러한 굴욕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그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였다”(DA 112). “예수께서 인간의 타락한 성정을 취하심으로 … 사단은, 예수께서 타락한 인간의 성정을 취하시면 자기가 예수를 이길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구속의 경륜을 이루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고 말했다”(EW 150, 151). 이것이 교회지남의 저자가 일부 교인들이라고 하는 재림교회 선구자들의 견해이다.
예수를 이기지 못한 사단은 이제 “오, 예수는 타락한 인성을 쓰지 않았다. 그는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타락한 우리 본성의 욕구를 물리칠 수 없다. 사단은 이 통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시험을 가져올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 주께서는 사람이 걸어가야 할 땅을 먼저 통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사단과의 투쟁에 있어서 우리가 불리한 처지에 놓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모든 것을 견디셨다. 그의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이다”(DA 122).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 요이 1:7).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이 성경절들을 “그리스도교의 시금석”이라고 표현하면서, 적그리스도가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William W. Prescott, The Doctrine of Christ, 1920, p.1).
“그리스도께서 죄의 극복을 타락하기 전의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시면 되지 구태여 타락한 이후의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실 필요가 없다”(교회지남 8월 p. 33).
구태여 타락한 이후 인간으로 시작하셔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대한 구속 사업은 구속자가 타락한 아담의 자리를 취하셨을 때 성취될 수 있었다”(RH, Fer. 24, 187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으로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유혹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 아담은 아무런 죄의 영향을 받지 않았었다. 아담은 완전한 장년으로 몸과 마음에 충만한 활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에덴의 영광에 둘러싸여 있었고 날마다 하늘의 천사들과 교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단과 상대하시기 위하여 광야에 가셨을 때에는 그렇지 못했다. 4천 년간 인류는 체력과 정신적 능력, 그리고 도덕적 가치가 퇴보되어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퇴보된 인류의 연약함을 취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만 그는 인류를 쇠퇴의 깊은 구렁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셨다”(DA 116). “그분은 그분의 거룩한 영혼에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결과를 취하셨다. 자신을 낮추시고 한 걸음 한 걸음 타락한 인성의 수준까지 내려오셨다. … 우리 타락한 인류의 희망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에서이다”(3SM 128). “그는 인류에 속한 자들과 동일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사단이 인간이 영원히 자신에게 속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손에서 사람을 구하여 낼 수 없다고 주장하였을 때 거짓을 말하였음을 드러내야 하였다”(3SM 127).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과(롬 8:3), 종의 형체를 가지고(빌 2:7), 다윗의 혈통으로(롬 1:3)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갈 4:4)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죄의 권세를 멸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롬 8:3).
“죄된 본성을 가지고 오시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죄된 본성과 죄인은 사탄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영역이다.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영역으로 들어오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교회지남 8월 p. 33).
가려 뽑은 기별 1권에서는 <그리스도의 시험>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충분한 설명이 되어 있는데 그것은 저자가 “사탄의 영역”이라고 표현한 바로 그 시험들을 내부적으로 투쟁하시고 경험하셨다. 그리스도가 취한 본성은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실제”(1SM 94)였으며, “인성을 쓰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인간을 공격하는 모든 유혹들 곧 격렬하고 겉으로 보기에 압도적인 시험과 씨름하셨는데 그 시험들이란 식욕의 방종,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는 일에 나타내는 주제넘은 모험심, 이 세상의 우상 숭배, 이생의 현혹적인 쾌락 때문에 영원한 축복을 희생시키는 것”(1SM 95)들과 씨름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저항하신 유혹들은 우리가 정말로 이기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러한 시험들은, 그의 성품이 우리의 것보다 더 뛰어난 만큼 더 큰 힘으로 주어졌다. 그 위에 지워진 세상의 무거운 모든 죄악들과 함께, 그는 식욕과, 세상을 사랑함과, 옳지 못한 상상으로 이끄는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한 사랑함에 대한 시험을 받으셨다”(DA 116/영문직역).
이러한 선지자의 기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취하셨다면 구세주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신신학자들에게는 매우 당황스런 표현이기 때문에 결국 선지자의 증언들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부분 선택하거나 증언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기억하자. ‘남은 무리의 흔들림은 증언의 말씀을 불신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권면이 우리에게 있다(LDE 175; 1T 201).
사단은 순결한 재림교회의 신앙에 바벨론의 오류를 뒤섞어 놓고 있으며 그리하여 마지막 남은 교회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도록 끊임없이 애쓰고 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가 당하는 이 시련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단 한 번도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신 일이 없습니다”(현대어, 히 4:15). 오, 우리 주님은 내가 싸우는 투쟁을 아시는 분이시다. 주님께 감사하자.
“사탄이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순종할 수 없는 법을 요구하셔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 그리스도는 타락 후 아담의 본성과도 같지 않았지만 타락 전 아담의 본성과도 같지 않으셨다. … 그리스도께서는 4,000년 동안 죄로 더럽혀진 세상에 죄의 흔적과 유전으로 약해진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은 똑같이 죄를 알지 못하는 순결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차이는 아주 컸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담도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었음을 증명하였다”(교회지남 8월 p. 33).
위 글을 정리하면,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인성은 아담의 타락 전이고 육체(몸)는 타락 후 연약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얘기다. “아담도 그렇게 살 수 있었음을 증명”했다는 대목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아담의 모본이요 구원자이지 나의 구원자가 아니다. 위 글은 시대의 소망을 비슷하게 인용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예수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는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DA 49).
E.J. 와그너는 그리스도론을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연결하여 설명하였다. “예수님의 조상들이 되었던 다윗과 그 후대의 왕들의 역사를 읽어보라. 그 조상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방탕하고 포악한 우상숭배자들이었다. 바로 예수께서 그와 같은 연약함이 있었을지라도 죄를 범치 않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이 유전성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와그너, Romans, 12).
이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자. 구주께서는 나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다. 그러한 유전적인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동일한 방법으로만 그분이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나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된다. 그분이 나를 위하여 승리하셨고 나도 그분을 통하여 승리자 이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심으로 사람의 아들인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며” 죄에 대해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 주시려 함”(KJV, 히 2:14,15)이시다.
이제 독자들은 정직하게 답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유전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으신 것은,
선지자께서 생존해 있던 1872년, 재림교회가 기초교리로 공식 발표한 후 100여 년 동안 일관되게 가르쳐왔던 타락 후 인성(Postlapsarian)인가?
100여 년 이상 가졌던 견해가 몇 신학자들에 의해 1950년대부터 급격하게 변경되어 새 그리스도론으로 발표된 ‘악한 성향을 유전 받지 않은’ 타락 전 인성(Prelapsarian)인가?
1980년대부터 제시되어 현재 가장 널리 퍼져있는 둘 다 포함하는 견해, 즉 영적인 본성은 타락 전(죄의 본성을 입지 않은), 몸의 본성은 타락 후(배고픔, 고통, 연약함을 느낌)라는 복잡한 인성인가? (이 견해는 내부적인 죄의 힘을 느끼지 않았다는 ‘타락 전 인성(Prelapsarian)’과 일맥 하는 얘기며, 나아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영과 육을 분리하는 영혼불멸설의 기초가 된 소크라테스의 이원론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죄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야말로 이 “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떠한 답을 얻게 되는지에 따라, 구원론 및 예언해석 등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일에 커다란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죄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사람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정립되며,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과연 성품의 완전과 죄짓지 않는 생애가 성경적으로, 합법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아니면 극단적인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를 결정하게 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아담의 타락 후로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롬 3:10)”(교회지남 7월 p. 31).
죄의 성경적 정의는 “죄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들을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켰으며”(DA 208). “사람이 죄를 섬기기로 선택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이다”(DA 763). 시대의 소망은 ‘죄된 본성’이 하나님과의 분리를 초래했다 하지 않고 ‘범죄’하므로 깨어진 관계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한 성경구절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인데, 성경은 그 이유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롬 3:23)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된 본성을 물려받아 죄인이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의인이 없게 된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범했다”는 말은 의지와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는 말이고 따라서 선택에 의한 결과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 비슷한 성경절이 롬 5:12절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in whom) 죄를 지었다’는 원죄론을 전개해 온 학자들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KJV, for that all have sinned / NIV, because all sinned)’로 해석하는 것이 성서적이다. 다시 말해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내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사단은 그 아무도 죄(SIN)를 짓도록 강요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죄는 죄를 짓는 자의 개인적 행위이다.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마음에 존재할 수 없다”(ST, Dec. 18, 1893). 죄의 영향(본성)과 죄 그 자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의 뜻은 거듭나기 이전에는 아무도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가 죄된 인성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취하였을 뿐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은 소유했거나 취하였거나 간에 완전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타락 이후의 죄된 본성을 취하였다면 그는 완전한 죄인으로 태어나신 것이다”(교회지남 7월 p. 31).
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사실 죄에 대한 정의는 매우 간단하다. 많은 사람들은 어거스틴(Augustine)이 세워놓고 칼빈(Calvin)이 물려받은 원죄론(ORIGINAL SIN)을 죄의 정의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아담의 죄로 인해 “인간은 모태부터 죄인이고 그러기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죄를 범하여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어거스틴, 참회록, 서문). “죄의 책임은 본성에 있는 것이다. … 육체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인이 된다”(칼빈, 기독교 신앙의 설립 2권, 1장 p. 27).
원죄론의 문제는 “죄된 본성”과 “죄”를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또 다른 오류를 낳게 되었는데, 개인의 구원이나 멸망을 미리 정해놓았다는 예정론(Predestination)의 기초가 되었고, 또 유아세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아기는 나면서부터 “정죄”받은 죄인이기에 빨리 죄를 씻어 없애야지 만일 그 아기가 세례 받기 전에 죽으면 구원을 못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다면, 성육신하신 예수님도 죄인이 되므로 어거스틴은 또다시 딜레마에 빠지게 되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마리아는 원죄에 오염되지 않았고 존재하는 첫 순간부터 평생에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출산했다”는 가톨릭의 무염수태(Immaculate Conception)교리를 세우게 된다(가톨릭 교회헌장 56항). 이와 비슷하게 이 원죄론을 받아들인 개신교에서는 마리아의 무죄 중 출생 대신, “예수님은 아담이 죄 짓기 전에 가지고 있던 죄 없는 인성을 가지고 태어나셨다”는 입장을 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죄(guilt)는 유전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아비는 그 자식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 24:16, 왕하 14:6).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겔 18:20,24).
어린이의 본성에 대한 다음의 증언을 어거스틴의 개념과 비교해 보라.
“어린이의 정신은 본성적으로 악으로 기운다. 만일 선한 사물로 그들의 마음을 채워 주지 않은 채 버려둔다면 활동적인 마음을 가진 아이는 사단이 제안하는 것에 눈을 돌릴 것이다”(Lt 28, 1890; CG 33).
선지자는 어린이의 본성이 악으로 기울기 때문에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고 그대로 버려두어 죄를 범하게 될 때 잃어버린바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기가 죄인이라면 출생하자마자 죽게 된 아이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어 이 땅에 태어난 것뿐인데 그 책임을 아기들이 지고 영원한 둘째 사망의 불로 태워 없어져야 한단 말인가? 신신학자들은 “그렇다”라고 답하거나(ADVENTIST REVIEW.1990.1.25) 또는 하나님께서는 아기들이 자라서 하나님을 섬길지 아닐지를 아시기 때문에 어떤 아기들은 구원받고 어떤 아기들은 멸망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한 것인가? 로마서 5장은 아기가 둘째 사망을 당한다는 이런 논리를 완전히 파괴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는 거리가 먼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각 개인에 대한 유죄판결은 아담이 죄를 짓기로 결정한 것처럼 스스로 선택할 때 내려지게 된다. 세상의 법도 부모의 죄를 자녀에게 책임(정죄) 묻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세상보다도 불공평한 분으로 나타내는 것이 합당한가? 또한 성경은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겔 14:14,20)진다고 말하는데, 의는 전가가 안 되면서 죄(정죄)는 전가된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다시 말하면 아기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죄의 책임을 지고 유죄판결을 받지는 않는다. 이 개념을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악(evil)과 죄의 책임(guilt)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면 된다. 어린아이가 총을 가지고 놀다가 방아쇠를 밟아서 누군가를 쏘았을 때 인간의 법이 그 아이에게 죄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악과 죄책(guilt)의 차이점을 인정한 근거에 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난 후,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게 됐고 자연적인 죽음(첫째 사망)을 인류에게 가져왔으며, 공의는 죄를 범함에 따르는 형벌인 영원한 죽음(둘째 사망)을 불러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지심으로 그들은 두 번째 사망은 피했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첫 번째 사망은 받게 되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도 죄의 결과로 생긴 첫째 사망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금방 태어난 아기에게는 죄의 첫 번째 측면(죄의 결과, 악, 첫째 사망)은 존재하지만 두 번째 측면(형벌, 정죄, 둘째 사망)은 자신의 선택으로 죄를 짓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죄 사함의 길을 열어 주셨고 성령께서 주시는 힘에 의지하여 끝까지 사단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길 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어린 아기의 구원에 대해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갓난아기들이 불멸의 모습으로 땅속에서 나오게 될 때에 저들은 즉시로 나아와 어머니의 팔에 안기게 될 것이요 … 천사들은 어머니가 없는 갓난아기들을 받아서 저들을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간다”(YI 1858. 4; 2SM 260). “그대는 그대의 어린 자식의 구원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그대가 받을 응답이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6). … 우리들은 죽은 자식들을 만날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저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Lt 196, 1899; 2SM 259).
“아기도 죄인이기에 둘째 사망을 당하며 구주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은혜의 시기가 끝나고 예수님의 중보 없이 죄를 극복하는 삶을 산다’는 예언의 신 말씀에 “그렇다면 그때는 그리스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냐”라고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며 성화의 삶을 살게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주님의 거룩한 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가능해졌다. 성서적인 구원은 바로 우리를 죄로부터(from sin) 구원하는 것(마 1:21)인데,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리스도의 용서가 필요하며, 또 동시에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져야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더 이상 용서받음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게 “더 이상 구주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주의 역할은 죄의 용서하심과 죄를 승리하도록 하는 능력의 부여하심을 동시에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한 손에는 죄의 짐에 눌려있는 자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못을 박히셨고, 다른 한 손은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않을 수 있는 승리의 능력을 주시기 위해 못을 박히셨다.
죄는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데서 출발한 것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법을 지키지 않음)이라”(요일 3:4).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얼마나 분명한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알아야 죄가 성립된다.
E.J. 와그너 목사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다음의 설교는 <죄에 대한 성서적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만 와그너가 말한 “그리스도 인성”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을 때에,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느끼는 것과 똑같이 육신의 욕망과 성향을 느끼셨다. 왜냐하면 “각 사람이 받는 것은 자기 욕심(자기 자신의 육신의 욕심과 성향)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다(약 1:14).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이 모든 일을 경험하셨다. 왜냐하면 시험을 받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욕심이 잉태”하고 야심을 품고, 죄의 성향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죄를 낳”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의 생각에서라도, 육신의 욕망을 품거나 그 뜻을 행하도록 시인하신 일이 없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하나의 죄라도 범하시지 않으셨다”(RH, Oct. 2, 1900).
위의 와그너 입장을 분석해보면 <죄가 성립되는 과정>과 <그리스도 인성>에 대한 견해를 4단계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의 표에서 원죄론의 개념과 비교해 보라.
“죄란 선택이 아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죄인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의 선택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일이 될 것이다”(교회지남 7월 p. 31).
저자의 이 주장은 정말 어거스틴의 원죄론과 다름이 없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도 우리는 죄 덩어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용서받으며 살아야 하고, 죽는 순간까지 이 지긋지긋한 죄에서 해방되기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을 믿는다(마 1:21). “우리를 죄 가운데서(in) 구원해 주기 위해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죄 자체로부터(from)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실제로 우리가 범한 죄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로 이끄는 잠재적인 성향으로부터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다(요일1:7,9; 롬7:23,25). 그는 악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유전적, 후천적 성향을 포함한 “모든 불법”(딛 2:14)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오셨다”(DA, 671; 9BC 172). “그리할 때 우리는 모든 죄와 품성의 모든 결함으로부터 정결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의 죄된 성향이라도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다”(7BC 943).
성경은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하며(겔 18:19-20, 롬 3:23; 5:12, 약 1:14-15, 약 4:17, 요일 3:4 / 관련성경절: 요 9:1~3, 눅 13:1~5, 요 5:24, 25, 마 11:21~25), 선지자도 여덟 번이나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하셨다. “성경에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법을 범하는 것)’이다”(2ST 363; 1SM 320; 7BC 951; GC 493; COL 311 등). ‘기본교리 28’ 제7장(인간의 본질, p. 89)에서도 죄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죄에 관한 성경적 정의는 “불법”(요일 3:4),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약 4:17),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롬 14:23)하는 모든 것 등을 포함하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명령하신 것을 행하는 데 등한히 한 것이나 혹은 그분께서 금지하신 것을 행하는 것 등,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선지자의 견해를 덧붙여 살펴보자. “자녀들이 부모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참여하지 않은 부모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벌을 받지는 않는다”(PP 306). “죄는 악한 생각을 품는 데서 시작된다”(5T 177). “빛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을 등한히 하거나 거절하면 심판을 당하게 되고,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1T 116). “최고의 사람들도 괴롭히는 사단이 암시하고 일깨우는 생각과 감정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마음에 품지 않고, 증오스러운 것으로 여겨 물리쳐 버린다면, 영혼은 죄책으로 오염되지 않는다(죄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RH, Mar. 27, 1889).
구원은 모든 인류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라고 말하고 있다. 오, 성경은 모순된 책이며 그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인가?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죄에서 승리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죄를 짓지 않아도 죄인으로 존재한다면 구태여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왜 필요한가? 그리스도인 삶(성화)을 보여주는 성소의 이해와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것(죄된 본성 없이 오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창조주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는 참람된 주장일 뿐이다”(교회지남 7월 p. 31).
늘 고민해오고 답답해하던 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죄”에 대한 문제였다. 죄에 넘어졌을 때 ‘그래 본성적으로 죄인인 내가 어쩔 수 없지. 오, 주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는 십자가 없이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하며 용서하는 은혜에 간절히 매달렸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도 용서하시는 그 은혜가 크고 감사함에도 불구하고 때론 ‘이것이 정말 복음이란 말인가?’하는 답답함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도 또다시 죄를 범하게 되는 이 처절한 경험의 반복이 그리스도인 생활인가? 나는 늘 이렇게 죄와 싸우다 결국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인가? 나의 죄됨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완전함만 의지하면 되는 것인가? 속은 회칠한 무덤임에도 그저 남 보기에 경건하다 인정받고 성령의 열매로 보이는 것들이 조금 나타나면 잘하고 있는 것인가?’
또 한 가지 의문은, ‘과연 예수님은 나의 고민과 갈등과 유혹에 대항하여 싸우는 투쟁을 아실까?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이해하실까? 내 마음의 법과 죄의 법이 싸우는 이 경험이 무엇인지 아실까?’ 복음의 능력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신학적인 예수만 알고 있는 나에게 풀리지 않는 문제였다.
긴 기간 동안 처절한 씨름을 하던 어느 날 새벽, 성경을 다시 펴들고 간절히 기도했다. 성경을 지적인 깨달음을 얻으려는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복음’으로 체험케 해달라고. 그리고 천천히 읽어내려 가다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는 말씀이 내 눈에 들어왔다.
성령께서 내 심장에 똑똑히 들려주시는 말씀, “너를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겠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죄의 연약함까지도 나에게 가져오라. 너는 나처럼 변화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해 주겠다. 이 일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내가 이 땅에 오지 않았느냐! 나는 너를 사랑한다.” 오! 하나님은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수없이 보았던 말씀임에도 가려진 눈으로는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니! “하나님이 죄에서 우리를 구원 하신다”는 말씀으로 설교도 했을 뿐 아니라 수십 번, 수백 번은 들어왔던 말씀이다. 그런데 이제야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십자가의 용서하는 은혜’만이 필요했던 죄인이 ‘십자가에서 나누어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새벽 신학자들이 발명한 예수가 아닌 진짜 우리 주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과 감동은 피상적인 믿음과 교리로만 알던 그 예수님을 만지고 느끼고 뜨겁게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오, 참람되다고 하는 선지자의 말씀을 나는 사랑한다. “비록 그(예수)는 모든 인류의 정욕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순결하고 고상하지 못한 어떤 한 행동이라도 하게 만들려는 유혹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으셨다”(HP 155). 주님은 나의 모본이시며 구원자이시다.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는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믿는바와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변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지자께서는 “사단이 이 진리를 왜곡시키기 위해 모든 종류의 이론들을 불러들일 것이니 조심하라”(6T 129)고 경고하셨다. 진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은 선구자들의 피 값으로 우리 손에 귀중한 복음이 들려있다. 성육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다니! 너무나 중요해서 사단이 계속 파괴시키는 진리! 필자는 오늘도 이 진리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여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교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 영생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 속의 주님을 만나야 한다. 잘못된 신학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하므로 진리의 토대 위에 올바른 신앙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더 이상 죄인을 용서하는 구세주로 오시지 않는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십자가의 피로 죄를 씻고, 그 사랑에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 참 그리스도인들을 데리러 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믿는가”에서 “어떻게 사는가”로의 전환은 우리에게 시급한 것이다. 부디 진리에 안착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주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찾으러 오실 때 그 자리에 함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인용된 예언의 신 약자 해설>
DA 시대의 소망
MB 산상보훈
MM 치료봉사
1,2,3 SM 가려뽑은 기별 1,2,3
RH 리뷰 앤 헤럴드
1,2,5 T 교회증언 1,2,5
EW 초기문집
LDE 마지막 날 사건들
COL 실물교훈
Lt 편지
CG 새 자녀 지도법
YI 청년지도자
HP 저 하늘에는(미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