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저자: 강병국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으로서의 본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하나님으로서의 본성적인 면을 옹호 하려는 듯이 열을 올리는 경우들을 가끔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먼저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관건인지를 새삼스럽게 느껴 보기 위하여 다음의 말씀을 읽어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가려 뽑은 기별 I 권 244 페이지에서 화잇 여사께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의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붙들어 메는 황금 고리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메어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연구 과제가 되어야 한다.” (가려 뽑은 기별 1권, 244)
왜 그럴까? 예수님의 인성 문제가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는 것일까?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충돌하게 될 때에 거의 무든 경우에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가 거론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왜 그러할까?
1888년도 미네아 폴리스 대총회 당시 G. I. Butler 대총회장은 병원의 침대에 누워서, E.J. Waggoner 목사의 견해를 막고 옛 가르침을 고수하라고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에게 편지하였는데 그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바로 Waggoner 목사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가르침이었다. 그때에 Waggoner 목사의 가르침을 옹호하고 나선 화잇 여사의 글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흑암의 권세로 말미암아 모든 생애의 단계에서 공격을 받으셨다. 주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이후에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가시게 되었으며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다. 나에게 수많은 편지들이 왔는데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꼭 같은 본성(men’s nature)을 갖고 계시지 않았으며 만약 인간과 꼭 같은 본성(same nature as man)을 가지셨다면 그와 같은 시험들을 받을 때에 패배하셨을 것이므로 과연 그리스도께서 어떤 본성(nature)을 갖고 계셨는지 확증해 달라는 편지였다. 만약 주님께서 인간의 본성(man’s nature)을 취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모본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의 본성(our nature)에 참여하신 자가 아니었다면 우리 인간이 시험을 당하는 것처럼 시험을 당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시험에 굴복하는 일이 가능치 않았다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자격으로 인간을 위하여 싸움을 싸우시려고 오셨다는 것은 하나의 엄숙한 진실이었다. 주님께서 당하신 시험과 쟁취하신 승리는 우리 인간이 모본이신 주님을 모방하여야 하며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Review and Herald, 2-18, 1890 ; 영문 가려뽑은 기별 1권, 408)
그 후에 기록된 화잇 여사의 글들 중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많은 명확한 견해의 글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들 중에 몇 가지만 예증으로 들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죄 없는 본성에, 시험 당하는 자들을 어떻게 도와 줄지를 체휼하여 아시기 위하여 우리의 죗된 본성(sinful nature)을 취하셨다.”(Medical Ministry, 181)
“그분 안에는 죗됨이나 궤휼이 없으셨다. 그 분은 순결하시었고 더럽혀 짐이 없으신 분이 셨다. 그러나 그 위에 우리의 죗된 본성(sinful nature)을 취하시었다.”(R & H, 12-15,1896)
“단 하나의 죄의 흠이나 더럽혀 짐을 모르셨던 그리스도께서 퇴보된 형편 가운데 있는(it’s deteriorated condition)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 이것은 우리 유한한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겸비함이다.”(영문 시조, 6-9, 1898).
“아담은 완전한 장년으로 몸과 마음에 충만한 활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에덴의 영광에 둘러싸여 있었고 날마다 하늘의 천사들과 교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단과 상대하시기 위하여 광야에 가셨을 때에는 그렇지 못했다. 4천 년간 인류는 체력과 정신적 능력, 그리고 도덕적 가치가 퇴보되어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퇴보된 인류의 연약함을 취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만 그는 인류를 쇠퇴의 깊은 구렁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셨다.” (시대의 소망, 116)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예수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는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시대의 소망, 48)
이정도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예언의 신의 사상이 분명하지 않은가? 물론 많은 예언의 신의 기록들 중에 단 한가지 애매 모호한 대목이 나오는 내용이 있기는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호주에 있던 베이커 목사에게 쓴 편지이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죄없는 본성을 가지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른 많은 기록들은 제쳐 두고 오직 그 편지의 내용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그 편지 가운데 언급하신, 그리스도를 “evil propensity”(악한 경향)를 가지신 분으로 말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Propensity(경향)이라는 단어는 품성의 뜻으로 이해하여야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본 교회 성경 주석 7권 354 페이지와 실물교훈 354 페이지에서 우리도 단 하나의 악한 경향(evil propensity)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악한 경향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는 베이커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 관하여서는 랄프 랄슨 박사의 기사에서 더 자세히 연구해 보기로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인성을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해 보려는 시도에서 먼저, 예수께서 왜 이 세상에 성육신 하셨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 이 땅에 초림하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 할 수가 있겠다. 첫째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시기 위하여서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같은 형편에서 죽음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셔야만 하였다. 두 번째는, 우리 타락한 인류들이 변화함을 받아 다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성화된 생활을 살 수 있다는 모본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도와 주실지를 아시는 대제사장, 즉 중보자가 되시기 위하여서는 우리의 본성을 취하셔서 우리와 같은 시험을 당하시는 생애를 사시는 경험이 구세주의 필수적인 요건이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성품과 계명을 공격한 사단의 고소에 응답하실 필요가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자면 많은 지면이 필요 되겠으나 예수의 인성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진부한 설명이 될 것 같아서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9-18)
위에서 읽은 것처럼 특히 히브리서 2장의 말씀은 너무나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고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그리스도)와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우리들)이 다 하나에서 났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다른 본성을 가지시고 생애 하셨다면 우리가 심판대 앞에서 크게 핑계 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를 이해하며 능히 도우시는 대제사장이 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16절의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를 영어 성경은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For verily he took not on him the nature of angels(천사의 본성을 취하심이 아니요) but he took upon him the seed of Abraham(아브라함의 자손됨을 취하심이라).” 여기에서 우리는 천사의 본성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본성이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본성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본성인 사실을 주지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17절과 18절은 우리를 능히 도우시는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하여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되심이 마땅하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히 4:15,16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 갈 것이니라.”
인류의 구속의 계획에 있어서 구세주께서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본성을 취하시고 성육신 하시는 일은 필수 불가결한 너무나도 중요한 관건이 아닐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우리 죄인들의 구원 문제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심으로 속죄해 주시는 십자가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 성소에서 진행 중인 죄인을 정결케 하셔서 순종하는 거룩한 자들로 변화시키시는 중보의 사업도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지상생애는 우리의 모본과 용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로마 천주교회에서는 이러한 영원한 복음의 의미를 곡해 시켜 놓았다. 마귀는 천국 복음을 곡해 시키기 위하여 무염시태설을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 무염시태설이란 무엇인가? 만약 마리아가 그가 가졌던 인간의 본성 그대로를 가지고 예수를 잉태하여 낳았다면 그리스도는 죗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분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성경적인 사실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다. 마리아가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적적으로 죄없는 본성을 가진 자로 바꾸어 주신 다음에 예수를 잉태케 하셨다고. 바로 그것이 무염시태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인간과는 다른 먼 거리에 있는 하나님으로 묘사하여 놓은 것이다. 그것이 만국을 취하게 하는 바벨론의 포도주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교묘하게 탈을 쓰고, 조금 다른 표현들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교회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본성을 가지고 오셨다고.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 사실 때에 모든 유혹을 이기시고 죄를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같은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죄를 승리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여자의 남은 무리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모든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모든 죄를 승리한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우리들과 같은 인성을 가지고 오셔서 모든 일에 한결같이 우리와 함께 시험을 당하신 분이시면서 전혀 죄 지은 적이 없으신 분이셔야 한다. 죄의 유혹을 느끼는 그 자체가 죄가 아니다. 죄는 사람이 유혹을 받고서 그것을 의지로 선택하여 품을 때에 죄로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죗된 본성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것은 천주교회의 교리를 세운 어거스틴의 잘못된 신학에서 비롯된 원죄설의 가르침이다. 죗된 본성을 받고 태어 났다는 의미는 죄 자체나 죄의 책임을 유전적으로 받아 가지고 태어 났다는 뜻이 아니다. 죗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담과 조상들이 지은 죄의 결과를 받고 태어 났다는 뜻이다. 죄로 인하여 연약해진 연약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도 인류가 타락한 지 4000년이 지난 이후에 그 연약성을 몸에 가지고 태어나셨다고 성경과 예언의 신은 선포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의 인성이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본성이며 그러므로 우리와 다른 입장에서 사셨다고 믿게 되면,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히 죄를 승리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무리가 되도록 재림교회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연구가 읽는 이들로 하여금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이해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 문제를 깊이 숙고하는 자들은 예수께로 더욱 더 가까이 이끌려 가게 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은 오류에서 벗어나 승리하는 여자의 남은 무리가 되는 길들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