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퍼지고 있는 축제식 예배, 과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인가?
저자: 생애의 빛 (1989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재림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리와 기별을 교회 안과 세상에 전파하기 위하여 출판 사업과 테입과 T.V 방송을 해오고 있는 자영 선교 기관)
요즘 한국에서까지도 축제식 예배 형식이 힘차게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축제식 예배란 영어로 “Celebration Worship” 이라고 표현된 영어를 번역한 말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경쾌한 찬양과 감동적인 연극, 그리고 심지어는 판토마임(무언극)까지 곁들여 흥미 있게 인도해 보려고 시도하는 스타일을 말하는 신생 단어이다. 특히 이 축제식 예배 형식은 젊은 사람들의 취향을 위하여 딱딱하고 엄숙하기만 한 예배 스타일을 보다 생동감이 있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리고 교인들의 정서를 더 자아낼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예배 형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나게 율동하며 찬송을 부르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연극들과 무언극들로 교인들을 감동하기 이전에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축제식 예배가 왜, 어떻게 도입되었으며 무슨 목적이 그 뒤에 숨겨져 있는지를 알고 있는 재림 교인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우선 축제식 예배 형태는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애쓰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더 받으심직한 예배를 드리려는 뜻에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방법은 개신 교회들에서 교인들을 더 많이 확보하거나 이미 들어와 있는 교인들을 나가지 않도록 잘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안해 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젊은 층을 붙잡기 위한 아이디어다. 물론 이러한 아이디어가 적중하여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을 신나고, 감정적이며 즐겁게, 더 나아가서는 더욱 더 감동적인 예배로 만들어 나가는 일에 성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먼저 물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이 텔레비전이나 영화 앞에서 울고 웃는 감동도 성령의 역사인가? 그리고 예배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감성을 더 자극하여 예배의 흥미를 돋우어 주기 위한 시도인가? 아니면 성령의 은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올리며 참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 예배란 우리 교인들 자신들의 느낌을 위하여 드려지는 우리들을 위한 축제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사인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원하시는 방법대로 이루어져야 하며 진리를 가르치고 동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야만 한다. 예배의 중심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그 중심이 아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다. 그러나 다음의 두 질문인 “복음을 전파해야 할까? 아니면 교회를 성장시켜야 할까?” 라는 질문들은 같은 것 같지만 서로 다른 의미의 질문들이다. 우리는 재림 교인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재 재림 교회 안에는 이 질문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한 부류는 복음과 진리에 초점을 맞춰서 그것을 보존하고 전파하는 면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이성과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올바로 세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교육시키는 일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한 편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아서 교회를 빨리 성장시킬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춰서 일하고 있다. 교회의 성장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는 방법론에 대하여 골몰하게 되는데, 그들은 교인 수가 성장하기를 간절히 원한 나머지 진리와 원칙에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교인 수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그들은 일반 기독교계에서 유행하는 축제 예배 형식을 쉽게 도입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와서 눈을 감고 박수를 치거나 손을 흔들며 복음 성가를 부름으로써, 감정적으로 흥분된 상태하에서 예배를 드리게 만들어 주어 그것을 통하여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느끼게 하려는 시도가 바로 축제식 예배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 방식은 사람들의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는 성령의 음성을 소홀히 여기게 이끌어 간다. 왜냐하면 일단 감정적 예배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러한 교회들은 더 이상 교인들의 죄의 문제와 회개에 대한 촉구를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며 그들은 교인들의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깨뜨리는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기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지만, 사단은 인간의 감정을 통하여 접근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개, 감정적 예배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인가?”, 또는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감정적으로 아니면 실제 생활 면에서 만족과 행복감을 맛볼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들은 다음의 경고의 말씀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대가 인기와 인원의 증가를 얻기 위하여 표준을 낮추고, 이와 같은 증가를 기쁨의 원인으로 삼는다면 그대는 크게 눈멀어 있음을 보이게 된다. 만일 인원이 성공의 증거가 된다면 사단은 탁월함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그의 추종자들이 절대 다수이기 때문이다. 대학의 번영의 증거가 되는 것은 그 곳에 보급되어 있는 도덕적 능력의 정도이다. 기쁨과 감사의 근원이 되어야 할 것은 그들의 인원이 아니고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덕성과 지성과 경건이다.”(교회 증언 5권, 31)
“경건의 누룩은 그 힘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 교회의 위험과 침체가 가장 클 때 빛 가운데 서 있는 적은 무리는 땅에서 자행되는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더욱 특별히 그들의 기도는, 교회를 위하여 드려질 것이다.” (상동, 209)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세상에 내리기 전에 주님의 백성 중에는 사도 시대 이래 일찍이 목격하지 못한 근본적인 경건의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과 권능이 그분의 자녀들 위에 부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는 대신에 이 세상을 사랑하는 그러한 교회들에서 분리되어 나올 것이다. 목사들과 신자들을 막론한 많은 사람들이 주의 재림을 위하여 백성을 준비시키고자 이 시대에 전파되고 있는 큰 진리를 즐거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원수는 이 일을 방해하려고 이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가짜 운동을 꾸며 냄으로써 이를 막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의 기만의 세력 아래 모이는 교회들 가운데는 마치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내린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적 큰 부흥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도록 나타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실상은 전혀 다른 영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놀라운 정도로 역사하고 계신다고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단은 종교의 가면을 쓰고 자기의 세력을 모든 그리스도교계에 확장하기에 진력할 것이다.
과거 반세기 동안에 일어난 신앙 부흥의 대부분에는 다소간 그와 같은 영향이 활동해 왔던바 장래에는 더욱 광범위한 운동들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진리와 허위가 혼합된 감정적 흥분이 있으며 그것은 오도되기 쉽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속임을 받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보면 그런 운동의 내용을 분별하기가 결코 어렵지 않다. 무릇 사람이 성경의 증거를 등한히 하고, 극기하고 세속을 버리도록 요구하는 분명하고 심령을 살피게 하는 진리에서 돌아설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대쟁투, 464)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가볍게 손을 올리거나 흔들고, 감동적인 복음성가들의 간단한 가사들을 반복하여 부르며 성경의 이야기들을 연극화하여 보여 주는 정도의 시도를 왜 정죄하느냐고?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사람의 감정을 겨냥한 예배 형식은 점점 더 격렬한 방식과 시도를 원하게 되어 결국에는 오순절 교회들이 하고 있는 광란적인 예배 형태로 끌려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축제식 예배의 형태를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율동, 단순한 가사들을 반복적으로 부르는 찬송들, 진리를 말하기보다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들의 기도와 노래들, 소리를 지르는 일들, 박수를 치는 것, 기타나 드럼 등 타악기로 반복적이고도 강한 리듬을 배경에 넣는 것, 밝고 어두운 색상의 조명등의 사용 등등이다. 만약에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한 예배의 특징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너무나 멀리 정로에서부터 떠나와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예배라면 오늘날 오순절 교회들이 경험하고 있는 축제식 예배와 방언들, 그리고 감정을 자아내기 위한 예배 형식의 꾸밈들이 과연 참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라고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그러한 교회들로부터 예배 형식을 본받아 배워 오고 있는 현대 재림교회는 진실로 큰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다음의 경고의 글을 읽어 보자!
“세상이 변화를 받도록 하는 사업의 어느 부서에 고용된 이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과 연합을 맺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성부나 성자를 알지 못하며, 그들은 우리 사업의 성격에 대해서, 우리가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전혀 영적 식견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위로부터 임하는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불신자들에 의해 제안되는 권면을 듣거나 그 계획을 따라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위해 행하시는 사업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낸 제안이 하나님의 기관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제안들을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의 권면은 무시를 당한다.” (목사들에게 보내는 증언, 463)
화잇 여사께서는 계시를 통하여 이러한 축제식 예배의 움직임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재림교회 안으로까지 소개되어 들어 올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말씀하여 두셨다. 다음의 글을 읽어 보자!
“주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그릇들을 통하여 당신의 생각과 목적을 수행함으로 성취할 사업을 아무리 충분히 평가하려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인디애나 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그대들이 묘사한 것과 같은 일들이 은혜의 시기가 끝나기 직전에 있을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나에게 보여 주셨다. 온갖 기괴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큰 소리로 외치며 드럼과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리며 춤추는 광경을 재연할 것이다. 이지적인 인간의 감각들은 혼란을 일으켜 올바른 결정들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저들은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부른다.
성령께서는 결코 잡음의 광태와 같은 그러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이것은 이때를 위한 순결하고 성실하고 고상하고 고결하며 성화시키는 진리를 무력하게 하기 위해 교묘한 방법을 은폐시키려는 사단의 발명품이다. 지난 정월에 나에게 보여진 바 우리 장막 집회에 있을 사업을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이 악기들을 사용함으로 난잡한 음악으로써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이때를 위한 진리는 영혼들을 회개시키는 사업에 있어서 이런 종류의 일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잡음의 광태는 감각들에 충격을 주고 만약 올바로 행하였다면 축복이 되었을 것을 악용하게 된다. 사단을 대리하는 권세들은 북새통을 일으키기 위하여 고막을 찢을 듯한 괴상한 소리와 온갖 잡음들로 혼합되며 이것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비참했던 역사를 모두 글로 담아 묘사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다. 그러나 지난 1월에 주님께서는 우리 장막 집회에 오류에 속한 이론들과 방법들이 침투할 것과 과거의 역사가 반복될 것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나는 크게 슬픔에 잠겼다. 나는 이러한 요란스런 행동들 가운데 마귀들이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서 현명한 사람들이 진리에 대하여 싫증나도록 사단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교묘한 방법으로 활동할 것과 셋째 천사의 기별의 진리를 허다한 무리들에게 전하는 수단이 되어 왔던 장막 집회가 그 능력과 감화력을 상실하도록 원수 마귀가 일을 꾸미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셋째 천사의 기별은 공명 정대한 방법으로 전하여야 한다. 이 기별은 거짓의 아비 마귀가 준비한바 인간적인 이론들의 무가치하고 비참한 발명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하며 우리 시조들을 속이기 위한 매개물로서 사단이 사용한 총명한 뱀으로 변장된 것에 속아서는 안 된다. 사단은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순결하게 내세우려고 하시는 사업에 자기의 인장(印章)을 찍으려고 애쓴다.
성령께서는 지난 1월에 나에게 보여진 것과 같은 잡음의 혼란과 온갖 괴상한 소리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시다. 사단은 그러한 음악의 괴음과 혼란 속에서 역사한다. 음악은 올바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단은 그러한 음악의 효과를 뱀의 독한 이빨처럼 사용한다.
과거 역사에 나타났던 그러한 것들이 미래에도 나타날 것이다. 사단은 음악이 처리되는 방법 여하에 따라서 사람을 유혹하는 올무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증언의 빛을 가진 당신의 백성들이 진리의 말씀을 읽고 깊이 생각하며 깊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하신다.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분명하고 정확한 교훈을 주셨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창의적으로 구상해 내려는 근질근질한 욕망은 이상한 교리들을 빚어내는 결과를 가져오며 만약 저들이 주님께서 주신 진리에 대하여 처음부터 굳은 신뢰심을 보였다면 훌륭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자들의 감화력을 크게 파괴한다.” (가려 뽑은 기별 2권, 36,37)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재림교회가 이러한 축제식 예배를 본받아들여 오는 일이 바로 예수님 재림 직전에 있을 은혜의 시간이 끝나가는 사건의 중요한 징조일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단은 음악을 잘 사용하는 명수이다. 그는 원래 하늘의 찬양대의 지휘자였었다. 축제식 예배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음악이 차지하는 영향력인데,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생각이나 정서에 끼치는 영향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므로 어떤 음악을 교회의 예배에 사용하는가와 또한 그 음악을 어떠한 형태로 부르는가 하는 것을 결정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현대 카리스마적 오순절파 운동의 시작에는 로마 천주교회의 막후 활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지하여야 한다. 1960년대 중반에 있었던 Vatican II 회의 에서는 개신교회를 모교인 로마교회로 다시 되돌려오기 위한 작전들이 의논되었는데, 그것들 중에 하나가 개신교회들의 예배형식과 그 음악의 사용을 바꾸어 놓는 좋은 방법을 고안하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연구의 결과로서 태어난 발명품들이 바로 감정적인 예배 형식인 축제식 예배 스타일이며 그러한 종류의 감정을 유발시키는 복음 찬송가들과 열광적으로 부르는 노래 스타일들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예배드릴 때에 있었던 지나치게 많은 음악 순서들은 한사코 피해야 한다.. 음악적 기능에 의하여 영혼의 심령이 성화되고 부드러워지고 거룩하게 될 때 비로소 그 음악이 하나님께 가납된다. 그러나 음악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으로 주님께 멜로디를 바친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다. 저희 심령은 다만 우상을 섬길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그들의 특권으로 주어진 고상한 표준에 도달할 때 그리스도의 단순성이 저들의 모든 예배 의식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교회의 능력은 어떤 형식이나 의식, 혹은 음악적 재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럴지라도 그러한 것들은 유대인들의 예배 의식에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원칙에 따라 존재하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계시를 통하여 심령이 정결해 지고 성화되고 교회의 신자들이 거룩한 성품에 참예할 때, 진리를 믿는 교회에서 한 능력이 나아갈 것이며, 그것이 마음속에 멜로디를 만들어 줄 것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그렇게 될 때 남녀들은 저들의 기악을 의존하지 않고 충만한 기쁨이 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의지할 것이다. 교회 안에 들어온 쓰레기들을 깨끗이 청소하는데 해야 할 하나의 일이 있다.” (전도법, 511)
다음의 사단의 타락을 기록한 두 성경절들을 읽고 나서 한 유행가의 가사를 들어 보면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는 하늘에서 처음으로 음악을 지도하던 덮는 그룹 천사였었다.
이사야 14:11-14,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에스겔 28:13-15,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옛날 1970년대에 유명했던 가수였던 Barry Manilow 씨는, 자기의 히트 곡인 “I write the songs” 를 작곡한 Bruce Johnson 씨가 그 곡을 작곡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가 자기도 모르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뒤집어 씌움을 받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손과 펜을 빠르게 움직이며 20분 만에 그 곡을 작곡하고 작사하였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작곡된 곡의 가사가 우리를 놀라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영원 전부터 살아 왔다. 나는 제일 첫 음악을 만든 존재요, 나는 그 멜로디와 가사를 함께 만들었었다, 나는 음악 그 자체요 나는 노래들을 만들고 있다. 나는 온 세상이 부르는 노래를 만들고 있다. 나는 사랑과 특별한 일들에 대하여 노래를 만들고 젊은 여인들을 울게 만드는 노래를 만든다, 나는 노래를 만든다, 나는 노래를 만든다. 나의 집은 당신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당신의 영혼 속에 내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다. 내가 그대의 눈으로 내다 볼 때에 내가 비록 매우 나이가 많을지라도 나는 다시 젊어 진다.”
참으로 놀랍지 아니한가!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신앙의 척도로 삼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선지자께서 다음과 같이 경고해 놓으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볼 수가 있다.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에 휩싸인 경험들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거듭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은 달라지지 아니한다. 그들의 행동은 이전과 변함이 없다. 그들의 생애는 아무런 열매를 보여 주지 아니한다. 그들은 기도를 자주하고 길게 하며, 그들이 이러 이러한 때에 느꼈던 감정적인 경험들에 대하여 자주 말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생애를 살지 아니한다. 그들은 기만당한 것이다. 그들의 경험은 감정 그 이하로 더 깊게 내려가지 못한다. 그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요, 시련들이 올 때에 그들의 집은 쓸려 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 1권, 127)
가려 뽑은 기별 2권에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놀라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의 제목을 “옛날 구식 설교가 요구 됨”이라고 붙인 것은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목회 사업에 새로운 양식들이 등장하였다. 다른 교회들을 모방하려고 하며 단순성과 겸손한 행위는 거의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젊은 목사들은 기발한 것을 구상해 내려고 애쓰며 사업을 위한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계획들을 소개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이들은 부흥 집회를 열고 이런 방법을 통하여 많은 수의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모든 흥분이 가라앉고 집회가 그 막을 내릴 때에 회개한 영혼들은 어디에 있는가? 회개와 죄의 자복을 볼래야 볼 수 없다. 죄인은 자신의 과거의 죄와 배도의 생애에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도록 호소를 받는다. 그의 심령이 상한바 되지 않았다. 영혼의 통회가 없다. 회개하리라고 예상했던 자들이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위에 떨어지지 않았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한결같이 이 과정이 이루어져야 할 유일한 방법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고 외친 것은 침례 요한이 광야에서 보낸 기별이었다. 백성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기별은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5)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사도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오늘날 당신의 종들이 옛날의 복음 교리, 죄를 위한 슬픔 및 회개와 자복에 대하여 설교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들은 구식의 설교, 구식의 풍습, 구식의 이스라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을 원한다. 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임을 깨달을 때까지 끈질기고 열렬하며 빈틈 없이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힘써 회개하여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연단하여야 한다.” (가려 뽑은 기별 2권, 18,19).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15년 전인 1990년도 “Christianity Today” 지 2월 5일 자에, “The Recent Truth About Seventh-Day Adventists”라는 기사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제 제 3의 물결(자유주의 물결을 일컬음)이 재림교회의 문턱을 두드리고 있다. 한 재림교회의 선교학 학자는 보고하기를 적어도 6개의 재림교회들이 John Wimber’s Vineyard Fellowship 예배 스타일과 왕국 신학을 받아들이고 있다. 지속적으로 오순절파 카리스마적 부흥 운동을 저지해 오던 재림교회에 있어서 이 일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재림교회의 적응력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John Wimber 의 Vineyard Fellowship 은 다름 아닌 오순절파 교회의 카리스마 운동을 말한다-필자 주)
이렇게 서서히 시작한 재림교회 식 오순절 파 운동과 예배 스타일이 1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교회 안에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항상 보수적이었던 한국 재림교회마저도, 순 복음교회나 그 외 많은 개신교회들이 행하고 있는 발랄하고도 흥미 있는 것 같은 축제식 예배 형태를 손쉽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은혜의 시간의 끝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예배의 태도에 대하여 언급하신 다음의 말씀을 들어 보자. “교회가 세워졌을 때 이런 것들을 가르치지 않고 버려두면, 목사는 그의 의무를 등한히 했으므로 그가 보급되도록 허용한 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다. 참된 예배와 참된 경외심에 대한 바른 사상이 백성들에게 감명되지 않으면, 거룩하고 영원한 것을 세속적인 것과 동일한 수준에 두는 경향이 있게 될 것이며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불쾌한 일을 하고 신앙이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연마되지 않은 사상을 가지고서는 순결하고 거룩한 하늘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이 순결하고 완전하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함에 대하여 완전한 존경심을 가진 하늘 왕궁의 예배자들과 연합할 준비를 결코 갖추지 못할 것이다.” (교회 증언 5권, 500)
다음의 화잇 여사의 말씀은 오늘날 재림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진리의 투쟁의 면에 있어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한 가지 심각한 문제를 제시해 주고 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 질문이란 “정말 우리들의 교회 안에서 진리가 타협되어 왔으며, 과연 새로운 다른 가르침들이 몰래 스며들어 오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영혼들의 원수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에게 큰 개혁 사업이 일어나야 하며 이 개혁 사업에는 (참된 개혁이 아니라 진리에서 떠나가는 혁신적인 사업을 뜻함-필자 주)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바탕으로 되어 있는 교리들을 포기하는 것과 조직을 재편성하는 일이 포함될 것이라는 가정적(假定的)인 이론을 성립시키려고 노력하여왔다. 만일 이러한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면 과연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로써 남은 교회에게 주신 진리의 원칙들은 버림받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신앙은 변화되었을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에 이 사업을 버티어 온 근본적인 원칙들은 마치 오류처럼 인정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조직이 편성되었을 것이며 새로운 제도에 관한 책들이 저술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적 철학의 이론이 소개되었을 것이다. 이 제도의 창설자들은 각 도시로 침투해 들어가서 놀라운 사업을 행하였을 것이다. 물론 안식일과 그날을 제정하신 하나님마저도 가벼운 취급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운동의 진로를 가로막을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악덕보다는 미덕들이 낫다고 가르치면서도 저들은 하나님을 제외해 버리고 인간의 능력을 의지할 것이지만 실상에 있어서 하나님을 제외한 인간의 능력은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저들은 모래 위에 기초를 세우게 될 것이며 폭풍이 불고 폭우가 내릴 때에 그 기초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한 운동을 전개할 권위를 가진 자가 누구인가?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다. 또한 우리는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로 입증된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타협을 불허하는 진리가 있다. 이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마땅히 거부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주님의 영께서 쓰도록 강권하신 이 글을 우송하는 일을 매우 주저하였으며 시일을 지연하였다. 나는 이러한 궤변들의 그릇된 감화를 부득이 지적하는 일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침투해 들어오는 오류들을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려 뽑은 기별 1권,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