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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람하는 축제 교회 (CELEBRATION CHURCH)    

저자: 편집실

     통성 기도, 전자 기타, 드럼, 박수, 흔들어대는 몸, 얼싸안음, 소리지름, 빠른 리듬의 음악 등등 – 이런 온갖 북새통들은 우리 교회 안에서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는 운동이 바로 “축제 교회(Celebration Church)” 의 번성이다.

     1980-1981년에 데스몬드 포드의 영향을 받은 많은 재림교인들은 우리 교회를 떠나 다른 복음주의 교회로 입교했다. 그들은 건강, 복장, 음식등과 성소기별 같은 우리의 독특한 신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우리의 구원이 십자가에서 끝났다고 하는 포드의 기별을 받아들였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믿었다. 율법이나 어떤 표준을 순종하고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인 경험과는 별 관련이 없으며,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믿었다.

     1980년대 중반에 오레곤주에 있는 재림교회 목사가 오순절 교회를 방문한 후 그의 교회에서 오순절 교회와 유사한 예배 형태를 시작했다. 1982년부터 1989년까지 그는 135명의 교인 수를 1000명 이상으로 증가시켰다.

       1989년 봄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다른 한 목사는 두달 만에 1000명 이상의 교인 수로 그 숫자를 증가시켰다.

     신속한 교인 수 증가의 성공이 보고되자 1989년 늦여름, 대총회는 연합회와 대회에 지방 교회의 목사 중 자유주의적 경향을 지닌 목사들을 오레곤에 파견하여 새로운 예배형태를 배워오도록 말을 전달하였다.

     1989년 12월, 미국 전역에 있는 대회들로부터 1-3주간의 훈련 프로그램이 있는 오레곤의 밀워키 교회로 대회가 경비를 들여 목사들을 파견하였다. 거기서 그 목사들은 밀워키 교회의 목사가 어떻게 모든 순서를 진행시키는지와, 안식일 오전과 주중 집회 진행방식을 지도 받으며, 또한 새로 개발시킨 예배 형식의 이유와 가르침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르침 받는다.

     1990년 2월, 미국 전역의 이곳 저곳에서는 새로운 예배형식이 등장하는 동안 그 외의 다른 교회들은 그러한 예배형식을 반대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90년 4월, 밀워키 교회의 목사는 자신의 교회에서 한번에 30명의 재림교회 목사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알려진 사실은 지방대회의 대회장들이 가장 자유주의적인 목사들을 선택하여 훈련을 위해 밀워키 교회로 보낸 것인데, 그들은 예언의 신이나 혹은 성소봉사와 조사심판과 같은 우리의 독특한 가르침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이었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오레곤 주와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두 목사는 자주 오순절 교회들과 그곳의 훈련기관들을 방문한 후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그 같은 예배형식을 도입할 때 더 많은 참석인원과 돈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그것을 “성령의 역사” 라고 부르면서 대회장들은 뒤에서 그들을 후원하고 있는데, 예배형식은 일종의 흥분시키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극히 감정적인 설교와 연극들을 순서에 짜 넣는 것이다.

           한 축제교회 목사의 설교 

     도대체 왜 이런 식의 예배가 우리 교회에 발을 들여 밀게 되었을까? 나성의 글렌데일 교회에서 한 어느 목사(캘리포니아주, 콜튼의 축제 센터-Celebration Center-의 목사)의 설교 중 일부를 들어보자. (현재 그곳의 한 안식일 참석인원은 약 5,000명임)

     “……저는 21년간 재림교회의 목사로 일해왔고, 재림교인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재림교회 내에 무언가 바꾸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일 변화가 있지 않으면 우리는 진짜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는 점점 더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약 20년 전, 믿음으로 말미암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 운동은 잘 발전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20년 전에 거짓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전파되기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싸웠으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많은 목사들, 심지어는 신학대학원의 교수들까지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하다가 직업을 잃어왔습니다. (그는 여기서 데스몬드 포드가 등장하자 그만두거나 파면 당한 많은 목사들을 언급한다. 그는 포드의 기별을 믿고 있음이 틀림없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는 무언가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복음입니다. (거짓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오직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가르치며, 진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분의 기록된 말씀에 주어진 율법과 표준들을 순종하도록 힘을 주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 복음을 전하면 여러분은 사람들로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편지와 전화들을 받는데, 그들은 여러분이 축제 센터-축제 교회-의 교인이 될 수 있으며,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저는 또 여자들로부터 이런 전화도 받습니다. “우리 남편이 다른 여자와 도망을 갔는데, 그들도 축제 교회에 올 수 있지 않느냐? 왜냐하면 괜찮기 때문에!” 맞습니다. 축제교회에서는 그들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죄를 환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대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나쁜 평판을 가지도록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온갖 나쁜 평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진정한 성장이 있도록 하는 것은 오직 사랑과 용납의 정신 안에서 가능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을 사랑해 주어야 하며, 그들을 도와, 죄가 파멸적이라는 것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상될 만한 분이 아니시며, 관계를 맺을 만한 분이시고, 따뜻하며, 팔을 벌리고 계신 분이십니다. 예배는 그것을 반영해야만 합니다! 제게 있어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아무 것도 성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다른 것입니다. 종래에는 앞에 나간 사람이 예배했고, 청중들은 평가를 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앞에 나간 청중이십니다! 여러분은 감독이며 하나님은 청중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그 일에 참여합니다!

     저는 전통주의자들을 더 이상 참고 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전통주의자들에게 대하여 진절머리가 나도록 권태를 느낍니다. (전통주의자란 선구자들이 고수했던 재림신앙을 고수하는 자들을 말함) 매번 저는 무언가 새롭고 색다른 것을 시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전통주의자는 제가 시도하는 것을 멈추게 할 것입니다! 저는 전통주의자가 늘 이기는 것에 싫증이 났습니다.

     저는 다른(비재림) 교회들에 갑니다. 저는 그곳에 교리를 배우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그곳에 가는 것은 다른 것들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하루는 제가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제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제 생전에 가장 놀라운 예배의 경험이었습니다.

     한동안 저는 다른(비재림) 교회들에 대해서 연구를 했고, 이것 저것 시도해 봤습니다. 저는 새 영어 성경(New English Bible)을 사용합니다. 여러 해 동안 저는 흠정역 성경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흠정역 성경에 나오는 어떤 것도 읽기를 거부합니다. 무엇 때문에 제가 그 같은 성경을 읽기를 원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복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낡아빠진 언어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낡은 음악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드럼을 사용합니다! 어느 날 샌디에고에서 어떤 사람이 제게 말했습니다. “왜 당신은 이방인의 악기를 사용합니까?” 이방인의 악기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름을 대 보십시오. 극장에서 사용되던 올갠! 피아노! 기타!

     여러 해 전, 저는 미네소타에 있는 한 교회로 전임을 갔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강단에 전자 악기들은 올려놓지 않을 거요”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전자악기들을 곧 올려놓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방인의 악기란 없습니다. 그것은 악기를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에겐 1989년 4월 이래로 12명 내지 15명의 드럼 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말을 이해하느냐에 달린 것 입니다! 저는 언제부터 어떻게 그런 말이 들어왔는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밖에 나가 사람들을 모아 들일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저는 눈도 깜짝 안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것은 효력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어떤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무언가 유지하려고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무언가 유지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두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분이 사람들을 이 땅에 두신 것은 시대와 함께 움직이며 영혼을 구하도록 하기 위해서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학과 극장학에 학위를 가지고 있는 스티브(축제센터에서 함께 일하는 일꾼)에게 말했습니다. “매 주일 사람들에게 볼만한 것을 보여주시오. 나는 그들이 매 안식일 아침마다 보고, 듣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보기를 원하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비재림교인은 지금 각 곳에 있는 재림교회들에 의해서 자문위원으로 고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재림교인들은 정보로 양육 받아온 사람들입니다.”……

     우리 축제센터에 오는 어떤 이들은 매 주일 그저 포옹하기 위해 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것 참 위험한데!” 라고 말합니다. 그럴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는 그런 위험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 축제센터에는 기도의 동산이 있습니다. 저는 다른 비재림교회에 갔는데, 제가 앞에 나갔을 때 그들은 제 머리 위에 손을 얹었습니다. 지금은 우리도 그렇게 합니다. 사람들이 앞으로 나오면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음악이 있습니다. 아주 많은 연극도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교회 건물은 하나님의 회중 교회(Assemblies of God Church) 건물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교회가 아니며, 한 달에 세를 7,000불씩 냅니다. 커튼이 쳐진 커다란 움직이는 공간이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무언가를 합니다. 아이들은 놀고 노래를 부릅니다.

     한번은 사람들(연극하는 그룹)이 안식일 아침 예배 시간에 강단에 올라가서 콘칩을 먹고 타이를 매면서 밴드부의 연주에 맞춰서 동작을 했습니다. 참으로 보배로운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울 뻔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장면을 한 주일 내내 생각할 것입니다!

     또 어떤 주에는 우리가 모세가 홍해를 건너는 연극을 했습니다. 교인들 전체가 말입니다! 물이 출렁거리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서서 손을 흔들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손들이 출렁거리는 파도였지요! 아아, 그것은 참으로 볼 만했습니다!! 그거야말로 바다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였습니다.

!!! 로마린다에서 온 박사들! 그건 참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아아, 의사들!

     복도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때 갑자기 뒷문이 열리면서 모세가 들어왔습니다! 앞에서 낭독자가  “물 속으로 걸어가라!”고 낭독했습니다. 그가 들어서자 사람들이 둘로 갈라서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을 통과하여 오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 아이들이 모세와 함께 오고 있었습니다! 복도를 통하여 걸어서 말입니다! 

     그때 애굽인들이 들어왔습니다! 낭독자가 말했습니다. “바다가 합쳐서 저들을 삼키라!”고.

     그때 대회장(남동부 캘리포니아 대회의 대회장)이 복도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청중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군인들과 함께 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대회장이 꽤 공격적이었습니다!” [웃음] 저는 “그것은 그가 사람들이 테네시에서부터 온 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제게 말했습니다. “이건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왜 방언은 안 할까!

     축제 교회를 구상하는 이들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지루하다. 율법주의적이다. 죽은 형식주의, 우리는 복음을 모른다. 냉랭하다 등등. 그래서 새로운 예배 형태가 도입되고, 사람을 있는 그 자리에서 만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을 다 받아줘야 하며, 누구든지 교회에 오면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세리도 창기도 다 오라. 와서 너희들을 구하신 구세주를 춤을 추며 찬양하라. 박수를 치고 얼싸안으며 실컷 떠들고 즐기라. 소리 높여 함께 기도하고 이 즐거운 잔치자리에 이웃들과 함께 오라. 수영복만 입고 와도 좋고 반지를 꼈건 목거리를 했건 다 괜찮으니 오라. 예수께서는 너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다. 율법이니 표준이니 상관하지 말라. 예수님과 관계만 맺으면 그런 것들은 자연히 해결된다. 교회는 죄인들을 위하여 있는 곳이니 지체말고 오라. 죄에 대하여 너무 스트레스를 느끼지 말라. 언제든지 예수님께 가면 용서해 주시니까 예수님과의 관계만 변치 않으면 된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도 모두 용서해 주셨으니 큰 소리 높여 노래하며 춤추라. 더 열렬히 흔들어라. 디스코도 괜찮다. 하나님은 당신 앞에서 즐거워 춤추고 박수치는 자녀를 즐거워하신다. 그대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있다. 변화되지 않아도 좋다. 그것은 필요 없는 것이니까! 그저 편안하게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손뼉을 쳐대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무엇을 하든 사랑하신다. 기쁜 얼굴로 다음 주에 또 오라” 고 외치는 듯 하다. 그러면 방언은 왜 안 하느냐고 묻는다면 조금 있으면 틀림없이 나올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설마 재림교회에서?

     그렇다. (미국에 있는) 재림교회에서 가장 신속하게 번지고 있는 운동이 이 운동이다. 그대의 교회 옆에 와서 슬금 슬금 발을 들여 놓으려는 모압 여인들을 조심하라. 이 운동이 신속하게 번지도록 하기 위해 사단은 조심스럽게 혹은 담대하게 발람(계 2: 14)과 이세벨(계 2: 20)을 사용하였다. 남은 교회에 편만한 가르침은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할지라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는 신신학의 가르침과,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만 유지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실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이런 바벨론적 가르침들은 축제교회의 댄서(Dancer)들이 우리 교회에 들어올 기초를 놓게 된 것이다.

     지난 30여 년간 우리 교회를 채운 다음의 이상한 견해를 들어보라: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범하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의 죄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  이것은 그의 의지가 그리스도께 와서 굴복하는 것 외엔 어떠한 순종도 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저하된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이 죄와 싸우거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의 선택력을 굴복시켜 그가 더 이상 죄를 저항하거나 그의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죗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셨다. 만일 그러셨다면 행동과 율법을 범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의 논점이 되었을 것이다.

     순종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이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즉시로 완전하게 인정을 받으며, 매일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그 상태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계속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것이다.  이는 심지어 우리가 죽거나 승천할 때까지 알고 있고 품고 있는 죄가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가려주기 때문에 그러하다.

     사람은 알고 있는 죄와 품고 있는 죄를 범할지라도 그들이 그들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매어 달린다면 구원 받을 수 있으며 구원 받을 것이다.  그들은 그분께서 그러한 죄들을 제거해 주시기를 신실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 그분의 책임이다.  이것을 그분은 그분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때에 해 주실 것인데,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당장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 아님을 아시기 때문이다.  죄의 종류에는 단수인 “죄”와 복수인 “죄들”이 있다. “죄”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와서 그분과 함께 남아 있으면 그것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이는 우리가 그분과 분리되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침 예배를 계속하지 않음으로 그분과의 관계가 다시 끊어질 때 “죄들”이 있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종종 빠지기 쉬운 특정한 시험들이다. 그때에 유일한 해결책은 그 “죄들” 모두를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시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대가 다시 그분께 오면 이런 죄들은 더 이상 그대가 책임질 것이 아니며, 그대가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죄란 행동이나 순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나 형벌을 받음 없이 우리의 특정한 죄들을 남겨둘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며, 구원 받게 될 것이다.

    모든 특정한 죄들을 극복하는 완전주의는 오류이며, 이생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완전은 실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 받지 않으셨다. 그분은 죄를 저항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겐 결여되는 결정적인 고지를 확보하고 계셨다.

     어린이들과 청년들에게 도덕적인 표준들을 가르치며 그러한 표준들을 순종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실망으로 이끌며 결국은 교회를 떠나도록 인도할 것이다. 이것은 청년들이 우리들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없는 때문이다. 아무도 의도적으로나 혹은 우연히 하나님을 순종할 수는 없다.

     죄를 저항하거나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애쓰는 것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시도이며, 그 시도에서 성공할 때 그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큰 죄인 교만 죄를 짓게 된다.

     알고 있는 죄를 범할지라도 예수님과의 매일의 관계를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 유지하면 조만 간에 그대의 죄는 달아날 것이다.

     죄와 유혹을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며 그대가 해야 할 부분은 기도와 성경연구, 그리고 전도를 통하여 그분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분께로 나오라.’

     소위 이러한 (거짓) “관계 신학”은 우리 백성들을 감상주의적 신앙을 하도록 이끌어 왔다. “우린 어차피 죄인으로 태어났으니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계를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면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한 우리의 죄를 그분의 능력으로 제거해 주실 것이다” 고 소근거리도록 이끌어 왔다. 교회에는 죄를 이기게 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리를 채움으로 생기도 없는 형식주의적 예배가 반복된다. 세상과 별로 다름이 없는 대화와 복장과 생활양상은 참신한 신앙을 찾는 목마른 백성들로 하여금 매력을 잃게 만든다. “품고 있는 죄는 버리지 않을지라도 관계만 유지하면 구원은 우리 것이다” 는 외침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인양 방방곡곡에서 들린다. 죄와 싸우다 지친 길손들은 “우리가 공연한 헛수고만 했구나. 하나님께서 다 해주시는 것을 몰랐구나” 하며 하루에 3-5분간 교회지남의 기도력만 본다. 그리고는 교회에 가서 “관계, 관계!” 만을 주장하느라 열을 낸다. “그냥 있는 그대로 나오라.예수님께서는 다 이해하시고 다 받아주시니까!” 라고 아무리 말해도 형식주의는 변하지 않는다. 무언가 더 큰 자극을 기대하는 듯한 백성들은 순복음 교회나 오순절 교회의 박수 치며 부르는 찬송과 그들의 풍성한 듯한 사랑을 은연중 흠모한다. “우리도 해 보자!” 숫자와 연금이 늘어나니 신이 난다. 대회는 전적으로 후원해 준다. “아하, 늦은 비는 이런 식으로 내리겠구나……” 하며 기만 당한 지도자들은 드럼을 치며 신나게 노래 부른다. 4/4박자일 때 강, 약, 중간, 약이 정상인 것을 약, 강, 중간, 강(둘째 박자를 강하게 하는 것은 성적 욕망을 강하게 함)의 쿵작거리는 노래를 골라 부른다. 20년 전에 교회에서 들었으면 이상했을 바벨론의 음악이 이제는 그 최면적인 싱코페이션의 가미와 함께 천천히 하다가 빨리 흔들어 대도록 한다. 마치 파멸을 향하여 신속하게 달려가는 기차에 탄 것 같이 은혜의 문은 닫혀가고 있건만 청중들은 “구원은 확실하니 ‘먹고 마시자’(사 22: 13)” 고 한다.

           영감의 붓은 기록한다:

     “새로운 형태의 질서가 목회 사업 가운데 들어온다. 거기엔 다른 교회들을 모방하려는 욕망이 있다. 단순함과 겸손함은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독창적이기를 원하는 젊은 목사들은 새로운 사상들과 새로운 계획들을 도입한다. 그들은 부흥회를 개최하며,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교회로 부른다. 그러나 흥분이 지나가면 회심한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죄에 대한 회개는 느껴지지 않는다. 죄인은 자신의 과거의 죄와 반역에는 아무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도록 초청을 받으며 마음은 깨어진 바 되지 않는다. 거기엔 영혼의 뉘우침이 없다. 회심했다고 공언하는 자들은 반석 되신 그리스도 예수 위에 떨어지지 않았다” (영문 시조, 1899, 12, 27)

     죄를 저항할 필요가 없고 관계만 유지하면 된다고 말하는 소위 (거짓된) “관계신학” 에 대해서도 영감의 붓은 말한다:

     “애정이 세상과 세상의 쾌락, 그리고 세상의 유흥과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이 연합에 그저 동의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여금 더욱 담대하게 불순종 하도록 이끌 뿐이다”(5T, 231)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것이 아닌) 연합을 주장하는 것은 ……마음을 불순종과 자아를 신뢰하도록 강퍅하게 한다”(5T, 48)

     “죄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이 해야 할 결정적인 노력 없이 성품이 기적적으로 변할 것을 기다리는 자들은 실망할 것이다”(Maranatha, 227)

     “죄에 대한 회개가 성령님께서 생애 가운데 역사하실 때 맺는 첫 번째 열매이다”(원고 28, 1905)

     “죄인을 위한 유일한 소망은 죄를 그치는 것이다”(This Day With God, 140)

     기도와 성경 연구와 전도는 수백 만의 다른 교파 사람들도 하는 것이다. 알고 있는 죄를 범하면서도 계속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유지하면 그 죄는 조만간 달아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기만적인 암초인가! 나는 그 암초에 부딪쳐 파선 당한 배들을 너무도 많이 본다. 영감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많은 이들은 “진리를 믿지 않고” “거짓 것을 믿”(살후 2: 11,12)는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 13)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 18)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 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 9)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이 금한 것들을 계속 행하며 알고 있는 의무들을 등한히 하면서 마음으로 의에 이르도록 믿을 수 없으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도 얻을 수 없다”(가려 1권, 396)

     “모든 죄는 생명과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가증한 것으로서 포기해야 하며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계속적으로 행함으로 진보적인 체험을 얻어야 한다. 의지의 지속적인 복종과 끊임없는 순종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상동 397)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의롭다 하심(칭의)을 얻기 이전에 그 심령의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신다. 인간이 의롭다 하심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순종을 하여야 하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활동적이며 살아 있는 믿음을 통하여 그 영혼을 순결케 하여야 한다”(상동 366)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갖게 된다”(상동 337)   

     “우리가 믿음으로 그와 더불어 연합하고 있는 동안은 죄는 더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DA, 123)

     “악을 간직하고, 죄를 행하는 그 연약한 영혼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또한 그들의 생애에 초자연적인 일이 벌어져 자아를 초월한 높은 차원의 세계로 그들을 끌어올림으로 어떤 특별한 노력, 어떤 특별한 싸움이 없이, 또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이도 그것을 비교적 쉽게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일이 그렇게 되도록 사단의 진영에서 빈둥거리는 모든 사람은 악행하는 자들과 함께 멸망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혀 회복할 길이 없이 갑자기 멸망될 것이다”(TM, 453) 

     그렇다. 진정한 구원의 관계를 갖기 위해서 우리는 결정적인 노력으로 알고 있는 죄와 악습을 버려야만 한다.