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을 만나 뵙고서
1960년대 중반 무렵에 아더 맥스웰 교수가 바티칸을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 그는 교황에 대한 열성분자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강의 시간에 교황과 가까운 거리에 마주 앉아 있었던 것과 자기가 만난 교황은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내용의 말을 흥분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그 성격에 있어서 한 두 가지의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여러 가지의 다양한 원칙들을 가지고 있는데 과거 중세 시대에는 그들이 갖고 있는 원칙들을 강제 집행시키기 위해서 거의 2000년 동안이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 위에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다면 그들은 교황권의 교묘한 수법에 의해서 휩쓸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로마교는 거의 무서운 잔학성의 기록을 변명으로 덮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세상을 대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와 같은 차림으로 나서지마는 실상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 지나간 시대에 존재했던 법왕교의 원칙들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가장 암흑한 시대에 고안된 교리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천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 개신교도들이 존경하고자 하는 법왕교는 종교개혁 당시에 세상을 지배하였고 그 당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그의 죄를 폭로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걸고 항쟁한 그 동일한 로마교이다”
대장투, 414
얼마 전에 어드밴티스트 리뷰지의 부 편집인으로 일하고 있는 마이론 워드머(Myron Widmer)씨 역시 교황을 만나기 위해서 갔으며, 교황과 근접하여 앉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가 물론 좋은 의도를 가지고 그 곳에 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가 재림교회로 가지고 온 보고서는 잘못된 것이었다.
“교황이 시내로 들어섰을 때, 그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또한 세계 청소년 대회를 위해서 그곳 덴버(Denver)에 방문했던 사람들 역시 대단히 많았다. 스타디움 안에서 700면의 합창단과 80,000명의 카톨릭 청소년들에 의한 엄청난 촛불 예배와 환호하는 젊은이들이 메고 움직이는 나무 십자가, 지나친 기쁨과 환희의 눈물로 인한 탈수현상 때문에 기절하는 수천의 관중들, 그러한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가장 잊지 못할 사건은 그날 아침(8월 15일 일요일)이었는데 나의 아버지와 나는 새벽 4시 반에 졸림을 뿌리치고 일어나 수 천명의 행진에 참가한 후 그 행진의 성대한 폐막인 교황의 아침 미사에 참여한 것이었다.
아침 6시 30분에 미사장소에 도착했는데 이미 인산인해의 사람들이 미사 단상으로 약 1km 이상이나 멀리 뻗어 있어서 우리는 그 끝을 잘 볼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나는 특별한 통행증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속 탐지기와 4군데의 안전 검사대를 거쳐서 언론인과 귀빈들을 위해서 마련된 미사단 바로 앞의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우리는 교황의 휘황찬란한 행차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의 희망은 실현되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추기경과 주교들의 입장에 이어서 완전한 예복을 갖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미사단으로 가기 위해서 바로 우리의 눈 앞을 통과할 때, 나는 수십 명의 경호원에 의해서 주시되고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울타리에 몸을 기대게 되었으며 나의 맥박은 빠르게 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비록 그를 만지지는 못할지라도 교황의 시선 이라도 얻기를 바라는 흰옷 입은 수 천명의 사제들과 귀빈들의 모습들도 나의 맥박을 빠르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마이론 위드머의 “교황이 시내에 들어 섰을 때” 2부, 1993년 9월 23일 리뷰지)
수백만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육해 온 교황권의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그러한 환희의 전율을 가져다 준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참 교회에 대한 사단의 위조 교회의 우두머리와 근접한 거리에 앉았었다는 사실이 그를 그렇게도 명예롭게 만들었단 말인가? 사제가 되기 전의 준비 과정으로서 새 세대 운동의 개념과 신비주의를 배운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서 덴버까지 가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제수잇을 없앨 수 있었으며, 북 아일랜드의 개신교도들을 살해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런던의 폭격을 중지할 수도 있었으며, 구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시아 족의 보즈니아족 학살을 방지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람의 말을 그렇게도 듣고 싶었던 가!
리뷰지의 편집인으로서 매우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는 위드머 씨는 전세계에 있는 재림교인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한결같이 웅장했지만 세계 청소년 날과 그날 아침 미사 때 교황이 말했던 내용만큼 중요했던 것은 없었다. 놀랍게도 그 날 아침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천주교회의 교황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개신교나 재림교회 설교자의 설교처럼 들리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상동
위드머 씨는 이것에 덧붙여서 교황이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언급했던 몇 가지 서술을 설명했다. 천주교회의 조직과 지방 교구 자체가 진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데 어떻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해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갖고 있는 기별은 미사와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일과 돈으로 영혼의 대가를 지불하는 일을 통한 구원, 그리고 지상의 신으로서의 교황에 대한 복종과 사제의 권위를 포함하고 있다. 교황이 전한 메시지는 로마에 있는 기만하는 자들에 의해서 준비된 것이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교황권에 대해서 깊이 있게 연구한 책들을 편찬해 내고 있는데, 역사가 드러내는 그 내용들을 보면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서 금메달을 바칠 만큼 그들은 교황에 대해서 호의적이고 존경심을 갖고 있는가? 어떻게 교황권의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과 혼돈시키는 말에 재림교인이 기만 당할 수 있는가? 과거 여러 시대를 통하여 교황권은 종교 단체나 사회 단체들을 침투했으며 포섭해 왔다. 그리고 그들의 포섭과 설득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칼로서 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개신교의 설교처럼 들리는 이 놀라운 말씀은 그들 속의 진정한 변화 없이 연출하는 단순한 각본인가? 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관한 성경의 위대한 진리를 천주교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이 교황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가?” 상동
이 기사에서 위드머 씨는 교황이 그리스도를 위한 영원구원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가 쓴 세편의 시리즈의 결론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세상에 진리를 가져오기 위해서 교황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재림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감히 우리의 백성들로 하여금 로마교황은 좋은 의도를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세상에 전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믿도록 고무시킬 수 있는가! 교황권 안에는 사람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거나 그분 안에서의 구원을 줄 수 있는 가르침이나 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교황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의 전파와 같은 전통적인 개신교의 강조점들을 되풀이하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상동
나는 1960년대 중반 워싱톤 주 타코마시의 천주교단에서 운영하는 어느 책가게를 기억한다. 진열대 위에서 한 책을 보았는데 그 책의 제목은 “교회는 그리스도임”이었다. 제목이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천주교회는 결코 변한적이 없다. 그들의 기본 신조 어떤 것도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수 많은 저술가들은 마치 천주교회의 신조가 바뀐 것처럼 나타내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 아직도 수많은 해결되지 않은 부패함이 전혀 변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2000년 동안 그들은 이교도로부터 들여온 또는 사제들에 의해서 고안 되어진 온갖 잘못된 오류를 받아들였는데 예를 들면 침례가 아닌 세례, 존재하지도 않는 연옥에 있는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염주알과 사제 성자와 마리아에게서 구원을 찾으려고 하는 것 등이 있다.
그들은 성경적 안식일을 제거하였을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안식일의 신성성을 더럽히도록 만들었으며 안식일을 주일 중의 하루인 일하는 날로 변경하였다. 또한 그들은 천년 이상 동안 모든 준수자들을 무자비하게 쫓아 다녔으며 살해하였다.
어떻게 재림교인이 교황 가까이에 앉았었다고 해서 그렇게 황홀해 할 수 있으며, 교황은 그리스도와 그분에 대한 지식을 온 세상에 전하고 있다고 리뷰지에 쓸 수 있는가! 위드머 씨는 전체적인 결론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개신교의 적의를 없애기 위한 제스쳐인가 아니면 거의 십억에 이르는 천주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을 배울 것을 권장하는 놀라운 격려인가? 본인은 후자이기를 기도하며 희망한다.” 상동
위드머 씨는 진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교황의 말과 대쟁투의 역사와 증언 중에서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해야겠는가? “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는 옛날로 같은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개신교 국가들의 주상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어떤 변화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 변화는 법왕 교에 생긴 변화가 아니라 개신교가 종교 개혁 이후 크게 타락했기 때문에 오늘날 개신교는 천주교와 매우 비슷해진 것이다.” 대쟁투, 415.
위드머 씨는 그의 글 3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황이 시내에 들어왔을 때 온 시가지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온 세상이 그에 대해서 경탄하는 것 같았다. 미사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개신교도적인 자세와 성경 지식을 가지고 그의 메시지를 들었다. 기대한대로 하는 많은 다른 점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특히 마리아가 하늘로 승천했다는 내용은 나의 개신교적인 지식과 달랐다. 또한 동의할 만한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700명의 합창대가 개신교회의 찬송가인 ‘자비로운 주 하나님’을 부를 때는 함께 따라 부르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교황이 생명의 존엄성과 사회의 보존에 관한 전통적인 성경적 가치관을 말했을 때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3년 9월 30일자 리뷰지
바티칸에 의해서 사전에 조심스럽게 계획된 로마 천주교회의 진보적인 선전용 미사에 재림교회에서 전 세계적으로 출간되는 리뷰지의 편집인이 기만 당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사용하던 찬송가는 주의 깊게 선택된 것이며 한 설교 역시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그가 메시지를 낭독할 때 그가 강조했던 내용보다 그가 읽은 전체의 내용을 올바르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의 메시지에 있어서의 진짜 문제점은 카톨릭적인 사상과 비 카톨릭적인 사상의 혼합에 있으며 그가 읽은 그 내용을 그 자신은 믿지 않는다는데 있다. 여러분들은 개신교의 믿음을 나타내는 찬송가인 “자비로운 주 하나님”이 합창으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는 로마 교황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가? 그 찬송가의 가사가 전하는 주요 기별이 바로 그 날 교황이 했던 미사 내용과 카톨릭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위드머 씨는 하나님께서는 교황을 사용하여 마지막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생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진리를 전하고 계실 수도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전 세계의 재림 교인들에게 쓰는 그의 글의 결론을 맺고 있다. 우리 교단을 대표하는 출판물에 쓴 그의 글을 보는 우리들은 무슨 생각을 해야 하며 어떤 반응을 나타내야 하겠는가?
“지난 4일 동안 내가 들은 모든 것들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주장하고 계시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많은 사람들을 (특히 카톨릭 교인들) 말씀으로 고무시키기 위해서 전혀 기대치 않았던 사람들을 사용하시고 계신 것에 대해서 나는 경탄할 뿐이다” 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