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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림신앙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하는 분에게!

F.D. 니콜

 전에 재림신자였던 분이 종종 “나는 재림신앙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영적인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자신의 그리스도인 성장을 방해하는 교리들, 특별히 복음 안에서 누리는 그의 자유와 기쁨을 앗아가는 가르침들로부터 자유케 되었다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그가 보편적인 한도 내에 머무는 한 그에게 답을 준다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한도라는 것은 마치 구름이나 수증기 같아서 끊임없이 그 위치가 변하는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보편적인 한도 위에서 재림 운동 가운데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특별한 교리들에 대해 가르침 받았다. 그것 때문에 그는 교회에 들어오기로 했으며, 그가 우리를 떠난다고 하면서 자신이 “해방되었다”고 할 때는 이들 교리들의 전체 혹은 부분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함이 분명하다.

 이 교리들은 매년마다 발간되는 공식 연감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의 기본 신조”라는 제명하에 실려 있다. 거기에는 22항목(현재는 27항목-역자 주)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신조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는 간략히 줄이기도 하겠다.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교리들

1. 성경은 영감받은 말씀이며,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계시”해 준다.
2. “하나님 혹은 삼위”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을 가리킨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는 또한 “인간 가족의 본성”을 취하셔서 죄 없는 생애를 사셨으며,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시고, 다시 일어나셨으며,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
4. 구원은 “새로남”으로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려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애의 완전한 변화를 포함하는 것”이다.
5. 침례는 “회개와 죄의 용서에 뒤따라야” 하며, 침례의 적절한 형태는 물에 잠금으로써이다.

 이러한 교리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그는 아마 “아니오. 위의 교리들로부터는 아니오”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만일 그가 물에 잠그는 침례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님이나 사도들이 거기에서 해방되고자 하지 않았다고 답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자, 그럼 더 살펴보기로 하자.

율법과 안식일

6. 십계명은 모든 시대에 걸쳐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적용되는 도덕 규범이다.
7. 십계명의 넷째 계명은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를 요구한다. 이 거룩한 제도는 동시에 창조의 기념일이며, 성화의 표이다. 또한 믿는 자가 자신의 죄의 일을 멈추고 쉬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당신께 오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영혼의 쉼 가운데로 들어서는 것이다”
8. 십계명은 죄를 지적하지만 구원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은 율법을 순종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아서이다. 이 경험은 죄를 확신시켜 주어서 죄를 지으신 자에게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거룩한 역사를 통해서 일어나는데, 성령께서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여 그로 하여금 새로운 언약관계에 들어가도록 한다”

 이러한 교리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을까? 만일 그가 아직도 역사적인 개신교주의 내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6번째와 8번째 항목에 관한한 동의한다고 답해야만 할 것이다. 개혁 교회들과 그들을 따른 모두의 신조들은 너무나 분명해서 논쟁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토요일 안식일”로부터는 해방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분명 주일 중 마지막에 고착되어 있는 24시간에는 무언가가 있다. 그는 주일 중 첫 번째 24시간을 지키기 위해 주일 중 마지막의 24시간에서 해방되었다. 일요일 준수가 더욱 느슨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요일을 준수하는 목사들은 대부분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일요일에 쉬도록 더욱 강력한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켐페인까지 벌이고 있다 아마 그는 제칠일 안식이 기념하는 창조의 진리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구식의 “비과학적인” 창조의 교리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현대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라고 의기양양하게 부르게 있다.

 재림신자들은 성경 전체가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교리로부터 해방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로부터 해방되기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창세기나 성경의 기록이 시작되는 모세 오경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세계를 만드시고 창조 주일의 끝에 안식일을 제정하셔서 그 날에 쉬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시며, 그 날에 축복하셨다는 창세기의 기록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가 왜 우리를 에덴으로 연결시키는 날로부터 해방되기를 구하겠는가? 우리가 왜 위대하신 하나님의 본을 따르는데서 해방되기를 원하겠는가? 하나님께서 따로 떼어놓고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것으로부터 어떻게 해방되기를 구한단 말인가?

이사야가 본 안식일

 선지자 이사야도 우리와 똑같은 견해를 가진 듯 하다. 그는 구원의 선지자로서 알려졌다. 53장은 우리 주님의 수난을 그리고 있다. 54장은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 할지어다”라는 승리의 말로 시작하여 계속 구속의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 55장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초청하며, 56장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이사야는 구원에 대한 위대하고도 대폭적인 묘사를 하는 중간에 안식일을 소개하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선언하기를 안식일 준수자는 “기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계속 진행되어 가면서 57장에서 이사야는 불의에 대해서 견책하며, 하나님께서 통회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고 선언한다. 계속 그 사상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으면서 58장에서, “크게 외치라… 내 백성에게…그 죄를 고하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그 다음에 참된 금식이 묘사되었는데 머리를 푹 수그리거나 베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주린 자에게…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것이다. 이러한 실제적인 경건의 실천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게 할 것이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리라고 한 후에 안식일에 관한 다음의 기록이 나온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구원의 이야기, 죄로부터의 구출, 그리고 실제적인 성결에 대해 말한 이사야는 그 모든 이야기의 중간에 안식일을 삽입하였다. 그는 안식일을 무언가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으로서가 아니라 “즐거운” 어떤 것으로서 묘사한다.

우리 주님과 안식일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실 때 그분은 안식일 문제에 관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서로 대치된 의견을 보이셨다. 그분은 그 거룩한 날에 관해 사람이 만든 그들의 계명은 질책하셨으나 안식일을 부인하시지는 않으셨다. 우리는 재림신앙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는 전 재림교인이 예수님 당시에 살았다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제칠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면 그에 대한 공표는 예수님께서 하셨어야 한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안식일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대신에 그분께서는 그 날에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면서, 그 정점에 이른 때에 다음의 선언을 하셨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8, 눅 6:1-9도 보라).
 이사야는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일컬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고 하셨다. 재림교인들은 안식일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그분의 날을 거룩하게 지킴으로 안식일의 주인께 영예를 돌리려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안식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

 우리는 또한 다음의 것을 믿는다.
9. 하나님께서만 불멸성을 소유하시며,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불멸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입혀주실 하나님의 선물이다.
10. 죽은 자의 상태는 무의식 가운데 있다. 죽은 자는 모두 부활시까지 무덤에 누워있다.
11.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12. 악한 자들, 그리고 사단과 그의 모든 천사들은 결국 불로 멸망당할 것이며, 우리 발밑에 밟히는 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죄의 흔적은 하나님의 우주로부터 영원히 도말될 것이다.

 전 재림교도인 그는 사람과 그의 최후의 받을 보상에 관한 이런 신조들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의로운 자들이 죽는 날로부터 하늘나라에서 복된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고통 가운데 발버둥치고 있음에 틀림없을 자신의 불의한 친척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은 뒤로 미뤄둔다. 악인들이 그들이 태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소멸되어 없어질 것이란 생각이 그의 의분을 자아낸다. 그는 지옥불이 영원히 없어지며, 저주받은 자들의 고함소리가 영원히 그치며, 죄의 비극이 종막을 거둘 것이란 사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기뻐한다. 물론 재림신앙으로부터 해방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더 큰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어떤 것을 따로 떼어 지옥불이 영원히 불타며, 헤어진 불의한 친구들이 지금 그 속에서 발버둥치며 고통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그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재림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돌아선 것이 그로 하여금 주님 안에서 더 큰 자유와 기쁨을 누리도록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성소 교리

 우리는 우리 믿음의 기둥들을 계속 공부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다음의 것들을 믿는다.
13. 다니엘 8:14의 예언은 1844년에 마치며, 그때 조사심판이 시작되었다.
14. 참 성소는 하늘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서 표상으로 있어온 유대인의 제사제도에 해당되는 사업을 우리를 위해 수행하고 계시다. 성소의 정결은 표상적인 대속죄일의 제도와 관련된 심판사업이다. 이 조사심판의 끝은 인간에게 주어진 은혜의 기간이 끝이다.
15. 하나님께서 세 천사의 기별의 형태로 심판과 임박한 재림의 경고의 기별을 보내셨으며, 이 기별들이 재림을 위해 사람들이 준비하도록 개혁사업을 일으킨다.
16. “성소정결의 때는 조사심판의 때”이다. 첫째는 죽은 자, 그 후엔 산 자의 심판인 것이다. “이 조사심판은 티끌 가운데 잠자는 자들 중 누가 첫째 부활에 참여할 가치가 있는 자들인가와, 산 자들 중에 누가 승천할 가치가 있는 자들인지를 결정한다.”

 전에 재림신자였던 그는 이러한 교리들로부터 기쁘게도 해방되었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는 하늘을 유업으로 받기에 적합한 자들을 결정하기 위한 특별한 조사가 있다는 사상은 생각할 겨를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마쳐진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해 호전적으로 말하면서 재림 교회의 교리가 골고다에서의 우리 주님의 희생의 가치를 격하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었는가? 구원의 계획에 관한 어떤 색다른 견해가 그로 하여금 더 큰 기쁨과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었는가?

 우리는 1900년 전 그 엄숙한 금요일에 그리스도께서 희생적인 죽음을 당하심으로 거룩한 사업을 성취하셨다고 소개한다. 우리는 이 사업이 그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봉사사업으로 이러진다는 것과 여러 세기를 통하여 그분은 우리를 위해 그분 자신의 피로 봉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죄를 위한 치료제로 제공된 항상 있는 봉사와 우리의 구속을 위해 지불하신 값이 어떠한 것인지를 항상 의식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하늘에서의 봉사가 지상봉사의 원형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중보사업과 성소 정결 사업이 그 최종적인 클라이막스로 온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누가 하늘의 상급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를 결정하는 질서정연한 그분의 공의로 인해 즐거워한다. 분명, 집행심판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경우를 결정하신다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조사심판의 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 그는 갈바리에서 모든 사업이 마쳤다고 생각하며, 또한 선언한다. 그가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복음 안에서의 더 큰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의 견해가 온전히 골고다에 한정시키는 것이 어떻게 더 만족스럽고도 기쁜 견해일 수 있을까?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믿는 자들의 생각을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무한한 희생 후에 따르는 영광스러운 봉사사업으로 이끌고 가고자 했다. 우리도 우리의 설교에서 그렇게 한다. 우리들은 어떤 인공적인 대조를 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십자가를 높이며, 또한 십자가 후의 우리 주님의 사업을 높임으로 부분적으로 십자가를 높인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돌려드린다. 우리는 조사심판의 한 가운데 계시는 그분을 본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그 아들 되시는 분께 맡기신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을 보며, 그분의 흘리신 피 가운데서 우리를 정결케 하는 유일한 수단을 본다. 전 재림교도인 그는 재림신앙을 떠남으로 이보다 더한 것을 발견하는가?

단순, 정절, 절제

 우리는 또한 믿는다.
17.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이 사는 방식과 동떨어진 수준위에 서야 한다. 특별히 유흥을 추구하는 문제에 있어서, 단정한 복장을 해야 하며, 신체와 영혼을 더럽히는 모든 행습과 술과 담배를 금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신조에서 해방된 것을 기뻐한다. 그들은 유흥과 복장과 음식 문제에 있어서 얽매이기를 원치 않는다.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이해할만 하지 못한 것은 재림교회의 이 교리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주님 안에서 더 큰 기쁨을 향유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십일조와 영적 선물들

 우리는 또한 다음의 것을 믿는다.
18. 수입의 십분의 일은 주님께 속한 것이며, 그에 첨가하여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연금을 드려야 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보물을 맡은 청지기에 불과한 때문이다.

 “휴우”하고 한숨을 내쉬며 이 신조로부터 해방된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수입에서 십일조와 연금을 드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모두 이해할만 하다. 성경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한 본래의 이기심에 대한 묘사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사람이 십일조와 연금을 드리지 않으면서 주님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많은 일요일 준수 목사들은 그들의 교인들에게 십일조에 대해 많이 강조하면서, 거기에는 큰 기쁨이 따른다고 한다. 그렇다. 재림교인들은 경험을 통해 그것을 안다.

영적 선물들

 우리는 또한 믿는다
19.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고린도전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에 명시된 성령의 선물들을 부여하셨으며, 이 선물들은 성경에 주어진 거룩한 원칙들과 조화되며, 성도들을 완전케 하기 위해서와 봉사사업을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다.”

 많은 이들은 여기에 묘사된 성령의 선물들에 있어서 일반적인 선물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러나 종종 그들은 이 신조가 내포하는 어떤 특정한 적용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기쁨을 가져다 준다고 설명한다. 이 선물들 중 하나는 예언의 선물이다. 재림교인들은 이 선물이 엘렌 화잇의 생애와 저술들을 통해서 주어졌다고 믿는다. 그러면 어떻게 그 저술들이 구분이 될까? 그 저술들이 의로운 생활을 사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극단적인 종교적 습관을 형성하여 광신으로 이끌까? 그 저술들은 성경을 우리 생애의 최상의 권위인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가, 아니면 성경을 격하시키거나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여 없애버리는가? 그 저술들은 우리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희생적인 죽으심, 그리고 문자 그대로 부활하신 위대한 계시들을 높이는가, 아니면 격하시키거나 아예 무시해버리는가?

 화잇 여사의 글을 읽은 사람에게는 그 답이 분명하다. 심지어 그녀를 비평하는 비평가들까지도 그녀의 저술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으로서의 성경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생애를 위한 최상의 규범을 내포하고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임무를 완수하여 그분의 나타나심을 평화롭게 맞을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희생적 관용을 베풀도록 한다는데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선입견을 갖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그 외의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그가 화잇 여사의 저술들이 예언의 성령이 주신 선물이 나타난 것이라고 믿는 신조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인해 어떤 종류의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높은 수준에서 살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큰 희생을 할 필요도 없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심각하게 취급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로 하여금 주님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리도록 하게 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재림과 새 땅

 우리는 또한 믿는다.
20. “그리스도의 재림은 교회의 위대한 소망이며, 복음과 구원의 계획의 위대한 정점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정확한 때는 모르지만 “심히 가까워 바로 문앞에 이르”렀고, 문자 그대로 눈에 보이게 오실 것이다.
21. 재림 후 천년동안 성도들은 하늘에 있을 것이며, 땅은 하나님의 심판 하에 패망케 될 것이다. 1000년기의 끝에 성도들은 그들의 주님과 함께 돌아올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불이 악인들을 영원히 멸망시켜 재로 변하게 할 것이며, 그리하여 이 땅은 정결케 될 것이다.
22.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원래의 미를 되찾은 지구는 주의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곳이 될 것이다.”

그가 한숨 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비극을 해결하시기 위해 곧 오신다는 신조가 제 3차 대전이나 자살을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교리로부터 해방됨으로 한숨을 놓을는지 모른다. 그는 하늘의 정결케 하는 불이 죄의 모든 흔적과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을 완전히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데서 오는 만족을 발견할는지 모른다. 그는 우주의 어떤 분리된 지역에서 죄라고 불리우는 무시무시한 것이 죄인과 함께 영원히 고통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를 더 좋아할지 모른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구속 받은 남녀들을 위해 영원히 거할 완전한 곳으로 재창조하실 것이라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음으로 안도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가 이러한 교리들에서 해방되었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로 그의 신학적 사고를 변경시키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렇게 함으로 주님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결론

 이제 결론을 맺겠다. 신앙생애에서의 진정한 기쁨은 큰소리로 외치는 아멘이나 몸을 흔드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신앙생애를 하는 열성으로 드러난다.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집”에 가자는 초청을 “기뻐”하였다. 진정으로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은 규칙적으로 있는 거룩한 예배에 참석할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풍성하게 드릴 것이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이루신 일을 인식하는 것으로 인해 기쁨으로 가득찬다면 그는 그의 시간을 즐거이 선교봉사에 바칠 것이다.

 교회참석, 풍성히 바치는 것, 그리고 선교활동에 관해 우리가 다른 종파와 비교해 볼 수 있을까? 만일 우리 재림교도들이 다른 교회들의 지도자들에 의해 제정된 표준에 의해 평가를 받는다면, 우리는 그들과의 비교로 인해 별로 고통받을 것이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를 신앙적인 사람이  도록 만든 것이 바로 우리의 교리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신조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 가운데서 주님 안에 있는 큰 기쁨을 경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