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데니스 프리비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에서 수년간 목회자로 시무. 前 PUC 삼육 대학 신학과 교수, 자영 선교 전도 기관인 어메이징 팩트 (Amazing Facts)의 전도 목사로 봉사하고 있음)
여러 해 전에 재림교회는 교단 내의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믿는 신조들을 설명한 27 기본 교리를 채택하였다. 재림 교회의 일원이 되려면 반드시 이 27개 기본 교리에 동의하기로 서약해야 한다. 이 기본 교리들은 재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가? 단지 기본 교리를 읽음으로 재림주의의 심장부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
나는 27개 기본 교리가 토지의 경계를 표시하는 울타리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당신의 토지가 어디서 끝나고, 이웃의 토지는 어디서 시작하는지를 말해준다. 이것은 재림교회를 다른 기독교 그룹들과 구별해 준다. 또한 왜 우리가 침례교인이나 그 밖의 다른 교파 교인이 아닌 재림교회 교인인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이 울타리가 그 안에 자리한 집에 대해 소상히 알려주고 있는가? 27개 기본 교리가 재림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 본질을 말해주는가?
또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주의는 생활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안식일 준비를 금요일에 한다. 안식일 아침에는 교회에 가며 해가 질 때 안식일을 환송한다. 우리의 식단 역시, 전통적인 미국 식사에 길들여진 사람의 것과는 좀 다르다. 우리는 문화적인 유산과 함께 자라났으며, 재림교인의 생활 방식에 익숙하다. 하지만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이 된다는 것이 이러한 뒷 배경과 생활 방식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재림주의의 심장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것 말고도 더 이해해야 할 것이 있는가?
재림 교회의 시작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돌아가셨을 때, 이를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개인적인 구원이 보장되었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로 인해 그들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는가? 물론이다. 그 당시 십자가 주위에 단 한 명의 재림교인이라도 있었는가? 아니다. 십자가는 재림교회가 무대에 오르기 18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죄의 용서와 구원의 확신은 그 때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재림교회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재림교인이 출현하기 이미 오래 전에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예수께서 AD 31년에 하늘 성소에서 인류를 위해 1800년 동안 중보 기도하시기 위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대관식을 하셨을 때, 우리가, 즉 재림교인이 있었는가? 재림교회는 이 일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님 또한 분명하다. 우리의 기도를 그분의 의의 향과 섞으시는 예수의 봉사는 재림교회가 존재하기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을 돌보아 주시는 성령의 봉사는 재림교회의 존재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기독교에 중요한 진리라는 것과,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진리임에는 틀림없으나, 재림교회는 이러한 진리들을 다른 곳에서부터 물려받았다. 이 진리들은 재림교회의 존재 없이도 다 세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재림교회가 필요되었을까?
요한계시록 14:7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은 1844년에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마지막 대속 사업, 성소의 정결과 우리의 죄를 도말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이 때가 바로 재림교회가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기 시작한 때가 아닌가? 그렇다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존재는 직접적으로, 또한 밀접하게 성소의 정결 사업과 관련되어 있는가? 그것이 존재 이유인가?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문제들이 여기에 걸려 있는가?
대 쟁투
사단은 하나님의 성품과 우주를 다스리는 그분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키지 못할 율법을 주신 것은 그분이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사단은 그의 주장을 널리 알리는데 성공했다. 심지어 그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하나님은 불공평하고 잔혹한 분이시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신약 후의 대쟁투에서 사단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일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의식들과 인간의 행함을 원하신다고 믿게 하였다. 성경과 교회사를 읽어 나가면서 어떤 이들은 사단이 이 쟁투에서 이겨가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두려움이 다니엘 8:13에서 여러 질문의 형태로 나타나 있다. 이 대쟁투는 얼마나 오래 동안 갈 것인가?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이름이 얼마나 오래 동안 짓밟혀야 하는가? 성소는 얼마나 오래 동안 더럽힘을 받을 것인가? 결국에는 사단이 승리할 것인가? 그 답은 14절에 있다. 이 싸움은 결코 영원히 가지 않을 것이다.
2300주야 후에 성소는 정결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호를 더럽히는 일에 끝이 올 것이다. 하나님의 명예는 회복될 것이다.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롬 3:4. 이 성경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고소가 취하되다, 무죄를 선고받다, 명예가 회복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지구상에서 보여진 가장 존귀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율법과 그분의 성품을 옹호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은 선하고 그분의 성품은 사랑이라는 것을 보이셨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풀리지 않고 남아있었다. 끊임없는 반역 속에 살아온 죄된 인간이 죄짓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할 수 있으셨다지만, 인간은 할 수 있는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명예의 회복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으므로 하나님과 그분의 정부를 옹호하기 위한 어떤 것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예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증거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행성에서 죄의 문제가 종결되기 전에 있을 마지막 명예 회복을 기다리고 계신다. “온 하늘이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옹호하는 것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리뷰 앤 헤랄드 1901, 4, 16). 하나님의 율법이 과연 죄인들에게도 선하고 옳은 것인지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당신을 나타내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분의 백성들 속에 완전하게 재현될 때에 그분은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 (실물교훈 69). 이 유명한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성품이 보일 때까지 재림은 지체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지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그러한 지연이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사단의 고소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증명하는 일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4:5은 예수께서 오시기 직전, 지구에서 살 마지막 세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놀라운 약속을 하셨다. 거짓말이 없고 어떤 종류의 흠도 없는 한 백성을 가지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명예, 그리스도의 명예는 당신의 백성의 품성을 온전케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시대의 소망 671). 여기에 연관된 것은 우리의 명예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호와 그분의 성품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완전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정말 이를 이루실 수 있을까? 만일 그분이 우리를 완전케 하실 수 없다면 그분의 말씀은 거짓말이 되는 것이고 사단은 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당신의 보좌의 명예를 걸고 당신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성취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실물교훈 148).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약속하실 때, 그분은 언제나 당신의 이름을 담보로 내놓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을 때, 그분의 보좌는 위험에 처했다. 그분의 보좌는 그분께서 마지막 세대를 통해 무엇을 이루실 것인가에 달려있다. “모든 품성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며 모든 사람은 저희가 충성의 편을 택했는지 아니면 반역의 편을 택했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그 때에 끝이 이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옹호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시대의 소망 763).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호를 옹호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러나 또한 그분께서 바로 당신의 백성들의 성품을 통하여 옹호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의롭거나 악한 모든 성품들이 완전히 계발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율법을 증명하기에 필수적이다. 지구상에서의 죄의 도말은 그분께서 구속의 계획을 이루시면서 당신의 명예를 회복시키는데 달려있음이 분명하다.
엘렌 화잇이 이 모든 것을 마지막 대속 사업이라고 부른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십자가에서 희생은 완성되었지만, 대속 사업은 완성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재림교회를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회들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 마지막 대속 사업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쟁투에서 승리하시고 언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는 재림교회의 존재 이유가 바로 사단은 거짓말쟁이며 하나님께서 진실을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정도로 간단한 것이다. 이것이 재림교회의 본질과 기별이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반역으로부터 이 지구가 영원히 안전하게 되는 단 하나의 소망은 사단의 고소가 거짓으로 판명되므로 더 이상 재고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확실히 아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개입되어야 한다.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그분께서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 곧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하고 우리가 그분께 완전히 순종하도록 하시는 사업을 하는 것이다.
나의 친구여, 그대는 진실로 이 지구에서 죄가 영원히 사라지기를 바라는가? 그대는 아동 학대와 끊임없는 폭력, 동물 학대, 법원 판결의 부정, 이 모든 것에 끝이 오기를 바라는가? 이 모든 문제에 끝을 낼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시위나, 폭동이나, 불매 운동으로 이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한 방법은 우리의 아픔을 경감시킬지는 모르나 해결책은 아니다. 죄의 흉악함이 멈추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린다고 말한 것이 아님을 주목하라. 그분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이지, 우리가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재림교회의 사명은 지구상에 일찌기 존재했던 어떤 교회들의 사명과도 사뭇 다르다. 재림교회의 사명은 초대 교회나 왈덴스인들, 혹은 마르틴 루터의 사명과 다르다. 우리의 사명은 완벽하게 독특한 것이다. 이 사명은 이 지구의 표면에 거했던 어떤 다른 그룹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성소 정결 사업이 진행되는 대속죄일의 시간에 살고 있기 때문이며 이 대속죄일은 독특한 논점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 재림하실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재강림은 아무 시간에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쟁투에서 승리하시는지에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1840년대에 하나님께서는 한 백성을 인도하셨고 그들은 놀라운 경험을 가졌다. 그러나 대실망 후에 일들은 잘 풀리지 않게 되었고, 그들은 연합하여 앞으로 전진할 용기가 없었다. 그들은 갈라졌으며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힘든 시기를 지나고 살아남았다. 예수께서는 1844년 후에 곧 재림하시기를 원했지만, 그러실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분의 백성들이 연합하여 그분과 함께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지체하셨다.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을 방황한 후에 예수께서는 다시 백성들에게 오셔서 그들이 당신과 함께 기꺼이 전진할 마음이 있는지 물으셨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백성들은 뒷걸음질 쳤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라고 묻는 대신, “우리의 지도자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고 물었다. 우리는 지난 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재림을 백년 동안이나 지체한 것이 진정으로 우리 자신들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선구자들의 회개는 진실하였고 그 때부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가르쳐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1888 기별을 부인하는 정신은 1890년과 마찬가지로 지금에도 강력하다.
1890년대에 있었던 우리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 번 당신의 계획을 미루셨고, 이번에는 백년이나 넘게 지체되었다. 이제 그분께서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운동에 또 다시 호소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만 그분과 연합하여 전진할 준비가 되어있다면 당신께서는 언제고 우리를 본향으로 데리고 갈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1888년에 있었던 질문과 동일하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실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대쟁투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옹호하기보다는 계속하여 우리의 이기적인 관심을 우선 순위에 둘 것인가?
이스라엘로부터 배울 교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택하신 백성으로 부르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만이 구원에 걸맞는 백성이 되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품의 지극히 아름다움심과 그분의 정부에 대해 세상 나라들에게 증거하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는 세상을 계몽시킴으로 예수께서 초림하실 때 모든 이들이 그분을 반기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성취하였는가?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의 초림을 위해 이 세상을 준비시키지 못하였음을 우리는 안다. 그리스도의 사업은 그들의 실패와 연관되어 이루어졌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 즉 세상 가운데서는 거의 봉사하지 않으셨음을 아는가? 예수의 대부분의 시간과 힘은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여 회복시키는데 부어졌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환히 비추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가장 어려운 일 – 그들의 편견과 냉담의 벽을 깨뜨려 다시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하는 일 – 에 당신의 시간의 대부분을 바치셨다.
이제 재림교회의 사명은 이스라엘의 사명과 동일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재림교회가 홀로 구원받기에 합당하게 되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당신의 정부의 지극히 아름다우심을 세상에 증거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제 정직하게 질문해 보자. 재림교회는 그 사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가고 있는가?
아마도 우리는 애드벤티스트 리뷰 1986년 7월 3일자에 있는 윌리엄 존슨 목사가 쓴 권두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가 지역 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여론 조사가 실시되었다. “비록 응답자 가운데 70%가 재림교회에 대해서 듣거나 읽어본 적이 있다고 답했지만, 교회에 대해서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냐고 물었을 때는 52%가 아무 응답을 하지 않았다. 또 21%는 특별한 것이 없다고 답했다. 이는 72%가 교회에 대해 아무런 매력적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 된다. 이는 “재림교인들에 대해서 가장 좋아하지 않는 점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과도 평행선을 달린다. 51%가 아무 응답을 하지 않았으며 20%는 특별히 싫어하는 것이 없다고 답했다. 분명한 형태를 나타내기에 교회가 실패했다는 것이 나를 걱정시킨다… 우리가 우리의 빛을 말 아래로 감추고 있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애드벤티스트 리뷰 1995년 2월호에 보고된 여론 조사에서는 53%만이 재림교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고 답하였다. 덧붙여서, 우리를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로 오해하는 사람들의 수도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위해 세상을 준비시키는 일에 성공하고 있는가, 실패하고 있는가? 우리가 직면하기 어려운 진실은, 유대인들이 이천년 전에 실패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도 실패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영감의 글은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향해 갖고 계신 계획을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질서, 하늘 정부의 계획, 하늘의 거룩한 조화가 지상에 있는 당신의 교회에서 나타나게 되기를 계획하신다. 이렇게 하여 당신의 백성 가운데서 그분은 영광을 받으신다” (시대의 소망 680). 교회가 세상을 향한 하늘 정부의 계획을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신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하늘의 정부의 계획이 현재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에 나타나는가? 아니면 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계획이 난무하는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루어야 할 위대한 일이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참 질서, 진실된 훈계, 진실된 조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Ms 30, 1990). 그럴 때에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마치고 예수께서 재림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마지막으로 완전하게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며 그리하여 세상은 그 영광으로 환하게 될 것이다” (TM 50).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를 통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이것은 천사나 돌이 소리지르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대쟁투를 끝내는 데 있어 하나님의 교회가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위해 세상을 준비시키는 우리의 사명에 있어 성공적이지 못한 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날 많은 이들이 받아들이는 접근 방법은 교회 내에 있는 문제들을 무시하고, 세상으로 나가 활동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꽤 매력적인데, 왜냐하면 예수께서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많은 세상 사람들이 복음에 수용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일 우리가 교회내의 불순종에 대해서는 그저 잊어버리고 영혼 구원에만 중점을 두면 우리가 하고 있는 그 일로 인해 바로 교회내에서 찬양을 듣는다. 또한 성경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침례받게 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성취감이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실패하는 선민들에게 오셨을 때 쓰셨던 방법인가? 삼년 반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자멸할 위험에 빠진 당신의 귀중한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해 당신의 시간을 바치셨다.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데 거의 시간을 쓰지 않으셨다. 그분의 급선무는 당신의 백성들이 진리의 기별을 이방인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들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합회장으로 봉사했던 헨리 뱃쉬 목사는 최근 다음과 같은 중요한 원칙과 경고를 우리와 나누었다. “음악은 세 가지 – 멜로디, 리듬, 연주 – 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모두 다 필요한 것이지만 중요성에 있어서 똑같지는 않다. 멜로디가 가장 우선 순위에 놓여야 하며 리듬이나 반주에 의해 가리워져서는 안 된다. 설교, 강의, 출판물, 또 캠페인과 건물, 장비를 위한 헌금 호소 등은 다 절대적으로 필요하긴 하지만 그 자체가 남은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성취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멜로디가 아니다. 기껏해야 반주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영롱하게 울려 퍼져야 할 멜로디는 죄를 이긴 승리의 노래, 어린양과 모세의 노래로서 점점 더 높이, 하늘의 원형에 더욱 더 가까이, 세상으로부터 더욱 더 멀리, 그리하여 마침내 진흙 토기에서 그분의 은혜의 풍성하심이 완전히 나타나는 절정으로, 세상을 벗어던지고, 다음과 같은 천사의 선포로 증거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4:12). 처음으로 이 증거는 성도의 무리에 대해 발하여질 것이다.
“라오디게아여, 경고를 받으라! 다윗은 한때 수효의 마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대상 21:1 참조). 사단은 너무도 교활하게 교만과 자기 만족으로 이끄는 유희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미덕 대신에 2류로, 질을 양으로, 내핍을 허영으로 대체하도록 꾀인다. 숫자와 규모, 양이 던져주는 매력은 가만히 놓아두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리를 사생아와 섞인 무리로 가득 채우고 삼켜 버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가데스 바네아’에 멈춰 설 수 밖에 없도록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이 생기기를 원치 않으신다.
“라오디게아여, 그대가 취하는 노선을 숙고해 보라! 잠시 멈추어 서서 그 많은 활동들 – 목회, 교육, 의료, 사회 – 의 어디에서부터 참되신 모본을 따르기에 실패했는지 살펴보라.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간구한 후, 신령한 말씀에 비추어 앞일을 계획하라. 악을 선하게, 죄를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만드는 자기 합리화를 멈추라.
“라오디게아가 진솔한 자아 성찰과 타협하지 않는 자아 훈련을 하기에 실패한다면 폭풍이 몰아쳐서 그 대열을 흔들고 뒤집어 정결케 하여 주께서 직접, 교회 녹명책에 있지 않거나, 성직을 차지하지 않은 사람들로 더불어 다스리시도록 자리를 마련할 것이다. (TM 300, 5T 80, 롬9:28 참조).” (Our Firm Foundation, March, 1989).
위의 강력한 경고는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에 성공과 실패가 무엇으로 구성되는지를 지켜본 교회 지도자로부터 나온 것이다.
급선무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하나님의 명예를 옹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 성소의 정결 사업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성소가 모든 죄의 기록으로부터 깨끗케 되기 전에, 계속하여 하나님의 성호를 더럽히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이 먼저 정결케 되어야 한다. 재림주의는 하나님께서 사단의 거짓말에 대항하여 싸우신 육천년 동안의 싸움을 끝내시면서 이 대쟁투에서 하나님께서 승리하심에 관한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두 번째 사명은 세계 전도와 성경 연구과 구호 봉사, 영혼 구원을 통해 세상에 손을 뻗치는 것이다. 첫 번째 사명이 이해되고 착수되어야만, 두 번째 사명이 크게 성공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계속하여 그래왔던 것처럼 이 순서를 바꾸려 한다면 우리는 계속하여 실패할 것이다. 봉사만으로는 우리의 병을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마차를 말 앞에 놓아왔다. 필연적으로 이것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성공적인 봉사를 하기 원한다면, 이는 반드시 헌신하는, 순종하는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의 백성들이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순종을 하도록 그들을 회복시키는데 당신의 노력을 쏟으신 사실을 기억하라. 마찬가지로 우리의 봉사 역시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의 소망을 정당화 시키려고 하는 노력 없이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사랑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오늘날 재림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대신에 문화적 가치를 우선시 하는데 있다. 우리는 한 번 뿐만 아니라 계속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결심할 것인가, 아니면 그분께서 우리의 방식대로 일해주시도록 원할 것인가? 우리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성공과 실패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에스겔의 호소
에스겔은 배도와 퇴보의 시대에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특별한 기별을 그에게 주셨다.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찌어다” (겔33:7).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 (겔33:11). 이 기별은 단순히 에스겔 시대에 살고 있던 하나님의 배역한 선민들에게 주어진 호소가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배역한 선민들에게 주어진 호소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무 늦기 전에 돌이키라. 오 재림교회여, 왜 자꾸 죽으려고 하느냐?” 우리가 정말 신실한 재림교인이라면 이 호소를 무시할 수 있는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에게는 우리 교회가 치유받도록 도움으로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명을 성취하도록 할 책임이 있다. 때때로 외과 의사의 칼은 고통스럽고 치유되는 과정은 어렵지만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크신 의사이시다.
현재 사단은 교묘하게 놓은 덫으로서, 이 치유 과정을 타락시키려 한다. 한 가지 덫은 타협된 복음, 즉 예수께서 필요되는 모든 것을 다 하셨으므로 우리가 할 것이라고는 믿는 것 밖에 없으며 그 외의 것은 다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절대적인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복음이다. 이 복음은 지난 삼십여년 동안 재림교회 안에 계속하여 들어오고 있으며 지난 십년 동안 큰 세력을 얻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거짓 확신을 주는 복음으로써, 죄를 계속 지으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약속한다. 이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므로 작은 죄들을 무시해도 좋다고 가르친다. 그분께서 우리의 구세주 되심을 믿는 한, 우리가 계속 죄를 짓는 것에 상관 없이 우리는 그분과 함께 구원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덫은 사단의 다른 어떤 속임수보다도 더, 많은 신실한 재림교인들을 잃어버린 바 되게 할 수 있다.
사단이 놓은 또 다른 덫은 인본주의와 문화 우선주의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한다. 우리는 여론 조사를 하고 그 결과에 기초해 무엇을 할지를 결정한다. 영감의 조언은 구식으로서 문화적 재조명을 받아야 하므로 거기에서 지혜를 구하는 대신 가장 뛰어난 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논리에 의존한다.
또 다른 덫은 비판하는 정신을 갖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교회 안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하고 나머지 시간을 교회의 죄를 폭로하고 묘사하는데 바친다. 사단은 이러한 개개인들이 모든 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인도한다.
그 다음, 사단이 놓은 덫 중에 가장 교묘한 것은 “중용의 덕”이라는 덫이다. 우리 모두는 균형지길 원한다. 양극단과의 마찰을 피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문제가 좀 있다는 것을 인식은 하나 영혼 구원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들이 잘 돌아가고 있는게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성장을 보면 상황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다른 이들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는 안전하게 이 문제들을 제쳐 놓는다. 우리의 학교나 병원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어도 우리는 그저 입을 다무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음악과 예배 방식이 교회 안에 들어와도 우리는 그저 우리의 최선만 다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불에 데지 않도록 불 밖에 나가 있는 것이 확실히 안전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이 에스겔의 호소와 조화를 이루는가? 적군들이 성벽을 기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도 침묵을 지킨다면 우리는 과연 충성스러운 파수꾼인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구하기 위해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행할 것인가? 독특한 재림교회의 기별 없이는 독특한 재림교회의 증인이 나올 수 없다. 재림교회의 복음은 현 기독교의 복음과 다르다. 우리는 재림교회의 복음이 꺼져 가도록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를 보는 우리의 관점은 매우 독특한 것이다. 우리는 침묵을 지킴으로 이 관점이 사라지도록 할 것인가? 우리가 보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는 독특하다. 심지어 건강 개혁에 관한 우리의 이해조차도 독특한데, 이는 우리가 질병을 피하고 장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성화시키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가장 높은 표준을 세우므로 우리의 마음을 놓고 벌어지는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과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그분께서 현대의 선지자에게도 말씀하셨음을 또한 우리는 안다.
우리는 오늘날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인이 되고자 하는가?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성품을 옹호하기 위해 준비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신조의 울타리 안에 있는 집에서 기꺼이 살고자 하는가? 치루어야 할 대가는 비싸지만, 그 상급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렘12:5). 오늘날 우리는 평안한 땅에서 보행자와 함께 달리고 있다. 우리 앞에는 말과 요단의 창일함이 놓여있다. 지금은 준비할 시간, 우리의 성품을 강하게 단련시킬 때이다. 만일 교회가 승리하는 교회가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인이라는 우리의 이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왜 존재하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첫 번째 사명과 두 번째 사명을 바로잡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굳은 심령이 깨져서 유쾌하게 하는 이른비가 능력의 늦은비로 이어지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대의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가 죄로 저주받은 이 세상의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을 위해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