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세대 제 25 호
1. 도대체 “생애의 빛”(견고한 토대)이 누구인가?
저자: 손계문 전도사 (1997년 장로교에서 진리의 말씀따라 재림교회로 개혁 후, 2005년 삼육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현 주님의 다시오심을 위해 봉사하며 섬기고 있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필자는 교리를 고수하고 다른 복음을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이끌고자 막중한 유감(有感)과 부담(負擔)을 가지고 <생애의 빛>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연구를 거듭할수록 재림신앙이 처음 그 자리에서 방향이 많이 바뀌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역사주의 재림신학”을 옹호하는 이들을 평해놓은 자료들이 왜곡되고 무고한 주장들로 폄하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더군다나 오히려 생애의 빛, 그들이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말에 발끈 노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이해한다. 바로 내가 소위 <견고한 토대(이하 생애의 빛)>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상스럽고 위험스런 집단으로 여기고 <강병국 목사>하면 이설집단의 교주로 느껴왔기 때문이다. 필자가 장로교인이었을 때 재림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처럼 진리를 깨달을 수 없도록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편견과 오해이다. “사단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되던 자들을 어리석고 악랄하게 만든다. 편견, 자만, 완고함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비참한 요소들이다”(3SM 164).
선지자께서 “지극히 소중하고 중요한 기별”(TM 92)이라고 한 E.J 와그너와 A.T 존스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필자가 연구해 갈 때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는데, 그것은 이 두 기별자들의 복음과 현재 다수의 재림교회 신학자들의 견해가 상반된 결론으로 매듭지어져 있음을 발견 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진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이, 아이러니하게도 이설로 낙인 찍힌 <생애의 빛>과 동일한 신학사상임을 발견하고 그들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로 혼란스러운 시간들을 보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목회자, 성도들과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생애의 빛>에 대해 질문하면 다음과 같은 여섯 부류가 있음을 보게 된다.
첫째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
둘째는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이 “조심해야 할 무리”라고 내린 평가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셋째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견해가 기존 신학과 다르며 “완전주의” 냄새를 풍기는 “극단론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넷째는 개인의 성경연구를 통해 “1888년 메시지”에 대한 견해가 그들과 같으면서도 그들은 뭔가 다른 것을 말하는 이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다섯째는 그들이 전하는 바가 올바른 재림교회 복음이라 생각하고 마음으로 지지하면서도 교단의 평가 때문에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
여섯째는 제일 안타까운 현상인데 <생애의 빛> 지지자들이 보여주었던 성화되지 못한 행동들로 인해 그들이 무엇을 말하든지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마음 문을 닫아버린 사람들이다.
본 기사의 목적은 이들에 대한 편견 때문에 필자처럼 진짜 복음마저 거부하는 현상의 안타까움과 함께, 우리의 재림신앙을 되찾고 살아 숨쉬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본 교단에서 출간된 서적들과 국회도서관, 삼육대학 논문 등에서, <생애의 빛>이 이단인 두 가지 이유는
⑴ 예수그리스도의 인성을 ‘타락 후 인성’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며,
⑵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경지’에 올라야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덧붙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재림교회를 바벨론이라 말하고 조직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를 제외하고는 실제 <생애의 빛>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생애의 빛>은 어떤 한 개인이나 단체의 새롭고 유별난 기별이 아니라 교회가 처음부터 믿어왔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믿고 있는 복음을 말하고 있다.
첫 번째, <그리스도의 인성> 무엇이 진리인가?
이것은 신학자들의 논쟁거리로 치부하고 말 것이 아니며 이렇게 믿든 저렇게 믿든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여길만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은 기독교 신앙의 전부요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 되셨는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기초가 되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복음의 결론과 구원 문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연결시키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황금 고리이다”(1SM 244).
이 문제는 본 교단에서 최근 출간된 <영원한 본체를 붙잡다-그리스도 인성에 관한 재림교회의 역사적 고찰(J.R. 즈커, 김중훈역. 서울: 시조사, 2006)>을 중심으로 얘기 하는 것이 좋겠다. 제목에서 말해주듯이 이 책은 저자 개인의 사상에 대한 정립이 아니라 재림교회 탄생부터 오늘날까지의 <그리스도 인성>에 관해 조명하고 있는데, 1852~1952년까지 재림교회가 100여 년간 무엇을 믿어왔는지, 그런데 1952년 이후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변질되기 시작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역사적 고찰>이므로 누가 거짓 논증을 교회 안으로 가져왔고 누가 그것에 대항했는지 신학자들의 실명들이 거론되고 있다.
이 책은 오래 전 <생애의 빛>에서 <잃어버린 재림신앙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한 서적이며, 시조사에서 출간되기 두 달 전쯤 필자가 이 책의 내용으로 강의를 하자 이설을 전하는 위험스런 자가 되었다. 사실 이 문제는 매우 간단하고 명료하다. 신학적인 복잡한 사고와 목사들로부터 들어왔던 편견을 내려놓고 성경과 예언의 신을 본다면, 너무도 쉽게 잘 설명되어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 책과 반대되는 책이 바로 한국인에게 익숙한 <넉넉히 이기느니라(신계훈, 이삼용, 오재윤. 서울: 시조사, 1990)>이다. <넉넉히 이기느니라(이하 ‘넉넉히’)>는 역사주의 재림신학을 지키고 있는 <생애의 빛>의 가르침을 반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책인데, 저자들은 책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강의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한 이후 인성>을 취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평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의 한국 목회자들에게 편견과 오해를 낳으며 그대로 대물림되고 있다.
그런데 <영원한 본체를 붙잡다(이하 ‘영원한’)>에서는 <넉넉히>의 주장은 사단이 재림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가지고 들어온 신학이라고 말한다(p.277). “1950년 경에 비성경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아 다른 하나의 해석이 재림교단 안에 생겼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인성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의 인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p.63). “엘렌 G. 화잇은 그리스도의 타락 후의 인성에 관하여 자신의 입장에 조금도 의문점을 남기지 않았다. …모든 저서 가운데 그리스도의 인성을 타락 전 아담의 인성으로 취급한 때는 단 한 번도 없었다”(p.71,72). “로이 아담스는 E.J 와그너와 A.T 존스의 그리스도론을 <반역적인 형제들>의 그리스도론이라고 비평하고 영국성공회 목사인 헨리 멜빌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는 타락 전 아담과 같지 않고 우리와도 같지 않다. 그는 독특한 분이셨다’라고 주장했다. 로이 아담스의 해석이 오늘날 재림교회의 다수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 견해는 잘못된 것이며 이것은 결국 타락 전 아담의 인성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p.322, 350).
1955년부터 1956년 사이에는 재림교회와 개신교 목사들 간에 성육신 교리에 대한 문제를 놓고 18번의 정기회의를 가졌다. 개신교 대표인 월터 마틴과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는 엘렌 G. 화잇의 인성론에 반대하였으며, 그들은 매우 공개적으로 선구자들의 사상을 이단적인 것으로 취급하였다. 재림교회 대표자들은 마틴에게 말하기를 “모든 기독교회 안에 극단적이고 무책임한자들이 있는 것처럼, 우리 가운데도 ‘극단론자들’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엘렌 G. 화잇과 재림교회 선구자들이 “타락 한 인성을 취하셨다”고 기록한 것에 대해 무책임하고 극단적인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교리에 대한 질문(Questions On Doctrine)
재림교회에서 발간한 이 책은 반하우스와 마틴과의 대화 결과로 출판되었다. 대총회의 공인을 받은 <교리에 대한 질문(QOD)>은 여러 신학교, 대학, 도서관들에 보급되었고 수천 권이 비재림교 신학교수들에게 보내졌고 약 140,000권이 출간되었다. 이 책의 출판은 교단 내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에 대한 반응이 즉각 일어나기 시작하였다(p.207). 이 책의 저자들은 부록에 엘렌 G. 화잇으로부터 발췌된 것처럼 66개의 인용구들을 “죄 없는 인성을 취하다” 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죄 없는 인성”이라는 소제를 붙여 분리하여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구들은 결코 엘렌 G. 화잇의 글로부터 인용된 것들이 아니다. 이처럼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하여 학자적 양심을 버린 여러 사례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그리스도는 타락 전의 아담과 같았다. 그는 한 터럭의 죄도 없이, 순결하고 죄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것은 원문을 왜곡한 것이다. 첫째 부분인 “그리스도는 타락 전 아담과 같다”는 그 문구는 엘렌 G. 화잇이 아니라 그 책의 저자(리로이 E. 프룸)에 의해 쓰였는데 마치 엘렌 G. 화잇이 쓴 것처럼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인 “그는 한 터럭의 죄 없이, 순결하고 죄 없는 존재였다”는 내용은 아담에 대한 묘사였지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 아니었다. 이처럼 매우 놀랍게도 자기들의 입장에 맞추어 증언을 적용하면서 엘렌 G. 화잇의 개념을 흐려놓고(p.354)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말하는 신뢰성이 없는 선지자로 만들고 있다.
재림교회 성경주석과 역사적 그리스도론 지지자들의 반격
엘렌 G. 화잇과 선구자들이 만장일치로 발표한 후 100여 년 동안 계속적으로 가르쳐져 왔던 그리스도 인성에 관한 돌변은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그리스도의 타락한 인성에 대한 문제는 재림교회 설립 이래 아무런 논쟁을 일으키지 않았었다. 1953년과 1957년 사이에 3~4명의 재림교회 신학자들과 2~3명의 개신교 신학자들 사이의 비공식적인 모임이 있었을 때 프랜시스 D. 니콜의 지도 하에 약 40명의 신학자들은 <재림교회 성경주석(SDA Bible Commentary)>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 인성에 관해 가장 직접적으로 다뤄지는 <로마서(A.G. 맥스웰)>와 <히브리서(M.L. 앤드리어슨)>가 전통적 입장의 옹호자들이었던 신학자들에게 위임되었다. <교리에 대한 질문(QOD)>에 대한 반격은 히브리서 주석을 담당한 M.L. 앤드리어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저명한 신학자인 그는 1938년부터 1949년까지 워싱턴 D.C 에 있는 신학 세미나 담당교수로 매우 많은 기사들과 책들을 저술한 저자로서 의심할 바 없는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열띤 반박에서 <교리에 대한 질문>이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서 빗나갔으며 엘렌 G. 화잇의 그리스도론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해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선지자의 증언을 믿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정욕으로부터 면제되셨다고 주장하는 신신학을 믿는다고 할 수는 없다.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교회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교리에 대한 질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주신 하늘의 은사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구세주는 내가 필요하지 않고, 세상도 필요로 하지 않는 구세주이다. 정욕과 싸워보지 않았다면 그 능력에 대하여 알 수 없으며 그것을 정복하는 기쁨도 가질 수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특별한 호의와 면책특권을 주셨다면 바로 그것은 그의 사명에 대해 부적격자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 논증된 이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앤드리어슨은 어떻게 이 새로운 교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다른 교단의 목사가 우리의 신학을 고치게 할 만큼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영향력을 주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우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바꾸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우리는 누가 <교리에 대한 질문>을 썼는지 알 수가 없다 … 지난해(1958년) 대총회 때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신학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단의 기본교리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전 교리에 정면적으로 대립된다. 이 책의 내용은 4년마다 열리는 정기 대총회 때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그러므로 신실한 재림교인들은 <교리에 대한 질문>과 <시대의 소망>, 거짓과 진실 사이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 유전의 대법칙은 구원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폐기될 수 없는 근본법칙이다. 그 법을 없애면 더 이상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에게 모본이 되시는 구세주를 가질 수 없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께서는 이 법칙을 ‘받아’들이셨으며, 그렇게 하심으로 구속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법칙으로부터 면제되셨다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는 것이며 성육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을 이러한 가르침과 교사들로부터 구원하시기를 바란다!”
<교리에 대한 질문>의 적대감은 거의 모든 곳에서 일어났고 이 책을 개정하기 원하는 여러 안건들이 대총회로 보내졌다. 그런데 왜 오늘날 이러한 신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가? 앤드류스 세미나리 역사신학 담당교수였던 멀빈 맥스웰 목사는 <북미지회에 보내는 호소>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신학 교수들과 그들이 길러낸 후진들이 현재 교단의 언론과 학원들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주요 출판기관과 대학들을 신신학파가 장악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각 기관들의 잘못된 인선과 선택이 빚은 결과입니다.”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위원장인 케넷우드 목사는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세상에 보낼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의 기별을 능력 있게 선포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진리에 연합이 있어야 한다.” 이 책은 新신학자들에 의해 교회의 가르침이 혼란스럽게 된 <그리스도의 인성>뿐만 아니라 원죄설에 근거한 잘못된 <죄의 정의(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가, 범죄하므로 죄인이 되는가)>, 여전히 곡해되고 있는 마지막 세대의 <완전한 품성>까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관련된 모든 주제가 정리되어 있다.
분명한 것은 위와 같은 주제들에 관한, <한국삼육신학대학원장>의 견해가 <AIAS신학대학원장(랄프 랄슨), PUC 신학과장(데니스 E. 프리비)>의 견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는 신신학이고 하나는 재림신학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승리하신 것은 우리로 당신의 본성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DA 312).
두 번째, 완전문제는 문제인가?
필자가 <생애의 빛> 한국선교센터를 맡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염려해 주었는데 그 염려의 주요인은 그들이 <율법주의자/완전주의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몹쓸 사람이 되어 쑥덕거리는 이야기의 주제가 되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인격모욕적인 말들이 종종 들려왔다. 필자 역시 그러한 편견을 가졌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한다.
<생애의 빛>이 왜 완전주의자가 되었는가? 앞에서 언급한 <넉넉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어”(창 3:5)인간을 하나님 같이 완전하게 되라고 유혹한 사단의 시험이었습니다. …피조물인 천사로서 완전했던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지극히 높은 자와 비”(사 14:14)겨 하나님 같이 되려다가 땅 아래로 떨어져 버린 두려운 이야기입니다. …은혜를 결여한 율법주의적인 완전주의자들도 있어 왔다. 스스로 완전에 이른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독선에 빠지고 자신들과 같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비평한다”(p.7,105,111,166,182,189 등)>. 이런 평가 덕분에 “하나님과 같은 절대완전에 도달해야만 구원이 있다”, “어떤 커트라인을 만들어 놓고 그 상태에 도달해야 구원이 있는 율법주의적 바리새인들이다”, 심지어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어보려는 가련한 사람들”이라는 오해를 갖고 있다.
<넉넉히(p.47,64,85,88)>에서는 완전에 관한 두 용어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⑴ 죄 없는 완전(sinless perfection): 이것을 추구하는 것은 완전주의이며 죄된 본성도 없는 재림 후 거룩한 몸으로 변화된 이후에만 가질 수 있는 상태이다.
⑵ 죄 짓지 않는 완전(perfection without sinning):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성품의 완전이다. 이것이 없이는 환난의 때를 통과할 수 없으며 모든 죄에 대해 온전한 승리를 한 사람에게만 늦은 비가 임한다.
필자가 <생애의 빛>에 대하여 연구할 때, 동일한 용어의 정의를 부탁했는데 다음과 같은 답변이 왔다. “죄 없는 완전(sinless perfection)이란, 죄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의 완전을 의미하는 말로서 하늘의 천사들이나 아담이 범죄 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하는 단어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는 이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 짓지 않는 완전(perfection without sinning)은, 죄된 본성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모든 죄를 승리하여 나가는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2006년 12월 10일e-mail답변).
뭔가 다른 정의를 기대했는가? <생애의 빛>의 견해를 하나 더 살펴보자. 매월 발간하는 <살아남는 이들 93호 p.30> “완전이란 외부적으로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각 개인이 매 순간 올바른 편,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고 순종하여 행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한 성품을 가질 수 있으며 그 단계는 각 개인마다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할 때인 거듭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굴복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완전한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완전한 의로 여겨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성품과 생애에 풍성한 열매를 맺어서 추수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무한하다. 그것은 무한한 지식을 요하는 것이고 우리는 결코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비록 천사들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완전을 갖추지 못했으며, 구원받은 후에도 그러한 성숙함에 도달 할 수 없다. 완전이란 결코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라는 보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성품의 완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과 봉사와 은혜를 통해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완전은 그들의 생애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전심으로 응답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죄 없는 생애를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시려고 인성을 취하시고 세상의 미움을 받으셨다. 우리의 생애에 이 능력을 나타내게 되면 우리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Ms 97, Oct. 16, 1909; UL 303).
그러나 <넉넉히>에서는 이러한 오해뿐만 아니라 안타깝게도 성서적인 <완전>에 대한 개념도 혼동하고 있는데 재림교회에서 출교된 데스몬드 포드의 칭의론을 반복하고 있다. 사람이 여전히 죄를 품고 있고 그 마음의 주인이 둘인데 그러한 죄인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때문에 그저 덮어주면서 완전하다고 선언해 주실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가장 밝은 지식을 성소를 통해서 얻게 된다. 성소는 뜰과 성소(첫째 칸)와 지성소로 구분된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뜰의 번제단에서 뿌려질 뿐만 아니라 다시 첫째 칸의 분향단에 발라지고 다시 대속죄일에 지성소 안에서 일곱 번 염소의 피가 뿌려지면서 속죄가 된다. 번제단에서 이미 짐승의 피가 뿌려져서 용서되었다면 왜 지성소에서 다시 피를 뿌리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임을 말해준다. 참된 회개는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변화와 개혁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즉 죄는 회개했을 때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실제로 극복하고 버렸을 때 비로소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용서를 받았어도 여전히 기록이 남아 있어서 그 죄가 도말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죄를 뉘우치는 사람은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험담을 한 사람이 그 당사자에게 사과를 했다면 그것은 다시는 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지 않겠다는 뜻이 포함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했다는 것은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야 한다. 단지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의가 나의 모든 죄를 덮어준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논하는 것은 구속의 경륜을 곡해시킨 사단의 기만 아닌가! 죄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직도 같은 죄를 짓고 있거나 앞으로도 그 죄를 다시 지을 강력한 소원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죄의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죄의 도말은 죄인이 그 죄를 극복하고 이기는 것을 의미하며 그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이 필수적이며 그렇게 해서 새로운 품성이 형성되어야 한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지성소의 기별(조사심판의 기별)을 가진 남은 백성들을 일으키셨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에 의해서 완전함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우리들의 생애 가운데서 모든 죄악을 제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다.
세 번째, SDA는 바벨론인가
주님께서는 형제에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바벨론이라고 부르라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을 그 가운데서 불러내야 한다는 기별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그러한 기별들에 대하여 반대되는 결정적인 빛을 주셨으므로 형제가 어떤 이유들을 제시할지라도 그것은 저에게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습니다”(2SM 63; TM 78).
콜린 스탠디쉬 박사는 하틀랜드(Hartland College)의 총장으로 역임하면서, 교회를 바벨론이라고 정죄하며 재림교회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심하게 견책해온 사람이며 <생애의 빛>에서는 스탠디쉬 박사의 <SDA는 바벨론이 아님>이라는 강의 TAPE를 제작하여 배포하기도 했고 강병국 목사는 그 대학의 교수로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생애의 빛>이 재림교회를 “바벨론”이라 부르고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발간된 월간지, TAPE, web site 등에 있는 글들과 설교 300여 편을 분석해 보았지만 단 한마디도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바벨론의 포도주”(계 17:2)가 우리 가르침에 스며들었으므로 처음 신앙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는 호소한다. “바벨론의 포도주”가 무엇인가? 계시록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맞지 않는 잘못된 교리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지 않는가?
최근(2007년 6월) KASDA(미주재림교회)에선 삼육신학대학 K 교수가 “만인구원설(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모든 사람을 구원)”을 주장하자 두 부류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로 치부되어야 하는 얘기가 논쟁거리라니…. 또한 요직에 있는 목사들이 하늘성소와 조사심판을 부인하고 뜰에서의 경험으로 구원은 완성되었으며, “일요일 법령은 19세기 정세에 근거한 급조된 경고이므로(당시 일요일 법령 시행 안건이 상정되었을 때 SDA대표로 참석한 A.T 존스의 의회설교로 보류) 예언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며 기별과 선지자를 부인하는 발언이 자연스러운 세상에 우리는 지금 머물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종교개혁 당시의 교황이 적그리스도이지 오늘날까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는 재림교회의 유명한 신학자들의 헛소리와 “밸린저가 옳은 증언을 했음에도 화잇의 권위에 쫓겨났으며, 데스몬드 포드를 배교자로 몰아가는데 그의 신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교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2300주야 교리를 부정한다는 양심선언을 했다”는 아우성을 듣고 있지 않은가!
“이른바 신신학(新神學)은 하나님께서 결합시켜 놓은 것을 산산조각으로 해체시켜 버렸다”(GC 464). 하나님께서 그처럼 은혜 가운데 우리에게 보내신 기별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신의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렵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은 무리의 흔들림은 증언의 말씀을 불신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LDE 175; 1T 201).
대총회에서 어련히 알아서 할 터이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가? 그런데 <알베르토 리베라(前 가톨릭의 Jesuit(예수회) 신부)>박사의 경고에 의하면, Jesuit이 맨 먼저 침투한 개신교는 <재림교회>이고 그들은 이미 대총회와 언론, 구호, 교육기관에 상당수 잠입해 활동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스페인 재림교회에 침투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오늘날 우리의 형편은 생각했던 것보다 심하게 배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교회의 형편을 보고 “진실한 사람들은 담대하게 죄를 견책하며 다가오는 진노를 사실대로 경고할 것이다”(EW 138). 누군가는 죄를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침반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하며,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일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Ed 57 참조). 이런 곧은 증언을 얘기했을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예루살렘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겔 9:4)들과 “오, 교회를 비난한다.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한다. 조심하라!”
“지나간 시대에서처럼 오늘날도 이 시대의 죄와 오류를 책망하는 진리를 증거하면 반대를 당할 것이다. …진리를 옹호하는 자들에 대하여 악의로써 그 인격과 동기를 공격한다. 이러한 일은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있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말을 들었고 예레미야는 배반자라는 욕을 들었고 바울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는 무고를 당하였다. 그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진리에 충성하는 자들은 치안을 문란케 하는 자, 이단자, 분열을 좋아하는 자라는 등의 비난을 받아왔다”(GC 459).
필자는 배도하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도 통탄스러워 울며 애통하면서 밤새 잠을 못 이룬 적이 있다. 재림교회 안에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러한 이상한 현상을 보면서 주의 재림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보면서 잠든 영혼들이 깨어나고 개인의 영적 쇄신과 교회에 경건의 부흥을 일으키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외, 계시록 해석의 오류?
또한 <생애의 빛>을 이단으로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로버트 하우어의 “Give Glory to Him, The Sanctuary in the Book of Revelation”의 영향을 받아 역사주의와 미래주의를 혼합한 형태로서 계시록에 성취된 일곱 나팔과 일곱 인이 일요일휴업령 이후에 다시 성취되며 1260일, 1290일, 1335일 예언이 문자적으로 이중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김○○, “재림교회 내의 이단에 관한 연구.” 삼육대학교, 1996 (미간행)>.
이 문제에 관해 <생애의 빛>에 직접 질문했을 때 다음과 같은 답변이 왔다.
<“재림교회의 교과 책들이 예언 해석에 있어서 오락가락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특히 마치 세대주의자들의 사상처럼 일곱 나팔을 미래사건으로 풀었던 적이 있었지요. 저는 거의 모든 면에서 옛날 우라이아 스미스 목사가 해석해 놓은 대로 믿고자 하고 있습니다. 물론 북방 왕은 옛날처럼 오토만 터어키가 아니라 교황권이라는 사실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다니엘 12장의 1290일과 1335일의 예언들도 1844년도를 지목해 주고 강조하기 위한 예언들로서 이미 다 이루어진 예언들이지요.”>
덧붙여 아래 <생애의 빛>의 홈페이지에 모든 내용이 공개되어 있으므로 재림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언해석과 다른지 확인해 보길 바란다. http://www.sostv.net/ 살아남는 이들 39호 “일곱 나팔의 경고”, 살아남는 이들 71호 “일곱 나팔 예언에 나타난 세상 역사”, 살아남는 이들 76호 “일곱 인에 나타나 있는 비밀”
개신교회 목회자 12,000 여명
한국에서는 만여 명이 넘는 개신교 목사들에게 재림교회의 복음이 수록된 <살아남는 이들> 월간지를 5년째 보내고 있으며, sostv.net과 계시록/다니엘 강해설교(DVD, CD, TAPE 등)와 여러 책자들을 통해 문서선교사역을 하면서 전화나 e-메일로 그들과 성경연구를 하고 있다. 개신교회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는 전 세계적으로 여러 차례 가졌는데 한국에서는 2005년 10월 춘천을 시작으로, 전주에서 2006년 6월 57명, 2007년 2월 65명이 참석한 세미나에서 “재림신학”을 전파했고 목회자 만여 명에게 ‘예언의 신’ 합본을 전하는 일을 추진 중이며 5만여 명의 목회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이 세미나의 주제는 “바벨론에서 나오라”이다. “<생애의 빛>으로 오라”가 아니다. <생애의 빛>은 재림교인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새로운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다. 바벨론의 거짓된 가르침에서 나와 성경적인 진리로 양들을 가르치라는 것이 전부이다. 필자는 지난 2월 개신교 목회자들과 함께 한 그 감동적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어떤 침례교 목사님은 2000여 명이 모인 침례성회 강사로 초청되어 <안식일>에 대해 설교 하신 분, 어떤 분은 동료 목사들과 교단에 낙인 찍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안식일 진리를 목숨을 걸고 전하겠다는 분, 전주의 목사님은 재림에 대한 월간지를 읽으시고 울먹이며 전화하셔서 “제 생애에 가장 감동스런 순간이었습니다. 재림을 사모합니다”라고 고백하시는 분, 또 예정설에 대한 월간지를 보시고 “수십 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예정론과 원죄론에 늘 의문이 있어왔는데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어 성경이 새롭게 보입니다”라고 기뻐하시는 분, 다른 분은 교회에서 <성경연구>교재로 <살아남는 이들>을 사용한다는 분, 어떤 분은 “구원에 대해 이렇게 성서적으로 잘 설명해 놓은 곳은 처음 보았습니다. 제가 20여 년간 목회를 하면서 이것은 아닌데 라고 생각하며 풀리지 않았던 부분들이 이제는 다 해결되었습니다.”라고 전화하신 분들을 기억한다,
한 분은 월간지를 받을 때마다 전화를 해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분인데 어느 날 “강 목사님이 안식교 목사더구만!”하시며 몇 말씀 안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안식일 문제를 다룬 세미나 DVD를 보냈는데 며칠 후 전화가 다시 왔다. “사실은 요즘 개신교회가 지키는 주일이 틀렸다는 걸 나도 알고 성경을 연구한 목사들은 다 압니다. 사도신경이 잘못된 것도 알고, 크리스마스도 틀린 거 압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크리스마스도 안 지킵니다. 나는 우리 교인들에게는 솔직히 원래 성경의 안식일은 토요일이 맞는데 교회의 전통 때문에 일요일에 예배드린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은퇴할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은퇴하면 개신교회 내에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자는 운동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그러니 좋은 자료들 있으면 빼놓지 말고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보내준 DVD 잘 봤습니다. 목숨을 내놓고 전하시는 목사님 같은 분이 계셔 참 다행입니다. 제게 이제 초등학교 졸업할 때가 된 손자가 있는데 그 아이에게 앞으로 너는 순교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분은 “할렐루야,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를 연발하시며 진리를 깨닫게 된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시는 분, 인천의 장로교회 목사님은 “저는 우연히 귀 월간지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엘렌 G. 화잇의 글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는 안식일교회에서 전하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최선을 다해 발견한 진리를 전하겠습니다.” 이런 전화가 일주일에 40~60여 통씩 온다. 그들의 간증을 이곳에 다 기록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이렇게 준비되고 있는 영혼들이 바로 11시 일꾼들이며 이름뿐인 우리의 자리를 대신 채울 하나님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중국에서는 본토인들을 위한 문서전도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더니 초교파 목회자들을 1000여명 이상 훈련시키는 일들도 생겨났다. 대쟁투 총서 합본과 치료봉사, 실물교훈, 산상보훈, 정로의 계단 등을 번역하여 출간하였고, 수백만 부의 전도지를 뿌리는 기적들도 생기고 있으며 약 200여 명의 문서전도자들을 양성하고 교육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요 인간들이 하는 일이 아니다. 만일 강병국 목사가 내침을 받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이 생겨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의 열매들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로 보낸다. “재림교회는 바벨론이니 나와라” 했다면 모순되지 않는가? <생애의 빛 TV 방송설교>를 듣고 재림교회로 개혁한 목사님을 알고 있는데 사모님은 재림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고 목사님은 신학을 다시 해야 하는 교회의 형편 때문에 평신도로 섬기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생애의 빛>을 통해 왔다고 하면 무슨 죄인 취급하듯이 따가운 눈초리와 색안경으로 이 신실한 회심자들을 올바로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복음을 가로막는 이런 무모한 오해는 삼가자.
독립 자양 선교센터
위의 내용을 다 인정해도 결국에 가서는 교단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잘못이라는 것이다. 1980년 이후 미국 재림교단 내에 신신학의 영향으로 지계표(성소진리, 안식일 등)되는 교리들을 부인함과 약화시키는 풍조가 많이 일어날 때 이러한 현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평신도들과 일부 목회자들의 항의를 교회와 행정가들이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재림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독립선교단체들이 많이 생겨 여러 잡지와 세미나 등을 통해 교회의 타협을 염려하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목회자들이 교회의 각성을 시도하기보다는 많은 경우에 직권을 남용하면서 이들 자양선교단체들과 지지자들을 박해하고 소외시키는 작업에 나섰다. 이때 많은 평신도들이 심한 소외감으로 교회를 떠나가거나 혹은 부당한 이유로 출교를 당하게 되었다. 재림교회는 마지막 “남은 교회”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처음에는 독립교회를 생각지도 않아서 합회에 교회조직을 신청하게 되었으나 대부분의 합회 지도자들은 그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고 이리하여 독립교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일례로 몇 년 전 플로리다 합회 내에서 자비로 라디오 방송선교를 하던 라파엘 페레즈라는 한 전도자가 ‘대쟁투’에 있는 내용을 설교하자 가톨릭교회가 합회에 항의를 하게 되었다. 교단은 이 전도자를 제지하려 했었으나 그가 말을 듣지 않자 출교시키게 되었고 이를 지켜보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 전도자와 함께 Eternal Gospel SDA Church 라는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들이 계속 적극적으로 전도하며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하자, 대총회가 가톨릭교회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게 되었고, 결국 대총회는 페레즈 목사의 독립교회로 하여금 SDA 혹은 Seventh-day Adventist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고 연방 법원에 고소하게 되어 몇 년간 법정투쟁을 하여 왔었다. 결국 이 페레즈 목사의 교회로 하여금 Eternal Gospel Church founded by Seventh-day Adventists 라는 간판을 쓰도록 합의하고 소송을 종결짓게 되었다. 그 동안 적지 않은 신실한 교회들과 교인들이 잘못된 감정과 판단을 가진 행정가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출교를 당하게 되었는데 그들을 구원받을 수 없는 이단 분파 집단으로 몰아도 되겠는가? 불행하게도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다.
<생애의 빛>의 경우도 그러하다. LA 13개 교회 연합에서 <오늘의 신앙 TV 방송>을 위해 강병국 목사를 초빙하여 방송목사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재림교인들이 대도시에서 안주하며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있으므로 다가오는 위기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설교들에 지도자들의 심기가 불편해지게 되고 기별이 너무 강하다는 의견과 함께 다른 교회와의 유대관계를 위하여 강한 기별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경고를 받게 되었다.
1988년 8월에 개최된 지도자 연수회 기간 중에 열렸던 <북미주 한인 재림교회 협의회 운영위원회>는 당시 역사적 재림신학을 옹호하는 강병국 목사의 주장을 검토하도록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연구위원회는 1989년 3월, 37쪽으로 된 연구 결과 <SDA 북미주 한인 교회 협의회, 북미주에 계신 교역자 및 교회 지도자 제위께: 강병국 형제가 전하고 있는 신학적 주장의 검토‘Berrien Springs, MI; SDA 북미주 한인 교회 협의회 연구 위원회, 1989’>를 내놓았다. 한 사람을 이단으로 매도하고 <강병국 목사 이설>이라는 기사를 교회에 배포하면서도 본인의 확인이나 한 번의 회동도 없이 다만 한국인 A 목사의 전화 한 통이 전부였고 그것도 신학적 내용들에 관해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강병국 목사는 한국인 목회자 사이에서 밀려난 것이지 재림교단에서 출교 당한 것이 아니다. 이후 교회를 개척하여 그 지역 흑인합회에 가입하려고 했지만, 한국 목회자들의 방해로 가입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따로 독립교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3~4년 전 <오늘의 신앙 TV 방송>을 회생시키려는 의도로 강병국 목사를 다시 추대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으나 결국 이 시도가 일부 목회자들의 개인적인 입지고려 때문에 무산되었다.
<생애의 빛>은 이렇게 심한 배척을 받아오면서도 여러 선교활동을 통해 재림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되도록이면 재림교회로 보내고자 해 왔다. 미주지역에서는 <안식일>진리를 깨달은 많은 평신도들을 재림교회로 연결했으나 한국에서는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형편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두 전도사가 있는데 이들은 <생애의 빛>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현재 재림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뉴욕의 전 합회장으로서 3기를 역임한 디오니시오 올리보(Dionisio Olivo)목사와 법과대학을 졸업해 변호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는 현 합회장 리처드 마커(Richard Marker)목사는 뉴욕 <생애의 빛> 지부의 독립선교사업에 호감을 가졌던 목회자들이다. 또한 미주에서는 여러 재림교회에 주말 부흥회에 초청되기도 하고 교단에 있는 목회자들이 오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에서만 보아도 강병국 목사에 대한 쟁점은 잘못된 교리나 신학이 아니라 기득권과 그 기득권을 유지하는 돈 문제, 그리고 목사들간의 압력에서 기인했다고 당시 사건을 기억하는 한국인 목사들의 양심적인 고백과 평신도들의 평가이다.
도대체 누가 견고한 토대인가?
필자가 알게 된 여러 명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한국 목회자들이 지금 음으로 양으로 <생애의 빛> 선교단체와 가깝게 교류하며 협조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의 영적인 수준이 정말 위태할 정도로 추락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불필요한 편견을 버린 것이다.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나 같은 재림교인과 목사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 재림교인을 대상으로 한 <집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필자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의 성도님들을 만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애의 빛>이 집단으로 모여 생활하는 한 무리로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설로 규정한 이들은 재림교회의 일원으로 각각의 소속 교회를 섬기고 있다. 그들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남은 교회이며 유일한 진리교회임을 확신하고 있으며, 성도로서 목회자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다.
그러나 <생애의 빛>에 거부감을 가지는 또 하나의 안타까운 이유를 빠뜨리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진리를 고수하고 전하는 이들의 예수님을 닮지 못한 태도와 언행에 그 원인을 들 수 있다. 창 33장의 요셉과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 속에서 요셉은 17세 때 자신이 받은 진리를 그대로 전했다. 순진하고 정직했지만 인격이 아직 미성숙할 때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꿈을 형들에게 고하므로 더욱 미움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지만 인격의 미성숙함이 부른 화이다.
교회의 타협과 배도를 보면서 울며 탄식하기 보단 열심만으로 오해의 소지를 만드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필자도 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기별 자체를 판단하거나 모든 사람의 문제로 확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어느 종교계보다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계의 모습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마저 부인해야 하는가? 기별을 믿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서 기별 자체를 이설로 규정한다면 모든 진리가 이설이 되고 말 것이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그룹의 신앙이 이설로 규정되는 것은, 객관적으로 충분히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가장 가혹하고 잔인한 경험이다. 더구나 그러한 정죄를 같은 신앙을 해온 형제들에게서 받게 될 때의 충격과 상처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믿는 것을 이설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불을 보듯 뻔한 것이라 할지라도 매우 신중하고 사려 깊은 접근과 해석이 필요하다.
도대체 <견고한 토대>가 누군가? <생애의 빛>을 지지하는 목사들과 성도들을 모두 색출해서 이단분파로 몰아 출교시켜야 하는가? 때가 때인 만큼 이기심과 시기심에 기인했던 편견들, 한번 뱉어놓은 말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존심은 버리고 세상에 보낼 최후의 기별을 힘차게 전파하기 위해 <진리> 안에서 연합하기를 바란다.
인류역사의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불과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많은 예언자들의 경고를 구태여 듣지 않더라도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돋으면 봄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무수한 징조와 표적이 마지막 영광의 그날이 목전에 임박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호소하고픈 것은 이전에 가져보지 못한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남은 교회 남은 백성이 되어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토록 거룩히 여김 받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난처를 삼아야 하고 지금까지 무시되고 등한시되었던 복음의 질서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믿음으로 연합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EW 99).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은 오직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칭의와 믿음에 의해서 성장되는 성화, 둘 다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의 선지자들은 복음은 칭의만을 포함한다는 인간의 가설들을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부인하고 있다.
잭 세퀴라 목사의 주장과 그 문제점
이번에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하여 잭 세퀴라(Jack Sequeira) 목사의 저서, “Beyond Belief” (한국어 번역: 사랑이 이룬 구원)의 중심적인 개념인 “객관적 복음” (Objective gospel)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주:객관적 복음이란 인간의 사전 지식과 동의 없이 인간을 의롭게 하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간 내면에 어떠한 변화나 전환, 즉 성화 없이도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잭 세퀴라 목사는 그의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거의 400년 동안 개신교는 구원에 관하여 두 개의 파로 나뉘어져 왔다. 첫 번째가 칼빈주의로,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십자가에서 인간들을 이미 구원하였지만 그 구원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자들 즉, 선택된 자들에게만 제한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견해는 알미니안주의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이미 구원을 얻어 놓았다고 주장하지만 그 구원은 단지 모든 인류에게 제공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은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회개하여서 제공된 것을 자신에게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단지 조건적인 복음에 불과한 것이다. 본인은 두 가지 견해들이 다 구원에 대하여 온전한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실제적으로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다고 성경은 가르치며,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러한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워짐도 이미 받았으며,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믿는다(롬 5:10,18; 고후 5:18,19). 나는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의도적으로, 그리고 고집스럽게 그리스도 안에 제공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기 때문이(요 3:18,19)라고 믿는다. 이것이 세상 끝날까지 여러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족속들에게 전해져야 할 계시록의 영원한 복음인 세 천사의 기별이다.” Beyond belief, 7-8.
이러한 그의 책의 서문을 읽는 사람마다 머리 속에 붉은 신호등이 켜져야만 한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대에 신신학의 기수였던 데스몬 포드 박사의 가르침을 정확히 지적하여 오류라고 외치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잭 세퀴라 목사의 가르침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그의 책, “Beyond Belief”의 서문 중에서 발견되고 있는 그의 주장들에는 세 가지 문제점들이 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믿고 회개해야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설교하신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14, 1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3).
구원이 무조건적이라고 하는 주장은 구원은 믿음과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과 같이 성경의 기초에서 벗어난 것이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과 거룩하게 됨과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엄연한 조건들이 있다.”(가려뽑은 기별 1권, 영문 377).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 1:1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 1: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 2:22,23).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7).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6).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계 22:14, 킹 제임스 성경 번역).
세 번째에 제시되고 있는 개념도 우리를 오해하도록 이끌기 쉬운 것이다. 구원을 거절하는 것도 우리를 잃어버린 바 되도록 유도하지만, 구원을 소홀히(등한히) 여기는 것도 우리를 영원한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 2:3). ‘우리가 저항하거나 거절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구원받는다’는 개념은 그럴듯하게 들리는 개념이지만 여기에는 상당한 위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이 개념은 ‘우리가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구원받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 우리는 저항하거나 거절하지 않아야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결정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 편에 서기 위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거절도 선택도 하지 않은 채 중간에서 헤매고 있는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 12:30).
잭 세퀴라 목사와 포드 박사의 공통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가르침에 있어서, 잭 세퀴라 목사와 포드 박사 사이에는 실제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잭 세퀴라 목사가 제시하는 개념은 지금부터 약 20년 전에 포드 박사가 가르쳤던 것과 많은 동일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Beyond belief 책에서 발견되는 잭 세퀴라 목사와 포드 박사 사이의 공통되는 견해들을 살펴 본다면 다음과 같다.
구원은 칭의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칭의는 하늘을 위한 자격을 갖추는 데에 있어서 우리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 그리스도의 의에 관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완전하다.” (잭 세퀴라 목사의 저서, Beyond Belief, 103)
객관적인 복음(Objective Gospel)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객관적 복음(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은 하늘을 위한 우리의 자격인데, 그것은 지금 현재와 심판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상동, 36). 그러나 데스몬 포드 박사와는 달리 잭 세퀴라 목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믿고 있다. 그는 인간이 변화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구원의 조건은 칭의이지 성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있다.
성화는 복음의 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하늘을 위한 우리의 자격에 기여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주관적 복음(그리스도의 나눠주시는 의-성화)은 하늘을 위한 우리의 자격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에 대한 실제를 증거하는 것 뿐이다.” (상동, 36).
복음의 중심은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말에 있다는 것이다. “복음에 관한 사도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사상에 있다.” (상동, 33).
포드 박사와 잭 세퀴라 목사가 성소에 대한 많은 언급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한 구원의 모든 것은 2000년 전에 갈바리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논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소 봉사의 의미와 중요성을 격하시키고 있다. “구원의 세 가지 국면, 즉 칭의, 성화, 영화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출생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서 이미 성취되었다.” (상동, 30).
두 사람 모두 만인 구원설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으로, 실제적으로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다고 성경이 가르치며, 그러한 행위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았고 하나님과 화해되었음을 믿는다.” (상동, 8).
우리는 구원에 대한 적극적이고 계속적인 거절에 의해서만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의도적으로, 고집스럽게 그리스도 안에 제공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상동, 8).
우리가 죄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칭의 가운데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수를 하고 죄에 빠질 때마다 우리를 거절하시지는 않으신다.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할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칭의를 잃어버린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진리를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것이 된다.” (상동 104).
잭 세퀴라 목사와 포드 박사는 천주교회의 어거스틴에게서 그 기원을 발견할 수 있는 개신교회의 칼빈주의와 상당한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다. 위에 열거한 개념들은 성소 기별 중에 나타나 있는 참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신앙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다. 비록 잭 세퀴라 목사가 성소에 대한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그의 가르침 속에 섞고 있을지라도…. 그의 저서인 ‘Beyond Belief’ 에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하늘 성소에 대하여 심각할 정도로 무시하고 있다. 잭 세퀴라 목사는 자신의 책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대속 사업이 하늘 성소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된 것으로 논리적으로 추측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사실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이 지성소가 아닌 성소 뜰의 번제단에서 완성된다고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잭 세퀴라 목사가 전하는 객관적인 복음(칭의)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과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선물에 대한 전적인 반응인 완전한 순종 없이도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많은 사람들을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하늘 지성소 사업을 심각하게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의 가르침에 동의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과거에 데스몬 포드 박사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수없이 영적으로 죽어간 우리의 이전 형제들을 회고해 보아야 된다. 이러한 우리의 회고를 통하여 우리는 잭 세퀴라 목사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