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있는 두 그리스도
저자: 마샬 그로스볼 (캔사스주, 위치타에서 성경통신학교 및 성경교사 양성소인 Steps To Life Institute와 TV 방송 책임자)
교회 안에 있는 두 그리스도 – 제1부 –
많은 신실한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에 대한 엇갈린 견해를 가지고 있다. “아, 그거야 어의학적 문제에 불과한 거죠.”라고 하거나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독자가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알게 되겠지만 그리스도의 속성문제는 영혼구원사업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 때문에 사단은 초대교회 이래로 가짜 그리스도를 교회 안에 확립시키려고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휴거론’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원수는 여기서도 이론적 근거를 철저하게 다져놓았다. 만약 사단이 가짜 그리스도를 남은 교회에 소개해서 거기에 거짓 기독교 이론을 요지부동하게 세워놓을 수만 있다면 세 천사의 기별의 능력과 영혼 구원사업의 효율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고 있는가?
나의 목회사역 초년병 시절에 나는 매우 젊고 열심 있는 천주교인 한 분을 구도자로 얻은 일이 있었다. 그는 폴란드계의 미국인으로 종교적인 배경은 그가 어려서 받은 신앙이 그 전부였다.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러 가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 이 사람은 천주교인이고… 마귀는 처음부터 자기 교회에 거짓 예수를 소개해 왔는데… 그렇다면 그 목적이 영혼을 파괴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이 사람에게 참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사단의 의도와 정 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짐 팔로스코빗츠 씨를 만나 첫 시간부터 나는 신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어떤 분이셨는가에 대한 복음을 공부시키기 시작했다. 성경의 심오한 진리가 점차 이해되자 그렇게도 무뚝뚝하던 그가 얼마 안가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날 밤 당장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십여 년이 지난 오늘도 그는 자기가 나가는 교회에서 겪은 허다한 풍파와 배도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충성되고 겸손한 평신도 지도자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말씀하셨다.
영혼구원의 비결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치켜 드는 것이 영혼구원의 비결이다. 그것이 오순절의 경험을 갖게 만든 비결이었다. 예수그리스도를 높이 드는 것이 우리의 대규모 전도 집회와 소규모 성경연구 모임들을 유리하고 효과 있게 만드는 비결이라는 사실에는 거의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그리스도를 높여야 하는 것일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무리 가운데 거짓 그리스도를 높이 치켜드는 자들이 있을 것을 암시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저들도 예수님을 주로 섬기고 그의 오심을 기다린 그리스도인들이란 사실이다. 저들은 예수를 높였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에 다녔고 예수의 이름으로 십일금과 연금을 바치고 했으나 문제는 예수께서 저들을 모르신다고 하신 것이다. 그들이 경배하고 높이던 사람이 누구였든지 간에 그는 참 그리스도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저들은 거짓 그리스도를 믿고 섬겼던 것이다. 저들이 섬긴 예수가 엉뚱한 예수였음을 주께서 지적하셨는데 그 증거는 바로 그들이 섬기던 예수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저들을 인도하지 않았던고로 저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에는 그리스도도 많고 (마 24:24) 주도 많을 것(고전 8:5)이나 참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이 계실 뿐이다.
거짓 그리스도와 참 그리스도가 있다는 증거는 요한일서 3:4~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참 그리스도)가 우리 죄(불법)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참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저들은 그저 그리스도라 하는 어떤 누구를 알기는 알았으나 그는 거짓 그리스도였으므로 저들이 죄를 이기도록 인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계명을 지키면 이로서 우리가 저(참 그리스도)를 아는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참 그리스도)가 그 속에 있지 아니 하니라”(요일 2:3,4)
이 말씀은 물론 일요일을 지키는 무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이 남은 교회에게 안전할까? 벌써 교회 안에는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설,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설, 또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라는 설등 별 소리를 다하는 이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아는가? 이와 같이 “불법”을 가르치는 소리가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참으로 참람된 일이 아닌가? 성경의 빛으로 조명해 볼 때 저들은 분명히 거짓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들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신자로서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다음과 같은 진행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가? (바로 그 사람이 당신이라고 생각해보라)
심판대 앞에서
“주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제가 주님의 교회에서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가르치고 십일금을 잘 내고 교회 잘 받들고 예언의 신도 다 믿었습니다.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대 이름을 생명책에서 찾을 수가 없네. 오직 ‘이기는 자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겠’다 했고 또 그런 사람만 ‘흰옷을 입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리라’하였네. 내 앞에서 물러가서 사단과 유다의 무리 편에 가 서게. 그대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나니’라고 한대로 그대가 누구에게 속하였나를 보여주고 말았네”(계 3:5 2:7 , 요일 3:8).
“그렇지만 주님!” 당신은 너무도 놀라고 낙담하여 부르짖는다. “제가 율법을 다 지키진 못했겠지만 어느 정도는 지켰습니다. 제가 제대로 못한 부분에 대해선 그저 주님의 은혜만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제 대신 모든 것을 다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전 그것만 믿었습니다. 사람은 도저히 온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게 아닙니까? 그렇지가 않았나요? 제가 섬긴 그리스도는 제 마음에 율법을 새겨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님의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은 율법주의이며,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공로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고, 우리는 그저 주님의 은혜만 믿으면 된다고 배웠거든요. 우리처럼 믿은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사실 순종의 좁은 길을 택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광신자 또는 완전주의자들이라고 불렀지요. 우리는 그들이 우리 죄를 지적하면서 자주 회개하라고 하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사람들로 생각했습니다.”
“주님, 제 말 좀 들어보십시요. 저는 주님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 주님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그 말씀들이 주님을 분명히 높이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주여, 우리는 주의 앞에서 주의 만찬을 먹고 마셨으며, 목사님들을 통해 주의 교훈을 길거리에서 배웠습니다!”(눅 13:26)
그때 예수님께서는 비통한 어조로 대답하신다.
“유감일세, 사랑하는 낯선자여, 그대가 그렇게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사람의 가르침을 믿었으니 참으로 유감이요. 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증거되었소. (마 1:21) 나는 그대의 마음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기를 힘썼으나 그대는 나를 모르는체 하고 다만 육신적 안일에 빠져 만족하고 있었오. 그대는 과거 그대가 자신을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교인이라고 간주했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나의 사면을 기대하시요? 그대가 받았던 빛의 절반도 못되는 빛을 받고 암흑 시기에 살았던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대와 똑같은 이유로 구원을 상실하였소… 그들은 그들의 집에 찾아오는 비천한 왈덴스인들로부터 진리를 배울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부들의 가르침을 따라 가짜 그리스도를 믿고 가짜 신앙을 했기 때문이요. 그대는 성경과 예언의 신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읽고 공부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가 있었으니 그대의 사면은 전적으로 불가하오. 더구나 이점에 대해 내가 분명히 경고하지 않았소? (신부, 목사, 학자, 유명인사등)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고…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고 하였지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만 주장 하는 자가 의롭다고 한 적이 있었는지?…(요일 3:7) 그뿐 아니라 이 말씀도 있지 않소?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고?
이보게 낯선 피고인이여! 그대 생각에는 인자인 내가 어떻게 깨끗했다고 생각하는가? 실제로 깨끗했다고 보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으나 법적으로 깨끗하다고 쳐준 것 때문에 깨끗했다고 보는가? 나는 그대의 완전한 모본이었으니 그대는 내 본을 따라 살 수 있었네. 왜냐하면 그대가 나를 믿는 믿음을 통해 받을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성격이나 능력도 나는 나타내 보였거나 사용한 일이 없었으니까. 나의 ‘완전한 인성’은 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내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하기만 하면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인성이었네. (시대의 소망 3권.154)
낯선 피고인! 그대에게는 핑계가 있을 수 없소.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에 부가해서 엘렌 화잇을 통한 특별한 기별들, 곧 그대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서 쓰여진 시대의 소망이란 책까지 그대의 서재에 꽂혀 있지 않았는가. 거기에서 나는 매우 단순한 말로 그대가 오해할 수 없도록 이렇게 말했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악적인 특성을 복종시키고 아무리 강력한 시험이라도 이를 모두 대항할 방도를 그리스도 안에 준비하셨다’ (상동 2권.202)
이보게, 낯선 피고인! 그대는 나를 안다고 주장하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 들아 나를 떠나가라’!”(눅 13:27)
슬피 울며 이를 갊
성경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눅 12:28)고 말한다. 주의 종은 말하기를 이들 중에는 많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인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이 주께서 모르신다고 말씀하신 그 무리에 속할 것이다.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를 따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참되고 진실해 보이는 사람들 중 상당한 다수가 천한 금속이었음이 입증될 것이다”(5T,136)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그러나 이와 같은 미혹의 이면에는 사단이 재림신앙의 심장부로 깊숙이 파고들어 가능한 한 많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짓 그리스도를 믿도록 계략을 베풀어 놓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재림교회 안에는 두 그리스도가 있게 되었다. 한 그리스도는 지상봉사 기간 중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인성을 가지고 완전한 칭의를 주기 위해 오셨으나 성화는 완전히 이루어주지 않는 그리스도요, 다른 그리스도는 자기가 구원하고자 하는 인생들의 인성 즉 타락하고 연약한 인성으로 오신 분으로 인간에게 완전한 칭의와 완전한 성화를 주시는 분이다. 이 두 그리스도의 차이는 실로 막대한 것으로서 그리스도교와 구원론의 핵심을 좌우하는 문제로 단순한 어의학적 범주를 훨씬 능가하는 영역의 문제이다.
데스몬드 포드가 처음 일어났을 때 그리스도의 본성문제를 별난 각도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어의학적인 문제로 밀어버리기도 했으나 데스몬드 포드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예리한 조직신학적 통찰력이 있는 그는 만일 그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자기의 주장을 교회 안에 확고히 심을 수 있다면 자신이 확립한 모든 종교적 철학을 교회에 견고히 세울 수 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엘렌 화잇은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는 열쇠가 된다?이 문제는 우리의 연구 과제가 되어야 한다?우리는 참회하는 정신으로, 배우는 자의 겸비한 태도를 가지고 이 문제를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연구는 숨은 진리를 깊이 탐구하는 연구자에게 보상을 주는 풍성한 결실의 밭이다.”(가려뽑은 기별 1권, 304)
그리스도의 본성 문제는 모든 문제의 중심이 된다. 그래서 데스몬드 포드가 자기가 확립한 그리스도의 본성론을 내세웠던 것이려니와 실은 그보다 앞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죄의 문제 즉 죄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죄의 정의 여하에 따라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바로 아담의 타락 이전의 본성이냐 타락 이후의 본성이냐로 달라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본성 문제에 대한 이해 여하가 구원에 대한 신앙여하를 결정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죄의 정의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죄는 불법이라”(요일 3:4)고. 불법이란 법을 어겨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 때문에 같은 성경절의 전반부에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분명하게 일러준다. 그렇기 때문에 엘렌 화잇은 이렇게 기록했다. “죄란 무엇인가? 성경말씀에 주어진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3:4)는 것 뿐이다. 사도는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 4:15)고 하였다.”(RH, 1890, 6, 10). “하나님의 말씀에 주어진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란 율법을 범하는 것이란 정의이다”(영문 대쟁투,493)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다한 신학자들이 5세기의 어거스틴을 비롯해서 이렇게 단순한 죄의 정의를 불만족스럽게 생각해 왔다. 그런 식의 단순한 정의는 신학적 깊이가 결여된 정의라 느낀 것이다. 그 결과 본 교회의 신학자들 중에도 엘렌 화잇의 글에 비추어 볼 때 맞지 않는 새로운 죄의 정의를 거론하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그리스도-즉 거짓 그리스도를 창출해 낸 것이다.
새로운 죄의 정의란 이런 것이다. ‘죄란 사람이 무엇을 행함으로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적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죄는 인간의 의지의 행사여하에 따른 것이 아니고 타고난 인간의 상태이다. 행사(행위)는 인간 속에 있는 죄의 결과에 불과하다’. 물론 이 말 속에는 어느 정도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연약한 인성과 그 속에 깊이 자리잡은 이기적 성질 때문인 까닭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죄는 의지의 행사가 있었을 때 성립되는 것이지 그러한 의지의 행사를 유발한 나약한 인간의 본성 그 자체가 죄는 아닌 것이다.
예컨대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머리를 길게 기르지 말라고 했는데 아들이 장발족이 되었다 하자. 이때 죄는 아들의 몸에서 머리털이 자라도록 하는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힘이 아니고 이발을 하지 않은 행위 그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자라게 되어 있듯이 천성적으로 죄로 기우는 경향, 이기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경향이 죄는 아니다. 죄는 사람이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와 연합시키지 않은 까닭에, 그 경향에 굴할 때 오는 것이다. 이점을 깨닫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런고로 죄란 근본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이지 인간의 어떤 본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사실은 매우 상식적이요 또 성서적이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이와 정반대 되는 새로운 정의를 내놓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으려 하나 성경은 이율배반적인 책이 아니므로 적절한 말씀을 찾지 못하고 그저 몇 군데 있는 말씀을 문맥을 무시하고 그 의미를 곡해한 채 이용하여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다. 그들의 주무기가 되는 성경절은 바로 로마서 14:23이다.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니라”
그들은 말한다. “이것 보시오. 그러니까 죄는 믿음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의지의 행사가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아기가 믿음 있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인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허점은 본문의 말씀을 펴서 그 구절과 문장 전체를 잘 읽어보면 밝히 들어난다. 그 구절의 전반부는 후반부를 설명하고 있는데 독자가 읽어보면 신학자들의 주장은 빗나간 것이다.
만일 믿음이 없으면 무엇이나 죄라고 한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무도 돌멩이들도, 심지어 새 예루살렘의 진주문들도 믿음이 없으니까 죄라고 해야 옳지 않은가?
그들은 “그런게 아니고 거기서 ‘모든 것’이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고 대답한다. 그게 사실인가? 본문의 말씀을 읽어보면 ‘모든 것’이 사람이 아닌게 너무도 분명하다 . 본문의 전반부를 읽어보면 그것이 전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신학자들은 절대로 본문의 전반부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 본문을 보면 이렇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그러므로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만일 사람이 믿음이 없이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죄를 짓는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믿음이 없이 하면 그것이 죄이다. 이 말씀은 요한일서 3:4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오직 믿음이 있어야, 즉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믿음 없이 하면 그것은 율법을 범하는 결과를 낳는다.(요일 5:3,4 참조)
엘렌 화잇은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요일 3:4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죄의 정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새롭고 비성서적인 죄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성격주절로 이사야 59:2이 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 그러니까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이다”라고 저들은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저들은 말씀을 제멋대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분명히 죄가 관계의 단절을 유발한 것을 말하고 있다. 단절된 관계는 죄의 원인인 동시에 죄의 결과이지 죄 그 자체가 아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죄의 정의를 통해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세상에 소개되고 있다. 엘렌 화잇은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요일 3:4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죄의 정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제발 어떤 새로운 죄의 정의를 창안해 내려고 애쓰지 말라.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새로운 죄의 정의를 꾸며놓고 그 위에 인간적 논리에 입각한 새로운 교리적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 결과 앞에 보는 바와 같은 교리적 차질을 노출하고 있다. (독자는 먼저 한쪽을 다 읽고 다른 한쪽도 다 읽은 다음 양쪽을 하나하나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 그리스도의 비교
[ 새로운 죄의 개념 위에 확립된 새 그리스도 ]
1, 죄는 우리가 타고난 상태이지 의지의 행사가 아니다. 죄는 인간의 상태이지 행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죄는 아담의 타락에 연유한 것이며 우리의 잘못에 의한 것이 아니다)
2. 죄는 우리가 타고난 상태이므로 그리스도는 보통 우리가 출생한 상태와는 다른 상태로 출생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 이것은 재림교회에 들어온 새로운 가르침인데, 우리의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 지적한 죄의 정의를 받아들이면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이해도 변경되지 않을 수 없다.)
3. 예수는 출생한 상태가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그와 같이 닮는다는 것을
전혀 바랄 수 없다. (사단은 항상 인간이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사상에 대결해 싸웠다.)
4.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가 법적으로 죄에서 구원 받았다는 복된 소식이다.
복음은 칭의가 그 전부요 성화란 사실상 이룰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인간이 모든 죄를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는 “행함으로 구원 얻으려는 자”로 낙인이 찍힌다.)
5. 따라서 예수께서 행하신 구속사업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업일 뿐이요 우리의 모본으로 행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봉사는 승천 후 주 후 31년에 개시된 의의 봉사가 그 전부다. (그래서 1844년의 의미심장한 역사적 의미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 역사적 정통 재림신앙에 입각한 그리스도와 죄에 대한 개념 ]
1. 죄는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의지의 행위이다. 따라서 그 책임은 죄인이 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율법을 지킬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2. 예수는 인간의 타락하고 연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진 것이다. “인성을 쓰신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과 같이 되셨다 . 그는 우리의 저하된 상태의 본성을 취하셨다.”(영문 가려뽑은 기별 1권 252, 253) 비록 그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했으나 전혀 죄에 동참하지 않으셨다”(상동, 256) 이는 그가 육신의 연약함에 굴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그의 신성에 연합시키심으로 승리하셨다. 이로써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할 때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모본을 보여 주셨다.
3. 중생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에게 새로운 영적 속성을 주신다. “진정한 신앙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게 하며,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더불어 승리자가 되게 한다. 그 까닭은 인간이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며 신성과 인성이 그의 안에서 결합되기 때문이다.” (상동, 364)
4.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성화시키시기 위해 오셨다는 복된 소식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인성을 누구나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소망 3권, 154)
5. 예수님은 1844년에 성소를 정결케 하기 위해 새로운 봉사사업에 착수 하셨다. 이 사업은 당신의 백성을 조사 심판하고 죄에서부터 정결케 하는 것인데 이로써 저들은 최후의 대 환란을 중보자 없이 견디게 되며 승천할 준비를 마치게 된다. (그러므로 1844년이란 시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위에 보여준 새로운 죄의 개념의 이론은 데스몬드 포드의 신신학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그 깃발을 높이 들고 제창한 결과 교회안에 홍수 사태를 유발한바 있다. 비록 그 교리를 가르친 장본인인 그는 교회 밖으로 추방 되었으나 그의 가르침은 그대로 남아 있어 누룩처럼 퍼져 결실을 맺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기본적 연구를 통해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음을 살펴 보았다. 항상 올바른 증거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제시하는 쪽이나, 그것을 검토해 보는 쪽 양편 다 건전한 이성과 건전한 귄위(근거)를 존중하고 열려진 마음자세로 증거를 공정하게 저울질 하려는 성의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 당시 “무지한”백성을 책동하여 참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도록 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백성이 성서적 진리의 빛에 대해 편견을 가지도록 만들어 결국은 증거를 저울질 할 생각도 못하게 밀고 나갔다. 나는 독자에게 이 기사의 결론은 끝까지 다 읽고 많이 기도하며 증거를 신중하게 검토할 것을 호소하는 바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받은 모든 빛에 대해 충성되게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는 우리 각자가 구원의 도리를 깊이 깨달을 시간을 허락하고 기다려 주신다. 우리는 타인의 신실한 신념을 비판해선 안된다. 어느 누가 안식일을 믿든 일요일을 믿든, 그리스도의 본성이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본성이라 믿든, 타락 이전의 본성이라 믿든 그들을 비판해선 안된다. 그러나 오류를 믿는 신실한 신자들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실이 조금도 진리의 중요성을 감소 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무엇을 믿으면 그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주도 많고 그리스도도 많으나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 하시는 참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 밖에 안 계시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조금도 인간적 생각으로 짐작하고 더듬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 10:2~5).
교회 안에 있는 두 그리스도 – 제2부 –
우리는 재림교회 안에 두 그리스도가 공존하는 사실에 대해 언급을 시작했다.
한 그리스도는 아담의 타락 이전에 본성으로 죄인들을 대신하기 위한 대속물로 왔고, 다른 그리스도는 아담의 타락 후의 본성을 가지고 우리의 대속물 뿐 아니라 우리의 모본이 되기 위해 오셨다. 이 두 그리스도는 대단한 차이가 있는데 단적으로 말해 하나는 거짓 그리스도요 다른 하나는 참 그리스도이다.
어떤 이들은 이 차이를 단순히 어의학적인 문제로 간주하여 말하기를 “신학적 차이는 잊어버리고 연합하자, 연합하자”한다. 그리스도의 본성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대결의 양편에는 많은 신실한 재림교인들이 가담하고 있고, 또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키 위해 서로 형제를 사랑하며 기도와 성경연구에 몰두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절대로 이것이 어의학적 문제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느날이 참 안식일이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대결을 보더라도 문제의 양편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허다하게 가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단순한 어의학적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닌것이다. 참되고 영속적인 그리스도인의 연합은 오로지 우리가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합의를 볼때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 인성및 그의 사명을 논의할 때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논하는 것이다. 엘렌 화잇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연구해야 한다” (가려뽑은 기별 1권, 244)고 하였다.
그리스도와 구속의 경륜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견해는 구속의 경륜에 대한 개념 전체를 지배한다. 많은 신학자들이 비록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견해차이는 있을 망정 이 사실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 조직 신학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본성이 아담의 타락 이전의 본성과 동일 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이기는 승리의 생애는 불가능한 것으로 믿기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개념을 믿는 신앙을 “완전주의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완전주의”를 믿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로 낙인이 찍힌다. 이렇게 말하는 신학자들은 대체로 구원에 필요한 것은 칭의(Justification)가 그 전부라고 믿으며,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큰 죄, 즉 사회적으로 용납이 안되는 죄들만 이기도록 하라고 격려한다. 저들은 죄를 짓더라도 그 죄인의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이 신학자들은 흔히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토록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once-saved-always-saved)”는 이론이나 그와 유사한 주장을 믿는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본성을 쓰고 오셨다는 것을 믿는 신학자들은 구속의 경륜의 대한 신앙도 그들의 것과는 정반대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생애 하는 동안 우리의 죄를 지적해서 알게 해 주시며 그때마다 그 죄를 이길 힘도 함께 주신다고 믿는다. 그들은 칭의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구비자격이라 믿으며, 죄를 이기는 것 그 자체로써 하늘에 들어가도록 보장을 얻는 것이라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저 주시는 구원의 선물은 죄를 이겨야 한다는 조건부로 주어진다고 믿는다. 죄를 이기는 승리는 일순간의 경험이 아니고 매일 매일의, 순간 순간의 과정이다. 이들은 대체로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토록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속적인 관계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는 기독론과 구원론의 대표적인 두 가지 견해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재림교회 안에 급속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제 3의 이론이 하나 있는데 이것을 잠시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것은 전술한 두 견해를 혼합 절충한 이론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타락하기 이전의 본성을 쓰고 오셨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데스몬드 포드의 기독론을 받아들여 결론만 정 반대로 제시하는 이론이다. 우리가 죄를 완전히 이길 수 있는 이유를 저들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이겨주시기 때문이라고 하며, 인간의 죄를 이기려는 노력은 “자기의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는 무모한 노력”이라 간주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신앙적 관계를 가지면 죄를 범하려는 유혹은 없어지고 오직 우리의 신앙적 관계를 단절하려는 유혹만이 있을 뿐이란 것이다. 요컨대 우리도 아담의 타락 이전의 본성-또는 그와 흡사한 본성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금세기 초에 인디아나에서 머리를 들었던 거룩한 육체 운동(holy flesh movement)과 유사한 것인데 그때의 이론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의 주창자들은 이미 영구한 새 본성을 받았다는 것이었고 오늘의 이론가들은 이 새 본성은 매일 신앙생활의 과정을 통해 받아야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먼저 성경 말씀을 살펴보고, 다음에는 예언의 신의 기록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본 연구는 성서적 구원론의 올바른 이해를 결정적으로 도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아니 영원한 나라에 가서라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을 완전히 깨닫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받아드릴 수는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관한 성서적 기록을 거부한다면 성서적 구원론도 역시 거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신약성서에 기록된 바울의 글을 보면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로마서 1:1~4).
이와 같이 바울은 보편적인 유대사상을 떠나 대담하게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그의 글 첫 부분에서 선언한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리스도의 본성 중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의 인성론이다. 그분의 인성이 지금의 우리가 타고난 인성과 같은 것이었나 아니면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의 인성과 같은 것이었나? 바울은 그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로 말하고 있다.
이 “혈통”이란 족보를 말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즉 다윗의 씨(seed)로 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다윗의 혈통에서 인성을 유전 받아 태어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9에서 사람이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씨” 즉 그의 신성을 받아 그 신성이 우리 속에 거하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벧전 1:23) 이로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벧후 1:4)된 것이다. 인간이 거듭날 때 우리는 영적인 의미로 볼 때 그리스도의 씨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태어나셨다.
신약 성서에서 “육신”은 정욕과 죄가 자리한 본거지이다. “육신”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타락한 인간성, 즉 유혹에 약하고 잘 넘어가는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처럼 “육신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이라”(갈 5:19~21). 육신의 일들 중에는 하나도 선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고, 하나같이 나쁜 것 뿐이다. 타락 이전의 아담의 육신의 일들은 물론 선한 것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일단 타락하자 성격이 지적하는 그 “육신”이라 하는 인성은 죄의 종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인간 가족중에 그 밖에 다른 인성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타락한 아담의 후손 이외에는 다른 혈통의 인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담은 첫 아이를 낳기 전에 이미 타락했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께서 타락하지 않은 인성을 타고 났다면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이어받은 혈통에서 난 것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께서 태어나신 혈통이 타락 이후의 아담의 계보에서 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가 “다윗의 자손”임을 명백히 한다. 다윗은 실로 고백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 (시 51:5)라고 말했던 것이다.
정말 예수님은 인간 조상으로부터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받아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그밖에 받아가지고 나올 다른 인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위해 죄를 이겨주신 그 위대한 본은 바로 그 타락한 인성을 쓰시고 이루신 업적이다. 그 때문에 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 8:3)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쉬운 말로 풀이하면 이렇다. 인간이 의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랑의 율법을 주셨으나 인간이 타락한 후 육신적 요구, 즉 죄악적 성향에 종이 된 연약한 인간성의 소유자가 되었기 때문에 율법이 시도하는 바가 실현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시되, 다른 모든 인생들처럼 죗된 본성을 가진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살도록 출생시키셨는데 그는 자기 육신이 가진 죄악적 세력이 꼼짝 못하도록 제압했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생을 사실 수가 있었다. 우리도 그의 본을 따라 살면 비록 죗된 성향으로 가득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지만 예수님처럼 육신의 성향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살 수 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지배에 즐거이 따라 살면 우리도 하나님늬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룰 수 가 있는 것이다.
왜 예수께서 타락한 죄된 인간의 모양으로 오셨는가? 그것은 바로 그가 인간의 죗된 본성을 극복하고 이기는 길을 보여주심으로, 의로운 율법의 요구가 타락하고 죗된 본성을 타고난 우리 속에도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해서였다.(롬 8:4)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 11, 17, 18)
롬 8:3절은 예수께서 타고나신 인성이 바로 타락한 인성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같이 분명한 가르침을 배척하는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곡해하고 망가뜨리려고 연구에 힘을 써왔다. 그래서 그들이 내어 놓은 주장이 무엇인가? 그것은 “모양으로”라는 말을 왜곡해서 만든 엉뚱한 주장인데, 즉 그리스도는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왔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모양”으로 번역된 희랍어는 “호모이오마( Homoioma )”란 말이다. 영어로 번역할 때 이것은 “likeness”란 말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바울의 의도가 모양은 비슷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말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호모이오마”란 말은 바울의 글 빌립보 2장에도 나타나는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라고 8절에 기록되었다. 그러면 예수께서 실제로 사람이 되어 우리들 속에 사셨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았다는 말일까? “호모이오마”는 “같다”는 뜻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 라고 못박고 있다.
우리와 같이(호모이오마) 예수께서도 타락한 죗된 성향을 가진 인생으로 태어나셨다. 우리와 같이 그분도 다른 힘, 즉 신령하고 거룩한 본성에 의지함으로써만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와 같이 그분도 거룩한 생애를 살기 위해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셨다. 그분은 우리처럼 죄의 결과로 약화된 본성을 타고 나셨을까? 물론 그랬다. 그러나 그의 신성은 바로 천사가 말한 “나실 바 거룩한 자” (눅 1:35)였으며 출생시부터 거룩하신 분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죄를 범한고로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나 그는 전혀 죄를 범한 일이 없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 즉 영적인 본성과 육적인 본성, 이 두가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출생시부터 그의 육적인 본성은 영적인 본성의 지배하에 있었다. 전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는 “육신”의 소욕을 계속 십자가에 못박아 두었기 때문에 단 한번도 그는 육신적 소욕에 마음으로라도 굴했던 일이 없었다. 우리도 중생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본성을 받으면 그와 같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새로남(중생)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롬 8:13, 요 3:3 참조) 예수께서는 이것이 가능함을 효시하셨다. 우리와 같은 타락한 인성을 쓰고 오셔서 죄를 이기심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아담의 자손이 승리하고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 (히 2:18)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해 받을 수 없는 어떤 성품이나 능력도 소유했거나 사용한 일이 없었다. 그의 완전한 인성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예수께서 하나님께 순복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순복하면 소유할 수 있다.”(DA 644)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받아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승리하셨으므로 우리도 그와 같은 인간의 유전적 제약속에서도 승리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타락한 인성의 제약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해야 할 필요가 있기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의 비결을 보여주시며 자기 자신도 우리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승리하는 방법을 보여주셔야 했다. “이 위대한 구속사업은 구세주께서 타락한 아담의 입장을 취함으로서만 수행할 수 있었고…그 결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인간이 각기 제 나름대로 원수를 이기게 되는 것이다…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가! 당신 자신을 비하시키신 얼마나 놀라운 겸비이신가! 영광의 왕께서 타락한 인간이 되어 오시겠다고 자신을 낮추시다니! 그분은 아담의 발자취를 따라 자신의 발걸음을 맞추시려 하셨고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기로 하신 것이다.” (Confrontation, 17.18)
이것이 바로 사단이 증오하는 진리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성을 쓰신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를 그의 지배권에서 해방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단은 이 위대한 신약의 가르침을 무너뜨리기 위해 방안을 모색했다. 만약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지 않다고 믿도록 유도할 수만 있다면 인간을 계속 자기의 수중에 움켜쥐고 있을 수 있음을 그는 간파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이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의 인성이었다고 믿는 신학자들은 거의 누구나 우리가 지금도 사단의 지배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저들은 인간이 죄를 이기고 승리한다는 사상에 대해 조소한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이 신학자들은 인간이 죄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항상 사단의 종으로 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사단의 목적인 것이다.
사단의 기만
사단의 주장은 거짓이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이론만으로가 아니고)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 8:36)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신학자든 목사든 누구든지) 아무도 너희를 미혹(기만)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낭 의롭다고 칭함이나 받는 자가 아니고)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요일 3:5~7).
분명히 요한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단한 기만과 배도가 있을 것을 내다보고 미리 경고 한 것이다. 성경의 경고는 까닭 없이 주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요한은 아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우리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도록 기만하지 못하게 하라고 경고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요일 3:8). 요한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대적 기만이 있을 것을 경고함과 아울러 사단에게 이용당할 배도세력과 그들의 행위가 어떠할 것을 구체적으로 밝혀준다. 사단이 사용할 세력은 예언이 말하는 대로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서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속여 죄는 이길 수도 없고 이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칠 터인데 그 방법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었다는 진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으로 시도할 것이 예언되어 있다. 요한의 글을 자세히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요일 4:2~4 )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영이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영이 아니다. 이야말로 영을 구별하는 절대적이고 분명한 식별방법이다. 인간들은 혼동되는 수도 있으나 영들은 혼동이 없다. 선지자들도 이것으로 시험해 볼 수 있다. 많은 거짓 선지자나 교사들이 ‘예수께서는 살과 뼈를 가지고 계셨다. 피로를 느끼셨다. 우리처럼 시장해서 음식도 잡수셔야 했다’는 등의 사실을 시인하나 마귀나 그의 천사들을 예수께서 타락한 인성으로 오셔서 죄를 이겼다는 사실을 절대로 시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들의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며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인류는 자기의 속한 식민이며 노예란 것을 주장할 뿐이다.
“육체” 또는 “육신”이란 신약용어는 타락한 인성을 뜻하는 말이다. 모든 신약의 저자들이 그런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였다. 요한 역시 요한일서에서 그런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타락한 인성)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요일 2:16)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 (타락한 인성)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타락한 인성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 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 1~2)
그는 우리가 육체 가운데서 살지 말아야 한다고 할 때 문자 그대로의 살이나 뼈를 말하고 있거나 음식이나 휴식을 필요로 하는 어떤 약해진 상태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구원을 위한 요구조건이었다면 우리는 모두 맥이 쭉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말한 다음의 것과 일맥상통 한 것이다. “내 속에 곧 내 육신(타락한 인성)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18.23).
우리는 오직 “영으로써”, 즉 성령의 힘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수 있는 것이다. (롬 8:13)
바울의 “육신”은 연약하고 이기적인 본성 바로 그것으로써 그것만 가지고서는 죄의 호소를 물리칠 힘이 없었다. 예수님의 육신도 그와 같은 육신이었다. 바로 그 육신을 주님은 십자가에 날이면 날마다 아니 시간마다 못박아야 했다. 그 결과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그의 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성품을 이루셨다. 이 길만이 그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는 길이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의 지도 아래 새로운 생애를 살아야 한다. 이 새 생애는 로마서 6장의 침례로 잘 묘사되어 있다.
요한일서 4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적그리스도의 엄청난 세력은 온 마귀들과 합세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신을 쓰고 우리의 인성을 가지고 오셨다는 분명한 가르침을 반대한다. 이 세력은 소위 “무염시태설”이란 용어를 꾸며내어 예수는 타락하지 않은 여인의 몸을 빌어 태어나셨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신약교회 배도의 시작이였으며, 계시록에 언급된 짐승의 세력을 후일에 형성하기에 이른다. 여하튼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예수의 인성이 타락하지 않은 인성이라면 그가 타락하지 않은 여인으로부터 출생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때문에 마리아는 죄가 없는 여인이라 주장하는데, 논리적으로 그래야 마땅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러자면 마리아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아담에 이를 때까지 죄 없고 타락하지 않은 족보를 꾸며놓아야 마땅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오신 것은 “실로 (타락하지 않은)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히려 (타락한)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하였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식별하는 표식중의 하나는 그 세력이 예수의 육적인 인성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해서 참 선지자인지를 입증하는 하나의 표는 그가 예수의 인성을 우리의 인성과 같은 것으로 가르치는가를 검증해보면 알 수 있다. 엘렌 화잇은 여기에 합격하는가? 물론이다. 재림교회의 신학자들 중 허다한 사람이 사도 요한이 경고한 그 틀린 주장에 동조하다가 결국엔 예언의 신마저 내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타락이전의 인성론을 견지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아직도 마귀와 죄의 종으로 묶어두는 이론이기 때문에 예언의 신을 믿고 옹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엘렌 화잇은 너무도 분명하게 이것을 밝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인간이 순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수께서는 이 기만을 폭로하신다. 그는 우리처럼 인간이 되어 순종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스스로 우리의 본성을 쓰시고 인생을 체험하셨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 만일 우리가 무엇이든 예수께서 당하지 않으신 것을 담당하게 된다면 그것을 가지고 사단은 하나님 의 능력이 인간을 위해 충분치 못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예수는 인간이 당면 하는 모든 시련을 당하고 이기셨다. 그는 우리가 자유로이 받아서 사용 할 수 없는 어떠한 능력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신 일이 없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는 유혹을 대면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그것을 이겼다…그는 신성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붙드신다.” (시대의 소망. 24)
예수는 인성과 신성의 연합을 통해 타락한 인성의 아우성이 신의 성품의 권세 앞에 여지없이 잠잠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는 보통 인간들처럼 자기의 성품이 어떠한 생각이나 감정에 의해 죄악적 경향을 계발하도록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는 타락한 인성을 소유했으나 그 인성은 허다한 고난을 통해 계속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다. 로켓은 중력에 끌려 땅으로 떨어지려는 경향을 가치고 있으나 일단 엔진에 점화만 되면 중력의 작용은 상실되고 만다. 그 순간부터 로켓은 위로 치솟는 경향을 보인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했고, 우리도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연결된 것처럼 순간마다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투쟁을 하지 않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분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예수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 유혹들을 이길 터인데 주의 능력으로 반드시 이기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는 야곱이 전에 보았던, 밑바닥은 지상에 두고 꼭대기는 하늘 문, 곧 영광의 문어구에 이른 그 사다리이시다. 만일 그 사다리가 지상에 도달하는 한 개의 계단에 이르러서 쓰러졌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에 찾아 오신다. 예수께서 우리의 성정을 쓰시고 승리하신 것은 우리가 당신의 성정을 취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롬 8:3) 오셨으나 죄없는 생애를 사셨다.” (시대의 소망 2권, 27)
“그리스도는 스스로 고통 당하는 인성, 죄로 비천해지고 더러워진 인성을 쓰셨다.” (엘렌 화잇. 본교 성경 주석 4권,I147)
“율법을 유린당한 하나님의 신성과 율법을 유린한 아담의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났다.” (상동 7권, 926)
예수께서 오신 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있었더라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에게 특별한 도우심이 있으므로 죄를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