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 : 콜린 스탠디쉬(Colin Standish) – 시드니 국립 대학에서 심리학을 강의하였고, 미국의 메린랜드 주에 소재한 콜롬비아 삼육대학의 대학장 등 여러 재림 교회 대학에서 헌신하였으며, 현재 하트랜드 선교기관의 책임자로서 일하고 있음)
1974년 어느날 나는 Atlantic Union College의 대학장 잭 블랑코(Jack Blanco) 박사와 함께 리뷰 앤 헤럴드의 편집장인 케넷 우드(Kenneth Wood) 목사와 부 편집장인 허버트 더글라스(Herbert Douglass) 박사를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리뷰 앤 헤럴드의 편집인인 두 사람 모두는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가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내의 신학적 논쟁의 중점이라는 것을 단호하게 믿고 있었다. 그들은 호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염려스러운 신학적 분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호주에서 자라났고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다고 배워 왔으나 그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던 것은 8세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흔히 그렇듯이 우리는 그 날도 말썽을 일으켰고, 어머니는 “왜 너희는 어렸을 때의 예수님처럼 될 수 없니?” 라고 꾸짖으셨다. 그 때 나는 예수님은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느냐고 반문했고, 내 동생 럿셀의 기억에 의하면 어머니는, 성령께서 그를 덮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도 그렇게 덮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일이 기억난다. 물론 그때 우리는 후일 재림 교회 안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며, 수 많은 주의를 집중시키는 깊은 신학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1966년, 호주에 있는 아본데일(Avondale) 재림교회 대학의 한 동료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 동료는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지 않은 본성을 취하셨음을 주장했고, 그 자리에서 나는 그의 주장에 대해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반면에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위해 치르어진 그리스도의 희생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그 점만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 나는 대두 되어 있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케넷 우드 목사와 더글라스 박사의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은 나로 하여금 그 문제를 깊이 연구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나의 대학 학장도 말하기를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 보지 않았으나 앞으로 연구해 보아야겠다고 했다. 6주간의 깊은 연구 후에 나는 과연 캐넷 우드 목사와 허버트 더글라스 박사가 옳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어느 금요일 점심 시간에 나는 새로 발견한 확신에 대하여 학장에게 이야기 했고, 대학장인 블랑코(Blanco) 박사도 그 문제에 대해서 연구한 결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감격하였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우리를 함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 후로 우리 주님의 성육신의 아름다운 진리가 더 깊게, 넓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을 통해 몰두하여 연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문제는 1988년도에, 1888년 미네아 폴리스 대총회의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E. J. 와그너(Waggoner) 박사와 A.T. 존스(Jones) 목사의 설교의 공식적인 사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대총회에서 설교한 기별의 정확한 내용을 확인 할 수 없으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대총회 이후 두 사람이, 특히 존스 목사의 기별이 그리스도의 타락한 인성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존스 목사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거룩한 길”에서 그는 총 17장 중에서 11장을 우리의 하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주제와 예수님의 타락한 인성에 대한 성경상의 증거를 탐구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1905년에 발행되었으나 초기 1890년대의 그의 설교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존스와 와그너의 이러한 주장들이 그들을 신앙에서 점차적으로 배도하도록 이끄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심심찮게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들을 견책하거나 충고했던 기록이 전혀 없다는 사실로서 입증될 수 있다. 우리는 화잇 여사가 그들의 기별을 다른 영역에서 돕기 위하여 계속해서 보낸 많은 편지들을 가지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화잇 여사의 기록 중에는 예수께서 취하신 타락한 인성에 관한 진리를 옹호하는 증언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해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을 한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통하여,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의 결론을 끄집어 낸다.
1.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결 코 설교하거나 언급되어서는 안된다.
2. 교회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두 가지 중 어떤 것이라도 가르칠 수 있고 설교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의 견해가 모두 위험한 것이다. 첫 번째 견해가 위험한 이유는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교회 제일주의의 입장을 취하지 않고 말씀 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성경,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기준이 된다.” “오직 성경만이 진리의 심판자이다.” 혹은 “우리는 성경 외에는 다른 신조가 없다”는 등의 말을 많이 들어 왔다. 교리적인 문제에 관해 교회가 최종적인 권위를 가졌다는 개념은 항상 치명적이고 교황적인 잘못으로 간주되어 왔다. 나아가서 영감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연구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로 연결하는 금 사슬이다. 이것이 우리의 연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주제에 접근할 때 우리는 불 타는 가시 떨기나무에서 그리스도께서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주의하여야 한다 (출애굽기 3:5). 우리는 배우는 자의 겸손과 통회하는 심령을 가지고 이 연구에 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한 연구는 숨은 진리를 깊이 파는 탐구자에게 보상을 베푸는 기름진 땅이다.” (가려 뽑은 기별 1권, 244)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르치고 설교하든지 자유라고 생각하는 두 번째의 견해는 우리가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여도 좋다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그것은 우리가 진리든 오류든 무엇을 가르치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상의 문호를 열게 한다. 이 두 번째 견해가 오늘날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다양하고 상반된 가르침들이 범람하도록 허용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것은 사단의 목적에 잘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진리만을 취급하신다.
신 신학의 추종자들은 화잇 여사가 이 문제에 있어서 양쪽 모두를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말 함으로서 그들은 화잇 여사를 일관성이 없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의 종으로 하여금 상반되는 기별을 제시하도록 지시하시지 않으셨다. 화잇 여사가 이 문제에 있어서 두 견해를 다 지지하는 것처럼 주장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주 그녀의 증언을 오용하고 있다. 회의주의자들은 성경 말씀을 해석할 때 진리를 왜곡시키는 수치스런 일을 범한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성경과 예언의 신의 말씀이 일관성이 없고 두 가지 양면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의해서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대표적인 저서에서, 랄프 랄슨 (Ralph Larson) 박사는 1852년 이후 미국, 영국, 남 아프리카 및 호주에서 출판된 모든 재림교회의 서적들 가운데 언급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서 연구했다. 랄슨 박사는 1852년부터 1952년까지 우리 교회의 출판물 중에서 약 1,200 여 개 이상의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기록들을 발견하였다. 그 중 화잇 여사의 기록이 약 400 여 개 정도가 있었으며, 다른 저자들의 기록이 약 800 여 개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모든 기록은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타락된 인성을 취하셨다는 교리를 지지하고 있었다.
1952년 이후 교활한 새로운 사상이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 분열과 혼란을 일으켰는데, 랄프 랄슨 박사는 그것을 가리켜 “혼란의 시기”라고 불렀다. 나의 연구에서도 1947년에 당시, 와싱턴 디 씨에 있던 우리 교회의 신학교의 교수 중 적어도 한 명은 그리스도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을 이미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재림교회는 1950 년대 중반에 “교리에 대한 질문” (Questions on Doctrines) 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의 저자들은 재림교회 안에서 어거스틴적 천주교회 사상에 근거를 둔 빗나간 견해를 정설로 제시해 보려고 노력했다. 아마 어떤 서적도 “교리에 대한 질문” 이라는 책보다 더 많이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40 여 년 동안 우리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몇몇 뚜렷한 예외는 있지만, 이러한 방향의 가르침이 만연해 왔다. 그 결과 이 세대의 수 많은 목사들은 그들 스스로의 잘못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아름다운 진리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교리의 잘못을 깨달은 적지 않은 목사들이 우리의 주시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성경적인 진리를 아직도 곧 바르게 가르치는 사람들과 합류하였다. 이 아름다운 진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빛을 각 성도들의 마음에 비추고 있다.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이해한다.
1. 가장 미약한 이유이기는 하지만,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그 출범 당시부터의 전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음을 가르쳐 왔다.
2.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음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히브리서 4:5 – 킹제임스 성경 한글 번역본).
“자녀들이 피와 살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는 것 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심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시며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 주시려 함이니라.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그러므로 그가 모든 일에 마땅히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으니 이는 하나님과 관련된 일들에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들의 죄들을 위해 화목케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14-18 – 킹제임스 성경 한글 번역본).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시고”(로마서 1: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로마서 8:3,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갈라디아서 4:4,5).
3. 화잇 여사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44회 이상이나 특별히 언급했다. 그녀는 항상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말할 때 “타락한” 혹은 “죗된” 이라는 용어를 적용 함으로서 성경 말씀을 확증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한번도 “죄 없는” 혹은 “타락하지 않은” 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중 몇 가지 증언들을 인용하면;
“나에게 수많은 편지들이 왔는데, 그리스도께서 만일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셨다면 사람이 당하는 시험과 같은 시험에서 실패하셨을 것이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실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해 확실히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모본이 되실 수 없고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인간이 당해야 했던 시험을 받으실 수 없다.” 가려 뽑은 기별, 1권, 408
“위대한 구속 사업은 구속자가 타락한 아담의 자리를 취하셨을 때 성취될 수 있었다.” Review & Herald 1874.2.24
“이 세상 사람들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시기까지 낮추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그를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셨다.” 시대의 소망, 112 (영문)
“그는 타락한 인성을 취해야 하셨다.” 초기문집, 150 (영문)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예언의 선물, 4권, 115
“아담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을 때에는 그가 아직 죄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아니한 때였다. 아담은 완전한 장년으로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기운이 완성하였었다. 그는 에덴의 영광으로 둘러 쌓여 있었고 날마다 하늘의 천사들과 교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단과 대결하시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셨을 때는 그렇지 못하였다. 4,000 년간 인류는 육체적, 정신적, 또는 도덕적 힘이 저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타락된 인류의 연약함을 자기 몸에 취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심으로써만 가장 깊이 타락해 있는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시대의 소망, 117 (영문)
이 문제에 대한 화잇 여사의 가장 예리한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시험 받는 자들을 어떻게 구원하실지 알기 위하여 자신의 죄 없는 본성에다 우리의 죄 있는 본성을 취하셨다.” 의료봉사, 181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단순히 인간의 모양만 취하셨다고 하지만 화잇 여사의 말씀 속에서는 그러한 것에 대한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다. (영적 선물, 4권, 115을 읽어볼 것)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 전 본성과 타락 후 본성을 함께 취하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육체적 본성과 정신적, 도덕적 본성을 분리하는 것으로서 악한 육체와 선한 양심을 구분하는 헬라의 이교도적 개념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원론적 개념을 단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단의 기만이다.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육신을 취하셨다면, 실제로 그분은 그렇게 하셨지만, 그의 모든 본성 또한 타락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8:3 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강조해 왔다. 만일 우리가 여기에 사용된 “모양으로” (likeness) 라는 말이 희랍어의 “homogeneity” (“동일한 종류의, 혹은 같은 절차로 이루어진” 등과 같은 뜻이 있음 – 역자주) 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 말로 인해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예를 들어 보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빌립보서 2:7).
아무도 이 성경 절을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변치 못한 논리를 로마서 8:3 에 자주 적용한다.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논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사람과 같은” 이라는 말의 뜻을 “같지 않은” 의 뜻으로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저질러 온 잘못은, 그리스도께서 타락하기 전의 아담의 본성을 취했다는 견해를 진심으로 믿는 자들을 진정으로 염려하여 권고하지 않는 데에 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 역시 성경 절과 예언의 신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누가복음 1:35 과 히브리서 7:6 이다.
“천사가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누가복음 1:35).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브리서 7:2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의 성경 절들은 예수께서 물려받은 본성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품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본성과 품성에 대한 분명한 구분을 이해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타락하기 전의 본성과 타락한 후의 본성을 동시에 겸하여 취하셨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견해를 피할 수 있게 한다. 성경에서 모든 유대인의 장자들이 “주께 거룩한 자”라고 불리운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다.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한대” (누가복음 2:23).
어떤 사람들은 이 Post-Lapsarian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타락한 후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믿는 사람) 들은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만들고 있다고 염려해 왔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변조된 어거스틴의 원죄설을 믿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들의 주장은 만일 그리스도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셨다면, 그분께서는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과거에 하스켈 (S. N. Haskell) 목사 역시 이와 유사한 논쟁에 직면했는데, 그는 당시 인디아나 주에서 일어났던 거룩한 육체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이 문제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그 문제에 대해서 하스켈 목사는 화잇 여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아래와 같이 말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타고 나셨음을 믿는다고 말할 때, 아무도 우리를 오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그 사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거룩한 육체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 은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범죄하였다는 것을 믿는 사람으로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문제에 대한 그들의 신학적인 견해의 촛점은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 이전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믿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화잇 여사에게 보낸 하스켈 목사의 편지 1900.9.25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견해 (Pre-Fall View) 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하는 화잇 여사 글의 대부분은, 화잇 여사가 베이커 (W.L.H. Baker)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발췌된 것들이다. 이 편지에 대해서는 본교의 성경 주석에 약간의 설명이 되어 있고 랄슨 박사의 책 가운데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 그 편지의 내용 중 오해를 받아온 구절들의 예를 들어 보자.
“그리스도를 사람들 앞에 죄의 경향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 본교회 성경 주석, 5권, 1128
이 기별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죄로 기울어 지려는 경향 (propensities of sin) 을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경고로 주신 것이다. 동시에 화잇 여사는 불순종의 경향 (propensities of disobedience) 을 타고 난 사실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녀는 또한 그리스도를 우리와 꼭 같이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것은 그분의 품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그분의 본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다음 구절은 아마 이 사실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는 삶을 시작하셨으며, 모든 인생의 경험들을 겪었으며, 성화된 인간의 의지를 가지시고 삶의 기록을 마치셨다. 그는 한결 같이 우리가 당하는 시험을 당했으나 자신의 의지를 굴복하고 거룩하게 보존하셨으므로 털끝만큼이라도 악을 행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특별증언, 1894,10,29.
여기에 분명한 열쇠가 있다.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완전히 다른 차이는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품성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올바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하늘의 선물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든지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해 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어떻게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하며 (히브리서 2:17), 왜 그분이 우리가 멸망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게 한다 (베드로 후서 3:9). 그리하여 우리는 어떻게 그분이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7:25).
예수께서 타락하지 않은 인성을 취하셨다는 오류를 고수하기 위해 베이커 (Baker) 목사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는 것은 단순히 영감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용된 구절이 예수께서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음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께서는 죄의 경향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확실히 어려운 문제이다. 신신학의 지지자들은 죄의 경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과 타락하지 않은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동일시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다음의 말씀으로 우리는 그것은 증명할 수 있다.
“우리는 단 한가지의 죗된 경향이라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본교회 성경 주석, 7권, 943
우리는 명백하게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이러한 본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죄된 경향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지 않은 본성을 가지셨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베이커 목사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깊은 연구가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매일 당하는 시험과 죗된 경향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시험과 유혹을 받으면 자신들이 죗된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그것은 잘못된 결론이다. 화잇 여사는 죄의 경향들에 대한 예를 들고 있다. 죄의 경향들이란 품성에 포함되어 있는 악한 속성들임이 위에 언급한 인용구절을 통해서 증명되었다. 베이커 목사의 편지에 기록된 언급은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본성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죄 없는 품성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진정한 모본이 되실 수 있다. 이에 관련된 화잇 여사의 언급을 보자.
“자아 방종, 자아 쾌락, 교만, 사치 이 모든 것들은 근절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들을 만족시키면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리뷰 앤 헤럴드 1893.5.16
아무도 사도 요한보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묘사한 사람은 없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당시 그노시스파 (Gnostic – 영지주의) 의 오류를 알고 있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확실히 하였다.
“태초의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복음 1: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가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나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바 된 자니라” (요한 일서 1:1,2).
이와 같이 말한 바로 그 요한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문제의 중요성을 가장 날카롭게 증거한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 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은 너희가 들었거니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 일서 4:2,3).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가 적 그리스도를 가려내는 데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증거가 된다. 위클립과 루터와 또 다른 개혁자들과 같이 오늘날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도 적 그리스도는 교황권 이라고 주저 없이 적용한다. 천주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죗된 인간의 육체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인하고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오셨다는 교리를 주장한다.
요한의 예지는 이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큰 논쟁의 쟁점에 진지하게 초점을 맞추었다. 더 나아가 강조한 말씀을 보자.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라” (요한 이서 7).
요한은 교황권 (적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교황권의 오류는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아니었다 라는 주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교황권도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아니었다라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염 시태 (혹은 무구 회태) 라는 이론을 주장함으로써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다는 진리를 완전히 부인하여 왔다. 여기에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적그리스도 정신의 핵심이 있으며, 바로 이것이 신 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들은 위험한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도 불법의 비밀과 경건의 비밀의 정체를 정의하면서 이 설명에 대해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경건의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불법의 비밀을 이해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경건의 비밀의 중심이라고 선언한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가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음이니라” (디모데전서 3:16).
만약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간의 육체로 오셨다는 것이 경건의 비밀을 이해하는 열쇠라면, 분명 불법의 비밀에 대한 열쇠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요한이 이 오류를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지적하는 이유이다. 경건의 비밀과 불법의 비밀에 대한 사도 바울의 통찰력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완성과의 상관 관계를 풀어 주는 열쇠이다.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의 육체로 나타나셨음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공급해 주시는 경건을 이해한다.
베드로는 참으로 명민(明敏)하게 그리스도의 본성과 경건의 비밀의 관계를 이해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베드로 전서 4:1,2)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죄악으로 빠질 위험성이 더욱 커진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전혀 다른 본성으로 오셔서 우리로부터 떠나 있다는 사상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핑계거리를 던져 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이 문제를 연구하여,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당신의 아버지의 능력을 힘입어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신 그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를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을 위한 경건의 비밀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엄숙한 권면을 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본성을 논쟁이나 토론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또한 그것을 신학적인 토론이나 논쟁의 영역 속에 가두어 두는 것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야말로 우리가 성소 기별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 위대한 기별이며 우리가 굴복하기만 하면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죄를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준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요한 계시록 14:12을 선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우리는 이 기별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통한 당신의 완전한 구속 사업의 빛 가운데서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갈바리의 빛을 통해 보아야 한다.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에게 검은 표를 달아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목사님들과의 대화에서 조심스럽게 본성과 품성의 다른 점을 설명하면서 그들이 걸려 넘어졌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을 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셨으나 그 품성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을 때, 놀랍게도 그들이 이해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더욱 고무적인 소식은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같은 품성을 여러분들과 우리들의 생애에서도 간직하기를 원하시며, 이 세상을 흠 없이 걸어가신 오직 한 분, 그분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능히 너희를 실족하지 않게 지키시고 자기 영광의 임재 앞에서 흠 없이 큰 기쁨으로 서게 하실 수 있는 그 분”(유다서 24 – 킹 제임스 성경 한글 번역본).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고린도전서 10:13).
우리는 그의 약속들을 통하여, “우리는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 하” 는 자가 될 수 있다 (베드로 후서 1:4).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라” 고 (디도서 2:12)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분은 그리스도 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진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낸 하나님의 마지막 기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부요 하게 한다. 이기는 자에게 주신 그분의 약속이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부각되게 된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않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요한계시록 3:21).
그분의 신성에 우리의 인성을 함께 입으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당하신 우리 주님의 겸손을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돌 같이 굳은 마음들도 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위대한 진리를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심령에서 세상의 영화가 먼지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되고, 우리는 그의 영광과 은혜 속에서 변화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