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는 예수께서 두 무리를 앞에 두고 말씀하신 비유이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1~4. 예수님 앞에 앉아 있는 한 무리는 세리와 죄인들이었고, 다른 한 무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 멸시 받았던 세리와 창기들에게는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영혼의 절규가 있었다.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바로 그들을 잃어버린 양으로 표상하여 이 비유를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통 가운데서 울부짖는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세리와 창기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는 형편 가운데 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없는 형편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셨다. 그들은 진리의 빛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생애를 보고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자존심과 세속적 이기심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세리와 창기를 멸시하였지만, 세리와 창기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은 그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이셨으며 비록 그들이 유대 교회로부터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로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는 단 한 번도 잊혀진 바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불행과 죄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나 교단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느냐는 것은 하나님께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그분을 향한 간절한 마음과 자신이 범한 죄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영혼의 상태와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을 향하여 뻗은 떨리는 손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죄에 대해서는 너희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진노하였던 예수께서 세리들과 창기들의 죄에 대해서는 오히려 깊은 동정을 나타내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있던 두 무리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을 모두 구원하시기 원하셨지만, 한 무리는 구원하실 수 있으셨고 다른 한 무리는 구원하실 수 없으셨다. 한 종류의 사람들의 죄는 진노의 대상이 되었는데, 다른 종류의 사람의 죄는 오히려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두 종류의 죄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죄를 세리와 창기의 죄와 분명히 다르게 취급하셨다. 죄는 다 똑 같은 죄인데 왜 이 두 무리를 다르게 취급하셨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요한복음 9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 9:41. 예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소경된 자의 죄와 본다고 하는 자의 죄로 구별하여 취급하신다.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범하는 잘못은 죄가 아니지만, 본다고 하는 상태에서 범하는 잘못은 분명한 죄가 된다. 분명한 빛을 받고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알고 범하는 죄와 부족한 빛과 성령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한 상태에서 범하게 되는 모르고 범하는 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인간의 눈과 판단으로는 이 두 종류의 죄를 정확하게 구별하기란 매우 어렵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누가복음 23장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기도가 나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눅 23:34~37.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정말 두려운 죄다! 메시야를 십자가에 달아 놓고 조롱하는 자의 죄에 참여한 자들에게 얼마나 큰 형벌이 떨어지겠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중보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군중들은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 엄청난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를 소경된 자의 죄로 인정해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군중과 폭도들의 죄는 알지 못하고 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인지 몰랐으며 무지하게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인도를 따랐을 뿐이고 마귀와 그의 악한 천사들이 그들 속에서 섞여서 선동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폭도들과 군중들을 위하여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중보 기도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공정하고 은혜스러운 분이시다!
그렇다면 알고 범하는 죄는 무엇인가? 어떤 경우의 죄가 알고 범하는 죄가 될까? 이 문제 역시 성경에 나타난 예를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소위 본다고 하는 자들이다. 진리에 대한 분명한 빛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권능을 행하던 자들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직분과 권능을 행하였지만, 그들은 삶 속에서 빛을 거절하고 양심 속에서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죄는 알고 범하는 죄가 되었고 예수께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두려운 선언을 듣게 되었다.
알고 범하는 죄의 심각성
하나님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의 죄와 본다고 하는 자의 죄를 분명하게 구별하신다. 아담과 하와는 본다고 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전에 하나님과 천사들에게서 선악과에 대한 충분한 교훈과 경고를 받았다. 그들이 선악과 앞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았을 때 그들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과 천사들로부터 받았던 경고의 말씀들이 정확하게 기억났으며 성령께서 그들의 양심 속에 따 먹지 말라는 분명한 음성을 들려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기로 결정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의 책임을 물으셔야만 했고 그 결과 단 하나의 알고 범한 죄로 인하여 그들은 의의 옷을 잃어버린 채 에덴동산을 떠나야만 했다. 알고 범하는 죄란 진리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본다고 하는 자가 지적으로 영적으로 분명하게 유혹을 인식한 상태에서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면서 죄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본다고 하는 자가 알고서 죄를 범하거나 품고 있을 때 그것은 매우 심각하고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알고서 범하는 단 하나의 죄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알고 있는 한 가지 죄를 그대로 품고 있을 때 그것은 성령의 증거하는 음성을 잠잠케 하고 영혼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양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는 자와 같이 겸비한 영혼들을 항상 죄에서 분리시키시고 구원하신다.
사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죄된 본성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끌고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로 물든 더러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죄를 짓는 일에는 분명한 핑계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각 시대마다 이기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하고 있으며(계 2장과 3장),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다. 죄를 범하는 일에 핑계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앞에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범하고 성령의 뜻을 거절하고 있으면서 구원과 은총을 계속해서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죄짓기를 중단해야만 한다는 감동을 강력하게 받게 된다. 십자가를 제외한 채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죄에 대한 핑계는 매우 큰 설득력을 얻게 된다. 십자가를 빼놓은 상태에서 죄와 의에 대한 논쟁을 하면 오히려 죄에 대한 신학적 핑계만이 잔뜩 생길 뿐이다. 그러나 나 때문에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의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죄에 대한 승리를 말하게 되고, 죄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된다. 십자가 없는 죄의 문제와 십자가 없는 의의 문제는 우리를 아무리 애써도 실패와 좌절로 끝나는 율법주의로 이끌거나 아니면 죄를 붙들고 살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바벨론의 복음으로 유도한다.
기대와 상식을 뒤엎은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기대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랍비들과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처럼 경건하고 신앙이 좋아 보이던 사람들에게는 화 있을진저라는 정죄가 내려지고, 부적절한 이성관계를 가지고 있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나 세금을 착취하던 세리 삭개오, 부정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 로마 군인이었던 백부장, 그리고 어떤 귀신들린 자에게는 구원이 놀랍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비웃고 조롱하던 군중들의 죄는 간과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권능을 행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는 두려운 선언이 내려졌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도 도무지 구원하실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많은 진리와 빛을 받은 본다고 하는 자가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분명하게 유혹을 인지하고 성령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죄를 범하기로 선택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죄들로 자신의 생애를 채워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 그들의 신앙은 종교적 허식과 의미 없는 의무로 채워져 있을 뿐 하나님을 향한 울부짖음도 없고 양심의 가책으로 깊은 밤 고뇌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영적으로 교만하여지고 무감각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당연히 구원받을 것으로 기대되던 다수의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구원을 잃어버렸고, 도무지 구원을 쳐다보지도 못할 창기와 세리 같은 소수의 사람들이 오히려 구원받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지막 시대에도 비슷한 역사가 반복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소수가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해 주셨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주께서는 마음이 겸비한 자들을 통하여 일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학위나 학력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은혜를 받음으로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신앙과 기도의 사람들은 거룩한 열심으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옛날 어부들을 당신의 제자들로 부르셨던 것처럼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남녀 종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풍성한 알곡만 보이던 마당에서부터 쭉정이들이 구름처럼 바람에 불려 나갈 것이다. 우리가 그 휘황찬란한 빛 때문에 존경해 온 많은 별들이 그 때에는 어둠 가운데로 사라질 것이다. 그분께서는 멸망해가는 영혼들에게 마지막 경고의 음성을 주기 위하여 다른 직업을 가진 자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부르실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될까? 진리의 말씀에 따라서 성화된 신앙이 아니라 감정적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 감정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요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신앙을 말한다.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구원받은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이 감정적 신앙이다. 대개 감정을 중요시 여기는 신앙은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의 요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내게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그대로 가겠다 라고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사단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원하는 감정과 기적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감정적 만족감과 구원에 대한 거짓 확신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장 가난하고 부족하지만 가장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끼게 된다. 그들은 부도덕과 불법 속에서도 구원에 대한 안전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결국 자기 스스로를 완벽하게 속이게 되어 하나님께서 도무지 구원하실 수 없는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유대 교회의 경건하게 보이던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잃어버렸는데, 왜 세리와 창기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리나 창기와 같은 가난하고 애통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시는 잃어버린 양들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복을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