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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목사 안수, 어디까지 왔는가?

저자: 사무엘 피핌 박사 (조직 신학을 공부한 신학 박사로서 우리 교회 각 대회와 학교들과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특히 수많은 비 재림교회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전도하는 캠퍼스 전도사업의 일인자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로는 유명한 “Receiving the Word”가 있다.)

오랫동안 억압당해 온 여성들의 위치를 다시 찾고자 하는 운동이 한국 사회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한 여성 운동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 내지 공감이 가지만, 또 다른 어떤 면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를 감출 수 없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여자 목사 안수 문제이다.

현대 산업사회가 되면서 사회는 여자들을 가정 밖으로 끌어 내었다. 그 결과 미혼 여성 뿐만 아니라, 많은 어머니들이 전업 가정 주부의 직책을 떠나 직장 여성으로 변신하도록 이끌었다. 어머니가 가정을 떠나면서 서구 사회의 이혼율은 급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서구 사회 풍조를 뒤따르고 있는 한국은 이제 이혼율에 있어서 세계 1위가 되었다. 2003년에 결혼한 부부 2쌍 중에 1쌍은 이혼했다는 놀라운 이혼율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여성이 자녀와 가정을 뒤로 젖혀두고 사회로 나감에 따라 생긴 현상이다.

요즈음 한국 교회를 비롯한 우리 재림교회 안에 여성을 안수하여 목사로 세우려는 운동과 여론이 일고 있다. 과연 여성이 자녀와 가정을 뒤로 두고 교회의 목사로서 나설 때 어떤 문제가 발생될까? 또한 성경은 여자 목사 안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사무엘 피핌 박사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요약해 보았다. 이 글은 그의 저서인 “Must we be silent?”라는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 편집실 –

“여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그것에 대한 별 특별한 의견이 제게는 없는데요. 안수를 주어도 괜찮고, 그 반대라도 괜찮고…” 이것은 몇년 전 우리 신학대학의 한 교수가 여자 목사 안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을 때 대답한 나의 말이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였고, 논쟁을 불러 일으킬 만한 이런 신학적인 문제에 관여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에 서므로 시끄러워지기 보다는 중간 입장에서 편하게 있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나는 그 당시 별로 그 문제에 대해서 연구해보지 않았고, 그냥 여자에게도 안수를 주는 것이 평등하고 정의로운 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은 채 그렇게 편안하게 몇년을 지내며, 스스로를 재림교회의 선구자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 받아 가장 성서적인 진리를 믿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나는 어느날 갑자기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정말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는 것이 성서적인가? 정말 성경과 화잇 부인의 글은 그것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있는가? 비록 인간적인 생각에 그것이 정당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말 성경적인 것인가? 여자 목사 안수에 관한 성서적인 견해를 알고 싶은 욕망과 교회 안에 대두되고 있는 여자 안수에 대한 논란은 나로 하여금 이 문제에 대하여 연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것에 대한 연구는 여자 목사 안수에 대한 나의 의견을 통채로 뒤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근래에 재림 교회 안에서 여성을 안수하여 목사와 장로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문제는 두 차례나 우리 재림 교회 대총회에서 기각되었지만, 그러나 미주 안에 있는 어떤 지방 합회들에서는 아직도 활발하게 이 문제를 추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향력이 큰 어떤 재림 교회들에서는 일방적으로 벌써 여성을 안수하여 목사로 세운 곳들도 있다.

    1998년에는 Nancy Vhymeister에 의해 쓰여진 “여성 목회 (woman in ministry)”라는 책이 나왔는데, 그 책에는 앤드류스 신학 교수 20명의,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여자 안수에 대한 정의와 그것에 대해 찬성하는 글을 실어 놓았다. 이 책은 재림교회 안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그동안 우리 재림교회가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여자 안수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총체적인 가르침과 재림교회가 초기에 믿던 이해와 믿음을 흔들어 놓게 되었다.

나는 재림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중요한 역할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는 영혼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전도 사업에 여성들이 마땅히 참여되어야 하며, 재림교회는 그런 사업에 더 많은 여성들이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들을 더 많이 신학교에 보내어 훈련을 받게 하는 일에 교회는 더 적극적으로 후원해야 하며, 함께 목회 사업에 팀을 이루어 일할 때 적절하고 공평한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성경을 가르치거나 공중 앞에서 전도하고 가르치는 복음 사업에 여성들이 더 많이 참여하여야 하며, 기도회를 주관하는 일, 신자 방문, 건강 전도 사업, 심지어 새 분교를 세우는 일 등 교회의 전반적인 모든 사업이 여성들의 힘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교회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 여성들을 안수하여 목사와 장로로 세우는 것이 절실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는 이 때, 과연 성경과 초기 재림교회의 사상은 여자목사 안수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지금 우리 재림 교회 안에서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려고 활발하게 추진하려는 뒷 배경에는 어떤 사상이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여성 목회”란 책에서 말하고 있는 여자 안수에 관한 견해는 정말 성서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것인가?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그렇지 여성 목사 안수 운동을 강하게 추진시키는 이념의 뒷 배경에는 여성 해방운동(여권 신장 운동)이 있다. 이 이념은 상당히 유혹적인데, 그 이유는 이 사상은 가정과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의 차이를 제거시키는 것을 통하여 남녀의 완전한 평등을 성취하려는 평등주의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해방운동(여권 신장 운동)은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세워진 운동이다. 우리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여성 해방 운동의 이념에 거리를 두기는 하지만, 그들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불법과 불공평과 차별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것은 합당하다고 본다.

    그런데 이 여성 해방운동의 중심부를 살펴보면, 그것은 부적절하게 취급받고 상처받은 여성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서나 가정에서, 적절하지 못한 남자의 리더 역할에 의해 잘못 대접받고 불공평하게 다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안다. 많은 여성들이 가정에서, 또 그들의 결혼 생활에서 남편에 의해, 남자들에 의해 고통과 학대를 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불이익을 해결하려고 도전하는 많은 여성들은 사회가 남성의 편을 들어준다고 느낀다. 그래서 사회를 향하여 그들의 권리와 평등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 해방 운동의 관건이 상처받고 부적절하게 취급받는 여성들을 위한 합당한 일이라고 하여도, 그들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과 지향하는 바를 보면, 비성서적이고 부적절한 해결책에 도움을 구하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여성 해방운동 이념의 걱정스러운 양상들을 아래에 잠깐 살펴보자.

역할 분담의 의무 ; 여성 해방 운동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여자로 하여금 남자의 돕는 배필이 되어 서로 상호간에 보완하도록 성립해 놓으신 관계가 여자를 남자보다 열등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여성에게 주어진 참된 품위에 대하여 고려해보지도 않은 채, 어떤 여성들은 완전히 남자같이 되려고 시도함으로, 혹은 가정이나 교회에서 여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거절함으로, 자아 성취와 완전한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이를 위하여 많은 여성 운동가들이 결혼생활 상담실에서, 혹은 아동 교육재단에서 아동들에게 역할 분담 재교육을 시킴으로, 또는 종교 조직들, 특히 남자들이 상위권에서 지도력을 가지는 이슬람교계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여성 동성연애 주의 ; 여성 해방 운동가들은 성적으로 남성들이 여성들 위에 우월권을 가진다고 생각하여 그들 중 많은 여성들이 여성 동성연애주의 (레즈비언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마녀 인정 ; 또 많은 여성 해방 운동가들은 마녀나 고대 이방인들이 숭배했던 “다산의 여신”들을 악의 마술사라고 절대로 부르지 않으며 그들을 영적인 여성들이라고 부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이란 단어에 대한 재 정의 ;
여성 해방 운동가들 중 어떤 그룹들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하나님” 이란 단어에 중성적인 역할을 적용시키기 위해 그 단어에 대한 재정의를 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자녀”란 표현으로, “son of man (인자)” 란 표현은 “human one”으로 “heavenly father”이란 표현은 “heavenly parent”로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벌써 “여신, 즉 여성 하나님”을 예배하는 종교 (goddess religion) 가 하나님을 여성화시키려는 시도하에 각 교파 조직에 침투하여 큰 종파들 가운데 많이 퍼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카나다에 있는 가장 큰 개신교파인 “카나다 연합교회”의 교인들이 사용하는 교회 새 요람책 (new service book) 에는 침례를 줄 때 더 이상 옛날의 호칭, 즉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말을 쓰지 않으며, 그 대신 “창조주시요, 해방자시요, 치료자”라고 하거나 “사랑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사랑의 성육신하신 예수와 사랑의 능력이신 성령의 이름”으로 대치되었다. 그들의 책 100페이지나 되는 첫부분에는 “아버지”라고 불리워진 하나님은 한번 밖에 나오지 않으며, 그대신 모든 교인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 어머니 아버지” 또는 간단하게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요즈음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서까지 성령을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여성 멤버로 조장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창조주를 “He/She”로 적용하려고 거듭 시도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성경의 영감성과 권위에 대한 의심 제기 ; 여성 해방 운동가들은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남성 위주로 기술되어 있고, 남녀의 완전한 평등을 부인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전체적인 영감성을 부인한다.

성경절의 재해석 ; 여성해방 운동가들은 성경절들에 나와 있는 성별의 역할에 관한 기술은 진부한 고대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임으로, 그 당시 성경이 기록된 시대의 문화적 환경에 따라 쓰여진 성경과 성경절들을 현대적 개념으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이념을 성경의 저술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성 목회의 변이 ; 재림 교회에서는 영혼을 구원하는 목회 사업에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있다. 그런데 특히 개발 도상국가들에서, 예를 들면 아프리카 지회에 있는 나라에서는 여성이 주측이 되어 “만명 전도” 라는 캠페인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여성 전도부에서는 이것을 여성 목회 문제로 이용하여 여성을 안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성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것은 여성이 전도 사업에 동참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여성 해방운동은 이외에도 많은 이유들을 들며 사회나 교회나 가정에서 여성 평등을 주장하며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있다.

“평등”이란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미국 독립 선언문에는 “우리는 모든 인류는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자명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 라는 구절이 있다.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모든 점에서 평등하다는 말인가? 이 독립 선언문에 나와 있는 평등의 뜻은,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마이클 조단처럼 농구를 잘하고, 부룩처럼 야구를 잘 하고, 아더 멕스웰처럼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뜻인가? 서로 다른 독립체, 즉 서로 다른 존재가 평등하게 된다는 뜻은 과연 무엇인가?
도움이 될 만한 한 예화를 예로 들어 보자.

한 일곱 살쯤 된 아이가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한 컵의 설탕과 한 컵의 밀가루는 같은(equal:평등한) 가요?”
이 질문을 받은 아버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 아들의 질문이 설탕과 밀가루의 양이 같으냐고 묻는 것이었다면 그 대답은 “yes”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아빠! 만일 한 컵의 설탕과 한 컵의 밀가루가 같다(equal)면, 이 요리법에 나오는 ‘설탕 한 컵’ 대신 ‘밀가루 한 컵’을 넣어도 될까요?” 라고 다시 묻는다면, 그 대답은 “no”이다.

    한 컵의 설탕과 한 컵의 밀가루는 “어떤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모든 점”에는 같지 않다. 한 컵이라는 “양”에서는 같지만, “물질이나 재료”의 면으로 볼 때는 완전히 다르므로 “평등”할 수 없다.

독립 선언문에서 말하고 있는 “평등”은 모든 사람이 예술적으로, 체육적으로, 혹은 문학적으로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갖는 “권리”의 “평등”을 가리킨다. 독립 선언문은 “평등”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 의하여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 즉 삶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간단히 말해서 이 선언문에 쓰여진 “평등”의 의미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똑같이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성 해방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평등주의”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성별의 독특한 역할을 제한시키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에서 지혜를 얻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평등의 가장 나쁜 형태는 평등하지 않은 것을 평등하게 만들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교회 안에 있는 여성 해방 운동가들과 재림교회 안에서 여자 안수의 적합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많은 구절들 중에 특히 갈라디아 3:28절을 사용하여 남녀 평등을 주장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의 평등을 말하고 있는가? 평등한 가치인가? 아니면 평등한 능력인가? 아니면 평등한 역할? 아니면 평등한 은사? 그것도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타고난 평등한 재능인가?

    성경절 갈 3:28은 여성 평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성별의 역할을 말소시키는 완전한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앞뒤로 계속되는 구절, 갈 3:24 부터 29절까지의 뜻을 살펴보면, 여자와 남자는 함께 똑같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일에 평등하며,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일에 평등하며, 평등하게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브라함의 약속을 상속하는 일에 평등하다는 뜻으로 쓰여졌지, 여자와 남자의 성별과 역할에 대해 평등하다고 쓰여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성 해방주의자들이 말하는 “완전한 평등”의 이념이 어떻게 우리 재림교회에 들어온 여자 안수운동의 밑바탕이 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 개념은 성경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의 특이성에 대한 가르침과 완전히 반대되고 있으며, 결국 이 개념은 교회 안에 레즈비언(여성 동성연애자)들과 마녀 요술(witchcraft)과 하나님의 호칭과 성별을 여성화하는 일들을 초래시킬 것이며, 남녀 성별을 포함시키지 않은 언어 사용을 강요하고, 성경 전체의 영감성과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며, 성경의 재해석을 요구하는 고등비평을 교회에 불러 들여 여성 목회를 여성 해방주의 목회로 변질시킬 우려가 다분히 있다.

1998년 “여성 목회”라는 책이 발행되기 전까지는, 재림교회 학생들은 언제나 여자목사 안수의 적합성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사실 우리 재림교회의 역사적인 설명을 고찰해볼 때, 구약성경 시대나 신약시대에 제사장이나 사도나 장로를 안수하는 데서 여성을 제외시킨 이유는, 사회적 환경이나 문화적인 이유 때문이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거룩한 섭리로써 부여하신 성별의 역할의 특이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자 안수의 적합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여자 제사장이나 여자 사도나 장로의 행적에 대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하여 여러 다른 이유들을 내세워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데, 그 이유들을 보면 성경 자체는 시간의 제약과 문화적인 조건과 남성 위주의 환경, 랍비주의, 반 여성주의, 가부장 제도, 선입관 등에 의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애드류스 신학 대학에서 나온 “여성 목회” 책의 주장을 살펴보자.

1. 창세기 1~3장은 창조 당시 하나님께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되며 여자는 복종해야 한다는 역할의 구별을 두지 않으셨다. 아담과 하와는 함께 완전히 평등한 “지도자 역할” (leadership or headship)을 즐겼다.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일은 인간의 타락 후에 하나님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이 관계는 오직 가정의 관리를 위해서만 필요하고, 교회나 지역사회 관리를 위해서는 이상적이 아니다.

2. 신약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headship” (엡 5:21~33, 골 3:18~19, 벧전 3:1~7)은 현대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하는, 성별의 역할의 구별이 주어지지 않은 “완전 평등”의 개념이다.

3. 구약시대를 조심해서 연구해 보면, 사실 적어도 1명의 여자 제사장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 후, 하와에게도 아담과 똑같이 가죽옷을 입히시고 안수하심으로 제사장직을 주셨으며, 여 선지자 미리암, 드보라, 훌다는 남성들 위에서 지도력을 행사하였다.

4. 신약 성경에도 여자 사도와 지도자에 대해 나와 있는데, 예를 들어 유니아는 뛰어난 여자 사도였고(롬 16:7), 뵈뵈는 여자 목사였다(롬 16:1~2).

5.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만인 제사장직”은 여자도 장로와 목사로 안수할 것을 가르친다.

6. 성경의 구절들(딤전 2:11, 고전 14:34) 을 올바르게 이해해 보면, 가정에서 남편이나 아버지가 가진 머리로서의 지도력과 책임에서, 또 교회의 장로나 목사로서의 책임에서 여성을 제외시킨 것은 임시적인 제한이였으며, 특별한 상황 동안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7. 재림 교회 초기의 역사를 보면 여자가 목사로서 일했으며, 복음 사역을 위해 여자인 엘렌 지 화잇이 부르심을 받았다.

8. 1881년 대총회에서는 여자를 안수하는 일을 투표하였으나 남자 대총회 직원들에 의해 이 투표가 무효가 되었다.

9. 1895년 화잇 부인이�쓴 한 기록에 보면 여자를 복음 사역자로 안수하여 부르신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1881년에 대총회의 결정을 이행하기를 마음내키지 않아 하는 남자 형제들에게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10. 화잇 부인은 목회 사업의 신임성을 위해 스스로 안수를 받았다.

구약 성경시대에 여자 제사장이 있었는가?

    “여성목회” 책에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구약시대에 확실하게 여자 제사장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했을 때, 아담과 하와에게 하얀 무명옷을 입히시지 않고 동물의 가죽옷을 입히신 것은, 제사장이 대속죄일 희생을 드리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에게 제사장만이 가질 수 있었던 권한이었던 동물 가죽의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권한을 수여하신 것이며, 하와에게도 아담과 똑같이 제사장의 권한을 수여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와는 에덴과 그 지역을 위한 여자 제사장이었다는 것이다. [“만인 제사장직의 원칙에 의해”]

    만일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신 가죽옷이 제사장직을 수여하는 뜻이었다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첫 범죄를 축하하셨다는 뜻인가?
그리고 그들은 또 구약시대에 여자 제사장이 있었지만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은 이유를 여자가 제사장이던 “이방종교 혼합과 성적인 남용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그리고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제도상 여자가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게 되어있는 당시의 풍습 때문에 그랬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여자 제사장이 없던 이유는 그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이나 풍습때문이 아니다. 고대 동방풍습을 보면 오히려 여자가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허락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여인으로 하여금 제사장직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이방 종교의 여자 제사장들처럼 그들이 부도덕한 일에 빠질까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적으로 구약시대에 여자 제사장이 없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최상의 설명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마련하신 거룩한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여 선지자 미리암과 드보라와 훌다

    “여성목회”는 미리암과 드보라와 훌다 같은 여자들이 구약시대에 선지자로 택함받은 것을 예로 들며 여자도 목사와 장로로 안수해야 함을 주장한다. 자, 그러면 먼저 선지자와 제사장직의 차이를 살펴보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던 신정정치 국가였다. 예를 들어 아므람과 요게벳의 세 자녀 미리암과 아론과 모세를 보자. 세명은 다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 중 두 아들만 제사장이었고, 미리암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냥 선지자였다. 신약에서도 나오듯이 안나 선지자는 성전에 있던 여 선지자였으나(눅 2:36~37), 그녀나 다른 여선지자가 희생을 드리는 제사를 집전했다는 기록을 읽을 수 없다.

선지자(혹은 사사)의 지도자 역할은 종교 의식이나 백성들 위에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 뽑힌 성직이나 왕권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혹은 왕이나 제사장에게라도 그들에게 전할 기별이 있으실 때 당신의 기별을 전달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뽑으신 도구(mouthpiece) 일 뿐이다.

    신 구약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택하실 때는 성별을 초월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경은 목사나 장로를 뽑고 안수할 때는, 성경 구절에 나와 있는 조건 (딤전 3:2, 디도 1:6) 에 맞는 자격의 사람을 교회에 의하여 뽑도록 했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장로나 목사는 하나님의 권의에 의해서 뽑힌 선지자에 의해 기별과 견책을 듣는 백성들 중 하나이다. 교회의 지도자나 목사나 장로는 교회를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는 기별을 전할 뿐이지 억지로 그들을 순종하도록 권위를 행사하도록 위임받지는 않았다.

    우리 재림교회의 역사에는, 과거에 특별한 지도력과 선지자의 권위를 가졌던 드보라와 쌍벽을 이룰 수 있는 선지자인 엘렌 지 화잇이 있다. 화잇 부인은 자신이 교회의 지도자라고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으나 그녀는 하나님의 기별자로서의 그녀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교회증언 8권, 237에 “…그 때나, 사업이 큰 규모로 성장하여 책임들이 널리 분배된 후에나, 내가 이 백성의 지도권을 주장하는 말을 아무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주께서 나에게 주시는 빛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 나의 사업이다. 나는 그분의 기별을 받아서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 나는 기별을 가진 사자의 위치 외의 어떤 다른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백성들 앞에 보여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였다.

    미리암과 훌다와 드보라와 엘렌 지 화잇은 모두 훌륭한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들의 선지자로서의 권위가 가정에서 머리가 되는 권위(남편의 역할) 와 교회의 머리가 되는 목사나 장로의 권위와 혼동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유니아는 여자 사도였는가?
“여성 목회” 책에는 흠정역 성경(KJV) 롬 16:7절을 예로 들어 유니아를 여자 사도였다고 주장한다.

“내 친척이며 나와 함께 갇힌 안드로니코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 중에서 이름있는 자들이요,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느니라”.

이 구절을 그렇게 풀기에는 두가지 문제점이 있다. 헬라어를 보면 남성의 이름과 여성의 이름 둘 다 뒤에 “a”를 붙히므로 유니아가 확실하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으며, 옛날 교회의 교부들의 의견도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오리겐은 유니아를 남자라고 말했고, 크리소스톰은 여자라고 했으며, 교회 역사가 에피파니우스는 유니아를 남자로 얘기했다.

    또 다른 문제는 이 구절을 해석할 때, 이 뜻을 “뛰어난 사도 중에 하나인 유니아”로 해석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사도들에 의하여 잘 알려진” 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지 헬라어 구절은 두가지 뜻으로 다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나타난 바울의 견해로 보아 사도직은 남성에게만 안수하여 주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킹 제임스 성경이 아닌 보통 성경에는 이 구절이 이렇게 되어 있다.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뵈뵈는 여자 목사였는가?

    롬 16:1~2를 보면, 뵈뵈를 “servant of the church” 라는 호칭을 써서 불렀는데, “servant” 은 헬라어로 [diakonos 혹은 diakoneo]란 단어이다. “여성 목회” 책에서는 이것은 “목사”란 뜻으로 쓰여진 것임으로, 뵈뵈는 여자 목사였다고 주장한다.

    이 단어는 아주 넓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좁은 의미로도 쓰이는데, 넓은 의미로는 교회를 위해 목회나 사역을 하는 일, 교회를 위하여 음식을 준비하는 일(눅 10:40), 음식을 먹이는 일(눅 22:27), 물질이나 재료로서 돕는 일(눅 8:1~3), 집사로서 교회의 필요를 돌보는 일(행 6:1~4), 사도나 장로로서 교회에 봉사하는 일(딤전 4:6, 행 1:25)) 등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좁은 의미로는 이 단어는 집사의 하는 일을 나타내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 말한 집사의 자격을 보면, 한 아내의 남편(딤전 3:12) 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것이 뵈뵈가 여자 목사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재림교회 초기 역사를 보면, 많은 여성들이 주의 사업에 주역이 되어 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출판사업, 교육사업, 가정 선교사업, 안식일 학교 사업, 교회 재정, 전도와 선교사업 등에서 헌신적으로 일한 기록들은 있으나, 여성들이 안수를 받아 목사로서 일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재림교회 초기 선구자였던 J.H. Wagonner가 1878, 12. 19일 시조에 “복음 사업에 있어서의 여성의 위치”라는 제목으로 쓴 기사를 보자.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되는 것은 태초부터 마련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이다. 성경은 이것을 가족의 관계를 들어 항상 유지하고 있다. “이는 남편이 아    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 5:23). 남자는 여자에게 주어지지 않은 특권을 부여 받았는데, 그것은 어떤 의무와 짐들을 지도록 위임받은 것이다. 여자들은 기도할 수 있고, 예언할 수 있으며, 교회를 위하여 권고할 수는 있으나, 교회를 지도하고 다스리는 목사나 장로로서의 위치는 위임받지 못하였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가 가진 권위를 침해하여 남자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보여질 것이요, 또 그것은 딤전 2:12절이 금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재림 교회의 선구자가 쓴 이 글은 여성의 위치에 대한 우리 재림 교회의 초기 역사의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는 글이라고 사료된다.

정말 대총회는 1881년에 여자 안수를 투표했는가?
그 당시 대총회 회의 때 어떤 사람이 여자 안수에 대하여 건의하자 그 문제는 성서적인 개념에 대치된다고 하여 토론 안건으로 올라오기 전에 무효된 일이 있었다. (위원회에 상정되기 전에 무효됨)

“여성목회” 책에는 1895년 엘렌 지 화잇의 기록은 여성을 안수하여 주의 사업에 부르는 일을 지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기록에 나타난 사업은 목사나 장로의 임무가 아닌 평신도로서의 여성의 임무를 뜻했다.
(R & H, 1895, 7월 9일에 실렸던 기사)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엘렌 지 화잇은 자신을 안수 받은 목사로 나타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녀는 자신을 언제나 하나님의 기별자로 명명하였다.

여자 안수운동을 지지하는 교인들은 이 문제를 항상 문화적인 이슈로 치부한다. 그러나 이 이슈는 문화적인 것이 아니고, 신학적인 문제이다. 이것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성경 말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1. 무엇이든지 성경절과 대치되는 의견을 따르는 것은 결국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도록 만들 것이다.
“큰 배교의 발단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교회의 권위를 첨가하려고 시도하는 데 있었다. 로마교는 하나님께서 금한 것을 하라고 명령함으로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신 것을 금지함으로 끝을 맺었다” (대쟁투 289~290).

2.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언제나 파괴적인 결과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명확한 신학의 교리를 선포하는 대신에 세속적인 이념을 따르는 것에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3. 그 결과는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저자들, 모세나 다윗, 이사야, 마태, 베드로나 바울이 쓴 성경의 권고를 따르는 대신에 자신의 의견이나 목사나 교수나 부모의 권고를 따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화잇부인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자.

“사단은 하나님 대신에 사람에게 주의를 끌게 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그들의 의무를 깨닫기 위하여 스스로 성경을 상고하는 대신에 감독이나 목사나 신학 교수들을 그들의 지도자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이렇게 되면 그는 지도자들의 마음을 지배함으로써 자기의 뜻대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게 된다” (대쟁투 595)

4. 남자가 목사나 장로로서 교회를 위하여 지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성경의 합당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성서에 나온대로 따르는 것이 교회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일을 막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5. 우리는 무슨 일을 해결할 때,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원칙을 적용하므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사실 때, 그분의 목적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서라도 그분은 자신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42).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