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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과 장신구

저자: 죠 크루스 목사 – 미국의 대표적인 자영선교기관 중의 하나인 Amazing Facts 기관의 설립자이며, 전도 목사로서 봉사함.
            
    사람들이 종교에 관하여 가장 자주 하는 잘못된 불평 가운데 하나는 종교가 너무 제한하는 것이 많다고 하는 것이다. ‘네 맘대로 해라’ 와 자기 의지에 대한 합당치 않은 태도가 이 자유로운 시대에 강조되는 모든 것처럼 보인다. 그런 태도가 종교 안으로도 기어들어와서 교인들이나 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이론을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종교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어떤 것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표현하는 어떤 신조에 대해서는 즉시로 의심이 야기된다.

  이러한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점점 강해질 때 많은 교인들은 교회에 의해서 높이 쳐들어 올려진 높은 영적 표준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 된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 생긴 넓은 간격에 의한 당혹 과 “유별난” 소수의 존재라고 하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기가 싫기 때문에 이들 교인들은 그리스도인 표준과 관계된 자신들의 타협을 합리화 할 것을 모색해 왔다. 그들은 종종 교회가 너무 율법주의적이고 옹졸하여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그러한 ‘독단적인 법칙의 강요’로 인해 실망하여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이론을 전개한다.
 
만일 이러한 불평들이 맞는다면 교회의 신조는 근본적인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만일 그 불평들이 맞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 행위의 표준들을 진정한 성서적 해석을 통하여 어떻게 제시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이 분명해진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이 법칙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 교회에 의해서 제정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설정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그것들이 독단적으로 만들어진 금기 사항들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규제들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개인의 행위에 대한 어떤 절대적인 법칙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인기있는 반항과 비교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 생애에 대한 성경의 사실들을 일반적으로, 특히 도덕적인 면에서 숙고해 봐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표준을 따르는 것에 대한 현대인들의 요구는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참된 성서적 입장이 하늘로부터 온 천사에 의해서 그 모든 것이 사랑과 설득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진리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기에 쉬운 것일까?

  좀 더 솔직하게 그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영생으로 이르는 길은 부드럽고 안이한 꽃길이 아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많은 성경절들을 통해 그 사실을 강조해 오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눈이 멀 수가 없다. 그분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4)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제일 첫번째 원칙들 중 하나는 자아부정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누가복음 9:23)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완전한 굴복을 의미한다. 우리 주님께서 들려주신 진주와 상인에 대한 비유는 우리가 영생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상급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남김없이 모두 투자할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 해준다. 우리가 우리와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는 것 사이에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 하나라도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면 우리는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제자되는 특권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죄를 범함으로 사람들이 그 같이 너무 좁고 제한하는 것이 많다고 느끼지 않도록 해오지는 않았는가?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33)고 말씀하셨다. 부자 청년법관은 자신이 하늘나라를 얻기에는 하나가 부족하다는 말을 예수님에게서 들었다. 그 한 가지는 그가 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었다. 그는 구원 받기 위하여 자신의 부를 포기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주님보다 다른 어떤 것을 더욱 사랑했고, 근심하며 돌아가서 잃어 버려진 바 되었다. 그 점에 있어서 예수님의 입장은 너무나 강경했다.

심지어 그분께서는 이런 말씀까지 하셨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태복음 10:37).

이제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장을 남녀들에게 가장 친절하고 기지있고 사랑스러운 방법으로 제시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나는 믿기를 만일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품지 않고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제시 하든지 간에 별 차이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실수는 기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실수들은 전도자들이 그 기별을 제시하는 방법에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실수들은 그 기별이 어느 정도의 자아부정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 진리에 대한 반역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불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에 있다.

  어떤 개인의 감정이나 태도가 세상사에 있어서 어떻게 모든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자. 결혼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것을 제쳐 놓고는 자기가 원해서 선택하는 것 중에는 가장 제한이 많은 경험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전에 좋아하던 많은 것들을 포기하기로 약속한다. 그는 다른 여자들과 데이트할 자유를 포기하며, 엄숙하게 자기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단지 한 여성을 위해 묶어 놓는다. 신부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자기 남편에게 바치고 다른 모든 남성들은 버리기로 동의하는 그 제한 많은 서약을 한다. 결혼 서약이야말로 사람이 자신의 생애에 할 수 있는 가장 좁고도 강력한 서약들 가운데 속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만일 결혼에 따르는 제한이나 규칙들이 많은 비극의 원인이 된다면 결혼이야말로 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비참하고 불행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결혼은 가장 행복한 사건이다. 왜 그럴까? 왜 신부가 자신의 생애를 신랑에게 바치기로 서약하며 서 있을 때 그토록 빛나 보이는 것일까? 신랑은 자신의 남은 생애 동안에 자신의 행위가 제약 받을 것이란 서약을 하면서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결혼에 따르는 제약들이 그들에게 기쁨이 되는 이유는 그들의 상대방을 향한 태도와 감정 때문이다.

  그대는 결혼식이 끝난 후에 불평하는 신부의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아아, 이젠 내가 길동씨나 돌이씨와는 더 이상 데이트를 못하게 됐어. 이건 너무 불공평해. 정부의 법은 나로 하여금 내 남편에게만 충실하라고 강요하고 있어. 결혼하는 것은 너무 제약이 많아”라고 칭얼거리며 말하는 신부는 아마 한명도 못봤을 것이다. 또 그대는 새 신랑이 자신의 봉급을 자기 아내와 나눠 쓰도록 강요당하게 되었다고 불평하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법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투옥한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심지어 신랑은 그 법률에 대하여는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정부의 법은 신부가 간음을 하면 체포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신부는 그러한 법에 대해서는 심지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사랑은 모든 것들을 변하게 한다. 그들은 처벌 당할까봐 두렵기 때문에 서로에게 충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가 깊이 사랑하는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충실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남녀들은 서로 결혼은 하였으나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이 땅의 지옥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가해진 제약과 부담들에 대해 신경질을 내며 불평을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교인들은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결혼하였지만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교인들이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에게 좁고도 제약이 많은 종교의 짐을 가하는 교회와 그들의 교사들을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잘못이 종교나 목사님들에게 있는 것일까? 참으로 슬픈 사실은 그 사람들이 모든 참된 종교의 모퉁이 돌 되시는 분과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에 결코 들어가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공부 교제를 통하여 성경의 말씀들을 익히고 마지막 사건의 순서를 꽤 잘 설명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경험은 가지고 있지 않다. 어딘가에, 아마 매번마다 그들이 배우지 않거나 받아들이기로 선택하지 않은 교리는 진정하게 마음을 열어 놓는 종교이다. 그것은 한 뭉치의 규칙 꾸러미나 신조의 목록이 아니라 사람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깊은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그들의 동기가 단순히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에 있다. 그들은 천둥과 벼락을 피하기 위해 종교를 믿는다. 그들은 천둥과 벼락을 맞을까봐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것들을 한다. 그들은 유황불 못에 던짐을 받는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면서 주님을 두려워하며 섬긴다. 그들이 늘 못마땅한 듯한 찌푸린 표정을 짓고 다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 진리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결혼식장인 예배당을 막 떠나는 새 신랑과 신부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들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주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

  그대들은 어떤 아내가 자기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지 않으면 이혼 당할까봐 매일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 한다면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그와 같은 긴장 상태하에서는 이 세상의 관계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고 그 남편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든다. 아내의 생일이 가까워 오면 그녀의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인 남편은 자기 아내가 무엇을 갖기 원하는지 자주 주의 깊이 살펴보고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하기 위해 자기 남편의 머리를 후려칠 필요가 없다. 그 남편은 자신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산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주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매일 성경을 탐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최고로 사랑하는 분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지 알기 위해 끊임없이 징조들과 교훈들을 탐구할 것이다. 20세기역 성경에는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 “무엇이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인지를 발견하기 위해 언제든지 애를 쓰십시요”(에베소서 5:10).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얼마나 멋진 표어인가! 이 표어야말로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최상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처음 네 계명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하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마태복음 22:37,38).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규칙들과 종교가 가지고 있는 엄격함에 대해 신경질을 내고 불평하는 진정한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비참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만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그리스도인 “경험”의 범위는 규칙들을 잘 지키며 살고 그 법칙들을 지키려는 노력 때문에 끊임없이 투쟁하는 과정으로 일관되어 있다. 물론 남편이 자기 아내를 먹여 살리도록 하는 정부의 법을 지키는 것이나 하나님의 계명을 그와 비슷한 동기에서 지키는 것에는 아무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만일 법률의 요구가 그 법을 지키는 오직 한 가지 이유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는 그리스도인이나 남편은 무언가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법적인 짐도 들고 짐과 제약이 될 수 있는 것을 기쁨으로 해낼 수있는 힘을 준다.

  세 남자 아이를 가지고 있는 한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이 말끔하고 청결한 용모롤 갖추도록 하는 규칙들을 강요하려고 가진 애를 다 쓰고 있었다. 대부분의 다른 소년들처럼 이 세아들들도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구두를 깨끗이 손질하는 따위의 규칙들을 아주 싫어 했다. 엄마가 매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단지 권위와 강요의 방법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어떤 날 10대 초반에 들어선 맏아들이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모습으로 자기 방을 나서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은 잘 빗질되었으며 구두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엄마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놀라움과 기쁨을 억누르며 그녀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났는지를 기다리며 관찰해보기로 결심했다. 그 수수께끼의 해답은 멀지 않아 풀리게 되었다. 그 바로 다음날 엄마는 아래 동네에 새 식구가 이사를 왔는데, 그 집에 딸아이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그 소녀가 돌이를 못 봤는지는 모르지만 돌이는 이미 그 여자 아이를 보았고, 그것이 돌이의 태도를 심각하게 변화시켰다. 우리는 말끔한 차림을 갖게하는 규칙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변하게 한 것이 사랑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가 엄마의 강요 때문에 두려워서 자신의 용모를 단정하고 말끔하게 차리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요는 그리스도인 생애가 단지 “해라”와 “하지 말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영적인 결혼에 있어서도 실제적인 육신적 결혼에서와 마찬가지로 제약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제약들은 늘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한 사랑에 의해 부과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를 갖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길이 된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활기있고도 빛나는 증인들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기쁨으로 즐겨야 할 그리스도인 생애를 무언가 고역스러운 것을 억지로 하듯 하는 비참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입지 못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먹지 못한다고 울상을 지으며 불평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도록 강요 당한다는 이유로 교회를 비난한다. 그들의 종교는 마치 두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것과 같아 보인다. 그 사람은 자기 머리를 잘라 버리기를 원치 않지만 자기 머리가 붙어 있도록 하기 위해 그 두통이 계속되는 줄로 안다. 기쁨도 없는 그들의 신앙태도는 그들의 신앙이 남녀 노소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온갖 금지된 사항들을 만들어 낸 우울한 설교자들의 위원회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 표준이라고 부르는 신조들을 결정한 영적 원칙들에 대해서는 어떤가? 극장에 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법칙이 독단적인 교회의 법칙인가? 춤 추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부적합하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결정인가 아니면 사람의 결정인가? 화장품의 사용이나 보석류의 착용은 어떤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불쾌하게 하는 것일까? 진리는 우리의 믿음과 신조의 매 요점들이 성경에 나타난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원칙에 기초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늘 이와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어떻게 하면 내가 늘 애쓸 수 있을까 라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성경에는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명백한 교훈들과 예들이 수없이 많이 나와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나 태도에 관해 거듭거듭 해야 할 질문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어떤 목사님들이나 어떤 교회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믿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장 위대하고도 중요한 질문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불쾌하게 해드리는지 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성경절을 찾았다면 거기에 대한 더 이상의 논쟁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분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감히 그분을 불쾌하게 해드릴 위험스러운 것을 할 수 없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가 사랑하는 분이 기대하시는 것을 찾아서 행동에 옮기는 데 있어야 하며, 그분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들은 우리 생애 가운데서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그들은 상대방을 서로 위협하거나 최후통첩을 선고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사랑을 보여주고 서로를 기쁘게 해 줄 방법들을 찾는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의 위대한 계명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순종하는 것을 짐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의 가장 미약한 지시까지라도 민감하게 따를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벌 받을까봐 두려워서 끊임없이 안절부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갈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시편 32:8,9).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받은 추종자들이다. 그들은 단지 위협 때문에 반응하고, 벌 받을까봐 두려워 순종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나를 보고 네 길을 고치기 원한단다”그분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하는 사람들만이 훈계하시는 그분의 사랑의 표정을 알아차릴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지’ 라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성경을 탐구할 때 그들은 그분의 뜻의 가장 미세한 것일지라도 즉시로 순종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 정신의 진수이다.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드러내 주신 뜻과 매 생애의 단계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말이다.

  그리스도인의 표준을 논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사랑이 그 원동력이 되는지에 대한 위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우리는 원칙이 어떻게 실행에 옮겨지는 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교회의 많은 “행위”에 대한 표준 중에 어떤 것이라도 예로 들수 있겠지만 꽤 보편적으로 많은 불평이 제기되는 화장품과 보석류에 대한 문제를 택해서 다뤄보자. 수많은 신실한 교인들은 이러한 인공적인 장식들을 “교회가 하지 말라고 하니까”라는 이유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교회가 하지 말라고 하니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빈약한 이유이다. 이 장을 읽으면 그와 같은 문제에 대해 교회의 일방적인 규칙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깊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목사님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자주 접한다. “내가 낀 이 조그만 결혼 반지가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목사님은 제가 이까짓 작은 반지를 끼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저를 하늘나라에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내 마음은 그리스도교 정신에 대한 그와 같은 부정적인 접근을 수많이 볼 때 참으로 슬프고 답답하다. 그 질문에 내포된 뜻이 무엇인지 부디 유의 하시길 바란다. 질문자는 분명히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도 하늘나라를 얻을 수 있는지를 알기 원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태도는 “그것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식으로 하나님의 법을 해석하여 하라고 하는 것만 하려는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런 식의 태도는 틀린 것이다. 참으로 틀린 것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묻지 않을 것이다. “제가 하나님의 자녀로 남아있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해야 합니까?  아, 그것보다는 “제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지는 못하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 성경에 나타난대로 즐겁게 그분의 뜻을 순종할만큼 충분히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긍정적인 질문 방법이다. 이렇게하여 하나님의 뜻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그러한 사랑의 관계를 전제로 할 때 화장품이나 장식품의 사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탐구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할 것이다.

  창세기 35:1-4에서 야곱은 자기 가족들을 여호와의 단 앞에서 제사를 드릴 벧엘로 데리고 가라는 말을 하나님에게서 들었다. 이것은 야곱에게 있어서 아주 신성한 장소였다. 그가 일찍이 회개를 경험한 장소이며, 꿈에 하늘의 사다리를 본 장소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 신성한 장소에서 자신들을 바치기에 앞서 야곱은 식구들에게 “너희 중에 이방 신상을 버리”(2절)라고 말했다. 그 식구들은 이방인의 땅에 머물면서 그들의 몇몇 관습들을  쫓아서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제단 앞으로 나가기에 앞서 버려야 할 어떤 물건들이 있었는데, 그 물건들은 이방인의 물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물건들이 어떤 것들인지 4절을 유심히 살펴보라.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사사기 8:24에서 우리는 그 귀고리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에 의해서 착용되었던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 문맥은 그들이 장식품을 착용하는 것은 참 하나님으로부터 배도한 표시라고 하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다. 창세기 34장엔 야곱의 아들들이 어떤 무시무시한 죄를 범한 것이 나오며, 야곱은 그들과 자기 가족들을 위한 엄숙한 구속을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고 있다. 이 때야말로 마음을 깊이 살피고 회개해야 할 때였다. 잘못된 것을 바로 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이르러오게 하는 문을 열기 위해 모든 것들이 준비되었다. 이방인들의 관습인 장식품을 착용하는 관습은 이상한 이방신들과 함께 버려졌다. 귀고리들은 땅에 묻힌 바 되었다.

  출애굽기 33:3~6에는 유사한 상황 아래서 한 개혁이 일어났다. 바로 전 장에서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있었던 산에서 아주 무시무시한 배도가 일어 났었다. 많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금 송아지를 경배했고, 그것이 그 민족들에게 재앙과 파멸을 가져 왔었다. 모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에게 회개를 호소하였다.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애굽기 32:39).

  다음 장에서 모세는 그 때까지도 방종과 죄의 상징인 이방인의 장식품을 착용하고 있던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하기 위해 성소로 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주신 지시는 마치 일찍이 야곱과 그의 가족들의 경우처럼 의복을 바꾸라는 지시도 포함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 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출애굽기 33:5.6).

우리는 그러한 장식품들을 착용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떠하신지에 대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잘 알게 되었다.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제하고 심판 때에 자신들의 배도에 대해 답변하도록 말씀하셨다. 그들이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것과 관련하여 이러한 금지 사항이 발해졌다는 것은 그저 지나치는 관심 이상의 중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내가 사자를 내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을 쫓아 내고……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출애굽기 33:2,3). 그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장식품들을 제하여 버리라고 하는 요청을 받은 것은 참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1에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는 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침례받은 경험을 이야기하고. 7절과 8절에서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의 큰 반역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 다음에 즉시 그는 11절에서 그들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경계”를 위해 기록했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그들의 반역에 대해 그들을 취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 하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장식품들을 제하라고 하신 명령은 오늘날 하늘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 문맥에 비추어진 의미는 아주 분명하다.

  화장품을 사용하는 것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열왕기하 9:30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세벨처럼 화장했다”라는 표현의 기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이 성경절에 그에 대한 대답이 나온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이르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수백명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악독무도하기로 이름 난 그 이방 왕후의 역사는 성경학도들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다. 그러한 관습에 대한 성서적 기원을 추적해보면 이세벨이 확실히 그러한 행위를 통해 신성모독적인 그림자를 던진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화장품의 사용이 성서기록 전반을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방여인과 불충실한 여자들의 표라고 하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보석류의 사용에 대해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질책중에 가장 통렬한 질책 중 하나를 하셨다. 장식품을 착용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을 이보다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드러낸 곳은 없다. 이사야 3:16에 하나님께서는 장식품들을 일반적으로 뭉뚱그려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시온의 딸들”에 의해서 착용되고 있었던 장식품의 긴 목록들을 열거하셨다. 자, 이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들을 착용하는 것을 기뻐하시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거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이사야 3:I6~21).

  잠시 멈추고 이런 질문을 해보자.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제거하실 것인가? 그 다음 장 4절을 읽어보자.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중에서 청결케하실 때가 됨이라”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것들을 “더러움이” 라고 언급하신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 그분은 더 나가서 그 장식품들을 “씻어버린” 살아남은 자들을 가장 입체적으로 묘사하신다.”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이사야 4:2.3).

  대담하고도 분명하게 이사야 선지자는 장식품을 착용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자만심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한 시시한 인공적인 장식품들을 씻어버린 여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영화롭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존재로서 묘사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미를 평가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미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분명하다. 자기 자신들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모든 보석을 장식한 여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더럽다고 말씀하셨다. 그 모든 더러움이 씻겨져 없어졌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영화롭고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다.

이 진리가 가지고 있는 극한 중요성을 놓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아름답다”는 말을 사용하여 묘사하신다. “아름답고 묘한 딸 시온을 내가 멸절하리니”(예레미야 6:2).

  마치 여성들 가운데 있는 과도한 자만의 과시에 대한 그분의 평가를 강조하기 위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그분의 관점을 표명하셨다.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찐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이사야 3:9). 외부적 장식을 하는 죗됨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도 제기될 수 없도록 하셨다. 여성들의 치장한 얼굴을 하나님께서는 수치를 모르는 그들의 뻔뻔스러움에 대한 예로 사용할 정도로 그것은 허영으로 가득찬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리들을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의 일부로서 명명하신 것을 여기서 유의해 보는 것이 참 좋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고리들을 그분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 고등학교 졸업반생은 즉시 대답할 것이다. “내가 끼고 있는 고등학교 졸업반 반지는 내가 졸업반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이야. 나는 그것을 장식품으로 끼고 있지는 않아. 하나님께서는 다른 종류의 반지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신거야.” 메이슨(Mason) 회원은 자신이 끼고 있는 메이슨회 반지에 대해 거의 같은 식으로 대답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끼고 있는 반지를 말하고 계시지는 않아. 이 반지는 단지 내가 어느회에 속해 있는지를 말해 줄 뿐이니까.” 또한 탄생석 반지, 약혼반지, 결혼반지 같은 것들도 모두 상징적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끼고 있는 것에 대해 합리화 시키면서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고 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단지 우리가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끼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외로 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 되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가 왜 이 문제에 관해서 성경을 탐구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면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지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무엇이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인지 알기 위해 주위를 빙빙 돌 길들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단 한가지 목적은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실천하기 위해 그분의 뜻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위험스러운 짓을 감히 할 수가 없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반지의 종류를 둘러대며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어떤 것을 가지고 합리화시키려는 생각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모든 반지들을 다 치워버리라. 만일 어떤 상징적인 반지는 괜찮다고 한다면 다른 모든 상징적 반지들을 착용하는 것도 괜찮다고 우겨댈 것은 너무나 뻔하지 않겠는가? 성서적 관례에서. 결혼했기 때문에 어떤 상징을 착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이다. 결혼반지의 역사는 이교도들의 태양신 숭배와 이교도들의 미신에서부터 기원한다. 그것을 착용하고 다닐 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 한마디의 논쟁거리도 될 수가 없다. 정욕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어떤 그리스도인은 반지를 끼면 천국을 유업으로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논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반지를 착용하는 것이 우리의 사랑이요 친구인 분을 불쾌하게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대답을 할 것이다.

  다른 많은 구약의 저자들처럼 선지자 예레미야도 인공적인 장식품율 착용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몇몇 권고를 더하였다. 하나님은 그 거룩한 사람들을 예언상 교회를 상징하는 의미로 여자로서 나타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타락했을 때 그들은 선지자에 의해 기생 혹은 불충실한 아내로 묘사되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절을 읽는다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찌라도 너의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예레미야 4:30).

  에스겔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반역한 백성인 유다와 이스라엘을 오홀라와 오홀리바라고 하는 두 기생의 이름을 붙여 상징하셨다. 그들의 대담한 치장에 대한 그분의 묘사는 그들의 추잡한 행위와 잘 연결이 된다. “또 사자를 원방에 보내어 사람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이 오매 그들을 위하여 목욕하며 눈썹을 그리며 스스로 단장하고”(에스겔 23:40 ).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위선에 대해 묘사할 때 똑같은 생각을 표현했다.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호세아 2:13).

  거듭거듭 성경은 화장품과 보석류의 착용을 죄와 배도, 그리고 이교도주의와 관련시킨다. 그들이 하나님에게로부터 돌아섰을 때에 이사야는 “그들의 죄를 드러낸다”고 묘사한 것으로서 장식품들을 적용했다. 그러한 것들이 하늘의 위대하신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며, 그분의 뜻을 떠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로서 그에 대한 성경절도 수없이 많다.

  신약으로 오면 그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날카로운 면을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자주 옷을 입은 여인(거짓 교회를 상징함)을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계시록 17:4)고 묘사한다.

  그와 비교하여 참 교회는 계시록 12:1에 해의 영광을 입은 아름다운 여자로서 묘사되었다. 이 여자는 계시록 21:9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라 불리운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아무런 장식들을 착용하지 않은 것에 유의하라. 참된 종교적 조직과 거짓 종교적 조직에 대한 이러한 형태들도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때에 인공적인 장식들의 사용여부를 지적하고 있다.

  베드로와 바울이 기록한 두 개의 마지막 성경절들은 그것과 관계된 초대교회의 견고하고도 일관된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두 거성들은 제자들 가운데서도 훌륭한 감화를 미치는 이들이었고, 그들이 쓴 성령으로 충만한 편지들은 사도교회의 견해를 바꿀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한다. 바울은 기록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딤전 2:9.10).

  베드로도 믿지 않는 남편을 가진 그리스도인 여성들에게 특별히 말한 것 외에는 거의 같은 방식으로 기록했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1~4).

  베드로가 한 이 말은 오늘날 같지 않은 믿음을 가진 남편과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 아내들이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 하나에 대해 하는 권면을 포함하고 있다. 믿는 아내가 믿지 않는 자신의 남편을 즐겁게 하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양보해야 하는가? 집안의 모든 일들을 평탄하게 하며 가능한한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 아내는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타협해야 할까? 베드로의 권고는 단순하고도 명백하다. 진리와 원칙들을 하나라도 희생 시키지 말라. 비록 아내가 그녀의 믿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그녀는 자신의 “정숙한 대화”로 남편을 구할 수 있다. 다른 성경 번역판은 “대화” 대신에 더욱 적절한 용어인 “행위”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인 아내의 행위가 어떻게 드러날 것인지에 대해 유의해 보라. 베드로는 아내가 자신의 외모를 단장하지 않을 때에 더욱 남편을 구하기가 쉽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 결혼반지를 낄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아내들의 고충을 알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그럴지라도 그 아내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아님을 안다. 이 성경절은 하나님을 첫 번째 위치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만들고 있으며, 그러한 결정이 다른 어떤 과정보다도 남편을 구원하는데 더욱 큰 역활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수백명의 전도자들과 목사들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을 끝내는 믿음 가운데로 이끌어 들인 여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을 굳게 지킨 사람들이다. 남편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남편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작은 일에 있어서 그 표준을 희생시킨 사람들이다.
 
그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나타난 결과들은 그것이 사실임을 반영한다. 아내가 자신이 믿는 바대로 온전히 따라 살고 있지 않는한 남편은 그 아내가 믿는 것이 틀림없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온전히 따른다고 주장하지도 않는 어떤 것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별로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녀가 다른 모든 것들보다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자기 남편이 불쾌하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높은 수준을 지키고 따른다면 그 남편은”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는 감동을 깊이 받을 것이다. 아마 그는 자신의 진정한 감정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 실제로는 자신이 크게 화가 났다는 것을 표현 할는지도 모르지만 그의 아내에 대한 존경심과 숭애심은 그 아내의 견고하고도 양심적인 태도에 의해 은밀하게 자극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의 결혼반지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부인들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나는 내가 결혼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야 하기 때문에 결혼반지를 포기하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결혼이 가장 성스럽고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이러한 진지한 감정의 표현에서 잘못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부인들은 자기 남편을 사랑해야 하며, 또한 자기 남편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결혼은 중요한 것이며, 아내는 자신이 결혼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기를 원해야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질문 해보자. 사람의 생애 가운데서 결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까? 있다. 남편과 아내가 결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보다 더 우선 순위에 놓아 두어야 할 딱 한 가지 것은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이다. 깜짝 놀랄 정도로 모든 성경의 증거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장식품들이 우리의 사랑의 주제가 되신 주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결혼반지가 아내가 남편과 결혼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말해 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또한 어떤 다른 것을 말해 주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그녀의 주님인 예수님보다 자기 남편을 더욱 기쁘게 해드리기를 선택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잘못된 증거를 낳게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식의 결론이 너무 강력한 것이라고 반대할는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려고 대들것이다. “당신은 반지나 장식품 같은 작은 것들로 나의 그리스도인 신앙을 판단하고 시험하고 계십니다”라고.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시험이 치뤄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며, 성경은 그 시험에 관한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 시험은 비단 하나님의 명백히 드러난 계명을 지키는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발견했을 때는 그것을 하지 않거나 치워버리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에 그에 대한 증거가 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참 그리스도인들이 향상 하는 것 두 가지에 대해서 그냥 넘겨 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법에 새겨놓으신 명백하고도 직접적인 명령들을 순종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아서 행하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항상 애쓰”(에베소서 5:10. 20세기 역)라는 명령에 순종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하여 이 신성한 원칙을 모본으로 보여 주셨으며, 또한 강조하셨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한복음 8:29). 일반적인 계명들은 육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라도 명백한 순종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작은 일들은 오직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말씀을 찾아 상고하는 사랑스러운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만 나타난바 되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구원받을 사람들이 에녹으로 표상이 된 것은 아주 엄숙한 사실인데,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브리서 1l:5).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6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대한 묘사를 하는데, 이 성경절에서 그는 죽은 의인들의 부활과 살아남은 의인들의 홀연히 변하는 모습을 설명한다. 그러나 승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성도들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들의 표 중의 하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즐겨 하는 것이다.

  잘 들어보라. 만일 그대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하면서 그대가 그것을 하기를 거절할 때 실제로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 되는가? 그대는 어떤 다른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기쁘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대는 “그렇지만 이것은 아주아주 작은 일인 걸 “하고 말할 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작은 일이지만 사랑은 실제로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해주는 작은 일에 의해서 시험받고 그 진가 여부를 증명하는 것이 잖는가! 그것이 정말인지 아무 가정주부에게 가서 물어보라. 남편이 아내의 생일을 위해 세탁기를 사다 주면 아내가 그것을 고마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주중에 꽃이라도 사가지고 와서, “여보. 내가 당신을 위해 설겆이를 해줄께”라고 말하면 아내는 그대에게 그것이 세탁기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것은 마땅히 있어야 할 어떤 큰 것을 해주는 것보다 작은 것을 해줄 때 그 남편의 진정한 감정을 더욱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십계명을 지킬 때 기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계명 이상의 어떤 것, 즉 성경에 나타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작은 것들을 함으로써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좀 더 많이 나타내는 것이다.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그 양에 의해서 결코 측정될 수 있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에게 더 많은 문제를 가져다 주는 죄는 그 죄의 양이 아니라 그 죄의 질이다. 성경은 화장품의 사용, 반지나 그 외의 것들의 사용이 주님을 불쾌하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정도의 화장품의 사용이 잘못된 것이라든가, 어떤 종류 혹은 몇 개 정도의 반지를 끼는 것이 그분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대한 가장 작은 고의적인 불복종은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놓는데 대한 내적인 반역을 의미한다. 오늘날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주장은, “조금은 괜찮아”이다. 그것은 롯이 천사의 지시를 받아 산으로 도망할 때 쓰던 그의 바보스런 주장이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에 가까이 위치한 다른 성으로 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의 주장은,”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창 19:30)였다. 그대는 그가 소돔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인데도 다른 성으로 가기를 원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가? 그러나 똑같은 합리주의가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실천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반지의 크기로 그들의 부정숙의 어떤 양에 대해서 다투고 논쟁을 벌인다.

  사단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쯤 거역하면 되겠는지에 대해 결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들을 때 기뻐한다. 이것을 결코 잊지 말라. 성경의 표준에서 어느 정도 벗어 났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문제를 일으키는 탈선이 있다고 하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내딛는 발걸음의 넓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 발걸음이 인도하는 방향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가끔 목사님들은 침례 후보자들이 결혼반지를 빼버리기를 기다리기 때문에 결혼반지로 인하여 큰 곤란을 겪게 되는 때가 있다. 사실 반지 그 자체는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경험을 통해서 입증이 된다. 반지 그 자체는 단지 더 심각한 문제의 상징일 뿐이다. 온전한 굴복의 결핍, 그것이 문제이다. 마음이 하나님께 굴복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제일 첫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며, 그 사람은 침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는데 작은 반지 하나 따위로 방해가 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자기나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사랑보다 강할 때 그까짓 작은 금속 반지 하나로 인해 그분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편만한 사상이 되어버린 주제에 대해 성서적인 증거들을 모색하여 고찰해 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보석류를 착용하는 것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는 반대에 대해 대답할 것이다. 아주아주 명백한 태도로 심지어 결혼반지에 대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고집하는 것까지도 이 대답은 무너뜨려 버릴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바울이 한 웅변적인 말을 들어보기 전에 영혼 구원에 모든 시간을 바치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을 알아 보기로 하자. 교인이 되고난 후에도 계속 자기들의 장식품들을 착용하고 있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다른 영혼들의 길에 거치는 돌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거의 대부분의 전도자나 목사는 몇몇 일관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교인들로 인해 침례장에서 침례받기를 거절하는 남녀들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생활표준에 관하여 전체적인 성경의 진리를 배운 후에 이 침례 후보자들은 반지나 다른 장식품을 착용하고 있는 교인들이나 어떤 때는 교회 직원들을 보고는 크게 놀란다. 많은 사람들은 실망하여 교회에 입교하기를 아예 거절해 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려 들 것이다. “글쎄, 그 사람들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지 말아야 하잖아. 그들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받아 들여야해”라고. 그것은 참 좋은 이야기이고 참말이긴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성경의 인기없는 진리를 두고 헛점을 찾으려는 영혼들을 상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헛점들을 닫아버리고 그들이 하는 모든 주장을 맞아서 그들로 하여금 마침내 온전한 순종을 하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 사람들은 교회가 자신이 전한 그대로를 실천하는 교회라고 하는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몇몇 소수의 일치되지 않는 교인들이 목사님이 여러달 동안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온 연구와 침례 후보자의 준비를 위해 한 수고를 단 한 순간에 무너뜨려 버릴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거치는 돌이 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성장에 있어서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실망시키는 사람들에게 가장 엄숙한 경고를 발하였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로마서14:13).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주제에 대해 말씀하셨다. 단지 그분께서 아이들을 거쳐서 넘어지게 하는 것에 큰 강조를 둔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마 그분의 말씀은 우리가 안식일학교의 소년반 선생님과 함께 읽는다면 더욱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 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태복음 18:6). 참으로 심각한 말이 아닌가! 그것을 범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 있을 수 있을까? 선생님들을 자신이 따라야 할 모본으로서 보고 있는 작은 어린이들을 잘못 인도하는 그 일보다 말이다. 작은 소년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반지 끼는 것에 대한 성경의 표준에 대해 얼마나 자주 의아해 하겠는가!

  어떤 한 교회에 아이들이 신처럼 따르는 결혼반지를 낀 유치반 선생님이 있었다. 예배 시간에 한 소녀가 그 선생님과 그녀의 남편 사이에 앉을 수 있도록 종종 허락을 받았다. 보통 그녀는 선생님이 지갑에 넣어 온 것을 가지고 놀았으나 이 사랑스러운 천성을 가진 소녀가 자주 그녀의 여선생님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노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떤 안식일, 설교 예배시간에 그 여선생님은 그녀가 자신의 결혼 반지를 빼서 자기 조그만 손가락에 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좀 불안해진 그녀는 그 조그만 손가락에서 반지를 다시 빼내어 자기 손가락에 도로 끼었다.

  매 주마다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정도로 그 꼬마 소녀가 그 반지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그녀는 발견했다. 그녀는 종종 그 소녀의 조그만 손가락에서부터 자신의 반지를 억지로 뺏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그 금반지에 대한 그 작은 소녀의 증가하는 관심도는 그 여선생의 염려를 더욱 증가시켰다. 장식품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 그 여선생의 양심은 자신이 반지를 착용 할 때부터 좀 불안한 것을 느꼈었다. 이제 그녀가 그 작은 소녀의 반지에 관한 헛된 관심을 흩어버리려고 하는 동안 그녀는 설교 예배를 잘 드릴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아이의 앞길에 거치는 돌을 놓고 있었다는 확신이 들어 그 반지를 영원히 빼버리게 되었다. 후에 그녀는 한 순진한 소녀 앞에 시험거리를 두어 그녀를 괴롭힌 데 대한 죄책감을 가졌었다는 자신의 경험을 그녀의 목사님에게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저는 반지 끼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읍니다. 왜 제가 그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반지를 빼버리는 그런 위선자가 되어야 합니까?” 바로 이 질문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8:1~13의 답변을 하게 한 질문인데, 그 질문은 상당히 큰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 그 전 장은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물에 관한 문제에 대해 취급한다. 초기교회는 그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이교에서 들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고기를 먹는 것은 나쁘다고 믿었다. 그들은 제사 때에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인 것을 기억하였다. 이제 그들이 비록 그리스도인이긴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그 음식을 먹는 것은 어쩐지 그 우상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처럼 느꼈다. 그와 반면에 유대교로부터 교회에 들어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음식이 먹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완전한 식물이라고 느꼈다. 그 고기가”부정한” 종류의 것이 아니고, 다른 고기들과 함께 시장에서 파는 것이라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사는 일에 있어서 양심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 두 무리 사이의 분쟁이 아주 심각해지자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의 상당한 부분을 그 문제를 다루는 데 할애해야만 했다. 그 문제에 관한 그의 결단을 주의해 보라.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8:4~12).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해 그 영적인 촛점을 맞춘 이 어마어마한 성경절들은 교회에서 반지를 껴도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더 큰 의미로 적용된다. 우상에게 드려졌던 제물은 정죄를 받지 않았지만 장식품은 하나님에 의해 정죄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권면은 더 강하게 부각된다. 그러나 바울은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을 먹는 것은 죄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거치는 돌이나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또 같은 식으로 반지가 다른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작은 책의 중심 주제인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해 온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표준들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려는 관점에서 보고 있든지, 아니면 우리 이웃들을 사랑하는 관점에서 보고 있든지 그 결과는 똑같다. 그 전체적인 사상은 자아를 제일 마지막에 두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에 기초를 둔 신앙은 단지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며,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도록 할 것이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우리를 상기시킨다.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그리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여러분이 이곳까지 읽은데 대해서 한 질문을 해도 될까? 장식품의 착용에 대해 어떤 의문이 일어나는가? 성경 이곳 저곳에 있는 이 모든 증거들이 장식품을 착용해도 된다고 암시하고 있는가? 한 부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 보석조가리 하나를 착용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 못 들어오게 하실지는 아직 의문이다”고.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비록 당신들이 장식품을 착용한다고 해서 잃어버림 당한다고는 안느낄지 몰라도 그와 같은 많은 성경절들이 적어도 그와 같은 행동이 하나님의 전적인 승인을 얻는 것이 될는지에 대한 어떤 의문들을 일으키지는 않습니까?” 그들은 “아. 그렇고 말고요. 거기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읍니다”고 대답했다. 그 다음의 내 질문은 이것이었다. “당신들은 당신이 반지를 착용하는 것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릴 수 있다는 10%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잠시 생각하던 그들은 거기엔 적어도 그 정도의 가능성은 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 다음 나는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그대들이 침례 받으려고 서서 그대들의 생명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칠 때에 그대들은 그대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신 주님을 10%라도 불쾌하게 해드리는 길을 택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들은 천천히 손을 밑으로 내리더니 자신들의 반지를 빼기 시작했다. 남편은 대답했다. 아니요. 우리는 그분을 불쾌하게 해드릴 가장 적은 가능성까지도 우리 생애에 없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의심이 있을 때에 우리는 그분에게 그 의심을 처리하도록 맡기렵니다.”

  나는 이와 같은 굴복이 쉬운 것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애쓰지 않겠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9:23)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아에 대해 “안돼!”라고 말하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굴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가지고 전쟁을 치룰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리스도께로 와서 그분의 길을 배우는 사람은 자아를 부인하거나 혹은 자신의 전 본성이 애써서 간직하려고 하는 어떤 것에 대해 “안돼!”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의 의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 또 다른 사람들은 다른 점에서 그 시험에 실패한다. 나는 돈 문제에 있어서 자신을 부인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아왔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자신들의 직업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신들의 봉급이 삭감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돈에 대한 사랑에 대해 “안돼!”라고 기꺼이 말하지 못한다.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라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친구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친구들에 대해서는 자아를 부인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술과 담배,성경이 말하는 부정한 음식들에 대해서 자아를 부인하지 못한다. 식욕은 그들에게 있어서 큰 장벽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허영과 자만의 점에 있어서 실패한다. 그들은 의복에 대한 터무니없는 자만에 대해 자신을 부인하지 못한다.
  늘 흥미로운 사실은 진리가 전도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참으로 진실한 사람들을 어떻게 가려내는 가를 보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생애의 변화에 대해 제시하기 까지는 아무도 전도집회에 빠지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권면들을 설교하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청중들은 즐거이 초청에 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가 그 뿌리치기 힘든 자아방종에 대해 도전을 하면 투쟁이 시작된다. 안식일 문제, 십일금 문제, 먹는 음식에 대한 문제들은 모두 자아를 사랑하는 본성에 대한 시험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들에 있어서 실패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가장 큰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개인의 자만심에 대해 개입할 때에 일어나는 듯이 보인다. 허영심은 아주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상당히 널리 퍼져있다. 자아에 대한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가지 미묘한 방법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영혼들에 대해 마귀는 자아를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여 서는 최후의 필사적인 보루로서 사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라. 그리스도를 저들의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그분께서 요구하시는 뜻에 100% 굴복하기를 즐겨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저들의 길에 아무런 장애물을 놔두지 않는 사람들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5:10.11). 그럴 때 온전히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 쉽게 구분 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얼굴조차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온 거룩한 빛과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세상의 장식들을 걸치지 않았어도 그들은 즉시 구분될 수 있는 성령의 또 다른 장식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여성들은 그들의 장식품을 제거하고 나면 거의 벌거벗은 것처럼 느끼지만 그들은 곧 하나님께서 인공적인 것 대신 진짜로 그들의 장식품을 대치해 주신 것을 알게 된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편 34:5).

  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새로운 모습”이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모든 악한 것들을 포기할 때 거기에는 늘 영적인 대체물이 있게 된다. 바울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로마서 13:12). 각 사람의 의복과 장신구의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이러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 잘 유의해 보기 바란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결혼식 예복과 이 세상의 예복을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이사야 61:10).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혼하여 그분의 이름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의 신랑 신부들처럼 단장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기쁨으로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은 세상 사람들로 놀라게 하는 빛난 얼굴과 참으로 신선한 용모이다.

이 점의 중요성은 아주 조심스러운 고려를 요한다. 얼굴은 어떤 사람의 품성과 경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능력있는 증거는 단지 우리의 빛나는 용모의 증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바로 그 사실에 기초하여 화장품의 사용을 반대하는 가장 확 있는 주장 중 하나는 아주 잘 알려진 천주교인 저자인 프랜시스 파킨슨 키-즈 (Frances Parkinson Keyes)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왜 자신의 얼굴이나 머리에 인공적인 장식품이나 화장품을 사용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5년이라고 하는 기간은 여성의 얼굴에 주름살과 볼에 패이는 여러 주름들 외에 보이지 아니하는 더 많은 의미들을 남겨 놓아야 한다. 그 기간 동안에 그녀는 고통과 즐거움,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에 대해 참으로 친숙하게 된다. 그녀는 그동안 투쟁해 왔고, 살아 남았으며, 실패와 성공을 경험해 온다. 그녀는 믿음을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되며, 그 모든 경험을 통해 그녀가 젊었을 때보다 더욱 지혜롭고 부드러워지며, 더 잘 참고 잘 인내하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 그녀의 유모어 감각은 더욱 감미롭게 무르익은 것이 되어야 하며, 그녀의 시야는 더욱 넓어지고, 그녀의 동정심은 더욱 깊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은 드러나야 한다. 만일 그녀가 그녀의 나이가 만들어 놓은 주름들을 지우려고 애쓴다면 동시에 그녀는 경험과 품성의 보배로운 주름들 까지도 없애버리려는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영감의 말들; Words of Inspiration. 198).

그 말 속에는 얼마나 어마어마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가!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그들의 얼굴 표정으로 해야 할 증거가 있다. 의로움, 고상한 기품, 순결, 하나님안에 있는 조용한 믿음 이러한 속성들은 오직 용모에 의해서만 명백히 드러나야 할 때가 종종 있다. 예수님께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히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용모의 빛남을 두고 그 말씀을 하셨는 지도 모르겠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에서 비치는 영적인 빛은 수십번의 설교나 성경공부보다도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관심을 같도록 이끄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성경으로 이끄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찾기 위해 인공적인

장식에 관한 주제를 다루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 표준에 있어서도 같은 적용을 할 수 있다. 춤 추는 것, 영화 보는 것, 도박, 음식, 그리고 의복 등에 있어서 우리가 항상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을 찾는 그 동기에 있어서는 똑같은 원칙들이 적용된다. 우리 교회의 이러한 높은 표준들은 사람들이 어떤 위원회에서 결정한 사항에 기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기초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명백히 인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